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공부하다가 보면, '플로티누스' 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헬라철학의 완성판, 혹은 최종판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피타고라스와 스토아 학파와 또 에피쿠로스 학파 등이 이 사람에 의해서 다 마무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사람은 AD200년경에 태어나서 활동한 사람인데, 그런데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이상은 철학을 공부할 마음이 생겨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철학을 공부해보면, "아하,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철학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즉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해서 유명한 사람들의 모든 철학을 다 정리정돈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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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티누스 (Plotinus, 204/5~270) - 알레산드리아 근처에서 출생하였다. 암모니오스 사카스를 스승으로 하여 배웠다. 동방(東方)의 지혜를 구하려고 39세 때 고르디아누스왕(王)의 동방원정에 참가하였다가, 원정이 좌절됨으로써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40세에 로마로 가서 많은 친구와 제자를 모아 학교를 개설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플라톤에 경도(傾倒)한 그는 자기 철학을 플라톤 철학의 조술(祖述)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그와 그의 제자들을 당시 사람들은 플라톤주의자라 하였고,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신(新)플라톤주의자라 불렀다. 그는 도덕에 대한 강의로써 청중에게 감화를 주었을 뿐 아니라 평소 경건한 삶을 통해 선을 실천한 선생이었음, 실제적으로는 복잡하게 전개된 여러 철학적 학파들 혹은 전통에 대해 비판적 해석을 펼쳤던 철학자였다. - 어느 리포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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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야구경기가 뉴스시간을 40분이나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건'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즉 여러 가지 사건이 있고, 그것은 물질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이 물질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자꾸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번에 미국에서 WBC 야구경기를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뉴스시간의 40분이나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사건은 의미를 준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스토아 학파를 공부했지만, 그렇게 우리 인간은 뭔가 속으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사건이, 그것이 의미를 주는데, 그런데 그 의미라는 것이 손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결국 인간은 하나의 '사고뭉치' ??
이번에 이렇게 미국에서 벌어진 야구게임 하나가 뉴스시간의 40분이나 차지했다는 것은, 우리는 또 다른 사건이 터지면 또 그렇게 우르르 쫓아갈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따라서 이렇게 우르르, 저렇게 우르르, 그렇게 하다가 세월을 모두 다 보내고 말이다. 그렇게 사건을 따라서 시간을 다 보내고, 그렇게 흘러 다니다 보니, 결국 '나' 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건뭉치' 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 자신이 사건뭉치라고 하는 것은, 사건이 터지면 얼마든지 쫓아다니고, 또한 히히덕거릴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즉 항상 인간은 자기 것은 없고, 사건을 따라서 우르르 쫓아다니기 바쁘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건뭉치라는 것은, 결국 사고뭉치라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그저 말썽만 일으킨다는 말이다.
◈ '나' 라는 것은 없어 !!
그래서 스토아 학파는 인간은 없는 것으로, 즉 '나' 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여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어차피 이 세상은 출렁거리기 마련인데, 우리 인간은 바로 그렇게 파도가 치는 가운데서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이불을 덮고서 자는데, 이쪽에서 이불을 당기면 저쪽에서는 모두 빼앗기듯이, 그렇게 휘둘리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두고서, 저는 '갖가지 원인'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갖가지 자기에게 사건을 전달하는 원인에 의해서, 즉 그렇게 휘둘리면서 살아가니까, 결국 '나' 라는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 사건에 의해서 휘둘리는 인간인데 !!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에서 그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나' 라는 것을 고집할 때 비로소 원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기 행복을 고집할 때, 이미 그 자체가 '나' 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는 말이다. 왜 '나' 라는 것을 집어넣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시작되는데, '나' 라는 것을 집어넣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건에 의해서 휘둘리는 인간이 도대체 무슨 자기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것도 전혀 없으면서 비현실적으로 자기 것을 고집하니, 즉 그렇게 현실에 어긋나니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그만 방황하게 된다는 말이다.
◈ 왜 불안과 염려가?
그렇게 자기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을,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염려' 라고 하는데, 혹은 '불안'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불안과 염려를 '누구누구의 탓'으로 돌리는데, 왜냐하면 자기 주체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즉 자기가 잘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사실 실존주의 불안과 염려를 스토아 학파는 나름대로(?) 극복을 했는데 말이다.
◈ 퀴즈 - 키가 큰 사람을 짜부라뜨리면?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키가 큰 사람을 짜부라뜨리면 무엇이 되는가? 키가 작은 사람이 되는데, 그런데 그 키가 작은 사람을 짜부라뜨리면 무엇이 되는가? '점'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러면 코끼리를 짜부라뜨리면 무엇이 되는가? 결국 코끼리도 점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코스모스는? 그것도 역시 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인간=코끼리=코스모스" 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그러니 결국은 다양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까지는 쉬운데, 그렇다면 여기서 이 '점'을 다시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원래의 모습대로 사람이 되고, 코끼리가 되고, 또한 코스모스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러니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과연 사람이 나올지, 코끼리가 나올지, 코스모스가 나올지 도대체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모른다는 말이다.
◈ 가획적, 비가획적 ??
그러니 이것은 비가획적인(?) 것이 되는데, 즉 이쪽으로 갔으면 다시 그대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인데,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즉 가획이 되지 않고 비가획적으로 된다는 것은 뭔가 어떤 뭉치를(?) 하나 놓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뭔가를 말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렇게 눌려서 점이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한데, 그런데 그것을 다시 늘려서 원상태가 될 때, 거기에서 어떤 다양성으로 나올지, 그런 다양성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뭔가 처음부터 눌린 그 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낌새를 준다는 말이다.
◈ 스토아 학파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문제점인데, 즉 모든 것이 사건화가 되는데, 즉 다양함으로 하나의 객체가 되느냐는 말인데, 바로 이 점을 스토아 학파가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인간인데, 왜 계속해서 그렇게 인간이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어떤 사건에 터지면 인간이 코끼리가 되지 않고, 왜 그대로 인간으로 계속해서 남아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아예 처음부처 인간으로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데, 즉 사건이 터지든지 말든지 말이다.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스토아 학파의 주장은 무엇인가? 사건이 '나'를 만든다고 했는데, 즉 부모가 성 관계를 맺은 그 사건으로 말이다. 그런데 왜 그 인간이 다른 사건이 일어나면, 인간이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될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 많은가? 인간 말고도, 수천 수만 가지의 물체들이 있는데 말이다. 바로 여기에 대해서 스토아 학파는 사실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 불교 - 자슥아, '점'이 아니라 '온'이야 !!
