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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황지중[大荒之中]의 불함[不咸]과 백두[白頭]는 천하[天下]의 북방[北方]에 제[第] 일[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의 역사[歷史]는, 역사[歷史]의 본[本] 모습을 잃어버리고,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암흑[暗黑]의 치욕적[恥辱的]인 거짓의 역사[歷史]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現在]의 이 세상[世上]을 뒤 덥고 있다.
식민잔재[植民殘在]의 이러한 거짓의 역사[歷史]는, 산천[山川]도 이리저리 옮겨 놓고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백두산[白頭山]이다.
백두산[白頭山]은 신이[神異]한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담고 있는 천하[天下]의 명산[名山]이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이름 석자만 들어도, 한국[韓國] 사람들은 신령[神靈]하고 영험[靈驗]한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는 명산[名山]으로 인식[認識]하고 있다.
그러나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 근세[近世]까지 이어 내려온 역사서[歷史書]들은,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는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백두산[白頭山]은 대황지중[大荒之中]에 있으며, 그 산[山]은 대황[大荒]의 북방[北方]지대에 있는 산[山]으로, 크고 높기 때문에 사시사철 빙설[氷雪]로 덮여 있어, 백두[白頭] 백산[白山]이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은 아득한 태고[太古]의 시대[時代]로부터,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와 함께 숨 쉬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歷史]와 그 흐름을 같이 해 왔다.
백두산[白頭山]은 아득히 저 멀리 환국[桓國]의 환웅천황[桓雄天皇]으로부터, 신시[神市]의 단군[檀君]을 거쳐,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숙신[肅愼], 읍루[挹婁], 옥저[沃沮],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 그리고 가까이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歷史]의 뿌리와 근본[根本]이 되는 발상지지[發祥之地]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불함산[不咸山]은 또한 우리 역사[歷史]의 근원[根源]이 시작된 원류[原流]이며 북방[北方]의 신령[神靈]하고 영험[靈驗]한 명산[名山]으로, 각 왕조[王朝]의 존숭[尊崇]]을 받아왔으며,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이후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북관[北關]과 서관[西關]의 최 변경[最邊境] 지역으로서,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과 국경[國境]을 마주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의 평양부 [平壤府] 편에서,
靈異,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신령[神靈]스럽고 기이[奇異] 한 일,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世上]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降臨]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다.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婚姻]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南], 북[北]의 옥저[沃沮], 동북[東北] 부여[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檀君]의 다스림이 되었다. 라고 이렇게 기록[記錄]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歷史]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고, 저들은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불러왔다는 백산[白山]은, 무릇 범[凡] 8개[八個]의 산명[山名]을 가지고 있었다.
曰不咸,曰蓋馬,曰徒太,曰白山,曰太白,曰長白,曰白頭,曰歌爾民商堅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 등이다.
백두산[白頭山]은 이렇게 그 이름이 그 지방 토민[土民]들에 의하여 다르게 불리어져 왔으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이 나라의 운[運]을 다하는 기원후[紀元後] 서기[西紀] 1900년대[千九百年代]까지도 우리의 역사[歷史]와 함께하며 그 본래[本來]의 자리에서 변함이 없었다.
백두산[白頭山]은 태고시대[太古時代] 이후[以後]로 문자[文字]가 생기기 이전[以前]부터, 그리고 인간[人間]의 문자[文字]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나서, 반만년[半萬年]에 이르는 장구[長久]하고 유구[悠久]한 세월동안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또는 세속[世俗]에서 전[傳]하는 구전[口傳]으로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 조선사[朝鮮史] 일 만년[一萬年] 역사[歷史]의 근간[根幹]을 이루어 왔다.
山海經云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愼氏之國。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이르기를, 대황지중[大荒之中]에 산[山]이 있는데, 불함[不咸]이라고 하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고 했고,
後漢書云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挹婁接。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이르기를,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麗]의 개마대산[蓋馬大山] 동[東]쪽에 있으며, 동[東]으로 대해[大海]에 닿고, 북[北]으로는 읍루[挹婁]와 접경[接境]하고 있다고 하였다.
魏書ㆍ勿吉傳云 國有徒太山,魏言太白,有虎豹ㆍ羆狼不害人。人不得上山溲汚,行逕山者皆以物盛去。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이르기를, 그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호표[虎豹], 곰 이리[羆狼] 등이 있는데,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山]에 올라 용변을 보지 않으며, 산[山]에 다니는 자[者]들은 모두 물건을 가득 채워 다닌다. 고 하였고,
北史ㆍ勿吉傳云 國有徒太山,華言太白。俗甚敬畏之。
북사[北史]에서는, 물길전[勿吉傳]에 이르기를, 그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화언[華言]으로 태백[太白]이라고 부른다. 세속[世俗]에서는 이 산[山]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경외심[敬畏心]을 갖는다고 하였다.
唐書ㆍ黑水靺鞨傳云 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亦曰徒太山,與高麗接。粟末之東曰白山部。
당서[唐書]의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에 이르기를, 속말부[粟末部]는 그 남[南]쪽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있는데, 그들은 그 산[山]을 도태산[徒太山] 이라고 한다.
고려[高麗]와 접경[接境]을 이루고 있으며, 속말부[粟末部]의 동[東]쪽은 백산부[白山部]라고 한다. 고 하였고,
括地志云 靺鞨,古肅愼也。其南有白山,鳥獸ㆍ草木皆白。
괄지지[括地志]에서는, 이르기를, 말갈[靺鞨]은 옛 숙신[肅愼]이다. 그 남[南]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이 모두 희[白]다. 고 하였다.
一統志云 長白山在故會寧府南六十里,橫亘千里,高二百里。其顚有潭周八十里,南流爲鴨綠江,北流爲混同江,東流爲阿也苦河。
일통지[一統志]에서는 이르기를, 장백산[長白山]은 옛 회령부[會寧府]의 남[南]쪽 육십리[六十里]에 있다. [주[註], 여기서 말하는 옛 회령부[故會寧府]는, 금[金]의 회령부[會寧府]을 말하는 것이다.]
가로[橫]로 천리[千里]에 걸쳐 있으며, 높이가 이백리[二百里]이다. 그 산[山]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두루 주위가 팔십리[八十里]가 된다.
남[南]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北]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이 되며, 동[東]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고 하였다.
盛京志云 長白山卽歌爾民商堅阿鄰山。【歌爾民,長也。商堅,白也】
성경지[盛京志]에서는 이르기를, 장백산[長白山]은 즉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 산[山]이다. 가이민[歌爾民]은 크다는 뜻이고, 상견[商堅]은 희[白]다는 뜻이다. 고 하였다.
輿地勝覽云 白頭山在會寧府西三百里。 直甲山府北三百三十里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이르기를, 백두산[白頭山]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西]쪽으로 삼백리[三百里]에 있다.
갑산부[甲山府]에서 북[北]쪽으로, 삼백[三百] 삼십리[三十里]에 있다. 고 하였다.
