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나비가 이어준 끈
전성희
“아침에 노랑나비를 보았어요 요새는 노랑나비를 보기가 흔하지 않은
데요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그랬나봐요.”
책을 읽기를 좋아한다는 여인은 감성이 풍부하여 시인처럼 말하고 있었
다.
내일은 시어머니 제삿날이다. 제물 흥정은 남편과 같이 하는데 오늘은
나 혼자 마트에 들렀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정을 흠뻑 남기고 가셨다 동네 어귀에
수국이 만발하는 계절이면 더욱 그립다.
사 년 전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과 남해안의 위도에서나 보았던 수국이 동네 어귀에 피기 시작하였
다. 수국은 여린 무지개 빛깔의 아리아리하고 잔잔한 꽃잎으로 어머니의
성품을 닮아 나를 홀린다.
우리 집의 여인들은 제사를 받드느라 혼줄이 난다 어머니와 선대의 할
머니들께서도 겪으신 어려움이다 나도 시집을 와서 삼십 년 가까이 사대
봉사를 받들고 있다 요행스럽게도 작은 집 어머니들께서 오시는 날이면
횡재를 얻은 듯하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겁고 일을 거들어 주셔서
신이 난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품꾼들 일바라지와 집안의 대소사를 쫓아다니며 뒷
설겆이를 하느라 울타리 밖을 내다볼 줄 몰랐다 평생을 그리 살 줄 알았
는데 몇 년 전 갑갑증이 나서 윗대에서 해보지 못한 한을 풀어드리기라도
하는 듯 바깥세상을 구경하며 살게 되니 예전같이 일을 하지 않는다. 그
래도 이제는 나이 탓인가 날이 갈수록 제삿날이 다가오면 어깨가 무거워
지며 무력해진다.
다행히 해가 밝아오는 이른 새벽에 거뜬한 몸과 맑은 정신으로 일을 하
면 힘든 줄을 모르고 많이 할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중에서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름질을 하고 나면 나머지는 걱정거리도 아니다.
어머니 제삿날이 벌써 네 번째 돌아온다. 동서와 작은 시누이는 직장이
있으니 저녁에 올 것이고 큰 시누이는 대전에서 서둘러 오더라도 오정 때
는 지나야 한다 혼자서 준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나는 분주하게
서두른다.
이모저모를 살피고 있는데 과일전에서 방송이 울려나온다 싱싱한 참외
두 상자를 사면 할인이란다 솔깃하여 가보니 반질반질한 노오란 참외가
단내를 풍기며 가지런히 담겨져 있다.
고운 여인네가 기웃거린다 나는 여인네와 눈이 마주쳤다 여인은 한 사
람이 두 상자를 사서 나누자고 하였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하고 들고 갈
수가 없어서 망설였다 일을 저질렀구나!' 생각하며 점원에게 봉지에 나
누어 넣어 달라고 하자 여인은 선뜻 우리 집까지 갖다 주겠다고 나선다.
집이 멀다고 궂이 사양을 하였는데도 여인의 고집이 만만하지가 않았다.
마침 관청에 서류를 넣으러 왔다가 친구 집에 가서 바람을 쐴 요량이었단
다.
초면인데도 오래전부터 아는 친구처럼 화기애애하며 밤나무 향기 짙은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지나며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들꽃들을 보았다.
현세에서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사방 60리 안에 겨자씨만한 인연이 있
었다고 한다 선녀같은 여인을 이 순간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연유
일까?
이팔육 세대를 살아가는 얼띤 며느리가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땅바
닥을 끌며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안쓰러워 어머니께서 보내신 귀인일까?
새로운 만남에 대한 동경과 희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침에 노랑나비를 보았어요 요새는 노랑나비를 보기가 흔하지 않은
데요.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그랬나봐요.”
텃밭에서 내 마음을 퍼 주듯 아욱과 상추, 쑥갓을 솎아 비닐봉지에 꾹
꾹 눌러 담고 있으니 옥구슬처럼 맑은 음성이 귓전에 울린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장다리꽃이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피어
실바람에 하늘하늘거린다 흐드러진 장다리꽃에서 노랑나비가 나폴나폴
하늘로 날아가고 있는 듯하여 한참동안 눈을 부비고 있었다.
2005/22집
첫댓글 아침에 노랑나비를 보았어요 요새는 노랑나비를 보기가 흔하지 않은
데요.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그랬나봐요.”
텃밭에서 내 마음을 퍼 주듯 아욱과 상추, 쑥갓을 솎아 비닐봉지에 꾹
꾹 눌러 담고 있으니 옥구슬처럼 맑은 음성이 귓전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