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만만한 고종수의 목소리에서는 부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사진 이휘영) |
자신감과 자존심이 강한 전라도 사나이 고종수도 자신의 단점을 말할 때가 있다. “그동안 인내심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고종수는 20대 초반에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자신감 넘치는 말로 신세대 축구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과는 충돌했다. 그에게 돌아온 건 자존심에 남겨진 상처뿐이었다. 그의 미니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실패라는 상처 위에 인내라는 약을 발라 노력이란 붕대를 감는다면 성공이라는 흉터가 남는다.’ 대전 시티즌에서 제2의 축구인생에 도전하는 고종수의 마음가짐이다.
고종수는 8월 26일 전북 현대와의 홈경기에 후반 18분에 투입돼 30분 동안 그라운드를 누볐다. 올 시즌 3번째 출전이었다. 경기 다음날 대전 시티즌 숙소에서 고종수를 만났다. 그의 얼굴은 한여름 힘든 훈련으로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답게 자신만만한 그의 목소리에서는 부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노는 것을 정말 좋아했고 축구 외에 다른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이젠 노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다. 축구가 다시 재미있다. 이제 명예 회복을 할 때가 됐다.” 고종수의 부활 조짐에 팬들은 들떠 있다. 특별했던 그의 왼발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고종수가 만난 감독들 1-차범근과 박이천
“병 주고 약 주고 다한 분이시죠.” 고종수의 차범근 감독(수원 삼성 감독)에 대한 기억이다. 차감독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신예 이동국과 고종수를 과감하게 대표팀에 뽑았다. 차감독은 고종수의 발탁 배경에 대해 “팀에는 예상하지 못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돌출행동으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고종수였지만 경기에서 펼치는 개성 있는 플레이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 무렵 고종수의 거침 없는 언행은 세간의 화제였다. 1997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직전에는 박이천 감독(인천 유나이티드 감독대행)과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1996년 18세 3개월의 사상 최연소로 선발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애틀랜타올림픽대표팀에서도 그랬다. 특히 박이천 감독은 “전력상 (고종수가)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종수에게 선수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뜻에서 내보냈다”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청소년대표팀에서 밀려난 얘기를 듣고 싶다.
연습경기에서 내가 공격포인트를 가장 많이 기록했다. 13골을 넣고 10개의 어시스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호주에서 전지훈련을 했는데 연습경기에서 전반에만 2골과 1개의 어시스트를 하고 후반에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이천 감독이 다가와 뺨을 때렸다. 그날은 박감독의 생일이었다. 기분이 좋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맞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했더니 또 뺨을 때렸다. 대들지 말라면서. 그때 청소년대표팀에는 프로선수가 나밖에 없었다. 자만심도 조금 있었고 자존심도 강했던 시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선수들은 모두 햇볕에 서 있는데 나 혼자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는 게 때린 이유였다. 그래서 화가 나 수원으로 복귀한다고 말하고 경기장에서 나가 버렸다. 수원에 복귀하니 김호 감독이 선수는 감독을 이길 수 없다면서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많은 생각을 했고 내가 너무 치기 어린 행동을 했다는 반성도 했다. 하지만 감독이 선수의 인격에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팀을 지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차범근 감독이 그런 상황에서도 대표팀에 부르지 않았나.
청소년대표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차감독이 월드컵을 앞둔 국가대표팀에 나를 불렀다. 정말 고마웠다. 대표팀에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훈련을 하다 (이)상윤이 형(차범근 축구교실 코치)과 부딪쳐 앞니가 모두 부러졌다. 치과에 가서 치아를 새로 맞췄다. 그리고 계속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대회가 임박해 곧바로 프랑스로 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열린 본선 경기 때 치아에 염증이 생긴 것도 모를 만큼 긴장을 많이 하고 또 열심히 뛰었다. 그때부터 4, 5년 동안 치아 염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2004년 수원 삼성에서 차감독과 다시 만났을 때는 어떤 문제가 있었나.