조선[朝鮮]의 후기[後期]를 살았던, 대유[大儒]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백산보[白山譜]에서,
白山者,東北諸山之祖也。
백산[白山]은, 동북[東北] 제산[諸山]의 조종[祖宗]이다. 라고 하였다. [중략]
이 백두산[白頭山]은 지금 한반도[韓半島]의 북[北]쪽에 있다. 백두산[白頭山]인 불함산[不咸山]에 대한 고금[古今]의 역사[歷史] 기록[記錄]들을 살펴보면, 반도[半島]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역사[歷史]의 설명과는 전혀 부합[符合]되지 않으며, 일치[一致]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불함[不咸]이 대황지중[大荒之中]의 유산[有山]이라는 사서[史書]의 기록[記錄]들은 그 기록[記錄]들이 무색[無色] 하기만 하다.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도 없으며, 산천[山川]과 지리[地理], 산세[山勢]와 자연환경[自然環境], 이곳에서 수[數] 천[千], 수[數] 만년[萬年]을 살아온 각 종족[種族]들의 풍속[風俗]과 민속[民俗], 그리고 역사[歷史]의 기록들을 뒤로하고, 장구[長久]한 세월동안 이어 내려온 구전[口傳]의 역사[歷史]와 그에 상응[相應]하여, 그러한 것들을 증거[證據]하고 증명[證明]하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아예 존재[存在] 하지도 않는다.
당시[當時]를 살며, 백두[白頭]에 올라 백두[白頭]의 산천[山川]을 둘러보고 기록[記錄]을 남긴 우리의 조상[祖上]인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한결같이 백두산[白頭山]은 사계절[四季節]내내 빙설[氷雪]이 쌓여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부실정도로 희며, 백자[白瓷]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백두[白頭]의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소위 중국[中國]의 사서[史書]들과 우리의 역사[歷史] 기록[記錄]인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들은, 백두[白頭]는 그 높이가 200리[二百里]에서 300리[三百里]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남긴 각종 문헌[文獻]에서도 이러한 기록[記錄]들은 맞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구상[地球上]에서 그 높이가 200리[二百里]에서 300리[三百里]에 이르는 산[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백두[白頭]에 대한 역사[歷史] 기록[記錄]의 이면[裏面]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두산[白頭山]에는 수[數] 백리[百里]의 평원[平原]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대택[大澤]이라고 불리는 산중[山中]의 호수[湖水]가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백두[白頭]의 천지[天池]를 제외하고, 그 산[山]의 허리에는 두루 주위가 40리[四十里]에 이르는 신분[神湓]이라는 대택[大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으로 전[傳]하는 백두[白頭]에 대한 몇 가지의 사실[史實]만을 보더라도,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불함산[不咸山]인 백산[白山]이 아니다.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은, 조선사[朝鮮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産物]이며, 조선사[朝鮮史]를 폄하[貶下]하고 축소[縮小]하여,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려는 그 음흉[陰凶]하고 간악[奸惡]한 음모[陰謀]에 의하여 만들어진 허구[虛構]의 산[山]이라는 것이 백일[白日]하에 명백[明白]하게 들어난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살펴보면, 백두[白頭]는 고조선[古朝鮮]의 발상지[發祥地]이며 북[北]쪽으로는 부여[夫餘]가 있었고, 고구려[高句麗]는 백두[白頭[를 중심[中心]으로 동서[東西] 2만리[二萬里]를 아울렀으며, 금[金]과 청[淸]나라도 여기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두산[白頭山]의 서남[西南]쪽으로는,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가 펼쳐져 있었으며, 연경[燕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것들을 기준[基準]으로 하여, 추정[推定]과 가설[假說]로 위치[位置]를 비정[比定]하고, 우리의 역사[歷史]와 고구려[高句麗]의 강대[强大]하고 위대[偉大]함을 장황[張皇]하게 설파[說破]하고 있다.
그러나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것들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정면[正面]으로 위배[違背]되고 있으며, 치밀[緻密]하게 조작[造作]된 역사[歷史] 왜곡[歪曲]의 거짓 지도[地圖]이며, 허구[虛構]의 날조된 위작[僞作]의 지도[地圖]라는 것이 이미 만천하[滿天下]에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고지도[古地圖]라고 하는 것들이 역사[歷史]의 지도[地圖]라고 한다면, 역사서[歷史書]의 내용과 고지도[古地圖]가 부합[符合]되고 일치[一致] 되어야 본래의 역사[歷史] 지도[地圖]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지도[古地圖]를 근거[根據]로 하여 우리 역사[歷史]의 본[本]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며, 애초부터 잘못 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치욕[恥辱]의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역사[歷史] 진위[眞僞]의 논쟁[論爭]을 벌이는 것은, 과연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
조선[朝鮮]이 중화[中華]의 본체[本體]가 되어온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을 알지 못하고,
이미 오래전에 명[明]나라를 마지막으로 사라져버린 중화[中華]를 들먹이며, 중국[中國]을 외치고,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가 이루어 놓은 문화[文化]와 문물[文物]들을, 중국[中國]의 것이라 하며,
거짓과 왜곡[歪曲]과 오욕[汚辱]과 치욕[恥辱]의 식민잔재[植民殘在]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을 되뇌이는 자들,
그러한 자들이 말하는 학문[學文]과 지성[知性], 역사[歷史]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
천지[天地]의 대도[大道]와 천하[天下]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한번 일어나고, 한번 망[亡]하는 사이에,
세상[世上]의 거짓과 악행[惡行] 간악[奸惡]하고 사이비[似而非]한 것들을 비로 쓸 듯 모두 쓸어버리고,
천도[天道]의 영원[永遠]한 대[大] 법칙[法則]으로, 천하[天下]의 대도[大道]를 구현[具現] 한다는 서릿발 같은 역사[歷史]의 엄정[嚴正]하고 준엄[峻嚴]한 진리[眞理]를,
모름지기 역사[歷史]와 학문[學文]을 하는 자[者]들이 이를 모르고, 또한 거짓으로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있다면, 그 외에, 그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
역사[歷史]에서 말하는 백두산[白頭山]에는, 아득히 저 멀고 먼 옛 신시[神市]와 고조선[古朝鮮]의 비사[秘史]에 관한 간략[簡略]하고 희미[稀微]한 기록[記錄]들을 증거[證據]하고 증명[證明]하는 신비[神秘]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고스란히 보존[保存] 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근세[近世]에 청[淸]나라와 조선[朝鮮]이 백두산[白頭山]에 올라 세운 정계비[定界碑]가, 당시[當時]의 모습 그대로 초라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또한 고려[高麗]의 윤관[尹瓘] 장군이 세운 것으로 역사[歷史]에서 거론되는 입석[立石]도, 백두[白頭]에서 선춘령[先春嶺]까지 동북[東北]으로 비스듬히 이어지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기록[記錄]들을 살펴보면, 세부적[細部的]인 기록[記錄]들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지 않고,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설명을 각기 다르게 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큰 틀에서 백두산[白頭山] 전체의 모습을 보는데 있어서는, 모든 기록[記錄]들이 일치[一致]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기록[記錄]들은 이와 같이, 같은 산[山]을 말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서로 다르게 설명[說明]을 하고 있을까 ?