그래서 이것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는고 하니, 아까는 '점'으로 이야기했는데, 불교는 이것을 '온'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온'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불교에서처럼 자아가 없어지고 무아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온의 집합인데, 쉽게 말해서 가루(?)의 집합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가루가 되는데, 그래서 화장을 하고 사리를 건지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 '사리' 조차도 불교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데, 후대에서 종교화를 시키다보니 생겨났는데 말이다. 아무튼 다시 온이 결합이 되면 업보에 의해서, 이 업보는 일종의 관계망인데, 즉 자기가 지은 업보에 의해서 쥐가 될 수도 있고, 또한 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스님, 그러면 무생물은 어떻게 하지요?
그러니 인간이 왜 계속해서 인간으로 남아있느냐는 것은, 불교에서는 죽고 난 뒤에 해결을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살아있을 때는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고 난 뒤에는 해체가 되니까, 소나 쥐로 다시 변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불교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있는데, "생물은 되는데 왜 무생물은 되지 않는가?" 라는 것이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온' 인데 말이다.
◈ 이제 플로티누스를 살펴보면 !!
우리가 지난 시간에 스토아 학파를 공부하면서, 이 스토아 학파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고 그들을 '붕' 뛰어주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오는 플로티누스를 공부해보면, "아하, 이런 면도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될 텐데, 사실상 공부는 이런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는 맛이 말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의 철학은 없다" 라고 하면, 후대의 철학자들이 또 그 틈새를 공격해서 "이것이 문제이다"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길게 봐서 흔히 유행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유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지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하나에서 다양성이 나온다는 것은, 이러한 물질의 원인을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과감하게 몽땅 지워버리는데, 그래서 그는 스토아 학파가 주장한 전부를 다 버려버렸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사건으로 봐서는 현실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무엇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것으로 되돌릴 수가 없다 !!
그렇게 다 지우게 되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 거기에 대해서 플로티누스는 뭐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무엇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것으로 되돌릴 수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으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이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컵이 있든지, 책이 있든지, 아무튼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으로는 할 수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처럼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뭔가가 있더라도 새로운 사건이 생기면 기존의 것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즉 불이 나면 없어지듯이 말이다. 하지만 플로티누스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자기 기억에서 지운다고 해서 없는 것인가?
설령 그렇게 불이 나더라도 거기에 기존의 책이 있든지 아무튼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있음을 없음으로 여겨서 자기 기억에서 지워버린다고 해서, 그때의 있음을 취소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어려운가요?
그러니 뭔가의 있음은 있음 그 자체에서 해명이 되어야 하는데, 즉 "나는 왜 있는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이 반드시 있음에서 해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있음에서 있음을 해명시켜주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만 이 있음에 대해서 잊으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잊으려고 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영화 '실미도'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는데,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라고 말이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의 목을 가져오게 해달라고 하니, 그들의 대장이 뭐라고 하는가? 정책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북한에 가지 못하게 하니, 북파 특공대들이 그렇게 말한 한다는 것이다.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라고 말이다.
◈ 스토아 학파의 약점은 '행복론' !!
다시 말해서, 그러한 있음이 자기 의식이 잊어버린다고 해서 과연 있음이 없음으로 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식의 바깥에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스토아 학파가 인간의 행복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 행복론은 반드시 "나에게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을 추구하는데, 즉 그렇게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로티누스가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니라, 비록 자기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상관이 없다고 하더러도, 그것이 왜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더욱 더 현실적이고 진리답지 않느냐는 것이다. 비록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 기사님, 폴란드에 왜 폭우가 왔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지금 괜찮지만 얼마 전에 폴란드에는 이상기후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 칠곡에 다니는 750번 시내버스 기사에게 왜 폴란드에 폭우가 쏟아졌느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플로티누스가 보기에는 비겁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 행복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즉 그런 것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 시간에 제가 집사님에게 "한국이 일본에게 2:1로 이겼습니다" 라고 하니, 집사님이 하는 말이 "저는 그 야구 경기를 보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즉 자기는 그때 자기는 할 일이 있어서 그 야구게임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집사님, 제 말이 맞지요?
◈ 스토아 학파여, 비겁하지 마라 !!
하지만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그런 것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다 해명해야만 진리이지, 스토아 학파처럼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 골라서 해버리면 그것이 어떻게 세상 전부를 다 아우르는 그런 진리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는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에게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와서, 그런 사건과 사건들이, 다른 말로 하면, 그런 의미와 의미들이 "아하,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구나" 라고 하는, 그러한 '나'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가? 그렇게 해야 이 세상 전부를 하는 하나의 매듭으로서 '나' 라는 것이 존재하기에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바깥에서 일본에게 이기든 지든지 간에,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다고, 스토아 학파는 그렇게 다양성을 설명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건이 되어서 그쪽에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조건 있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의미가 주어질 때만 있는 것으로서 보자는 것이다. 물론 자기에게 의미가 없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으면, 그것은 또한 그 사람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기에는 없는 것이란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그들은 그런 의미로서만 설명을 한다는 말씀이지요?
왜 그런고 하니, 이 스토아 학파에서는 말하기를, 만약에 자기가 죽어버린다면, 그것이 교회가 있던 하나님이 있던, 아니면 야구경기에서 이기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즉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플로티누스는 그것이 아니라, "내가 죽더라도 그것은 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내 몸이 죽으면 그만이야" 라고 비겁하게 도망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몽땅 다 알아야 진리를 안다고 할 수가 있지, 자기하고 상관이 없다고 해서 비겁하게 회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플로티누스가 스토아 학파보다 더 고집이 센데 !!
그렇다면 과연 둘 중에서 어느 쪽의 고집이 셀까요? 사실 플로티누스가 더 대단하다는 말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없는 것까지도 다 해명을 하고자 시도를 하니 말이다. 그러니 보통으로 대단한 철학자가 아닌데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스토아 학파는 개인적 출발이고, 플로티누스 신적 출발이란 말씀인가요?
* 답변 - '신적 출발' 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 질문 - 스토아 학파는 '나'로부터 출발하지만, 반면에 플로티누스는 전체를 바라보고서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 답변 - '나'로부터 출발이 아니라, 사건에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의미를 두게 되니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곧 자기의 행복추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 답변 - 물론 행복추구인데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플로티누스는 그렇게 개인으로만 보지 말라는 것이지요?