교토 퍼플상가에서 수원으로 복귀했을 때 차감독이 수원의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차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단지 차감독의 경기 스타일 때문에 트러블이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이관우나 백지훈, 김남일 같은 선수를 영입하면서 포백도 쓰고 스타일을 많이 바꿨지만 당시엔 냉정하게 말해 미드필드 플레이가 거의 없었다. 차감독은 스리백을 쓰면서 수비수가 롱패스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를 포함해 가비(가브리엘 포페스쿠)와 나드손 같은 선수들과도 잘 맞지 않았다. 나드손은 툭하면 나한테 다가와 농담 삼아 목이 아프다고 했다. 높이 뜬 공을 쳐다보느라 목이 아프다는 비아냥이었다. 가비도 이 팀은 내가 있어야 할 팀이 아닌 것 같다면서 같이 떠나자고 했다. 그런 가운데 서울 원정경기로 기억한다. 전반만 뛰게 하고 후반에 나를 빼버렸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고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다. 며칠 뒤 구단에 편지를 쓰고 숙소에서 나왔다. 축구 그만두겠다고. 이제와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은 행동이고 감정적인 처사였다. 물론 가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만두려면 그때 시원하게 그만두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결국 구단에 복귀하려고 돌아오지 않았나.
어머니의 설득도 있었고 나 또한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구단에 들어갔는데 차감독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잘랐다. 내 생각엔 단정하게 잘 잘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감독이 그게 머리카락을 자른 것이냐면서 삭발을 하고 오라고 했다.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무슨 차두리도 아니고(웃음) 어린 아이도 아닌데. 물론 감독이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머리카락을 안 자르고 온 것도 아니고 내 마음가짐이 어떤지 알고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생각한다. 사람이 다 똑같을 수는 없지 않나. 난 한국에서 태어나면 안 되는 축구선수였나 보다(웃음).
고종수가 만난 감독들 2-히딩크와 베어벡
대전 시티즌의 김호 감독은 지난 2월 SPORTS2.0과의 인터뷰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은 2001년 K리그 시즌 도중 선수들을 모아 체력훈련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그 훈련 때문에 AFC(아시아축구연맹)챔피언스리그 등 다른 구단 선수들에 비해 더 많은 경기를 치러야 했던 고종수는 피로 골절 증상을 보였다. 이듬해에 종수를 계속 벤치에 앉히고 교체멤버로만 투입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이 고종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얘기다. 결국 고종수는 2002년 한일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했다.
고종수는 8월 26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북전에 올시즌 리그 3번째로 교체 출전했다.(사진 이휘영) |
히딩크 감독은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나.
그는 선수들의 개인 기량을 키우는 스타일이 아니고 선수들의 장점을 잘 조합해 팀 전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부상 등이 겹치면서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쉽다.
처음엔 중용할 뜻도 비치지 않았나. 왜 2002년 월드컵 최종명단에 오르지 못했다고 보나.
아마 무릎 부상 후유증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히딩크도 한때 다쳐서 목발을 짚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나도 무릎 부상으로 목발을 짚고 다녔다. 장소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팀이 경기를 펼치는 어느 경기장에서 둘이 같이 목발을 짚고 그라운드를 들여다보며 얘기한 적이 있다. 그때 히딩크 감독이 나에게 “2002년에 우리 둘이 일 한번 내자”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 생각만 하면 착잡할 뿐이다.
2003년에 J리그 교토 퍼플상가로 갔는데.
교토 퍼플상가 감독으로 취임한 베어벡 감독이 불렀다. J리그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뛰어 보고도 싶었다.
교토 퍼플상가로 가기 전 몸무게가 많이 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갈 때 81kg이었고 한국으로 다시 올 때 71kg이었다. 체중에 관한 이야기는 늘 듣는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 팔을 좀 만져보라. 뼈가 굵지 않나. 고등학교 2학년 때 백록기대회에서 금호고를 우승으로 이끌고 MVP가 된 적이 있다. MBC와 인터뷰를 했는데 볼에 살이 없는 것이 정말 볼품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때 몸무게가 70kg이었다. 통뼈라 체중이 좀 나가는 편이다.
그때 베어벡 감독이 공격수로 기용해 감독과 충돌한 것으로 안다.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 나왔으니 할 말은 하겠다. 감독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것 또한 선수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최전방 공격수로 단 한 번도 뛰어 본 적이 없었고 또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뛰어보니 미드필드에서 뛸 때와는 움직임 자체가 달랐다. 1,2주 지나면 좀 바뀔 수 있을까 해서 계속 노력했다. 하지만 난 최전방 공격수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독에게 미팅 신청을 했다. 미드필더로 뛰게 해달라고. 미드필더로서 일본선수들보다 확실하게 잘할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베어벡 감독은 연습게임에서조차 나를 미드필더로 투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미팅 신청을 해 좀 더 강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예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왜 일본으로 갔는지 후회만 했던 시기였다.