그것은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기록[記錄]들은 하나의 높은 산[山]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산[白頭山]은 그 높이가 200리[二百里]에서 300리[三百里]에 이른다고 사서[史書]들은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은, 가장 높은 주봉[主峰]을 중심[中心]으로, 3개[三個]의 정봉[頂峰]이 각각 200여리[二百餘里]에 걸쳐 삼각[三角]을 이루면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백두산[白頭山]의 높이가 200리[二百里]에서 300리[三百里]에 이른다고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광대[廣大]하고 웅장[雄壯]한 산록[山麓]에, 수[數] 백리[百里]의 광활[廣闊]한 평원[平原]이 펼쳐져 있으며, 수 많은 산중[山中]의 호수[湖水]인 대택[大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이 빽빽이 들어서 자라는 울창한 수목[樹木]들이 수[水] 십리[十里]의 산[山] 기슭을 덮으며 곳곳을 수놓고 있다.
또한 이 높고 크며 광활[廣闊]하고 장엄[莊嚴]한 산록[山麓]의 곳곳에는, 수[數] 만년[萬年]을 오르내리는 역사[歷史]의 고적[古蹟]들이 원형[原形]그대로 보존[保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은 곧 동북[東北]의 곤륜산[崑崙山]이다. [白頭山卽東北之崑崙也.] 라고 하였다.
그만큼 산[山]이 높고 크며, 웅장[雄壯]하고 장엄[莊嚴]하기 때문에 백두[白頭]를 곤륜[崑崙]에 버금가는 산[山]이라고 지칭[指稱] 했을 것이다.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을 동북[東北]의 곤륜산[崑崙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불함산[不咸山]과 비교 한다면, 불함[不咸] 백두[白頭]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작은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백두산기[白頭山記]
凡山坡迤高而上平者. 北人謂之德. [중략]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는데 그 위가 평평[平平]한 것을 두고 북[北]쪽 사람들은 ‘덕[德]이라고 부른다. [중략]
백두[白頭]의 능선[稜線]들은, 해발[海拔], 3000천[三千]에서 4000[四千] 미터에 이른다. 이 능선[稜線]들이 평지[平地]처럼 펼쳐져 있는 곳들이 많은데, 이것이 바로 백두[白頭]의 기록[記錄]에서 말하고 있는 덕[德]이라고 하는 것이다.
折而西而南過豊坡. 杉被其阜. 至紅湍水淺石齒. 灘聲甚聒. 是爲土門之上流. 自茂山邑治至山頂. 二百九十九里十八步. [중략]
서[西]쪽으로 꺾어 다시 남[南]쪽으로 가면 풍파[豐坡]를 지나는데 삼[杉]나무가 언덕을 뒤덮었다.
홍단수[紅湍水]에 이르면 수심[水深]이 얕아지고 돌은 깎이어 물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이곳이 바로 토문강[土門江] 상류다. 무산읍[茂山邑] 치소[治所]에서 백두산[白頭山] 정상[頂上]에 이르기까지는 299리[二百九十九里] 하고도 열여덟 걸음[十八步]이 되는 거리다. [중략]
鴨綠水. 漢書曰馬訾. 盛京通志曰益州江. 或呼靉江. 我肅宗壬辰. 淸遣烏喇摠管穆克登徃觀白頭山. 由六道溝出九道溝. 入厚州獐項路. [중략]
압록수[鴨綠水]를 가리켜 한서[漢書]는 마자(馬訾)라 했고, 성경통지[盛京通志]는 익주강[益州江] 혹은 애강[靉江]이라고 했다.
우리 숙종[肅宗] 임금께서 재위하시던 임진년[壬辰년]에 청[淸]나라가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백두산[白頭山]에 파견했다.
육도구[六道溝]에서 길을 떠나 구도구[九道溝]로 나와 후주[厚州] 장항[獐項]의 길로 들어왔다. [중략]
백두[白頭]의 수목[樹木]들은 예나 지금이나 곧게 자라고, 하늘을 뒤덮듯이 우거져 백두[白頭]의 산록[山麓]을 수놓고 있다.
백두[白頭]의 평원[平原]을 노니는 옛 군마[軍馬]의 후예[後裔]들, 이 군마[軍馬]들의 선조[先祖]는, 멀리는 고구려[高句麗], 가까이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북관[北關]의 군마[軍馬]들이었을 것이다.
杉檜柏樺之木. 參天而密. 大幾五六抱. 熊豕鹿獐豹貂貛鼬䶅鼪鼯之屬. 出沒其間. 稍前登長坂. 愛順曰此韓德立支當也. 支當北俗冰崖之稱. [중략]
크기가 대여섯 아름쯤 되는 삼나무, 노송나무, 잣나무, 자작나무들이 뒤섞여서 하늘을 찌를 듯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곰, 멧돼지, 사슴, 노루, 담비, 이리, 족제비, 날다람쥐 등속이 그 사이로 출몰했다. 좀 더 나아가 긴 언덕에 올랐다. 애순[愛順]이 여기가 한덕립지당[韓德立支當]입니다. 하고 말했다.
지당[支當]은 북[北]쪽 지방 속어[俗語]로 얼음절벽〔冰崖〕을 일컫는 말이다. [중략]
백두[白頭]의 기록[記錄]에서 말하고 있는 한덕립지당[韓德立支當], 백두[白頭] 백산[白山]에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태고[太古]의 빙하[氷河]와 빙설[氷雪]이 산봉[山峰]을 하얗게 뒤덮고 있다.
鹿夏聚而避蝱. 德立守其口而得鹿故名. 上坂行可二十里. 山始蒼白. 東望一峯. 嵂兀千霄. [중략]
사슴의 무리가 한가롭게 모여 있다 등에를 피해 달아나면 덕립[德立]이 그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사슴을 잡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판[上坂]에 올라 20리를 가니 산[山]이 비로소 창백[蒼白]색으로 보였다. 동[東]쪽으로 바라보니 봉우리 하나가 가파르게 우뚝 솟아 하늘에 닿을 듯했다. [중략]
高麗侍中尹瓘有定界碑於先春嶺. 而分界江繞其下. 此爲我境無疑. 苟能援而爭之. 可以復高麗之舊. 而因循縮朒. 唑失地七百里. 祖宗發祥之地. 及八池之勝. 並爲胡地. 惜哉. [중략]
고려[高麗]의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선춘령[先春嶺]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으나, 지금 분계[分界]가 되는 강[江]이 그 아래쪽에 있으니 이곳이 우리 영토[領土]임을 의심할 바 없다.
