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눅20:1-8
권세
(눅 20:1, 개역)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눅 20:2, 개역)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눅 20: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눅 20:4, 개역)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눅 20:5,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눅 20: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눅 20:7, 개역)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눅 20: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복음을 전하게 되면
주변으로부터 벌떼 달려들 듯이
와락 달려들게 되어 있는 것이
현 세상입니다.
더러는 우리는 너의 전하는 말을 믿을수 없다.
더러는 너의 전하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치 않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마 7:6)처럼
입을 다물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와락 달려드는 이유는
평소에 대부분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이질적인 인물로
느껴지는 것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권세 문제’로 취급합니다.
권세 문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위장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데 있어
하늘의 권세를 필요치 않고
그저 같은 인간들끼리 같아지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 내막은
그렇게 간단히 취급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천사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권세가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피조물입니다.
위에서 시작해서 위로
그 마무리가 돌아가는 것이
천사의 역할입니다.
이것은 곧,
‘사람이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가
아니면 행동하고 난 뒤에 생각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천사의 행동에 있어 생각이 먼저입니다만
그 생각이라는 것은
천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행동부터 먼저하고 난 뒤에
주섬주섬 이성적으로
변명거리를 불러 모으게 됩니다.
인간의 행동이란
인간도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자신의 야심이나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먼저 일을 저질러놓고서는
뒷 수습에 나서는 것이
인간들의 행동방식입니다.
즉 “이러이러해서 행동했는데
나로서는 어쩔 수 없으니
그 일로 나의 존재 가치를 까내려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비겁한 변명거리로 일관되는 이유는,
하늘의 권세보다는
옆으로 퍼져 있는 권세 속에서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31-32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권세는
위에 있는 권세인 것에 비해서
사람들의 권세는 땅의 권세에 의존하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주변에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주변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4:4-6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 주변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귀한 것이
성도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이유는
성도가 예뻐서가 아니라
성도 안에 하나님의 귀한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것을 지키는
보관용 서랍같은 존재입니다.
그 귀한 것이
‘하늘의 권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성도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근거가
예수님에게서 이미 발생되었음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그 발생된 것이 근거가 되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안에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이러한 티격태격이 되풀이 되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 인간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옆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권세를 사모합니다. 인간들의 목표로 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정당하기 위해 변명거리로 동원시킬 수 있는 권세를 원합니다.
구약의 특징은
모두 위에서부터 일이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잘 보여집니다.
천사들은 그저 기능적으로
자기 역할을 다 할 뿐입니다.
천사들에게
‘하늘의 권세냐 사람의 권세냐’라는 물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지녔기에
‘사람의 권세’로서
‘하늘의 권세’를 대신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처음 사울이라는 사람이 왕이 될 때는
그토록 겸손하게 나오더니만
나중에서 국가 자체를
자신의 정당함을 지켜주는 권세로
활용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들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다른 권세, 곧 ‘사람의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거론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권세는
본인이 원치 않는 권세입니다.
즉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권세가
아닙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자신의 선지자직을 포기하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은 곧, 세상적인 권세 유입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례요한의 권세는
‘이 세상에서 없는 권세’입니다.
바로 이 권세가
하늘에서 주어진 권세입니다.
이 권세와 같은 권세로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세상의 권세는
국가적인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종교 세뇌를 시키므로서
국가 자체가
신과 교제에 나설 수 있는 집단적인 권력 단체로 작용하게끔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그 현상이
교회가 되고
하늘의 권세로 나타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외롭고
자기 잘남을 증명할 길이 없어 찾는 집단은
모두 악마의 능력 밑에 있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권세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예수님에게는 충분합니다.
세상 권세가 더는 필요없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권세,
달리 말해서 진정한 나라는
세상 권세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의 마당을
예수님께서 마련하셔놓고서는
십자가 영을 통해
우리 성도에게 주입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귀한 것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17강-눅20장 1절-8절(권세)120304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0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0:1-8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했는데 어떤 시비가 들어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사회생활하는중에 복음을 누군가에게 전할 때 듣는 사람이 시비를 걸고 들어온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우가 많이 있을 거예요. 복음을 전했는데 시비를 건다, 그러면 그 전한 복음내용이 기존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식과 위배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기존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 말고 다른 법칙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당신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저쪽에서 하는 말이 당신에게 그런 식으로 살아가라고 누가 이야기하던가, 라는 질문과 반발을 되받는 경험이 있어야 돼요.
이 사람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다들 세상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라는 반발 같은 것, 부딪힘 같은 것을 느끼면서 사시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이 계신분이고 예수님의 영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구태여 전도해서 핍박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보통 우리교회 교인들은 그냥 입을 다물지요. 해봐야 통하지도 않고 통할 리도 없고, 성경에 여기에 해당되는 편리한 말씀이 있잖아요. 돼지한테 진주 던지지 말고 개한테 거룩한 것 던지지 말라고. 그러나 그것이 버릇이 되면 안 되는데요, 문제는 그러한 반발을 오히려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 반발을 받아보면 ‘그래, 그 말이 맞아. 나는 도대체 무슨 권세로, 무슨 힘으로 사는 거야.’라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기회를 갖는 겁니다. 요한 1서 4장 4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와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너희 말을 들을 것이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너희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내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속한 힘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거예요. 본인이 하늘에서 주신 힘으로 묶여 있고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해당이 안되겠지요.