베어벡 감독이 이끈 대표팀의 아시안컵 경기를 봤나.
봤다. 베어벡 감독은 감독감이 아니다. 딱 수석코치다. 그동안 내가 여러 감독을 만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냥 뭔가 모르게 아직 감독을 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나 본 축구인 모두 공감하는 내용이다.
고종수가 만난 감독들 3-김호
고종수는 김호 감독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김호 감독에게 전화를 건다. 방황하던 시절 고종수는 김호 감독을 가끔 ‘아버지’라고 불렀다. 김호 감독은 1996년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로 금호고를 졸업한 18살의 고종수를 영입했다. 김감독은 “(고)종수는 고등학교 때부터 눈여겨봐왔고 청소년대표팀에서 연습하는 것도 몰래 가서 살펴보곤 했다”며 일찌감치 점찍어 놓았던 애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고종수는 함께 입단한 데니스와 함께 1998년과 1999년 수원에게 2년 연속 K리그 정규리그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다. 긴 방황을 끝내고 재기를 다짐할 때도 김호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둘 사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제지간이다.
김호 감독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김감독은 모든 것을 대화로 풀어 간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 놓을 수 있게끔 분위기를 이끌고 잘못된 행동에 대해선 단호히 지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말과 행동이 전적으로 선수를 위한 것이다. 일부 감독들처럼 구단의 눈치를 보거나 팀의 성적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선수관리에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수 개개인에 대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출전 시간을 조절한다.
수원에서 김호 감독과 차범근 감독을 모두 겪었는데.
두 감독 모두 스타 플레이어 출신의 훌륭한 분이다. 하지만 선수마다 자신과 잘 맞는 감독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김감독이 더 잘 맞는 것뿐이다. 차감독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매정한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좀 더 인간적으로 감싸고 보듬었으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저녁운동까지 하면서 열심히 했을 텐데. 그런 문제로 교토 퍼플상가에서 한국으로 올 때 조광래 감독이 있는 FC 서울로 가려고 했었다. 조감독은 수원에서 코치로 있을 때부터 나를 잘 이해하는 분이었다. 서울 강남의 어느 호텔에서 같이 밥을 먹고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다. 서울은 수원의 라이벌 팀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 서포터들이 배신감을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단 더 많이 뛰고 활약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었다. 그것이 나를 아껴주는 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당시 수원 서포터 그랑블루 회장과도 만나 그런 이유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수원에서 계약 조항 등 여러 문제를 걸면서 나를 다시 데려갔다.
방황하던 시절
연예인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다닌다는 둥 리니지에 빠져 산다는 둥 고종수는 그동안 한국 축구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소문을 몰고 다녔다. 그 같은 일은 당돌하고 솔직한 인터뷰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스타로 발돋움한 1998년 고종수는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생각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 “축구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머리카락을 염색하면 어떤가요. 축구만 잘하면 되지 않나요.” 이런 고종수와 일부 지도자들과의 마찰은 예견된 일이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돌출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방황을 거듭하다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2004년 수원에서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나와선 뭐하고 지냈나.
원래 성격이 낙천적인데 그때 우울증에 걸렸다. 연예인들이 왜 자살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혼자 호텔에서 소주 먹고 처박혀 지냈다. 한마디로 미친 놈이었다(웃음). 하루는 소주를 먹고 술 기운에 영동대교에 갔다. 자살하려고. 진짜 죽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영동대교를 차로만 다녀 봤지 걸어가 본 적은 없었다. 걸어서 다리 가운데까지 갔는데 다리가 막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서워 전력으로 달려 다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했다. 그래서 구단에 다시 들어갔다. 죽을 각오까지 했는데 무엇을 못하겠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차감독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라고 해서. 아 참, 그 얘긴 아까 했지.