* 답변 - 자기가 죽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해명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죽더라도 해명을 해야 속이 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플로티누스도 개인중심인가요?
* 답변 - 물론 개인중심은 아니고, 그것은 말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플로티누스는 항상 모든 것을 다 아울러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 시간 - '나'가 아닌 전체를 보아라 !!
아무튼 이렇게 있음이 있음이 되는데, 하지만 이 말이 간단한 것 같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스토아 학파처럼 "나 하나 배부르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라고 해버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속성이 튀어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 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우리는 인간은 스토아 학파의 주장처럼 자기 것만 챙기고 싶은데,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기 자신이 자기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꾸만 뭔가 이런 시간이 있어서, 이 시간을 의식해서, 이 시간이 자기를 흘러서 떠내려가게 만든다고 하는, 아무튼 그렇게 한 자리에 머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나중에 이것도 다 해명을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에게 변화를 느끼게 하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제의 '나'로 그냥 계속해서 밀어 부치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막상 오늘이 되니 어제의 '나' 와는 다른 오늘의 '나'가 되고 싶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지금과는 또 다른 내일의 '나'가 되고 싶다는 말이다.
◈ 왜 로또복권을 구입하는가?
사람이 하다가 하다가 안 되어서 답답하면 로또복권을 사는데,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말리고 싶지만 자기 돈으로 자기가 사는 것이니 그럴 수도 없고 말이다. 그렇게 로또복권을 구입할 때는 사람들이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예측을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예측을 한다는 것은 지금의 자기가 아닌 다른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로또복권을 살 때 그 마음은 무엇인고 하니까, "신이시여, 어떤 번호가 당첨이 될지 저에게만 살짝 가르쳐주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본인이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은근히 기대를 한다는 말이다. "제발, 20억 정도만" 라고 말이다.
◈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
그러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를, 그러한 '나'의 시간 의식 속에서 떨쳐버리고, 자꾸만 노를 저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이 '시간' 이라는 것은 노를 저어나가게 만드는 의식이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플로티누스 말고 다른 철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자꾸만 과거의 '나'도 아니고, 현재의 '나'도 아니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나' 라는 것이 불안정하니까, 그렇게 불안정한 '나'를 어떻게 붙잡느냐는 쪽으로 머리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플로티누스 말고 말이다.
◈ 시간을 흘러가게 하는 것만은 영원해 !!
여기서 플로티누스가 뛰어난 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나'로 하여금 변화하게 하는 그 요소만큼은, 즉 그렇게 뭔가가 변화한다는 것 그 자체는 안정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변화가 한번 변화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변화하고 싶고, 모레도 또 변화하고 싶은데, 그러니 그런 변화한다는 원칙만큼은 지극히 안정이 된 법칙이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까?
* 질문 - 그러면 그렇게 인간이 변한다는 것이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인가요?
그것이 아니라, 뭔가 안정된 것이 있다는 것하는 희열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불안정한데 말이다. 그 안정이 곧 영원인데, 즉 시간을 흘러가게 하는 것만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계속해서 뺑뺑이를 돌릴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있다는 말인데, 그것이 곧 '영원' 이라는 말이다.
* 질문 - 하지만 그렇게 변화하는 것 자체가 안정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변화하게 만드는 안정된 것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 의미인데,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고 하니, 생각하는 것과 생각이 되어진 것 중에서, 사실은 두 가지가 동일한 의미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것이 사실은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 왜 하나에서 다수가?
다시 말해서, 갑자기 집에 있는 마누라가 생각날 수도 있고, 일산역 앞에 있는 호수다방의 박 마담이 생각날 수도 있고, 일년 전에 헤어졌던 옛 애인이 생각날 수도 있고, 그리고 돈을 떼먹고 도망간 친구 놈이 생각날 수도 있고, 그렇게 여러 가지가 생각날 수 있는데 말이다. 물론 마누라가 생각날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말이다. (ㅋㅋ)
아무튼 그렇게 생각나는 것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러나 정작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냥 '나' 라고 하기보다는, 그런 '나'는 없는데 말이다. 바로 그것을 '정신'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정신에서 생각이 되어지는 것을 두고서 '영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나는 왜 생각하는가?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플로티누스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물론 그것은 나중에 설명을 하겠지만, 지금 이야기를 해버리면 너무 비약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이것을 플로티누스가 생각한다고 여기지를 말고, 지금 우리 개인이 각자 각자 생각한다고 해보자는 것이다. 지금 철학을 여기서 처음으로 공부한다고 여기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철학을 처음으로 공부한다고 가정을 했을 때, 과연 "왜 나는 생각하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그러한 것까지도 생각을 해야하는데, 바로 그것을 이 플로티누스가 해결을 했다는 말이다.
* 질문 - 제가 지난번에 기차 안에서 그런 질문을 하니, 목사님의 대답은 "인간은 늘 멍하게 있다(?)" 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저의 생각이 플로티누스와는 다르니 그러한 답변을 했지만 말이다. 교회에서 교주들은 뭐라고 하는가? "까불지 말고서 믿어라. 이 무식한 놈들아!" 라고 하는데, 그러나 철학자들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같이 느끼는 것을 한번 생각해서 그 공통점을 한번 찾아보자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훌륭한 점이고 말이다.
◈ 변화하는 것이 안정되어 있기에 !!
아까 이야기한 시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 안정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가 안정되었다는 것은, 변화를 하다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변화하는 것은 영원히 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안정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것에 의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나' 하나뿐인데, 그런데 그 하나에서 생각이 되어지는 것은 다양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이 오직 하나의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번져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
오늘 강의에서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한데, 정신을 차리고 잘 들어보라는 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녹음을 듣는 분들을 위해서 가능한 한 말로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 이것이 너무 중요하고 또한 말로서만 하기에는 힘이 들어서 말이다.
이렇게 자기가 생각하는데, 그 생각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회사도 생각하고, 야구도 생각하고, 또한 애인도 생각하고 말이다. 그렇게 분명히 '나' 라는 한 사람에게서 다양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그냥 물질로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코끼리가 안 되니 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 아무리 점을 잡아 늘여도 인간이 코끼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나' 라는 하나가 생각을 해도 다양한 생각이 나오는데, 그러니 인간은 그런 능력이 있더라는 것이다. 하나에게서 다양한 것이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아닌 물질의 경우에는, 즉 컵이라고 하면 그냥 계속해서 컵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도 컵이고, 저기에 있어도 컵이라는 말이다. 즉 컵이 빵으로 변하는 법은 없는데, 그렇게 물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야, 저 컵이 꼭 누구를 닮았는데 !!
