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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사실 철저히 어른이 됐을 때를 겨냥해 이루어진다. 현재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 습관, 문화는 대부분 초등학교, 중등학교 시절 국가 교육을 받을 때 무의식적으로 아님 의식적으로 내재화된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배운 교육 내용들을 살피면 조선 시대까지 한국의 옛 학교의 교육과정은 소학, 효경, 사서, 오경, 삼사 등 대부분 중국의 것들이었다. 이러한 중국인이 만든 철학적 형이상학적 세계를 좇고 배우려는 경향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상당 부분 계속 이어져왔다. 어렸을 적부터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인 유교, 도교, 불교 서적을 읽었던 옛날 한국의 조상들은 적어도 통일 신라 시대부터는 높은 학문적 강국인 중국을 높이 평가하는 의식을 가져왔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한편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중국의 유교, 도교 등 중국인이 만들어온 정신세계는 서양의 기독교나 인도의 불교처럼 분명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며, 동아시아의 정신세계를 지배할만한 탄탄한 철학적 체계와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효, 충, 인 등 지금 보아도 국가와 사회에 꼭 필요한 사상적 자양분 역시 내재화시켜 한국인의 정신 유산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대부분의 것들이 중국에서 나왔다는 것이 한국 사람으로서 참 아쉽기도 하다.'
한국의 교육은 해방 후 남과 북으로 갈려서도 남한은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에 북한은 소련의 사회주의식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학교 교육 역시 미국과 소련식으로 이루어졌다. 외국의 교육 사상과 교육과정으로만 채워져 온 한국 교육사는 한낱 외국의 교육을 좇아온 것에 불과한 것인지 한국 사람으로서 묻게 된다. 이런 아쉬움을 풀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로 난 어쩌면 한국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것을 거부하고 한국(고구려)의 것만으로 찬란하고 자주적인 고구려인만의 교육을 하지 않았을지 아무 근거 없는 상상도 해보기도 하였다. 가령 문화순혈주의(지금 만들어본 용어) 같은 생각으로 강력하였던 고구려는 고구려인만의 것으로 고구려인만의 강인하고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일부 사람들이 한자말을 배제하고 순우리말만을 쓰는 것이 우리말을 정화하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나, 과거 중국의 한족이 이룩한 문화를 한국이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하였던 부분들도 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려는 것이나, 북한처럼 우리식, 자주만을 내세워 지금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것이 우리 문화를 잘 발전시켜가는 것이라는 생각과도 비슷하다. 또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없음에도 한국사를 상상력으로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혈통의 '대제국'으로만 그리려고만 하는 것도 비슷한 부류의 생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 고구려 역시 오로지 순수한 고구려 자신만의 것(문화와 생각은 오고가기에,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으로 강력해진 나라는 결코 아니었다. 고구려는 중국 문화를 적극 수용하였고, 중국 문화의 영향력을 잘 활용한 나라였다. 비단 고구려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의 모든 왕조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역대 한국의 외국(중국) 문화의 수용과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한국의 '교육사'를 살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수용된 문화와 정신세계는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 전파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교육 제도가 고대 국가 중 비교적 발달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삼국사기에서 '국초시용문자시 유인기사일백권'이라고 하여 이미 건국 초기부터 문자를 사용하고 기록을 남겼다. 한국 교육사 최초의 관학(국가가 세운 학교)도 최초의 사학(개인이 세운 학교)도 모두 고구려에서 최초로 세워졌다. 태학이란 말 자체는 고구려가 왕 중의 왕을 수식하는 말로 '태'자를 썼던 것처럼 학교 중의 학교라는 뜻으로 태자를 붙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 이미 '태학'이라는 이름을 선비를 양성하는 고등교육 기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했기에 중국의 '태학' 이름을 땄다고 볼 수도 있다. 태학이란 학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중국 <<한서>> <동중서전>에 자세히 나온다. 심정 상 앞의 생각을 더 따르고 싶지만 뒤의 주장이 맞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한서는 고구려 태학의 중요 과목 중 하나였고, 고구려의 지식인들은 한서 속 태학에 대한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후자의 주장이 맞다고 한들 그것이 고구려 교육의 비자주적인 요소였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대학을 영어로 '유니버시티'라고 부르든 중국말로 '따쉐'라 부르든 그 대학에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형성된 그 나라의 문화와 국민들의 사고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대답하자면 고구려의 문화는 중국과는 다른 독특하고 개성있는 문화였으며, 고구려인은 중국인과는 다른 고구려 중심 천하관을 가진 나라였다.
