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나들이,
1993년 가을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이상미
너무 화가 나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먼저 퇴근해 버린 다음 날 아침, 내 책상에는 빨간 장미가 한가득 망가진 커피포트에 꽂혀 있었지. 놀라며 함박웃음 짓는 내게 피터는 웃으며 말했지,. '마티아스가 새벽에 양재 꽃시장에 가서 사 왔어. 근데 가시에 찔리면서 잘 못 꽂아서 내가 꽂았지'. 그 말에 쑥스러워하던 키 큰 어린 청년, 마티아스. 샤샤는 부드러운 미소지으며 초콜릿을 내밀었고 상한 마음을 풀어주려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하여 기쁘게 해주었던 나의 친구들.
정자와 민지가 태국인 비사누(Visanu)와 냉(Neng)을 데리고 남대문 시장에 구경 갔던 어느 날, 당황한 얼굴로 비사누와 둘만 돌아왔지. ‘냉은?’ 하며 놀라서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마타아스가 샐쭉하니 화를 냈지, ‘왜? 똑같은 23살인데 내 걱정은 안 하면서 냉을 걱정하냐’고. 그러고 보니 그랬지. 둘 다 한국에 온 지 두어 달, 냉은 어려 보이고 영어도 못 하는 보호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다. 독일인 마티아스는 한동안 이태원에서 미군들과 어울리며 DMZ도 가보고 신나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착각하였다. 그런 내게 마타아스가 쐐기를 박았다. '기다리면 올 거야'. 냉은 지하철의 표지판을 읽고 돌아왔다. 한글을 가르쳐 준 보람이었다.
지금은 저세상으로 가신 주영 감독님과 애니메이터 임석운 강신길 김방희 임민지 박정자 등과 독일에서 온 샤샤 피터 마티아스 우도 파울로(Paulo) 우테와 태국에서 온 비사누 냉과 함께 퇴근 후 레스토랑에서 어울렸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었는지 장난기에 희희낙락(喜喜樂樂)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마시는 중에 진한 눈썹의 검은 뿔테안경 속의 큰 눈을 한 포르투갈계 파울로는 누가 봐도 곱게 자란 모범생. '파울로, 뭘 더 마실래?' 묻는 내게 세 잔째 'one more pineapple juice, Sangmi'라 하던 그.
꽃 같던 그 시절부터 친구들, 언젠가 또다시 볼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C-19로 달라진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2022년 고양작가회의 동인지 '작가연대 016' 에 발표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