그런데 그러한 컵을 보고서 "야, 저 컵이 꼭 누구의 가슴을 닮았는데(ㅋㅋ)" 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은 자유롭고 다양하게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정신이야말로 다양성을 나타낸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질이 아닌 정신이 말이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는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물질이 원인이 되는데, 무슨 의미인고 하니, 물질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비추어지니 나무가 자라더라는 것이다. 태양도 물질이고, 또 나무도 물질인데, 그러니 신이 있어서 나무를 자라게 한다는 소리는 때려치우라는 것이다. 또 정신이 있다고 하는데,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는데, 오로지 물질만이 있다는 말이다. 즉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물질의 원인이 되어서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바람이 불어서 옷자락이 날린다고 하면, 거기에 무슨 신이 필요하고 정신이 필요하냐는 말이다. 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고, 그냥 바람이 불어서 옷자락이 날렸다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스토아 학파이고 말이다.
◈ 그러면, 바람이 부는데 왜 인간은 코끼리가?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다면 왜 바람이 부는데 인간이 코끼리는 되지 않는가?" 라고 해버리면 그만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흙이 되는 것은 인정을 하겠는데, 짜부라져서 말이다. 그런데 그 흙에서 잡아당기니 코끼리가 왜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물질로서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플로티누스가 하는 말이, 그것은 처음부터 그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플로티누스에게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라고 하면, 그는 뭐라고 하겠는가? "그것은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생각대로 'T' ??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자체를, 즉 자기 생각은 자기가 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생각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알아서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만화든지, 드라마든지, 또한 영화든지,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이니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정신의 한계성도 있지 않나요? 본인에게 주어진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말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에서 다수가 나온다" 라는 것에만 집중을 하고 있는데, 그 본질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에 들어가면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삼위일체' 라고 하는데, 즉 '존재의 삼위일체' 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기독교의 삼위일체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닌가?
흔히들 사람들은 삼위일체가 성경에서 나온 사상인 줄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가 이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중요하게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그러니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성경을 공부하려면 반드시 이 사람의 사상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를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플로티누스 사상의 본질에 들어가면, 제가 방금 질문한 것이 해결이 되나요?
그것이 하나가 더 추가가 되는데, 지금 플로티누스의 삼위일체 사상에서 두 가지만을 이야기했는데, 즉 정신과 영혼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 인데, 즉 '정신'과 '영혼'과 그리고 '하나' 라는 것이다. 물론 그 하나는 곧 '신'이고 말이다. 그러니 신, 정신, 영혼, 이렇게 삼위일체가 되는데, 이것을 지금부터 설명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지금부터 플로티누스의 '삼위일체'를 !!
철학이라는 것은, "철학교리가 이렇습니다. 믿으세요" 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무엇인가? 일일이 하나하나를 모두 다 따져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라가서 나중에 박수를 치면서 "야,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이것으로 되네" 라고, 그렇게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이다.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따라가는 능력도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끙끙거리면서 앞서가고, 또한 따라가서 동의를 하고 말고 할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간편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그것이 아니라, 따지고 따지고 또 따지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 물질은 저리 꺼져 !!
그건 그렇고, 이러한 정신과 영혼에 있어서, 정신은 하나인데, 그런 하나에서 생각을 하니, 그 영혼은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물질은 양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다양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물질은 거기에 포함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물질이라는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전혀 다양성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질은 그냥 지나가도 된다는 말이다.
◈ 다시, 어떻게 하나에서 다수가 나오는가?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에서 다수가 나오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플로티누스가 설명한다는 것이다. 물론 물질은 배제가 되고 말이다. 여기서 '정신' 이란 것은 생각이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정신과 영혼이 하나이면서도, 그런데 만약에 떨어져 나가면 그것이 그만 물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스토아 학파가 주장한 것처럼, 물질과 물질 사이의 연관성으로 보게 된다면,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기에 '내'가 있었다고 해버리면, 그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는데, 즉 아버지가 '나'를 낳았는데, 그런데 아버지와 '나'는 다른 개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를 죽여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개체이니 말이다.
이것이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데, 즉 "엄마가 죽었는데 내가 왜 우는가?" 라고 말이다. 엄마가 죽어도 자기는 죽은 것이 아닌데, 그렇다면 엄마와 자기는 다른 개체가 되니 말이다. 그러니 윤리적으로 엄청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토아 학파처럼 물질과 물질로 따지게 되면, 즉 엄마라는 개체를 물질로 보고, 또 '나' 라는 것을 물질로 보게 되면, 개체에서 개체로 그렇게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플로티누스의 주장에 의하면, 정신을 그 사이에 넣는다는 말씀인가요?
개체와 개체 사이에 넣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이 그 안에 들어있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붙으라고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고 말이다. 심지어 죽어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말이다. 모든 민족마다 다 조상숭배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죽은 조상도 자기와 떨어진 개체가 아닌데, 서로 연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이런 철학을 알던 모르던 간에 모든 인간의 의식 속에는 이런 것들이 다 들어있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배워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게 의식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이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즉 '배움' 이라는 사건이 발생되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스토아 학파라는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배운 놈은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배우지 못한 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스토아 학파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어느 쪽이 옳은가요?
플로티누스의 경우에 시기적으로 후대이기 때문에, 즉 이미 스토아 학파의 주장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 400년이나 이후이니 말이다. 불공평한가? 그것은 할 수 없고 말이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의 주장을 하나하나 다 때려부순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이 세상을 잘못 보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 "누가 옳다, 그르다" 라는 것은 좀 그렇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플로티누스는 이미 물질 속에 정신이 들어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미 들어있는데, 그런데 물질 같으면 개별적인데, 이것을 우리가 명심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질은 개체적임을 말이다. 즉 물질은 딱딱 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컵과 책이 서로 같이 붙어있다고 해도, 약간의 컵과 약간의 책이 있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컵은 컵이고, 책은 책이라는 말이다.
◈ DON'T FORGET TO REMEMBER ME !!