만약 있는 힘껏 목극등[穆克登]과 다투었다면 고려[高麗]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기에, 앉아서 700리[七百里]의 땅을 잃고 조종[祖宗]의 발상지지[發祥之地]와 팔지[八池]의 승경[勝景]이 모두 호지[胡地]가 되어 버렸다. 참으로 애석[惜哉]한 일이다. [중략]
時淸人將修一統志. 克登所以來也. 然余見淸一統志. 朝鮮北界鴻濛不名. 豈克登亦未能詳歟. 烏喇在白頭北西百七十里. [중략]
목극등[穆克登]은 당시[當時], 청인[淸人]들이 일통지[一統志]를 고치고 보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내가 청일통지[淸一統志]를 찾아보니 조선[朝鮮] 북[北]쪽 경계[境界]는 애매해서 정확하지 않다고 씌어 있다.
아마 목극등[穆克登]도 역시 상세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라[烏喇]는 백두산[白頭山]에서 북[北]쪽으로 470리[西百七十里] 지점에 있다. [중략]
海闌者. 金史所稱孩懶也. 石顯者. 孩懶水烏林荅部人. 金昭祖死於逼刺紀村. 歸至孩懶水. 石顯與完顔部窩忽窩要諸路. 攻而脫之. 孩懶水亦土門之一派也. [중략]
해란[海闌]은 금사[金史]에서, 해라[孩懶]라고 불렀다. 석현[石顯]은 해라수[孩懶水]의 오림탑부[烏林荅部] 사람이다.
금[金]나라 소조[昭祖]가 핍자기[逼刺紀]에서 죽어 돌아가는데, 상여[喪輿]가 해라수[孩懶水]에 이르렀을 때, 석현[石顯]은 완안부[完顔部]의 와홀와[窩忽窩]와 함께 길을 막고 공격[攻擊]하여 탈취한 일이 있었다.
해라수[孩懶水] 역시 토문강[土門江] 일파[一派]의 지류[支流]다. [중략]
三池. 過虗項嶺行五里而至. 自三池向白頭泉二十三里九十步. 自泉至臙脂峯二十七里. 自峯至穆克登碑十八里二百步. 自碑至大澤八里一百十步. [중략]
삼지[三池]는 허항령[虛項嶺]을 지나 5리를 가면 닿는다. 삼지[三池]에서 백두천[白頭泉]까지는 23리 하고도 90걸음이고, 백두천[白頭泉]에서 연지봉[臙脂峰]까지는 27리다.
연지봉[臙脂峯]에서 목극등[穆克登]이 세워 놓은 정계비[定界碑]까지는, 18리[十八里] 하고도 200보[二百步]에 이른다.
정계비[定界碑]에서 대택[大澤] 까지는 8리[八里] 하고도 110보[一百十步]가 된다. [중략]
삼지[三池]에서 저 멀리 바라보이는 산[山] 아래의 평지[平地] 같은 언덕이 허항령[虛項嶺]이다. 삼지[三池]는 세 개의 호수[湖水]로 이루어져 있다.
白頭在西北. 小白吊北. 枕峯虗項在西南. 寶多吊南. 洵佳境也. 談者以爲鏡浦永郞之勝. 無以過之. [중략]
백두산[白頭山]은 서북[西北]쪽에 있고, 소백산[小白山]은 동북[東北]쪽에 있고, 침봉[枕峯]과 허항령[虛項嶺]은 서남[西南]쪽에 있고, 보다산[寶多山]은 동남[東南]쪽에 있어서, 참으로 경치가 아름답다.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경포[鏡浦]의 영랑호[永郞湖]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삼지[[三池]보다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중략]
臙脂峯. 形尖而色紅故名. 杜棣之叢被之而紅. 非土石之色也. [중략]
연지봉[臙脂峯]은 생김새가 뾰족하고 빛깔이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산[山]이 붉은 까닭은 두체[杜棣]가 온 산[山]을 뒤덮어서 그런 것이지 흙과 바위의 색깔이 붉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중략]
백두[白頭]의 가장 높은 주봉[主峯] 기슭의 모습이다. 연지봉[臙脂峯]과 연지봉[蓮池峯]은 다른 봉우리다.
연지봉[蓮池峯]은, 백두[白頭]에서 가장 높은 주봉[主峯]을 말하는 것이고, 연지봉[臙脂峯]은, 이 주봉[主峯] 아래의 산[山] 기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白頭大角之峰. 落于平地. 起大小鵲峯. 俗稱可察峯 一枝南轉爲綠雲山. 一枝東轉爲南甑山. 相對成門. 又轉爲三峰. 綠雲印爲長坡. 以西爲天坪. [중략]
백두산[白頭山] 대각봉[大角峰]의 산세가 뚝 떨어져 평지로 이어져 소작봉[小鵲峰] 속칭 가찰봉[可察峯]이 되었다.
이 산[山]의 지맥 하나는 동[東]쪽으로 돌아 남증산[南甑山]되고,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마치 문(門)처럼 보인다.
또 다시 돌아서 삼봉[三峰]이 된다. 녹운산[綠雲山] 이동[東]은 장파[長坡], 이서[西]는 천평[天坪]이다. [중략]
天坪接白頭山. 地勢夷曠. 西至于小白山. 南至于寶多山. 東至于長坡之南甑山綠雲之東. 山北則胡地. 自虗項嶺至赤巖可百里. 自分水嶺至綠雲洞亦可百里. 以開方計之. 可設方十里者百. [중략]
천평[天坪]은 백두산[白頭山]과 접하고 있다.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아득하다. 서[西]쪽으로는 소백산[小白山], 남[南]쪽으로는 보다산[寶多山], 동[東]쪽으로는 장파[長坡]의 남증산[南甑山]과 녹운산[綠雲山] 동[東]쪽에까지 이른다.
산[山] 북[北]쪽은 오랑캐 땅이다. 허항령[虗項嶺]부터 적암[赤巖]까지는 가회 100리가 되고, 분수령[分水嶺]에서 녹운동[綠雲洞]까지도 100리가 된다.
그 면적을 계산해 보면, 사방[四方] 10리[十里] 되는 구역을, 100개[百個] 놓을 수 있을 정도다. [중략]
鴨綠西胡人徃寧古後春則必由白頭之南. 路天坪而出海闌獨梁古江南等地. [중략]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 사는 오랑캐들이 영고[寧古], 후춘[後春] 지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백두산[白頭山] 남[南]쪽을 거쳐야만 한다.
천평[天坪] 길로 들어가 해란[海闌], 독량[獨梁], 고강남[古江南] 등지로 나오게 된다. [중략]
大澤稱神湓. 由泡石洞行十里. 過穆克登定界石堆直向高峰中麓. 愈上愈峻. 及至澤淸漪平滿潾潾. 綠色如蕉葉. 窈窕姸媚. 四面環而繞者十二峯. 若城于澤. [중략]
대택[大澤]은 신분[神湓]이라고도 불린다. 포석동[泡石洞]에서 10리를 가서 목극등[穆克登]이 정계비[定界碑]를 세운 언덕을 지나면 곧장 높은 봉우리의 가운데 기슭으로 이어진다.
