2025 끝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며 엄청나게 쏟아지던 카톡의 홍수가 사라질 무렵에 재미있는 톡 하나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톡이 아닌 `내 기억 속 최고의 웃겼던 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희한한 것은 주제는 웃겼던 순간인데 왜? `내 기억 속 최고의 어이가 없었던 순간`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환갑을 넘긴 지금의 내가 어이가 없던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니 그때와 전혀 다른 마음이 담겨있는 것에 놀라웠다. 흘러간 사십여 년의 시간 안에 담겼던 민망하고 좋지 않던 기억이 그동안 분노는 용서로 용서는 웃음으로 입꼬리마저 춤을 추게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춰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 변화를 알지 못했다.
대학 졸업반으로 무척 분주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나는 대학 연합 다도 서클에서 만난 A라는 남학생을 몇 해 동안 마음에 품고 지냈다. 밝고 쾌활한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학창 시절에 은근히 수줍음도 타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 앞에서는 좋아하는 티를 전혀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소위 짝사랑만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면 믿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보기에 따라 콧대가 세 보일 것도 같지만 실상 부끄러워서 나를 방어하기 위해 새침하고 조금 건방진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일 뿐 난 쑥스러움도 많아서 같은 학과 남학생들이 아니면 거의 눈길도 말도 건네지 않았다. 화장기가 없어도 마른 몸매에 이목구비가 컸던 탓에 겉모습이 화려하게 보이는지 졸업반이 되었어도 마음에 둔 A는 내게 전혀 대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종 내게 향하는 따사로운 눈길을 의식할 때가 있는데 고개를 돌리면 다정하게 바라보는 A가 늘 있었다. 어쩌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황급히 눈길을 피했고 당황해서 콩닥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올까 싶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A와 나는 초등학생이나 하는 풋사랑과 같은 사랑을 3년이 넘어가도록 남몰래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농담도 잘하고 리더의 역할도 잘하는 B군이 나서서 A군을 다리 놔주겠다며 은밀하게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으로 시간과 장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되었고 청바지만 즐겨 입던 평소와 달리 단아하게 하얀 레이스 옷깃이 달린 짙은 남색 원피스를 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종로 2가 커피 향이 짙은 `준` 커피숍 2층에 B가 먼저 와서 밝고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스커트를 입으니 다른 사람 같다는 둥 오드리 헵번 같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칭찬 일색을 늘어놓던 B는 A가 오는지 내려가서 데리고 오겠다며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A를 의식하고 있는 내 표정이 숨겨지지 않았기에 입장이 난처해서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설렘으로 가득 차오르는 지난밤 상상의 날개를 펴며 밤을 꼬박 새운 나는 올라오는 계단 입구에 열두 살 소녀의 감정을 고정해 놓았다. B가 내려간 지 십 분 정도 되었을까? 앞가르마의 허연 이마 아래로 눈 코 입이 보이며 이내 표정이 굳은 B의 상체가 계단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다란 다리까지 다 보인 뒤에도 그는 혼자였다. 실망이 수치심으로 온몸을 후비는 그 순간에 들려오는 비장한 B의 음성.
"오늘 A는 안 와. 내가 너에게 나를 소개하는 자리야." 분노를 새기는 재봉틀의 박음질 소리가 온몸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3년 전에 B는 A에게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고 했다. 알 수 없는 A의 아련한 눈빛이 그제야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여학생을 바라만 보아야 했을 A의 마음.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룰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던 거였다.
그날 이후 다도 모임은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좋아하던 작설차의 은은한 향조차 화를 자아내어 한동안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톡 하나 덕분에 사십 년이 지나서 `내 기억 속 최고의 어이없던 순간`이 이제는 `내 기억 속 최고의 웃겼던 순간`으로 탈바꿈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다. 스물셋의 내가 에베소서 4장 26절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는 말씀을. 그랬다면 분노로 꽁꽁 싸매어 두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내 기억 속 최고의 웃겼던 순간으로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바로 떠올리지 않았을까? 이렇게 좋지 않은 기억도 시간에 휩쓸리면 왜곡이 아닌 그리운 추억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그날의 추억을 웃음으로 반추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