그러나 이에 반해서 정신은 절대로 떨어지지를 않는데, 심지어 죽음이 오더라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정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저히 잊지를 못하니 말이다. 그 남자를 잊지를 못하고, 또한 그 여자를 잊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헤어져서 집에 왔으면 잠을 자야 하는데, 그런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보고 너무나 싶어서 말이다. 물질이라면 그냥 베개를 베고 쿨쿨 자면 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신 세계에서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이 되어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통합이 되어있는가? 그것을 플로티누스가 설명을 하는데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말이다.
◈ 다시 설명을 하자면 !!
다시 해보겠는데, 있음은 있음으로부터 해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 이렇게 컵이 있고 '내'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내'가 창문에서 떨어져서 그만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죽어버리면, 컵이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플로티누스의 경우에는,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문에서 떨어지다가도 다시 올라와서, "그런데 컵이 왜 여기에 있지?" 라는 것을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컵이 자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왜냐하면, 컵이라는 물질을 정신적으로 보면, 그 컵과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면 그렇게 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있음이 있다는 것은, 즉 컵이 그렇게 '나'에게 기억이 된다는 것은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컵의 있음을 해명하지 않으면, '나'의 있음은 불완전한 있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컵을 빼버리고 자기를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자기의 고향이 어디고, 학교는 어디를 다녔고, 부모는 누구이고 등등, 그런 것을 제 아무리 설명을 한다고 해도, 그 컵의 있음을 포함해서 설명하지 않으면 자기의 정신은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황당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러나 억지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아빠, 여기서 누구와 결혼식을 해 ??
여기서 천박한 예를 하나 들어보면, 그런 것이 기억이 오래되니 말이다. 한 남자에게 두 명의 여자가 있는데, 여자들도 그것을 서로가 알고 말이다. 그래서 'A' 라는 여자는 남자에게 'B' 라는 여자를 정리하면 결혼을 해주겠다고 하고, 또한 'B' 라는 여자는 'A' 라는 여자를 정리하면 결혼을 해주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남자는 'B' 라는 여자와 정리를 하고 'A' 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물질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렇게 정리를 하면 끝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B' 라는 여자가 이 남자를 잊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B' 라는 여자와 온전히 정리가 되어야 제대로 된 결혼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이 'B' 라는 여자가 남자의 결혼식에 어떤 어린아이를 한 명 데리고 와서 남자의 아이라고 소동을 벌이고 개판을 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 '나' 라는 '있음'과 연관성이 있는 것은 설명되어야 !!
이러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렇게 정신 속에는 뭔가 '나' 라고 하는 있음과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들이 제대로 해명이 되지 않는다면, 바로 이 '나' 라는 정신이 온전하지를 못하다는 말이다.
* 질문 - 스토아 학파는 의미로서 존재를 설명하지만, 그러나 플로티누스는 정신으로서 설명한다는 차이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 그런 차이밖에 없다고 할 수가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세상을 보는 것이 더 환하게 밝히 보여주느냐고 여긴다면, 진리가 그런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차이는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나'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으니, 기뻐하자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아마 지금 제가 하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지 싶은데(?), 즉 "이 세상은 이미 내 안에 전부가 다 들어있다" 라는 것이다. 왜 이것이 충격적인고 하니, 그러한 아이디어는 그때까지 플로티누스 말고 그 누구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이야 절에만 가면 하는 소리가 이런 것이니 전혀 충격이 없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물질로 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데, 물질은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온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이 세상을 그렇게 정신으로 보면, 즉 "나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으니 기뻐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
이렇게 되면 기독교가 참으로 머쓱해지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바로 종교의 전부이고, 교주이고, 또한 신이 되니 말이다. 아무튼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존재가 곧 신인데, 그러니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이다. 걱정하는 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플로티누스의 말을 들으면 참으로 신이 나는데, 자기가 곧 신이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한지, 그것을 좀 설명을 해보라고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합당한 해명이 있으면 더욱 더 신이 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 반지름이 정신이고, 원주가 영혼 ??
플로티누스가 이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양반이 아닌데,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원이 있다고 하면, 이 원도 일종의 점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원의 반지름을 가지고서 한번 들려보자는 것이다. 이 반지름이 바로 정신인데, 그러니 이 원은 따지고 보면 정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지름으로 돌리면 원이 되니 말이다.
그러니 플로티누스는 정신밖에 없는데, 물질이라는 것은 영혼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밖에 있는 이 원주가 영혼인데, 즉 다양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의 원에서 하나의 반지름이 나오는데, 두 개의 반지름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각종 영혼의 색깔들이 다양하게 다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WE ARE THE WORLD !!
그런데 감사한 것은, 여기서 인간이 나오고 코끼리도 나오는데, 그런데 인간이나 코끼리나 다 하나의 정신 속에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하나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코끼리가 옆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집에서 바퀴벌레가 기어 나온다고 해서 전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부가 다 '하나'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즉 하나의 정신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이고 한 식구라는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두려움이나 염려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다 이루었다(?)" 라는 상태인데, 그러니 정말로 괜찮은 종교라는 것이다. 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이 말이다. 집에 바퀴벌레가 와도 징그럽다고 피할 필요도 없고, 또한 약을 놓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같은 식구이니 말이다.
왜냐하면, 이 바퀴벌레는 그 집을 자기의 정신세계로 보는 것인데, 물론 자기도 그 집을 자기의 정신세계로 보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공유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면 무엇을 공유하는가? 서로가 '있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 바퀴벌레님, 이리 오세요 ??
지금 플로티누스가 주장하는 것은, 있음이고 존재인데, 굳이 종교라고 하면 존재의 종교이고 말이다. 그렇게 존재로서 다 바라보게 되면, 뭔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데, "이놈의 바퀴벌레야. 저리 꺼져!" 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그것을 사건으로 보면, 지금 누가 방귀를 끼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자는 것이다. 냄새가 나도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건이 있다는 것이 '있음' 인데, 그러한 새로운 있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반가워하고 끌어 앉아주자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말입니까?
물론 당연한데, 자기는 그냥 있는 것이니 말이다.
* 질문 - 완전히 불교까지도 포함하는 것 같은데요?
불교는 죽어서 어떻게 되고 하는데,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불교보다도 한발 더 앞서나간다는 것이다. 지금 플로티누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배후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당신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 !!