산[山]은 오를수록 더욱 험해진다. 대택[大澤]에 이르면 맑고 잔잔한 물결이 반짝거리는데 마치 파초[芭蕉] 잎처럼 푸르러 그윽하고도 아름답다.
대택[大澤]을 열두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성[城]을 쌓아올린 것 같다. [중략]
백두[白頭] 대택[大澤], 신분[神湓]의 모습이다. 아름답기 그지없다. 백두[白頭]에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이러한 대택[大澤]의 신분[神湓]이 태초[太初]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狀類仙人戴盤者. 又類大鵬擧嘴者. 有拄而繁者. 有聳而拔者. [중략]
전체적인 모양은 선인[仙人]이 소반[小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기고 하고, 큰 대붕[大鵬]이 부리를 쳐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주봉[主峰]이 되는 것과 매여 있는 것, 그리고 높이 솟아 있는 것, 뽑혀 나와 있는 듯한 모습이다. [중략]
백두[白頭]의 주봉[主峯]아래, 위 사진[寫眞]의 맞은편 대택[大澤], 신분[神湓]의 모습이다.
이 신분[神湓]은 기록[記錄]대로 주위가 40리[四十里]에 이른다. 여기서 가까운 거리에 신시[神市]의 유지[遺址]가 있다.
裏皆剷削壁. 揷丹黃粉碧. 爛然如丈木. 上濶而下微殺. 辰巳方橫出一枝. 斗入揭柄. 而三峯聯綿皆黃石也. [중략]
안쪽으로는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絶壁]이고, 붉고 누르고 푸른 나무들이 그 벽[碧] 사이에서 꽂혀 자라나는데,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마치 장식을 한 것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위쪽은 넓고 아래쪽은 약간 좁다. 진사[辰巳] 방향에는 나뭇가지 하나가 가로질러 나와 있어 마치 북두칠성 모양 같다. 이를 둘러싼 세 봉우리는 이어져 있고, 암석[巖石]은 누른빛을 띠고 있다. [중략]
池溢而下. 爲混同之源. 飛瀑注下. 如從霄漢壁下有巖如广. 可容百人. [중략]
못은 물이 아래로 넘쳐흘러 혼동강[混同江]의 수원이 된다. 폭포가 아래로 흐르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다. 벽[壁] 아래에 있는 집처럼 생긴 바위는 100[百]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 [중략]
山之東西北皆天坪. 惟三水甲山山勢蟠鬱. 而江界以西遼瀋之境. 羣山迷茫. [중략]
산[山]의 동[東], 서[西], 북[北]쪽은 모두 천평[天坪]이다. 오직 삼수[三水]와 갑산[甲山]만이 산세[山勢]가 얼기설기 서려 있고, 강계[江界] 이서[以西]는 요심[遼瀋]과의 경계[境界] 지역인데 군산[羣山]들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중략]
西峯乃山之最高處. 俗稱瓶師峯. 其絶頂曰大角峯. 西峯外窪然之谷. 泉脈微細. 如開小鏡. 卽鴨綠之源. 而愛順所稱報恩水者也.
서[西]쪽에 있는 정봉[頂峰]은 백두산[白頭山]에서 가장 높다. 속칭[俗稱] 병사봉(甁師峯)이라고 한다, 그 정상[頂上]을 대각봉[大角峯]이라고 부른다.
서[西]쪽 봉우리 바깥쪽으로는 웅덩이처럼 생긴 골짜기가 있다. 샘물의 수맥이 가늘게 이어지다가 거울처럼 맑게 드러나는 그곳이 바로 압록강[鴨綠江]의 수원[水源]이다.
이것이 애순[愛順]이 말했던 보은수[報恩水]라는 곳이다. [중략]
이 연지봉[蓮池峯]은, 후[後]에 갑산부[甲山府]으로 귀양 갔다가 백두산[白頭山]을 유람[遊覽]하고 백두산기[遊白頭山記]를 지은, 조선[朝鮮]의 서명응[徐命膺] 일행에 의하여 대각봉[大角峯]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된다.
그러나 현지[現地]의 토민[土民]들은, 연지봉[蓮池峯]이라고 불렀다.
長白山與白頭並稱長白. 然實白頭三圓峯之枝也. 橫亘於明吉鏡茂四郡之間. 西南行. 由上端坪通于白頭. 自白頭至三池淵八十七里. 自淵至上端坪九十里. 自坪至長白山十里. 坪廣輪各四十里. 地沃可居. 老土部落所嘗據也. [중략]
장백산[長白山]은 백두산[白頭山]과 함께 장백[長白]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실은 백두산[白頭山]에 있는 세 개의 둥근 봉우리의 지맥[支脈]으로, 넓고 길게 가로놓여 명[明], 길[吉], 경[鏡], 무산[茂山] 등 네 개의 군[郡]에 걸쳐 있다.
서남[西南]쪽으로 뻗어서 상단평[上端坪]을 거쳐 백두산[白頭山]에 통한다.
백두산[白頭山]에서 삼지연[三池淵]까지는 87리, 삼지연[三池淵]에서 상단평[上端坪]까지는 90리, 상단평[上端坪]에서 장백산[長白山]까지는 10리의 거리다.
상단평[上端坪]은 넓이가 40리로, 땅이 기름져 사람들이 살 수 있다. 노토[老土] 마을이 그곳에 있다. [중략]
백두[白頭]의 동남면[東南面]이다. 저 멀리 백두[白頭] 3개의 주봉[主峯] 가운데 동남[東南]쪽에 있는 백자[白瓷]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둥근 봉우리가 보인다.
이곳이 수[數] 백리[百里]의 대[大] 평원[平原]이, 동북[東北]으로 펼쳐진 곳이다.
허항령[虛項嶺]도 이 평원[平原]과 이어져 있다.
虗項嶺. 在枕峯寶多之間. 雖名嶺阨. 實平地. 虗項之稱以此. 虗項以北並大野. 無重關複嶺之阻. [중략]
허항령[虗項嶺]은 침봉[枕峯]과 보다산[寶多山] 중간에 있다. 비록 령[嶺]라는 위태로운 이름을 가졌지만 실[實]은 모두 평지[平地]로 된 땅이니, 허항[虛項]이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붙은 것이다.
허항령[虛項] 북[北]쪽은 모두 대야[大野]넓은 들판으로, 가로막는 험한 관문[關門]이나 겹겹의 산봉우리도 없다. [중략]
허항령[虗項嶺]은 그 입구[入口]에 위치하여 남북[南北]을 잇는 중요한 인후[咽喉] 된다. 허항령[虗項嶺]은 무산[茂山]과 갑산[甲山]의 경계[境界]에 있다.
땅에 모래가 많아 농사를 짓기에 알맞지 않고, 바람이 차고 기후[氣候]가 항상 쌀쌀하다.