고종수는 팀이 플레이오프까지 나간다면 후반전에 교체 투입돼 팀에 도움이 되는 공격포인트를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사진 이휘영) |
언론에 대한 불만도 상당히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든 언론에 대한 얘기는 아니고 일부 언론에 대한 불만이다.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왜 쓰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1997년에 왼쪽 무릎 부상 때문에 연골판을 수술하러 팀에서 나왔다. 감독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어느 신문 헤드라인에 ‘고종수 퇴출’이라고 돼 있었다. 또 청소년대표팀에서는 내가 감독 역할을 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청소년대표선수들이 거의 다 친구들인데 내가 바보인가. 만약 내가 선수들한테 ‘야 임마, 너 이렇게 움직이고 넌 이렇게 움직여’라고 말한다면 동료들이 뭐라고 할 것 같나. ‘저 미친 XX’ 그럴 것이다. 말이 되는 기사를 썼으면 좋겠다.
대전에 입단하기 전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뭐하고 지냈나.
운동했다. 청계산을 비롯해 서울 근교에 있는 산에 다녔다. 그렇게 4,5일 하다가 어느 날 자책을 한다. 이렇게 운동한다고 날 불러줄 팀이라도 있나. 그리곤 또 논다. 그러다가 다시 ‘아니야 운동해야 돼’하고 운동하다가 또 자책한다. 반복된 생활이었다. 완전 한심 그 자체였다(웃음). 그러다 평소 알고 지내던 어느 선배에게 양수리에 있는 별장을 빌렸다. 거기서 친구랑 아침엔 삶은 달걀 먹고 저칼로리 음식 만들어 먹으면서 살을 뺐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강남에 식당을 차렸다고, 또 술집을 한다고 기사가 나왔다. 상식적으로 식당 차릴 거면 기자들한테 다 알려서 오픈하지 않나. 그런 기사 보면 또 술 먹고(웃음). 정말 긴 시간이었다.
방황할 때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들의 조언은 없었나.
어머니는 늘 내가 바른 길로 가길 바라신다. 아버지는 몸이 좀 아프셨다. 요즘엔 내가 다시 그라운드에 나오니까 몸이 좀 괜찮아지셨다고 한다. 그동안 불효자였다. 예전 수원 시절엔 선배, 친구, 후배들 때문에 전화기에 불이 났다. 그런데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니까 김호 감독을 빼고는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세상 인심이 그렇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가. 인간 관계도 그렇고. 솔직히 대전에 입단하려고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입단하니까 그런 욕심보다는 그냥 평범하게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선수로 뛰다가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요즘도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몇몇 어린 선수들이 있다. 선배로서 한 마디 한다면.
자만심을 버리고 묵묵히 한 단계, 한 단계 잘 밟아가기 바란다. 그리고 언론에 특별히 바라는 게 있다. 어린 선수일수록 칭찬을 많이 하는 기사를 실었으면 좋겠다. 어린 선수가 꼬투리를 잡아 비판한 기사나 인신 공격성 기사를 보면 한 달 만에 회복할 부상도 세 달이 걸릴 수 있다. 그만큼 기사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얘기다. 언론과 선수는 공생관계라는 생각으로 어린 선수들을 동생이나 조카처럼 잘 보살폈으면 좋겠다.
수원 삼성과 대전 시티즌
수원엔 아직도 많은 추억이 있을 것 같은데.
창단 멤버가 거의 모두 떠나고 몇 명 남지 않았다. (이)운재, (박)건하, (김)진우 형이 보고 싶다. 그리고 오랜 기간 나를 아껴준 그랑블루가 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그랑블루랑 따로 은퇴식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팬들에게 좋은 경기내용을 보일 수 있도록 힘 닿는 데까지 뛰어볼 생각이다.
대전 시티즌에 온 지도 반 시즌이 지났는데.
대전 서포터들이 정말 잘 대해 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아직 대전 관중이 수원보다는 적지만 팬들은 정말 열정적이다. 경기내용만 좀 더 재미있으면 대전 축구는 금세 살아날 수 있을 것 같다. 대전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도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기 바란다.
현재 몸 상태는 어떤가.
훈련을 꾸준히 하고 있어 많이 좋아졌다. 게임 감각은 60,70% 정도는 된다. 몸은 80% 정도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벌써 9월이고 좋아질 만하면 시즌이 끝나겠다.