그렇다면 그 배후의 존재는 무엇인가? 어떤 특정한 개체의 신이 아니라, 우리 전부가 다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나'의 존재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인가? 물질에서는 확인이 안 되고, 정신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신의 정신을 살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플로티누스는 영혼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데, 즉 "당신의 영혼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영혼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영원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아까 질문을 했던, 즉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정신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자기 정신의 한계성을 말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해결을 해주는데,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것은 영원에 다 도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지금 궁금한 것이 좀 있어도, 이 플로티누스에 대해서 너무 따지지 말고, 이 양반이 완벽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일단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플로티누스 집사님에게 말하기를, "집사님, 미래를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당신의 존재가 당신의 미래로 몰아넣어서, 결국 당신을 영원 속에 합류시킵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도, 당신을 만드는 당신의 영원 속에 있는 정신이 당신을 인도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결국 자기 자신을 신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그것이 편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기존의 신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 자체가 신이니 말이다. 그리고 기존의 신에 대해서는, 기존의 신은 하나인데, 그 신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는 하지만, 정작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 촐랑거리며 돌아다니는 신 ??
그런데 이 세상은 움직이고 다양한데, 그러니 기존의 신이 이 세상에 하급 신을 파견시켰다는 것이다. 좀 촐랑거리는(?) 신이라고 할까? 마구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말이다. 아무튼 그러한 신을 보내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데미우르고스' 라고 하는데, 즉 '로고스' 라는 것이다.
이 신은 창조의 신인데, 그러니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신이 촐랑거리며 이 세상을 창조하는 그런 신을 보내었다는 것이다. 회사로 치자면, 최종 결재자가 실무자를 파견근무를 시켰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상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실무자가 육신을 입고 왔다고 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가 되는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육신이 아니라, 형상과 질료를 결합시켜서 창조하는 신은 하급신인데,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그런 신들이라는 것이다. 태양을 관장하는 하는 아폴론 신이 있고, 또한 음악을 관장하는 신이 있고(누구지?),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신인 '아프로디테'도 있고 말이다. 로마신화에는 '비너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분야가 다들 다른데, 그것을 합치면 창조의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이 물질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는데, 창세기 2장에 보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일단 만들게 되면, 이 세상은 다 만들어졌는데, 그러니 새로운 창조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조합해서 만들면 되니 말이다. 즉 번식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니는 니고, 나는 나다 !!
그러니 이것은 자기 형상을 찾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물질과 물질 사이에 중간 매개체가 없다는 것이다. 즉 "니는 니고, 나는 나다"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 자기가 창조했다고 우기고 싸움을 해도, 그런 분쟁을 조종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로티누스의 설명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 모두가 하나의 정신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의 형제가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같은 정신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결국은, 우리 모두가 신이다 !!
그러므로 이웃사랑이 저절로 되는데, 우리가 흑인이든, 백인이든, 어중간하든(?) 상관이 없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사실 동일한 하나의 정신에게서, 즉 신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모두가 신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정신을 하나로 보면 그렇지만, 정신이 다양하다고 보면 그것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정신은 다양할 수가 없는데, 아무리 다양한 생각을 해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지는 주체는 하나라는 것이다. 지금 집사님은 지금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데, 아니 이해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말고 일단은 한번 따라와 보라는 것이다. 동의를 하든지 말든지 간에 말이다.
* 질문 - 목사님이 생각하는 정신세계와 제가 생각하는 정신세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라 플로티누스의 정신인데, 물론 플로티누스는 사람마다 차이점이 아는 그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예를 들어서, 영혼이 이러한 'A' 지점에 도달하면 집사님이 되고, 'B' 지점에 가면 제가 되고, 또 'C' 지점에 가면 다른 누구가 된다는 것이다.
◈ 정신은 하나지만, 영혼은 여러 개 !!
그러니 정신이 다른 것이 아니고, 정신은 하나인데, 영혼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물질은 배제하고 말이다. 그렇게 영혼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쪽 저쪽에서 잡아당겨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정신이 여기에 가면 이런 영혼이 되고, 저기에 가면 저런 영혼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사람뿐만이 동물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코끼리도 다르고 생쥐도 영혼이 다르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정신을 부여해 준 신을 과연 이 플로티누스가 믿습니까?
플로티누스는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체성으로 이야기하는데, 즉 신 안에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플로티누스에게는, 신이란 우리가 생각하면서 접근해나가면 될 문제이지, 구태여 신을 하나 걸쳐놓고 믿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을 믿으려고 하니 달려가고 쫓아가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신을 쫓아가도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스토아 학파를 이야기하면서 다 했는데, 신은 있어봐야 자꾸만 라이벌이 되어서, 마치 밤하늘에 있는 달과 같아서 따려고 하면 저만치 가고, 또 다가가서 따려고 하면 저만치 가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자꾸만 점점 더 멀어져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신으로부터 무슨 해답을 받아내어야 하는데, 그런데 만나지도 못하는데 무슨 해답이고 뭐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신을 만나야 협박을 하든 공갈을 치든, 아니면 멱살을 잡고 흔들든지 간에, 아무튼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또한 하나에서 어떻게 다양성이 나옵니까?" 라고 물어볼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신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신 안'에 !!
그러니 신을 어떤 개체로 잡아버리면 이 문제는 평생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을 만나지를 못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신 안에 놓여있다" 라고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신 안에 있는데, 다만 정신이 가는 위치에 따라서 영혼만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른 영혼들이 여기 저기서 마구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고, 코끼리이고, 또한 원숭이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래도 스토아 학파는 신을 인정한 것 같은데요?
물론 스토아 학파도 신을 인정하기는 했는데, 그러나 그것을 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운명' 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즉 결정되어진 운명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제가 '숙명' 이라고 했고 말이다. 물론 스토아 학파가 이렇게 신을 언급한 것은 윤리적인 것 때문에 그러한데, 즉 "욕심을 줄여라"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 즉 남의 것을 탐낸다고 하는 것은, 신이 부여한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괴로움이 발생하는데, 그렇게 괴로움을 주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도록 하고, 또 다시 괴로움을 주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까불다가 실패해서 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도록, 바로 그런 식으로 사건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 모든 영혼은, '시작'과 '분출'과, 그리고 '회귀'가 !!
여기서 제가 좀 더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로부터' 라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 교재에 의하면 '분출', '회귀', '시작'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것이 바로 플로티누스의 위대한 점인데, 물론 신학적으로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사고가 너무나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영혼들은, 물질은 빼고, 그러니 코끼리나 강도나 창녀도 모두 다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회기가 있다는 말인데, 모든 것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즉 시작과 분출과, 그리고 돌아가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모든 영혼의 공통점이 곧 정신세계 !!