허항령[虗項嶺]에서 보을하진[甫乙下鎭]까지는 거의 300리[三百里]가 되고, 노토부락[老土部落]이 그곳에 있다. [중략]
由白頭以南則必由虗項散入於明川端川吉州之地. 出沒爲北關患者. 據形便故也. 乃設堡數十於賊路以禦之. [중략]
백두산[白頭山] 이남[以南]은 반드시 허항령[虗項嶺]에서, 명천[明川], 단천[端川], 길주[吉州] 지역으로 나뉘어 편입된다.
오랑캐들이 출몰해 북관[北關]에 우환[憂患]을 끼치는데, 이는 지형[地形]의 유리함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적[賊]이 다니는 길목에 보[堡]를 수[數] 십여개[十餘個]를 설치하고 방어[防禦]한다. [중략]
백두[白頭]의 동남[東南]쪽에서, 동북[東北]으로 비스듬히, 윤관[尹瓘] 장군이 세운 입석[立石]을 따라, 기록[記錄]대로, 당시[當時] 조선[朝鮮]에서 설치[設置]한 진보[鎭堡]가 많이 남아 있다.
비록 허물어지기는 했으나 지금도 그때 설치[設置]한 진[鎭]과 보[堡]들이 거의 남아 있어서, 역사[歷史] 기록[記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백두산기문[白頭山記文]
유몽인[柳夢寅]
北道多雄岳鉅嶺. 摩空蘇洋. 彌豆數千里. 達于南海而窮者. 皆自白頭山來. 余甞遊三水. 郡小農堡.
조선[朝鮮]의 북도[北道]에는 크고 웅장[雄壯]한 산[山]과 거령[鉅嶺]이 많다. 허공에 솟고 바다에 잇닿아, 그 머리가 수[數] 천리[千里]를 뻗어 나가 남[南]쪽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 것은 모두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일찍이 삼수군[三水郡]의 소농보[小農堡]를 유람[遊覽]한 적이 있다.
登長慶而望之則白頭之. 山在湖中. 去我界纔數日程. 渾体皜皚如雪疂永斷. 魁然. 傑特. 頫聣衆山諸嶙峋□地. 環擁于左右前後者. 如嬰兒侍尊丈. 莫敢興肩.
장경봉[長慶峰]에 올라 바라보니 백두산[白頭山]은 호수[湖水] 가운데 있고, 우리 쪽 경계[境界]에서 겨우 며칠 일정 거리에 있다.
산[山]의 본체[本體]가 대단히 희어 눈을 쌓은 듯 얼음을 잘라 놓은 듯하고, 우뚝 솟아서 여러 산[山]을 굽어보았다.
높고 낮은 여러 산[山]들이 땅에 자리를 잡고 전후[前後] 좌우[左右]를 겹겹이 에워싸고 뛰어나서 옹립한 모습이, 마치 아이가 어른을 모시고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백두[白頭]의 주봉[主峯]들은 사계절[四季節]내내, 백설[白雪]이 쌓여 있기 때문에, 백두[白頭] 기슭에서는 어느 곳에서 보아도 눈이 부실정도로 희게 보인다.
土胡取拾. 剖殼盛甕. 滋塩佐朝夕食. 胡寇中國. 過是山者. 畏山神. 例以雲錦全匹. 掛山樹. 祈禳而去. 胡不敢取. 任其雨雪自朽.
그 지방 호인[胡人]들은 새를 잡아 껍질을 벗기고 단지에 담아 소금으로 절여서 아침저녁 반찬으로 내어 입맛을 돋운다.
호인[胡人]들이 중국[中國]을 침입했을 때, 이 산[山]을 지나는 자가 산신[山神]을 두려워하여 화려한 비단을 나무에 걸어 놓고 기도하고 나서 갔지만, 오랑캐는 감히 그 비단을 가지지 못했다. 비와 눈에 그대로 놓아두어 절로 삭았다.
백두[白頭]의 산[山] 허리에는, 대택[大澤]이 수 없이 자리 잡고 있다. 물은 맑아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으며, 눈과 얼음이 녹아 흘러내릴 때는 그 소리가 우레[[雷聲]와 같고, 호수[湖水]의 물빛이 변한다.
入其山. 山之腰. 有大池兩涘之間. 一望極目. 當天候向暖. 天下長翮之鳥. 如鶴鵠鴻鴈鷖鴇. 雲飛水宿之屬. 翔自衡陽. 歸向委羽. 咸來萃于玆池. 彭砰咜聒. 其翰蔽天. 其音如雷. 至初秋. 冷風乍起. 皆皷羽而南. 自此曠朗爲空池.
그 산[山]에 들어가니 산[山]허리의 양쪽에 대지[大池]가 있어 그 물가에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천하[天下]에서 큰 깃을 가진 새, 학, 고니, 기러기, 따오기, 너새들이 구름을 타고 날며 물가에서 잠을 자고, 형양[衡陽]에서 날아와서 위우[委羽]로 날아간다.
모두 이 대지[大池]에 모여 물결을 차고 시끄럽게 울면서 날개로 하늘을 덮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그러다가 초가을에 이르러 냉풍[冷風]이 일어나면, 모두 깃을 펼치고 남[南]쪽으로 날아간다. 이때부터 넓은 대지[大池]는 텅 비어 버린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순일편[旬一編]
백두산[白頭山]
황토동[黃土洞]과 성토동[星兎洞]을 합하여 드넓게 개척되었고, 평원[平原] 가운데 칠성봉[七星峯]이 우뚝 솟아 있으며, 그 아래는 평지[平地]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모두 삼초[蔘貂]의 땅이다.
병사봉[兵使峯] 앞에 철비[鐵碑]가 있고, 서[西]쪽으로 가면 고개 위에도 철비[鐵碑]가 있는데, 옛날 경계[境界]를 나눌 때 세운 것이라 한다.
산[山]에 마른 도랑이 있고 도랑 남안[南岸]에, 돌덩이를 첩첩[疊疊]이 쌓은 무더기가 열 걸음 혹은 열두 걸음에 하나씩 있다.
이것이 바로 경계[境界]를 정한 표석[標石]이라고 한다. [중략]
백두산[白頭山]의 광활[廣闊]한 평원[平原], 당시[當時]를 살던 선대[先代]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이 일치[一致]하고 있다.
백두산기[白頭山記]
홍세태[洪世泰]
是日晝晴. 下視四方. 直數千里泱漭平在眼底. 而環雲點綴若屯絮. 西北衆山. 累累然頭角半出. 雲. 與相呑吐. 不知爲何地山也. 然如鏡城之長白東西大山. 隱約猶可指認. 甫多會閼氏小白諸峰. 兒孫列耳. 其外則目力窮不可辨. [중략]
이 날은 맑아서 아래로 사방[四方]을 둘러보니 곧바로 수[數] 천리[千里]가 아득히 평평하게 눈 아래 펼쳐져 있고, 구름이 점점이 이어져 솜으로 만든 언덕 같았다.
