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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잠언의 말씀 30,5-9
5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6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7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8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9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
(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일에 내 돈, 내 힘 쓸 필요 없다>
오늘 주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얘기는 공관 복음에 모두 나오는 얘기인데,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는 없는 얘기가 오늘 루카 복음에는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루카 9,1)
그러니까 파견하시면서 힘과 권한을 줘서 보내신다는 얘기인데,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가지고 가야 할 것과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내가 맡긴 일을 어떻게든 네 힘으로 완수하라고 하시는 야박한 분이 아니시고 권한도 주시고 힘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책임이나 일이 맡겨질 때 그것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처음 양성 책임을 맡게 될 때가 생각납니다.
불과 서른한 살에 공동체와 양성 책임을 모두 맡으라는 거였습니다.
공동체 원장이 되는 것만도 힘드는데 양성 책임까지 맡으라는 거였고, 제가 양성해야 할 형제들 중에는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형제들도 있는데 그 책임을 맡으라고 하니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런 명령이 떨어지면 아뭇소리 않고 순종하지만 그때는 너무 걱정이 되어 한 달을 대답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저의 선배 중 한 분이 제게 이 소임을 누가 주는 것이냐고 물으시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소임이라면 힘도 주실 거라고 충고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선출하든 관구장이 임명하든,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사람이 내게 주고 내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주신 거라고 믿는다면, 그 일을 할 권한과 힘도 함께 주실 거라고 믿고 수락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그 일을 할 때도 내 힘은 빼고 하느님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 선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를 돈으로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돈이 필요할 경우라도 그 돈을 내가 마련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시게 맡겨드려야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믿음의 가난입니다.
우리는 '야훼 이레'라는 말을 잘 압니다.
주님의 산에서는 주님께서 마련해주신다는 말로서, 이사악이 제물이 없음을 걱정할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주신다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알기는 잘 아는데 막상 이 믿음이 필요할 때가 닥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습니까?
믿고 내가 마련하려는 짓을 멈춥니까?
내가 마련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주시는 것을 막지 않습니까?
믿음의 가난이란 꼭 돈이 없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는 내 돈, 내 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건 힘이건 그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심을 믿고 내가 마련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을 일컫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근본에 충실하라>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쉽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법칙>
언젠가 한 여자 청년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너무 착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 이해해주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주는 것이 못마땅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 청년은 남자가 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내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만나지 마라, 응? 오빠가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고!”
“오늘은 오빠가 먹자는 거 먹고, 오빠가 보고 싶은 영화 보자.”
“내일 시간 좀 내라. 바다나 보러 가자.”
이런 남자를 소위 나쁜 남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아보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항상 저자세로 다 이해만 해 주고 상대의 편의만 봐주려고 하는 남자는 왠지 매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거미는 이미 자기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거미줄을 쳐서 더 큰 먹이를 잡을지가 관심사입니다.
착한 남자는 이미 걸려든 하루살이와 같고 나쁜 남자는 걸려들지 않는 잠자리와 같습니다.
이미 잡힌 하루살이에게는 관심이 줄어들고 잡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자신을 받아들이는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은 제자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 고을을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보잘것없는 것 중의 보잘것없는 것의 표징입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먼지와 같은 당신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럽혀진 나 자신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먼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에는 더 이상 내 책임이 없습니다.”
선교하다가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툭툭 털고 나와 버리십시오.
그들은 저자세로 계속 자신을 대해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하고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시도하는 데에서 집착이 사라지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 ‘평균 성공의 법칙’입니다.
앨런 피즈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에 ‘평균 성공의 법칙’이 나옵니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활동에는 평균 성공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명보험 영업하던 시절 그는 1:56이라는 평균 성공 이율이 적용됨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보험에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56명당 1명은 “네”라고 대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을 하루에 168번 하면 보험 계약을 하루에 3건씩 체결하게 되고, 그러면 보험 영업의 세계에서 상위 5퍼센트에 들게 됩니다.
앨런 피즈는 이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11세 때 집집이 다니며 고무 스펀지를 개당 20센트에 팔았습니다.
그때 평균 성공 비율은 10:7:4:2였습니다.
그는 학교가 끝나고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방문판매를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10곳마다 7곳이 문을 열었고, 그중 4곳이 나의 준비된 상품 소개를 들어주었으며, 그중 2곳이 고무 스펀지를 샀습니다.
다시 말해 10곳 당 평균 판매액이 40센트였습니다.
그는 1시간에 평균 30곳을 돌았고, 2시간 동안 평균 12개를 팔아 평균 2달러 40센트의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1962년 당시 11세의 호주 소년에게 2달러 40센트는 큰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문을 두드리는 10집당 40센트씩 번다는 것을 알고는 문을 열지 않는 3곳과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관심 없다며 문을 닫는 3명과 구매를 거절하는 2명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10곳을 두드리면 40센트를 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평균의 법칙을 모르면 다음에 일어날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10대 시절 앨런은 방과 후에 무작위 전화 영업으로 냄비와 팬, 리넨과 담요를 팔았습니다.
이때도 당연히 평균의 법칙을 활용했는데, 활동 30여 일 만에 발견한 평균 성공 비율은 5:3:2:1이었습니다.