대전이 6강 플레이오프에 나간다면 진정한 고종수의 부활을 볼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올 시즌엔 큰 욕심 없이 45분 이상 경기에서 뛸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목표였다. 팀이 플레이오프까지 나간다면 후반전에 교체 투입돼 팀에 도움이 되는 공격포인트를 올리고 싶다.
전반기엔 부상 때문에 많이 고생했는데 과욕했다는 얘기도 있다.
맞다. 2년 가까이 놀다가 복귀했는데 마음만 앞선 것 같다. 올시즌 초 키프로스 전지훈련 때 무리했다. 팀 훈련은 하루에 2번인데 혼자 4번 훈련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채만 먹으면서 체중을 뺀 것도 한 원인이다. 그러다 보니 근육을 다 못쓰게 됐다. 전임 최윤겸 감독이 4월쯤 한번 나가보자고 했는데 혼자 너무 욕심을 냈다. 문제가 됐던 왼쪽 다리 근육이 괜찮아져 5월부터 뛰어 보려고 했는데 이번엔 오른쪽 근육에 무리가 왔다. 그렇게 전반기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하루에 4번씩 훈련했다면 대단한 의지다.
주위에서 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단 10분을 뛰더라도 최대한 빨리 그라운드에 들어가 그라운드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관리 못하고 게으른 생활만 하다 명예롭지 못하게 선수생활을 그만둔 표본이 될 것 같았다.
대전 선수들은 거의 모두 고종수가 멋진 형이라고 하던데.
대전은 정말 티없이 맑고 착하고 순수한 선수들만 있는 것 같다. 수원과는 조금 다르다. 수원은 원래 볼 좀 차는 친구들이 모인 곳이니까. 그런 친구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지 않나(웃음). 농담이다. 아무튼 그래서 문제다.
미니 홈페이지의 문구가 인상적인데.
누가 우연히 그런 말을 했는데 마음에 쫙 와 닿았다. 내 인생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말 같았다. 난 인내심과 의지력이 부족했다. 워낙 떠들고 노는 것을 좋아해 경기가 끝나면 놀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고 자부한다.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도 찾은 것 같다. 굴곡진 인생에서 얻은 교훈이다.
SPORTS2.0 제 67호(발행일 09월 03일) 기사
대전=장지현 기자
ⓒmedia2.0 Inc.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시 법적 제재를 받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차붐이 인간적이네 어쩌네하는 댓글보면 웃음만 나옵니다 ㅋㅋ
요센 차붐 성격이 유해졌다고 하지 않나요? 그랬던거 같은데...
차붐이 후에 그런 인터뷰를 했죠 신영록을 보면서 선수들이 겨우 자기 아들뻘 된다는걸 그때서야 깨닫았다고
그러 어린 선수들에게 날선 프로의식을 바라는게 무리인게 아닌가...
자신이 지금까지 잘못생각해왔던게 아닌가 싶다고..
이게 아마 08년도 쯤이고 그해 결국 우승...
07년 겨울에 신영록이 출장기회 잡으려고 다른 팀으로 이적하겠다고 했을 때로 기억해요.
저 장지현 기자가 지금 장지현 해설위원인가요?
네 그런것 같네요 장지현해설위원 경력에 스포츠 2.0 팀장 이력이 있네요
스포츠 2.0은 지금 휴간한 잡지구요,, 그래서 기사 원문이 없는듯
차기 명장의 냄새가... 마인드 정말 마음에 드네요 자신의 신념 잃지 말고 향후 지도자가 된다면 권위적인 감독이 아닌 누구보다 선수들 입장에서 선수들과 함께하는 감독이 되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수원감독으로 딱이네요 수원 차감독시절부터 현재 효감독까지 보면 너무 딱딱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걸 자유분방하고 유연하게 풀어낼수있는 열쇠가 고종수코치가 되주길 기대합니다
지금 윤성효감독이 뭐 딱딱하거나 그러진 않아요..ㅋ 오히려 선수 관리를 전혀 못하죠..
서울왓으면 그냥 ㅅㅇ전은 끝장이엿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랑회장님과 만나 양해를 구했다는걸보면 그냥 별 탈은 없었을지도..ㅋㅋ
만약이긴 하지만
만약 고종수가 서울로 왔으면 히칼도가 안 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