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세기 오사카 동부 시조나와테시의 시토미야키타 유적
-다수의 말뼈,고대 한반도 양식의 등자,안장,재갈 등의
말갖춤,백제풍의 주거지,이동식 부뚜막,유U자형 아궁이 장식판,도질.경질 토기
전남 영산강 일대와 충청도,중부권 유물들과 닮은 것들이 수두룩.
재갈은 재갈과 손잡이를 고리를 이용해 연결하는 백제.가야 재갈과 거의 똑같다.
새발자국 무늬(조족문),직선 무늬가 섞인 타날문토기,부뚝막 장식판 등은 전라남도 서남쪽 해안이나
충남.충북의 전형적 양식이며 백제 특유의 벽기둥(벽주) 건물 터까지 확인되다.
이 시설은 백제의 말사육 전문가들이 소금 토기를 만들었던 왜인 인부들을 부려 말을 먹이고 키운
시설이다.
이 유적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의 말사육 기술자 아직기가 오사카 부근 간사이 지방으로 건너온 연대
,기록과 일치한다.
서기 404년 - 부여왜와 백잔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파기하고 배를 타고 황해도를 침입하여 백제 병사와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했다. 광개토왕이 몸소 병사를 이끌고 평양을 떠나 이들을 토벌하러 나섰다.
대방에서 왕의 군사가 부여왜의 선봉과 만났다. 광개토왕의 군대는 길을 끊고 막아 사방에서 추격하여 살해하여
부여왜군은 궤멸되어 패했고 참살된 자가 무수했다.
광개토왕 비문 - 3면 3행
請□□□朝貢.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파)石城,
□(왜)連船□□□, 王躬率住討, 從平穰
14년(서기 404년) 갑진에 부여왜는 불괘하여(법도를 지키지 않고 즉양국의 관계를 파괴하고) 대방의 경계를 침입하여
백잔병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했다.
...왕이 몸소 병사를 영도하여 토벌했다. 평양을 떠나
3면 4행
□□□鋒相遇, 王幢要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왕의 군사가 적의 선봉과 서로 만났다. 왕의 군대는 길을 끊고 막아 사방에서 추격하여 살해하여 왜구는 궤멸되어
패했고 참살된 자가 무수했다. -
- 광개토태왕비
주석 : 삼국사기,광개토태왕비는 이때 백제는 이미 서기 396년에 고구려에 항복하고
백제 왕(아신왕) 이 노객이라 하며 무릎꿇었지만 와신상담 하여 부여왜와 대방을 함께 공격하였다.
백제 왕이나 백제 왕국의 의지가 부합하여 백제군사들이 왜군과 함께 벌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황해도를 침입한 왜군을 모조리 궤멸시킨다.
서기 407년 - 광개토왕이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왜의 본거지 임나에 수만 단위의 군대로
사방 포위하여서 그들의 개마무사들을 만여명이나 넘게 무참히 살륙하고 그들의 군대를 전부 참살시켰다.
노획한 군자 기계가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백제의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성등 6개 성을 격파하였다.
- "17년(서기 40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토록 하여...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 탕진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백제의 사구성, 누성, 우불성, □성, □성이었다.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
3면 5행
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 □□□□□
3면 6행
□城. □성이었다" -광개토태왕비
서기 5세기 초반 - 모미추 군대들이 전라도로 진입하여 과거 오구나 타케루(근초고왕)에게 주었던 전라도를
차지하였다. 임나 사현四縣을 설치하고 제2의 임나국을 세우기 시작하다.
서기 5-6세기 - 전라도에 가야계 유적과 유물들이 도배되는 엄청난 상황!
그것도 일부 지역이 아니라 전남 신안, 영암 그리고 전북 남원, 장수 등 전라도 전 지역에 해당된다.
모미추 군대의 모미추 양식 투구, 모미추 양식 판갑, 모미추 양식 토기, 모미추 양식 묘제 등이
전라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서기 5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모미추 군대들은 전라도에 주둔하며 전라도를 지배하고있던 것이다.
이즈음 영산강 유역에는 모미추의 통치자들의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나타난다.
서기 414년 - 장수왕 거련이 광개토호태왕비를 세웠다.
서기 445년 - 남조 송나라의 범엽이 후한서를 저술하다.
서기 455년 - 백제쿠다라제국의 왕자 경사(慶司)가 백제 왕에 즉위하고 근개루(近蓋婁)라 불리다. (개로왕)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
서기 461년 - 백제 근개루 왕(개로 왕)이 고구려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407년 이후 참살탄진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 야마토로 그의 아우 곤지를 보내
천황을 섬기게하고 백제를 구원할 원군을 빌어오게하였다.
만약의 일을 대비해 곤지에게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주었다.
- "백제 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采女)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다다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 근개루왕이란 별칭은 그동안 백제와 일본열도의 왜로 분리된 양국을 통합한 왕으로써 이때부터 백제와 일본왜는 하나의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그래서 개로왕을 근개루왕이라 칭한다. 아우곤지를 일본왕에 역임하게 하게 위해 일본으로 보내는 것을 <일본서기>가 일본입장에서 내용을 각색한 것이다.
* 곤지는 일본으로 가서 왜5왕중 [제]가 되고 후여 섬에서 내어난 사마는 왜5왕중 [무]가 된다 [무]는 백제로 돌아와 무령왕이 되어 백제를 다스린다.
서기 464년 2월 - 고구려군이 신라 땅에 들어와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왕이 임나왕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다.
임나왕은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에게 신라의 구원 요청을 전달하였다.
그러자 영산강유역에 있던 모미추의 장군들인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 가 출동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
-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임나왕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일본부 행군원수
(日本府 行軍元帥: 영산강 유역에 있었던 모미추의 세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조
서기 470년 - 신라 자비왕이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 '삼년산성'을 쌓다.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으며 실로 철옹성 요새였다.
