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식탁은 외롭다. 없던 시절에는 입에 풀칠을 하느냐가 문제이고, 풀칠 수준을 벗어나면 무얼
먹느냐로 관심이 이동한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먹음의 관심사는 어디서 먹느냐이다. 그런데 먹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면서 먹느냐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식탁은 어렸을 때부터 외로운 식탁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외로운 광야의 식탁이었기
까닭이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는
눅 1:80절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여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까지 그는 “빈 들”에 있었다는 눅 3:2-3의 말씀을 비춰볼 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빈 들” 곧 “유대 광야”에서 살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어린 아이가
유대 광야 곧 ‘허허벌판’에서 혼자 살수 있겠는가. 유대 광야에 자리잡고 있던 쿰란 공동체에 입양되어
살았다는 사실을 “아이가 자라며…빈 들에 있으니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독신생활을
고집하였던 엣세네파의 경우 입양이나 서원을 통해 공동체의 다음 세대를 이어갔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에세네파는
“다른 사람의 자녀를, 그들이 아직 유순할 때 입양하여…그들을 그의 방식으로 양육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쟁사 2.8.2.120). 세례 요한의 부모가 연로했던 점을 고려하면(눅 1:7), 그는 조실부모(早失父母) 했고 따라서
어릴 때 엣세네파인 쿰란 공동체에 입양되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부모님과 쫑알거리며 온갖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식탁풍경이 유대인의 식탁 분위기이다.
그러나 평시에도 쓸데없는 말을 하면 벌점을 받는 쿰란 공동체의 식탁분위기는 달랐다: 엄숙과 고요
속에 들리는 음식 삼키는 소리. 그러나 세례 요한을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이런 외형적인 엄숙과 경건이 아니라,
쿰란 공동체 자체만이 종말론적 구원공동체라는 폐쇄성이었을 것이다.
그가 쿰란 공동체를 뛰쳐 나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회개의 선포와 세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를 기다리는 식탁의 메뉴는 메뚜기와 석청(야생꿀)이었다고 한다 (마 3:4; 막 1:6).
요한의 식탁에는 ‘땅 위의 동물’과 ‘물 속의 생물’ 중에는 아무 것도 없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개
있는 것’ 뿐이었다. ‘날개 있는 것’은 새와 곤충이다. 그런데 요한의 식탁에는 새 종류의 먹거리(닭고기와 메추라기 등)조차 없고,
곤충과 곤충의 몸에서 나온 산물(꿀) 뿐이었다. 매우 가난한 식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메뚜기와 꿀은 ‘코셰르’인가?
대부분의 날아다니는 곤충은 먹는 것이 금지된다. 여기에는 파리, 벌, 모기, 그리고 대부분의 메뚜기가
포함이 된다. 그런대 예외적으로 몇 종류의 메뚜기는 성경에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곤충의 경우에는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종류”는 먹을 수 있다: 메뚜기 종류, 귀뚜라미 종류, 베짱이 종류, 팥중이 종류 등(레 11:21~22).
위의 규정에 의하면 메뚜기는 ‘코셰르’이다. 메뚜기를 히브리어로 ‘카루브’ (חרוב)라고 한다. 그런데
쥐엄열매도 ‘카루브’ (חרוב)이다. 그래서 실제 요한이 먹은 것은 쥐엄열매 (영어로 carob)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쥐엄나무는 물이 거의 없는 유대광야에서 자생하지 않으므로 세례요한이 쥐엄열매를
먹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그럼 꿀은 어떤가? 꿀은 벌의 몸에서 나온다. 벌은 코셰르가 아니다. 코셰르의 원칙에 따르면,
코셰르가 아닌 생물의 몸에서 나온 것은 코셰르가 아니다. 낙타는 코셰르가 아니므로 낙타의 젖은
코셰르가 아니다. 돼지의 몸에서 나온 돼지 기름이나 가죽도 코셰르가 아니다. 그런데 꿀은 가나안의
7대 작물 중 하나이며,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표현할 정도로 풍요의 대명사가 아닌가.
만일 코셰르의 원칙에 따르자면 꿀도 코셰르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랍비 규정은 꿀을 코셰르에
포함시키고 있다. 꿀은 벌의 몸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꽃의 넥타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벌꿀은 코쉐르의 일반적인 규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먹었던 꿀은 벌꿀이 아니라 대추야자 꿀이라는 견해도 있다. 유대광야의 여리고는
“종려나무(대추야자) 성읍” (신 34:3; 삿 3:13)으로서 많은 대추야자의 산출지인데 반해, 광야에는
벌이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광야의 식탁은 외롭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초라한 식탁에 비해 숲 속 정자 으리한 식탁에서 먹는
우리들의 영혼이 외로운 건 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