한국사 최초의 관학이자 국립대학인 태학은 소수림왕 즉위 2년차인 372년 세워졌다. 태학은 중앙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소수림왕 당시에는 국내성에 세워졌을 것이고 427년 장수왕 천도 때는 평양으로 태학의 본 캠퍼스를 옮겼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태학은 국가의 관리 양성, 국가 중앙 집권 특히 충효 등 왕과 국가에 봉사하고 사회 질서 유지를 강조하는 유교 사상을 귀족에게 보급하려는 의도로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하면 흔히 중원에 대한 강한 자주성과 호방한 품성, 전쟁한 능한 이미지, 때로는 반중국, 반한(漢)적인 모습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고구려인들은 중국인의 정신세계와 중국의 한자로 쓰인 문화 유산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이해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육 덕에 고구려인은 본래 중국인의 것이었던 한자와 한문으로 상당한 성과물을 만들었다. 을지문덕은 한시의 압운법과 오언 절구의 기승전결을 지켜 빼어난 한시 작품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을 수 있었다. 이처럼 뛰어난 한시를 지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을지문덕이 태학에서 가르쳤던 5경 중 <시경> 공부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삼국사기 을지문덕 편에 보면 다른 무관들의 소개에는 없는 '글을 알고 지을 수 있었다' 구절은 그가 한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음을 뒷받침한다. 태학박사 이문진은 <신집>이라는 상당히 큰 규모였을 고구려의 역사책을 한문으로 쓸 수 있었다. <신집> 책이 남아있지 않아 내용과 책의 구조를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태학 박사였던 그가 태학의 주 교재였던 3사와 서경(노나라 주공에 대한 기록)의 형식을 참고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을지문덕과 이문진이 수도권(평양 일대) 지역의 귀족 출신이라 본다면 분명 태학에서 유교 경전인 오경, 더불어 논어, 맹자, 중용, 대학 같은 사서류의 책, 중국 역사인 삼사와 중국 문화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관학인 태학에서 가르쳐진 과목은 5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과 3사(사기, 한서, 후한서)이다. 태학에는 보통 15세 무렵의 귀족 자제가 입학하여 9년 동안 5경과 3사, 그리고 기타 한문학 등 중국의 학문을 수학하였다. 적어도 소수림왕 이후 국내성 시기 약 50년간 평양 시기 250년 간 도합 300년의 기간 동안 고구려의 귀족들은 당시 중국의 유학과 같은 학문, 중국 문화들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 일상 생활에서도 태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공자가 말했던 오상(인, 의, 예, 지, 신) 등 유교적인 가치를 실천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유교 경전의 공부는 백제와 신라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백제에서는 오경박사, 모시박사 등을 두어 유교 내용을 가르치게 했고, 신라에서도 유교, 도교 등 중국에서 만들어진 사상을 가미한 원광의 오계 등을 화랑에게 가르쳐 내재화하게 했고, 통일 후 신문왕 때는 아예 종합국립대학인 국학을 짓고 성덕왕 때는 문성왕 공자의 묘인 문묘까지 두어 본격적인 유교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시행하였다. 유교적 사상과 가치가 비록 중국의 것이지만 삼국과 이후 한국의 여러 왕조의 사회 가치 질서를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고 국가의 정치 철학을 다지는데 공헌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인이 오랜 역사 동안 중국의 선진 문화를 상당 부분 잘 수용하여 활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삼국의 유교 교육 정책 중 고구려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지방 부락 단위로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설립된 사학인 경당이다. 경당은 중앙 귀족들이 입학하던 태학에 비해서는 비교적 더 민중에게 개방된 교육 기관이었다. 고구려는 오늘날의 의무 교육이나 국민 교육을 실시하던 나라는 아니었지만 분명 민중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교육 기관이 존재하던 나라였다. 이 문제의 포인트는 '민중도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구당서에서는 '형문시양의 집에 이르기까지 독서하고 활쏘기를 배운다'고 했고 신당서에서는 '궁리시가까지도 역시 서로 긍면하여 경을 외우고 활쏘기를 배운다'고 하였다. 경당에는 지방 부호의 자녀는 물론 일반 평민들도 입학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경당은 태학이 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의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이 통합된 형태의 통합 교육을 하는 학교였다. - 통합 교육은 교육학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데 초중고 통합, 문무 교육 통합으로 경당의 교육을 통합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ㅡ 초등 수준에서는 옥편, 자통, 자림, 문선 등의 기초 한자 교육과정으로 학생들에게 한자 교육을 시켰고 이러한 한자와 한문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고등 수준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인 태학과 똑같은 교육과정인 오경과 삼사를 가르쳤다. 이처럼 지방 경당에서는 민중과 지방 부호에게, 수도인 평양과 국내성에서는 태학에서 귀족층들에게 유교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기에 고구려는 태학 교육을 귀족들 외 일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경당 교육을 받은 사람은 사상적으로는 상당히 유교화된 면이 꽤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기에 본래 고구려에 있던 하백과 주몽에 대한 신앙 등 토속 신앙, 사상 역시 강했기에 고려, 조선조보다 유교화의 정도는 약했을 것이다.