이곳은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접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신라가 이곳에 견고한 산성을
쌓음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고 나아가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신라의 태종무열왕(김춘추, 654~661)이 당나라의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 맞았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이 산성은 신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고려의 왕건이 이곳을 공략하다 크게 패하기도 했다.
서기 472년 - 백제쿠다라왕국의 근개루 왕(개로왕)이 북위 제국에 편지를 보내 옛날 자신의 선조인 근구수왕이
평양에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의 목을 베었다고 알렸다.
- "신(개로)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 고국원왕)가 이웃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수(須 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지 잠깐만에 쇠(釗:사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 이러한 일이 고구려에 알려지자 고구려는 개로왕을 혼재주기위해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기 475년 -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 위례성을 정벌하여
백제의 근개루 왕(타케루 : 개로왕)을 참수하다.
고구려 장수왕 거련 : 근초고가 군사 3만으로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웡왕을 죽였듯이 장수왕도 똑같이 3만의 군사으로 백제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살해함. 이 때 개로왕은 아차산으로 달아났으나 도중에 태자와 왕비와 함께 고구려 군사에게 죽임을 당한다.
-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의 장수 걸루 등은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 아래로 보내 죽였다."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사망하여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
서기 477년 3월 - 일본 야마토의 타케루 천황(왜왕5주의 무武 : 웅락천황 )이
백제에게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인
웅진(구마나리)을 선물해 주어 근개루 왕의 동생 '문주汶洲'로 하여금 백제를 다시 복구하게 하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
타케루 천황은 전라도의 야마토 군대로 하여금 백제 왕실을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야마토의 타케루 천황(무武 : 웅락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 일본서기 웅략천황 제위 21년조
- 이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며 개적되고 각색되어 있다. 사실은 이 당시 개로왕 시절부터 백제와 야마토는 한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2국가 1체제였다.
제濟 : 유라쿠천황: 곤지왕(사이)
무武 : 웅락천황: 후에 백제 무령왕(사마)
주석 : 하치호리현은 하치(하타)의 호리(고을)란 뜻이다.
서기 495년 - 장수왕이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우다.
중원 고구려비의 중간 구절..
"... 동이(東夷) 매금(寐錦 : 마립간 또는 메르겐)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
서기 5세기 - 고구려 장수왕이 해마다 북위 제국에 조공물을 바치는 것이 동이 제후국들 중에서
제일 최고 으뜸이었다.
"동이와 북적은 중국에 있어 기미(羈?, 말이나 소를 얽어매는 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속국이란 뜻이다)일 따름이다. 고려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것이 동쪽 번국의
으뜸이었으므로, 길흉사에 중국 조정에서 보내는 것 또한 넉넉하였다.
기타의 녹록한 나라들도 모두 조공 바칠 줄을 알았으니, 아마 소나 말들이 중국을 향하고
동풍이 잘 불어 시절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위서(魏書 554 北齊·魏收) 열전列傳
서기 500년 전후 - 대가야가 사타(전남 순천) 지역을 지배하였다. 운평리 고분군이 세워졌다.
전남 순천 운평리 고분군 - 서기 6세기 초엽 가야계 고총 고분으로
사서엔 임나의 4개 현 중 하나인 '사타'로 나온다.
6세기 초엽 대가야의 순금제이식, 마구류, 대도, 꺽쇠, 토기류 등 2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운평리 고분군은 서기 500년 전후의 순천지역 지배층의 무덤이다.
대가야계 유물들이 출토된건 당시 임나의 4개현 중 하나인 ‘사타’(지금의 순천)가 대가야와 연맹관계였음을
확인시키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은 맹주국인 대가야의 영향이 닿는 고을이었다.
서기 500년 이후 - 흉노묘제인 적석목곽묘가 갑자기 사라지고 가야 계통의 석곽묘가 나오고 있다.
서기 500년 이후에 신라 왕실이 흉노선비족에서 가야 계통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 왕족 성씨는 중국 사서에 모牟씨라고 나온다.
서기 512년 - 야마토 천황이 백제에게 임나4현(전라도)을 선물해주었다. 임나(대가야)가 분노하고
신라가 불만을 표시했다.
백제 사신: "임나의 4현은 백제에 가깝고 임나(대가야)로부턴 멀어서 임나(대가야) 스스로 지키기 힘듭니다.
게다가 임나 4현이 백제령이 아닌 까닭으로 섬진강을 이용하지 못해 백제의 조공선이 서해와 남해의 코너를 돌때
거친 물살에 배가 난파되거나 조공품이 물에 젖기 일쑤입니다."
야마토의 천황은 백제에 이 영토를 할양해주었다. 여기에 임나(대가야)와 신라가 반발했고
후에 야마토를 원망하였다.
임나(대가야)는 당연히 자신의 영토를 뺐기고 섬진강이라는 대외 교통로를 빼앗겨 분개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수있다. 하지만 왜 경주분지의 신라가 여기에 반발했을까?
즉,512년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그 임나4현이라고 하는 영토에 대해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 가능한데.
그렇다면 이들 당시 신라 왕실은 그 임나,즉,가야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라고 봐야 논리가 자연스럽다로 귀결된다.
서기 500년 이후에는 흉노묘제인 적석목곽묘가 갑자기 사라지고 가야 계통의 석곽묘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서기 500년 이후에 신라 왕실이 흉노선비족에서 가야 계통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사료: 일본서기
참고 사이트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689840
서기 527년 이전 어느 때 - 신라가 임나의 남가라와 탁기탄을 차지하다.
야마토 천황이 신라의 궤씸한 짓에 여러번 신라를 책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