플로티누스는 바로 그것을 원주, 즉 모든 영혼의 공통점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공통점을 끄집어내면, 그것이 곧 정신세계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정신세계의 마지막은 고요함, 즉 운동이 전혀 없는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고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컵이 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두고서 "컵이 있다" 라고 한다면 정신세계가 약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묻지 않고, "목사님, 이 컵은 어디서 생겼나요?" 라고 '시작'을 먼저 이야기하는데, 그리고는 "이 컵은 일년정도 지나면 깨어질 텐데" 라고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이 컵이 깨어지면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라고 '회귀'를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어, 컵은 물질인데?)
◈ 철학이라면, 영혼의 동일한 공통점과 보편성을 !!
바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는 대상들만 온 세상의 개체가 다 되면, 그것이 바로 모든 영혼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렇게 이 세상을 해명할 때, 모든 영혼의 동일한 공통점과 보편성을 끄집어내어야, 그 정도는 해야만 비로소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플로티누스가 하는 이야기인데, 즉 모든 것에 다 통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코끼리를 이야기한다고 할 때, 스토아 학파의 경우에 자기는 그 코끼리가 싫다고 하면서 자살을 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나 플로티누스는 그것이 아니라, 먼저 이 코끼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여기에 코끼리를 두었느냐가 아니고, 처음부터 이 코끼리가 어디에서 생겼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물질로서 해명이 되는가? 만약에 물질로 보면, 아버지가 코끼리가 있어서 아들 코끼리가 있고, 또 그 아버지가 코끼리가 있고, 그렇게 물질로, 즉 사건으로 보면 해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로, 아버지로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아담이라고 하고, 결국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하나님은 어디서 생겼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어디서 생겼는가?"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고 하니, 하나님과 아담을 물질로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것이 철학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놈들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었다" 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오기가 발동한 것인데, 그렇게 되면 대화의 소통이 단절되고, 즉 철학이 전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물질로 보게 되면 반드시 개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끊어지고, 또한 '나'는 '나'대로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요?"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 창조되지 않는 신이 만들었지롱 ??
그렇게 물어보면 플라톤의 경우에는 뭐라고 하겠는가? "창조되지 않는 신이 만들었다" 라고 대답을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창조되지 않는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아마 플라톤은 "내가 방금 말했잖아. 창조되지 않는 신이 만들었다고 말이야" 라고 왕짜증을 낼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창조되지 않는 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이 나올까봐 귀찮아서 미리 내뱉는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창조되지 않는 신을 최종적인 목표로서, 즉 회귀로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정신이 내미는 영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이 플로티누스의 말이 이해가 되는가요?
◈ 우리가 신이니까 그런 생각을 다하지 !!
다시 말해서, 창조되지 않는 신이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비록 우리 존재가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사실은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냐는 것이다. 즉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인데, 만약에 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감히 하겠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물리적인 문제가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하면, "그것은 목사님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그렇게 모든 것을 시작으로 보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면,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저의 생각이 아니고 플로티누스의 주장이지만 말이다.
◈ 당신은 과거에 남자가 몇 명이었지?
예를 들어서, 어떤 젊은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약속했는데, 그런데 여자에게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에게 자기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고 결혼을 했는데, 그런데 막상 남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은 과거에 남자가 몇 명이었지?" 라고 하면서 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일단 물질은 배제를 했으니 영혼이 남는데, 그런데 그 영혼을 대할 때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까, "당신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것이란 말이다. 언제나 말이다. 그러니 서로 결혼을 해서 살게 되면, 반드시 어디서 왔고, 어떻게 되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즉 마지막 미래까지도 반드시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에게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보이지 않는 영원함과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즉 시간을 통해서 회귀하기 위해서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오우, 디피컬트!)
◈ 영혼은, 시간이 아닌 정신에 매여있어 !!
방금 한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과 더불어서 창조되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영혼은 시간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정신에 매여있기 때문에 말이다. 바로 그렇게 플로티누스가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플로티누스는 영혼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신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정신은 신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이 그림을 잘 보아야 하는데(?), 신은 이렇게 중심인데, 그런데 정신을 통해서 신과 하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함께', 혹은 '안에'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신 안에 있다고 해서, 그냥 신이라고 해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개체가 되면 신이 여러 개가 될 수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신은 하나이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나에서 어떻게 다양함이 나오는지를 설명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신이 여러 개가 되면, 다수에서 다수를 설명하는 것이기에, 그런 이야기는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하나 마나한 것이라는 말이다.
◈ 이력서를 하나 써도 !!
다만 신끼리 연결되어 있는 그 신성은 하나인데, 왜냐하면 공통적으로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다 이야기하니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서 언제나 질문을 할 때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하며, 또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는다는 것이다. 회사에 취직을 할 때 이력서를 써도 그러한 내용들을 써서 내야만 하고 말이다.
그러니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지, 돌맹이를 보고 그런 이력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돌맹이는 변화가 없으니 말이다. 즉 변화가 없는 것은 영혼이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시간이란 요소가 없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요소가 있다는 것은, 정신을 통해서 신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플로티누스가 자신만만하게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지금 자기의 이러한 주장 말고, 다르게 이 세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으면, 그러한 자가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의 마지막에 나오지만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이제 정리를 하면서, 이것을 플로티누스의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연결을 시켜보겠는데,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그 어떤 존재이든지 존재 안에는 다양성이 다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양성 속에는 시작과 과정과 회귀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존재인 사람들에게 있는 영혼마다 각각 다들 다른 시작과 다른 과정과 다른 회귀가 다 있다는 것이다.
◈ 시간은 사람마다 모두 달라 !!
그래서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는데, "시간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라고 말이다. 즉 사람마다 각자가 다 자기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가 서로 다른 자기 시간은 가지고 있지만, 그런데 그런 시간이 흐르는 틀은 공통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작과 과정과 회귀라는 말이다. 그러한 보편성은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동일하게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수학시험을 칠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시작과 과정과 회귀가 있는데, 물론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도 역시 시험을 칠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시작과 과정과 회귀가 다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마다 모두가 다 다르지만, 그러나 시작과 과정과 회귀가 있다는 것만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동일한 것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동일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즉 그러한 동일한 정신과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영혼을 자기에게로 잡아당기는, 즉 회귀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영혼들을 하나로 끄집어당긴다는 말이다.