서북[西北]쪽에는 여러 산[山]이 겹겹이 있는데 머리만 반쯤 나와서 구름과 서로 삼키고 토해 내니 어느 곳의 산[山]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경성[鏡城]의 장백산[長白山] 같은 곳은 동서[東西]를 가로지르는 대산[大山]이므로 어렴풋하지만 오히려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다회[甫多會], 알씨[閼氏], 소백[小白] 등의 여러 봉우리들은 자식 손자[孫子]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외에는 눈으로는 판별[判別]할 수 없었다. [중략]
백두[白頭]의 령상[嶺上]에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면, 하늘아래 홀로 서 있는 것과 같으며, 굽어 아래로 보이는 뾰족뾰족한 수 많은 봉우리들이 가물가물 아득히 펼쳐져 있어서, 모두 백두[白頭]의 기록[記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백두[白頭]의 봉우리들은, 동천지[洞天誌]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백두산[白頭山]에는 봉우리가 4만[四萬]개나 된다는 말에 실감[實感]이 나고도 남는다.
아득히 멀리는 200여리[二百餘里]가 한눈에 들어오니, 백두[白頭]의 웅장[雄壯]함은 감히 필력[筆力]으로 설명[說明] 하기 어렵다.
목은집[牧隱集]
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
동북면[東北面]으로 가는 한 만호[韓萬戶]를 보내면서 월[月] 자[字]를 얻다.
장백산[長白山]은 궁륭[穹窿]과 같고 長白山穹窿
철령관[鐵嶺關]은 우뚝하여 鐵嶺關峍屼
몇 천리[千里]를 가로 뻗치어서 橫亘幾千里
천험[天險]의 요새를 넘을 수 없는데 天險不可越
해단[奚丹]의 잡종이 조수들과 함께 살면서 奚丹雜種鳥獸居
궁시[弓矢]를 갖고 날뛰며 돌격을 일삼도다. 弓矢翩翾事馳突
대지[大地]를 돌아보며 어찌 크게 탄식[歎息]하지 않을 수 있으랴. 流觀輿地發浩嘆
추초[秋草]속에 윤관[尹瓘]의 비석[碑石]이 묻혔으니 秋草蕭蕭埋尹碣 [중략]
저 멀리 보이는 한 송이 부용[芙蓉]같은 백두[白頭]의 산정[山頂], 천하[天下]의 북방[北方] 중심[中心]에 우뚝 솟아 올라 웅장[雄壯]하고 장엄[莊嚴]하기 이를 데 없다.
사시절[四時節] 빙설[氷雪]을 가득히 않고, 천부[天符]의 역사[歷史]를 간직하고 있으니, 그 어찌 동방[東方] 제산[諸山]의 조종[祖宗]이 아니겠는가 ?
농암집[農巖集]
金鍾城 粹五 挽
김 종성[金鐘城] 수오[粹五] 에 대한 만사[挽詞]
수주[愁州]에서 북[北]으로 대황[大荒]를 굽어보면 愁州北望大荒隈
장백산[長白山] 높이 만년설[萬年雪]이 덮인 곳 長白山高雪不開
우리 임금 대 나누어 부절[符節] 주어 보냈더니 聖主恩分竹符去
변방[邊方] 백성[百姓] 통곡하며 상여를 보내왔네. 邊民哭送柳車迴
농암집[農巖集]
영회[詠懷]
[중략]
그 옛날 숙신[肅愼] 잊혀진 옛 도읍[都邑] 幽都古肅愼
쇠뇌[砮矢] 화살 이곳에서 생산되었구나. 砮矢此焉出 [중략]
아침이라 재필헌[載筆軒]에 임하여 朝臨載筆軒
서[西]쪽으로 장백산[長白山]을 바라보노라. 西望長白山
빙설[氷雪] 층층[層層] 가득히 쌓인 봉우리 層巓皓氷雪
태고[太古]적 아득한 옛날부터 변함이 없다고 言自太古還
여름[夏]에도 겨울[冬]에도 얼음이 얼어 이어지고 冱陰貫冬夏
호관[胡關]의 삭기[朔氣] 가득한 북방의 찬 기운 朔氣彌胡關
이 몸은 경락[京洛]에서 살다 왔으니 我來自京洛 [중략]
목은집[牧隱集]
유감[有感]
백발로 조정 반열에서 괴롭게 시[詩]를 읊노니 白頭朝列苦吟詩
유유한 이 신세가 심하도다 나의 노쇠[老衰]함이여 身世悠悠甚矣衰
장백산[長白山] 앞에는 사막[沙漠]이 아득하고 長白山前沙漠漠
대명전[大明殿] 가에는 잡초가 무성하구나. 大明殿上草離離 [중략]
백두[白頭]의 3개 주봉[主峯] 중에, 동북[東北]쪽에 있는 산봉[山峯]의 전경이다. 백두[白頭]와 백산[白山]이라는 산명[山名]은, 불함산[不咸山]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가집[四佳集]
寄咸吉道副元戎康同年 孝文
함길도 부원융[咸吉道副元戎] 강 동년[康同年] 효문[孝文] 에게 부치다.
[중략]
장백산[長白山]은 찌를 듯이 푸른 하늘에 우뚝 솟아 長白山高揷大靑
산[山] 위에는 유월[六月]에도 백설[白雪]이 겹겹 쌓였으니 山頭六月雪崢嶸
어느 때 휘파람 불며 한번 높이 올라서 何時一嘯登高看
티끌 없이 거울처럼 맑은 사해[四海]를 바라볼 수 있으랴. 四海無塵鏡面淸 [중략]
약천집[藥泉集]
送崔評事 昌大 赴北
북도[北道]로 부임하는 최 평사[崔評事] 창대[昌大] 를 전송하다.
북변[北邊]은 멀리 여진[女眞]의 성[城]과 접하였는데 北邊遙接女眞城
삼십 년 전[三十年前] 안절사[按節使]로 부임하였노라. 三十年前按節行
백산[白山]에는 오월[五月]에도 백설[白雪]이 시름을 자아내고 五月白山愁雪色
사시[四時] 창해[蒼海]의 파도 소리 사나웠노라. 四時蒼海怒濤聲 [중략]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 백두[白頭]의 기록[記錄]을 따라 현지[現地]를 조사하면서,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 진실[眞實]들이 하나하나 들어났으며,
선대[先代]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현지[現地]의 역사[歷史]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산천[山川]과 지리[地理], 현지인[現地人]들이 말하고 있는 역사[歷史]와,
그리고 자연환경[自然環境] 등 역사[歷史]와 관계[關係]된 모든 것들이, 부절[符節]을 합한 듯이 부합[符合]되고 일치[一致]되고 있음을 분명[分明]하고도 명확[明確]하게 확인[確認]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事實]은, 알타이 민속축제[民俗祝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청[淸]나라는 백두[白頭]의 기슭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들의 민속축제[民俗祝祭]에서는, 청[淸]나라 황제[皇帝]들이 머리에 쓰던 모자와 그 모자의 원류[原流]가 되는 아주 비슷한 민속[民俗] 모자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學校]에서, 조선사[朝鮮史]의 환웅천왕[桓雄天王]의 고사[古史]와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그리고 이를 주제[主題]로 글짓기 대회를 열고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천부인[天符印]을 상징하고 나타내는 문양[文樣]을, 심지어 집에까지 그려놓고 있는 토민[土民]들도 있었다.