전화를 받는 5명 중 3명이 그를 만나는 데 동의했고, 3개의 약속 가운데 제품 소개까지 성공하는 경우는 2번이었으며, 2명 가운데 1명꼴로 물건을 구매해주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법칙을 쓰는 이유는 성공에 집중하여 실패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합니다.
앨런은 나중에 보험 영업사원이 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가장 빠른 기간에 호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보험회사 직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할만큼 하시고 유다에게 “이제는 네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를 놓아버리십니다.
그를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나의 경고요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그리스도께 후회하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기쁜 마음으로 유다를 맞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은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고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서 파견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는 사람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
여름 내내 신앙학교 운영하느라 땀 흘리며 쌩고생한 형제들과 소풍을 왔습니다.
어떻게든 형제들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고, 산 너머 갯바위 포인트를 다녀왔습니다.
요즘 물고기들도 약아 빠져 사람들 발길 닿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손맛을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이것 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산더미입니다.
그걸 이고 지고, 깎아지르는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포인트에 겨우 도착했더니, 이번에는 장대비가 인정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마땅히 피할 곳도 없고, 이고 지고 온 것을 다시 챙겨 산길을 오르며 마음속으로 크게 후회를 했습니다.
어디 다닐 때는 어떻게든 짐을 최소화해야 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훈화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꾸리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 규범’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예수님의 훈시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말씀인가요? 빵도 돈도 안 챙기면 굶어 죽으라는 말인가요? 여벌옷도 한 벌 안 챙기면, 만나는 사람들 다 도망갑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 - '복음 선포와 회개, 믿음과 치유'>
“주님,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
(시편 119,105)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우리 또한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의 회개를 통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 일치가 깊어질수록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 될 수 있고,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빛이자 길이요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어 표류하고 방황하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우선적으로 찾아야 할 바 빛이자 길이요 추구할 바 희망이자 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희망이, 평생 화두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시 우리에게도 영원한 궁극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제가 자주 되뇌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께 파견받은 열두 제자들처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내야 할 하느님 나라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힘과 권한을 주심을 믿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열두 제자들과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요 병자들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목표가 뚜렷하니 삶은 아주 단순합니다.
소유의 삶이 아니라 전적 포기의 존재의 삶, 참 자유로운 삶입니다.
역시 안주의 삶이 아니라 도상(途上)의 삶, 순례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믿는 이는 모두가 ‘길가는 사람’, 도인(道人)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흘러야, 떠나야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삶도 행복도 자유도 선택입니다.
말 그대로의 무소유는 아닐지라도 이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무집착의 초연한 이탈의 가난한 삶을,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함이 없이 활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함께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치유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복음 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자리 잡고 있는 내 삶의 제자리가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언젠가의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잠언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려는 우리에게 참 적절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두 가지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공감이 가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순수와 자족의 겸손과 무욕의 삶을 간청하는 내용이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참 적절하고 이어 계속되는 내용도 더욱 공감이 갑니다.
간청하는 자는 변질, 부패될지도 모를 마음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있든 없든 부패와 타락이 없는 시종여일 한결같은 감사와 겸손, 절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회개와 더불어 믿음과 치유의 삶을,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 기쁨과 평화, 감사와 겸손의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필드 트립>
본당 주일학교에서 ‘필드 트립(Field Trip)’을 준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4시에 모여서 필드트립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차량봉사를 해 줄 형제님들도 함께 했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필드트립에 참가했습니다.
이번 필드트립의 장소는 텍사스 레인저스 구장이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메츠와 양키즈 구장에 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야구장으로 향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몇 년 전에 ‘돔’구장을 신축했습니다.
야구장은 덥지 않고 쾌적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응원했고, 텍사스 레인저스는 9회 말에 점수를 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1점차로 이겼습니다.
이런 필드트립이 좀 더 발전하면 필드 필그림이(Field Pilgrim) 될 수도 있습니다.
야구장, 농구장에 가서 학생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주교좌성당이나, 성지에 가서 학생들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3년간 ‘필드 트립’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필드 트립 장소는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 언덕에서 ‘행복선언’을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필드 트립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필드 트립’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저를 보내 주셨습니다.
5년 전에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에파타와 탈리타쿰’을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기 바랬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통해서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근심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길 바랐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필드 트립을 할 수 있는 동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2월 13일,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필드 트립의 장소는 다르지만 제가 해야 할 소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주셨던 소명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제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부유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부유하면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필드 트립’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멋진 필드 트립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과 ‘사랑’>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글자와 ‘사랑’이라는 글자가 너무 닮았는데, ‘사람’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ㅁ’이 ‘ㅇ’으로 바뀌면 된다.
‘ㅁ’이 ‘ㅇ’이 되려면, 즉 모난 네모가 둥근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부딪혀 깎여 나가고 닳아서 둥글둥글 해져야 한다.”
사람이 서로 부딪혀야 사랑이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고, 또 공감도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도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며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꾸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관계를 이어갈 때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성당에서는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왜 이런 고민을 안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냐면서 하소연 하십니다.
신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어렵다면 잠시 미사만이라도 나오라고 말씀드리는데, 얼마 못 가 성당에서 뵙기가 힘들어집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끊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거부감을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과 함께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시는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 주님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것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세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필요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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