태학이든 경당이든 고구려인들이 중국의 정신 세계를 주된 교육 내용을 배웠다는 것은 한편으로 괜히 실망스럽기도 하고(고구려에 대한 자주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한국 교육의 길을 제시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근대에서 들어서도 우리는 학교에서 많은 것들을 한국에서 만든 것이 아닌 미국이나 유럽에서 만든 것들로 배워 왔다. 한국인들은 외세로부터 교육받은 것들로부터 압도당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타자의 것들을 적극 잘 수용하여 한국적으로 체질화시켜온 왔다. 이것은 기록상 한국 최초의 교육 기관이라는 고구려 태학 이래로 한국 교육이 가져온 큰 강점이기도 하다. 통일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교관은 중국의 학문을 주로 연구했고 문성왕 공자를 제시하고 중국을 숭상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갖고 중국의 것을 재료로 삼아 독특한 한국 문화를 건설해왔다. ㅡ물론 사대성이 있었던 부분은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이것을 완전히 정신적인 사대성으로만 매도하는 것은 너무 한 측면만을 본 편협한 시각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식 한자와 한국식 한문 문학 등 중국의 한자로도 중국과는 차별된 한국식의 한자 문화가 형성돼왔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향교, 서당, 성균관, 학당에서 중국 유교 사상을 열심히 배웠지만 한국인들은 중국 성리학을 뛰어넘은 서양의 어떤 관념론과 비교해도 그 체계가 뒤떨어지지 않는 최고 수준의 형이상학인 조선 성리학을 만들어 냈다. 미술 역시 중국의 그림을 본 떴지만 조선 성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진경산수화를 만들어내는 등 한국 그림은 한국 전통 미술만의 강한 개성을 만들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7500만 모든 한국인이 세계에 자랑하는 한글 역시 한자와 한문 문학, 한자와 한국어(언어) 사이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한자의 음을 표기해야 하는 불편함 등을 적극적으로 한국 문화 발전에 활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학교에서 대체 무엇을 가르쳐야 한국 문화, 한국인의 사상, 한국인의 건전한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인가 묻는다면 분명 우리는 한국인만의 고유한 것(참 정의하기 어렵고 모호하지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맞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지난 2000년 간 선조들은 한국인만의 고유한 요소가 아닌 중국의 것(실제로 중국인의 문화는 굉장히 높아서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을 받아들여 충실히 배웠고 그 원리를 한국인에게 맞게 변형시켜 한국인만의 문화를 잘 발전시켜 왔다. 요새 참으로 고무적인 것은 새로 나온 07 개정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국 고유의 것들(국어면 한국 문학, 사회면 한국 역사, 한국 지리, 음악이면 국악, 미술이면 한국 미술, 체육이면 태권도, 씨름, 전통 놀이 등)이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대폭 더 충실히 반영됐다는 것이다. 동시에 더 고무적인 것은 새 07교육과정에 지난 7차 교육과정보다도 더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학, 역사, 지리, 예술, 춤 등 세계의 우수한 유산들이 학생들에게 제시됐다는 것이다. 우리 것과 외국 것을 잘 섭취한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미래에 분명 더 나은 우리 문화를 건설할 것이라 믿기에 나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 괜히 기대가 된다. 일부 한국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국인만의 어떤 고유한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문화순혈주의는 매우 일부분 필요한 부분도 있겠지만 명확히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외래의 문화만을 숭상하는(조선 시대 일부 이런 경향이 결국 나라를 망친 원인이 됐다) 것 역시 잘못 된 것이다. 개방된 자세로 특히 반도라는 지리상의 특성을 잘 살려 대륙과 해양의 문화를 더 적극 수용, 발전시켜나가는 노력을 계속 경주해야 한다.
한국인들이 꿈꾸는 미래 국가의 이상 중에는 강대했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운 고구려가 있다. 요새 광개토태왕이라는 드라마를 TV에서 방영하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그런 까닭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는 결코 폐쇄적인 자기의 것만을 고집하여 강해진 나라가 아니었다. 그들은 유교든 불교든 도교든 좋은 것이 있다면 받아들였고 학교를 세워 귀족과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고구려인들이 정치적으로는 불편한 관계였던 중국이란 나라의 문화에 대하여 취하였던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자세는 광대토태왕의 팍스코리아나 시대를 다시 열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인 아이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을 많이 배우고 이러한 외국과의 교류는 더더욱 늘어나가고 있다. 한국의 아이들이 교육에서 배우는 외국 것 중 좋은 것을 한국 문화의 더 좋은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게 어른들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강대하고 자기만의 문화를 가졌던 천손의 나라 고구려 속의 태학, 유교, 경당, 오경, 삼사, 한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말할수 없는게 서토의 상형문자입니다. 무엇보다 표의문자이니 각 나라마나 읽는 한자음은 제각각이고. 이것때문에 수천년간 서토에는 지금도 북경어 광동어 상하이어등 따로 국밥으로 발음이 다르고 무엇보다 북경어 역시 이전 명나라 남경 관어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알타이 계통의 만주족이 자기식 발음으로 한자를 읽던 소리입니다. 한마디로 만주족이 북경에 입성하기전 명나라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음. 이후 만주족이 고도의 지옥같은 다단계 과거제를 통해 지식인에 퍼지게 하고 이후 근대에 라디오등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대중화 도리어 8.9성음을 사용하는 고대 한족어에 가까운 광동어는 동남아나 해외에서 더 많이 쓰는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