◈ 운명은 없다. 우연만 있을 뿐 !!
그래서 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에 의하면, 운명이라는 것이 없는데, 물론 운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라는 것이다. 말을 참 어렵게 하는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스토아 학파를 공부했을 때 우연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우연은 없었는데, 필연만이 있었지 말이다. 그것이 곧 운명인데, 인간은 그렇게 운명이라는 자기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 스토아 학파를 다시 살펴보면 !!
여기서 스토아 학파를 다시 살펴보면, 오늘 너무 어려워서 지난번에 한 것을 살펴보면서 다시 정리를 하자는 말이다.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는 운명이라는 것은 자기가 요청한 것이 아닌데, 즉 교통사고가 나도 자기가 내고 싶어서 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분명히 순경이 없다고 여기고 그냥 지나가다 걸렸을 때, 그때 인간은 운명을 느낀다는 말이다. "에이, 재수가 더럽다" 라고 말이다. 무엇이 더럽다고요? 재수가 더럽다는 것이다. 즉 재수가 우리를 지배하는데, 이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라는 것이다.
◈ 어차피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
하지만 플로티누스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어떤 운명이, 즉 어떤 사건이 들이닥쳐도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끝으로 진행이 되는 말이다. 그러한 과정이니, 지금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마지막으로 어려운 부분이니, 조금만 더 참고 정신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교통경찰을 만났던 만나지 않았던 간에, 그것이 하나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그런 경찰이 있어서 스티커를 끊는 과정이 아닌, 과연 경찰이 없는 과정을 요청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연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연으로 돌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아하, 경찰이 있었네"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 경찰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괜히 그런 생각만 하면 열을 더 받고 스트레스만 더욱 더 많이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차피 과정이니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우리가 몸이 아프다고 하면, 그런데 "아, 몸이 아프지 않았으면" 이라고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몸이 아픈 것이 도착점이 아닌 과정이라고 하면 말이다. 그러니 이런 과정이 오든지, 저런 과정이 오든지 간에, 어차피 흘러가는 과정인데, 즉 머무르지 않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본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말이다.
지금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어차피 흘러가는 과정이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필연이라고 하면, 그것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필연이라고 하면 필연이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당했으니 말이다.
* 질문 - 플로티누스가 추구하는 최종목적은 무엇인가요?
그런 것은 없는데, 아니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하나'에 묶여져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에 묶여서 말이다.
* 질문 - 그렇게 해서 행복하다는 것인가요? 목적이 무엇이지요?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인가요?
플로티누스는 행복추구나 그런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것은, 있는 사실을, 즉 진리를 밝혀내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진리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하더라도, 철학자라고 하면 자기 할 일을 하고 나서 죽으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하겠는데, 이런 시작과 과정과 회귀에 있어서, 그렇게 회귀, 즉 돌아가는 것에 있어서 과정자체만을 생각한다면, 그러니 그 어떤 과정이 되더라도 그것이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자기 몸은 아프더라도 자기 정신은 살아있는데, 바로 그것이 '윤리' 라는 말이다.
◈ 자유의지는 저리 가세요 !!
그러므로 이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유의지를 무시를 한다는 의미는, 인간이 그러한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착한 일을 하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쁘다고 하는 짓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렇게 의지가 있다는 말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고 하니, 이렇게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는데, 그런데 과정자체가 선하다면, 그것을 가지고 선한 척 하는 것도 악한 짓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쁜 짓을 하면 나쁜 짓이 되지만 말이다. 착한 일을 하겠다고 의도적으로 하는 것도 역시 나쁜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질문 - 너무나 기독교적인 것 같네요?
그래서 이 플로티누스의 사상이 나중에 기독교와 결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기가 착한 일을 하겠다는 것도 너무 자기 의욕이 앞서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굳이 착한 일을 하겠다는 것은 과정을 의도적으로 바꾸겠다는 말이다.
◈ 정신은 영혼으로 갔다가 다시 회귀해야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 정신이 원주로, 즉 영혼으로 가서 다시 되돌아와야만 하는데, 그런데 이 정신이 그렇지 않고 바깥으로 튀어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신이 되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옆에 있는 영혼들은 자기의 졸따구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누가 하고 싶은고 하니,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혼들이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데, 그렇게 되면 욕심이 생기고 윤리고 뭐고 다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사회질서도 말이다. 즉 "내 주먹으로 내가 때리는데, 니가 왜?"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하나로 회귀하는 것을 무시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 신과 합일을 해여 윤리적 질서가 !!
그러니 신이 되려고 하지 말고, 자기 영혼과 신 사이에는 신이 주신 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 고무줄처럼 잡아당겨서 신에게 합일하는 것으로 가야 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영혼이 따로 뭔가 당겨서 신이 되려고 하면, 어디 옆에 있는 영혼은 가만히 있겠는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게 말이다.
모두가 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윤리가 깨어져서 안 되는데, 그러니 플로티누스는 철저하게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에게 합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 카톨릭이 플로티누스를 형님으로 ??
그러니 이러한 것을 누가 제일 좋아하겠는가? 바로 로마 카톨릭인데, 그래서 그들은 이 플로티누스를 최고의 철학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상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근호가 아니고 말이다. (ㅋㅋ) 이 플로티누스의 사상이 카톨릭의 신학과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어거스틴이나 다른 신학자들에게 접근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교재에 보면 플로티누스를 잘못 소개하고 있는데, '유출설'이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다른 책들도 대부분이 다 이런 방식인데, 그것은 본인이 직접 살펴보지 않고,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대충 듣고서 짜집기를 하니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물질위주로 나가는 것은 싫어 !!
그러니 플로티누스는 물질자체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물질위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다. "에이, 이 더러운 몸아!"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아닌 몸 위주로 살아가는 것을 미워한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고 하니, 그렇데 물질위주로 살아가면, 어디 옆에 있는 사람이 바보냐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그대로 보고만 있게 말이다.
자기가 옆에 있는 사람을 '툭' 건드리면 그 사람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다. 같이 치게 되지 말이다. 그러니 같이 회귀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옆으로 튀어 나가냐는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왜 건드리는가? 그것은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이 방해가 된다고 치고 건드리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만 신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윤리적이고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원과 그 원의 반지름과 원주와, 이러한 존재의 삼위일체, 즉 '정신'과 '영혼'과 '하나'로서 살아가면 이상적인 참된 사회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토아 학파처럼 물질위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개판이 되고 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