백두[白頭]의 산정[山頂]에서 사진[寫眞]을 찍으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인[桓人]의 형상[形象]을 그려넣고,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韓國]의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있는 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과 함께 하늘에서 산정[山頂]으로 내려오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그저 할 말을 잃어 버리게 한다.
작금[昨今]의 한국[韓國] 사학계[史學界]는, 과연 사학계[史學界]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
그저 식민잔재[植民殘在]의 충실한 주구[走狗]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海內晦盲否塞. 而文明之運. 獨箤於吾東. 爲萬國之首者.
사해[四海]가 어두워지고 그 기운[氣運]은 비색[否塞]해 졌으나, 문명[文明]의 운수[運數]는 오직 동방[東方]의 우리나라에 모여 만국[萬國]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寔由我太祖大王用華變夷故也.
이는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 때부터 중화[中華]의 문명을 써서 이[夷]들을 변화[變化]시켰기 때문이다.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에 뿌리와 근본[根本]을 두고, 동방[東方]을 소유하여, 천하[天下]를 호령하며, 만국[萬國]을 다스렸던 우리의 역사[歷史],
그 누가 감히 우리의 역사[歷史]를, 농단[弄斷]하며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라고 말하고 있는가 ?
다음 2편[二編]에서 계속 됩니다.
첫댓글 뭐라고 말을 할까!
경악!
백두산의 실체가 드디어 밝혀지고 있습니다.
말로만 듣고, 기록속에서만 보던, 백두산의 실체는 역시 대단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과 풍속들이 우리들의 것과 고전에 기록된 그것과 똑같은 것들이라니......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알타이문명과 조선문화는 결국 하나라는 것이겠죠.
환웅천황과 똑같은 고사. 천부인 문양등을 그곳에서는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 나이 많은 현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전으로 조선의 영토를 밝히기는 했으나, 이렇게 생생한 사진들을 보면서 느끼는 희열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안목을 넓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근래에 댁내 편안 하신지요.
제가 늘 문무 선생님께 감사을 드립니다. , 과분하신 말씀에 송구할 따름 입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나서, 환웅천왕의 고사를 널리 알리는데 주도적 역활을 한 사람은 바로 청나라 사람 이었습니다. 이 분도 물론 자신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 일 것입니다.
요동의 동북 지방에서 일어난 나라들이, 중국 이라고 부르던 나라들을 정토하고 중국의 주인이 된 이면에는, 자신들은 비록 유목민으로 살고 있었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역사의 기상과 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의 제왕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조선 사대부가의 문집속에는, 불함산 유역의 전체가 고조선의 고토이며, 고구려와 발해의 내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의 기록들은 틀림이 없는 사실일 것으로 사료 되는 바 입니다.
그들이 지금도 이러한 역사를 높이 받들고 존숭하며, 그 역사를 잊지 않고 있는것을 볼 때, 비록 생활 방식과 언어가 다르다 해도, 역사의 근본과 뿌리는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사료 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들의 문자와 구전으로 전하는 역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현실은 천하에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항상 노고가 많으신 문무 선생님께, 다시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백두산의 실체를보니
우리민족의 웅엄하고 장대한기상이 살아 움직여지는것같습니다. 어떤문헌에따르면 백두산과 평양의거리는 그리멀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연 평양도 선생님께서 고증한 백두산에서 그리멀지 않은곳에있을까요 ?
대부여님 안녕 하십니까 ?
감사 합니다.
고구려의 평양, 고려, 조선의 서경이며, 서관으로 부르던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이 유명한 평양은, 옛 모습을 많이 잃어 버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산천은 변함없고 강수는 고금을 통하여 흐르니, 수 천년 역사의 흐름을 모두 지울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평양은 방위로 본다면, 백두산 남방이며, 요동의 동남쪽에 있습니다.
고증을 마치는대로 논증을 통하여 소개 할 예정 입니다.
대부여님의 댁내에, 늘 평안과 건강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환국고려 선생님... 그러면 백두산은 현재 어느산인가요...
본문에는 없는거 같아서요..
한희수님 안녕 하십니까 ?
2편 마지막 사진 아래 실려 있습니다. 벨루하산 일대, 카자흐스탄, 몽고, 중국, 러시아 알티이 공화국의 4개국 국경에 걸쳐 있는 가장높은 3개의 주봉 일대가 불함산 입니다.
이 세개의 주봉은, 각기 200여리의 사이를 두고 마주보고 있습니다.
한희수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건강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환국고려님
백두산으로 천산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년설도 있고 천지도 있고...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어보이기도 한데요...
한희수님 안녕 하십니까 ?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역사서들은, 당시의 원본 그대로 전해오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요한 내용의 중간 중간에, 원문을 없애고, 조그만 반도 한국의 지리에 맞추어 역사를 왜곡하여 조작하고 변조하여, 원본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그 것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에 나와 돌아 다니는 고지도라는 것들은, 모두 원본을 모사한 위작일 뿐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에 뜻을 두고 우리 역사의 진실과 사실을 찾아 나서고 있으나. 우리 역사의 본 모습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것은, 왜곡된 역사의 사료들을 가지고, 그 역사의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역사서의 허와 실을 밝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당시를 살며 남긴 역사서와 문집들 속에는, 당시의 역사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생생하게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분명한 기록으로도 오천년을 오르 내리고 있습니다. 이 유구하고 장구한 세월속의 역사를,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도 모두 조작하고 왜곡시키지 못한 내용들이 즐비 합니다.
가장 어려운 길이기는 하나, 이러한 역사의 기록을 따라, 역사서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내용들과, 그 역사서가 가르키고 있는 현지를 찾아서, 역사의 기록과 부합되고 일치되고 있는지를 우선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개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보기 어려운 것 입니다. 말씀 하시는 백두산만 하더라도, 백두산에는 천지외에 신분이라는 대택이 있었고, 삼지가 있었으며, 수 백리에 이르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정계비가 있었으며, 석사자 망천후, 소암석 복호, 즉 움추리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을 한 암석,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백두산의 기록들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들과 일치하는 곳이 백두산 입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사람들은, 추정과 가정, 비정이라는 말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될 금기어와 같습니다.
작금에 이르기까지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으로, 조그만 반도 땅에, 추정과 가정 비정으로 제 멋대로 역사의 지명을 붙이고, 그 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이 줄을 잇고 있는데, 그러한 자들은 학자의 본분과 학자의 양심마저 저버린 파렴치한 자들 일 뿐 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현재에 이르러, 우리의 역사를 찾는 다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역사를 왜곡시키는 일들이 비일 비재 합니다.
지금의 천산은 고구려 평양의 고도가 있던 지역 입니다.
댓글이 길어짐에 이만 줄입니다. 참고가 되시리라 사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