요한 1서 5장 18절에 보면 더 심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고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그 사람을 지켜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것이 담겨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것을 책임지고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지켜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것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놓고,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네 속에 집어넣은 하나님의 것이 예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지켜줄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기분 좋게 들리신다면 오해입니다. 왜 그런가, 우리 자신이라 할찌라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건드리고 그것을 부정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하게 다루십니다. 우리는 아주 겁나는 것을 지금 보관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보물 같은 것을 우리 안에 본의 아니게 지키고 있는 겁니다. 임산부가 술 먹고 담배 피운다든지 이런 행동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안에 귀한 아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전까지는 유행가 부르면서 땡뻘, 하다가 임신하면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을 듣잖아요. 그런 수고와 희생을 하는 것은 다 뱃속에 들어 있는 아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처럼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인하여 직접 하늘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중간매체 역할을 하는 우리가 믿어진다는 겁니다. 믿어지게 되면 우리는 이제 홀몸이 아니고 뭔가 귀한 분과 동행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신약시대 이야기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지기까지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기에 현재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그러한 상황으로 놓이게 하셨느냐, 그 근거 마련하는데 오늘 본문이 동원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나는 위에서 났기에 위엣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땅에서 났기에 기껏 해봐야, 공부를 하고 뭘 해도 땅의 것밖에 생각 못하는 입장에 있다.’ 요한복음 3장이나 8장에 의하면 ‘나는 너하고 격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요한 1서의 이야기가 뭐냐, 노는 동네가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격이 다른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 속에 들어왔다 그 말이지요. 어떻게 해서 격이 다르고 수준이 다른 그분이 우리 속에 들어왔느냐, 그 준비 과정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이 본문의 내용들이 되어져야 그 다음에 우리 속에 해산하는 것처럼 귀한 것들이 우리 속에 들어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울산강의에서 강의초반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행동하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생각하고 행동합니까, 라는 질문을 했어요. 1번, 생각하고 행동한다. 2번, 행동하고 생각한다. 똑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내가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입니다. 반드시 사람은 행동을 해놓고 허겁지겁 변명한다고 뒤에 토를 달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행동을 해놓고는 ‘가만있자. 내가 이런 행동을 했으니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겠나. 내가 변명할 거리를 만들어야 돼. 누가 이걸 갖고 시비를 걸면 안 되지.’ 사람의 행동이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몸 당기는 대로 나오고 그 다음에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동원하고 배운 것을 티내면서 처리하는 거예요. 욱, 하는 것, 이것은 시간도 걸리지 않아요. 따지는 것은 좀 걸리지만 욱, 하고 저질러 놓고 그 다음에 허겁지겁 수습 잘해야 된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사람의 행동이라 하는 것은 육신의 욕심에서 나온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내가 다룰 수 없는 내 욕망과 욕심이 행위를 해놓고 그것이 욕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행동이었습니다, 하는 것으로 변명하는 식으로 뒤처리 하는 것이 배운 티를 내고 이성적으로 따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피조물이 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피조물이 딱 하나 있어요. 누구냐, 천사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그만큼 생각이 깊으냐, 아닙니다. 천사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지시하면 천사는 그대로 행동에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이 부분이 약간 어려운데요, 천사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될 때 그 천사의 행동을 보고 주변 인물들이 물어요.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내가 이렇게 생각해서 이런 행동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주장은 따로 일체 없고 기능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일에 종사하라고 했습니다, 라는 기능만 이야기하는 것이 천사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사사기에 보면 나옵니다. 삼손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삼손의 부모는 삼손을 태어나게 할 육적인 능력이 없었는데 천사가 와서 없는 삼손을 억지로 태어나게 했어요. 성경에서 삼손을 만든 이유가 천사가 하는 일과 없었는데 생겨난 사람과 비교하라는 차원입니다. 쉽게 말해서 천사도 아니면서 천사처럼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죽어야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이 삼손입니다. 이것을 나실인이라고 하는데 처음부터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나실인만 생각나면 논개라는 가요가 생각나요. 가사 중에 ‘몸 바쳐서 몸 바쳐서’라는 대목이 있지요. 삼손이 나실이라는 것은 바친다는 뜻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바쳐지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나실인입니다. 부모가 점지한 것이 없어요. 비슷한 사람이 사무엘인데 바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한다면 천사가 그냥 하면 될것이 아니냐, 천사는 못해요. 천사는 육체가 없기에 희생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폼은 내도. 천사에게 ‘당신이 누굽니까’ 할 때 나는 누구라고 하지 않고 그냥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기묘자요 모사입니다.’ 하는데 여러분은 모르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묘하다 그 말이지요. 애매한 정도가 아니고 아주 묘해요. 기묘자요 모사요, 묘하고 지혜롭다는 것인데 둘 다 특징이 뭐냐 하면, 땅의 것들은 모른다, 땅에 살던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하는 이 일에 대해서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것들이, 천사가 활동하는 것처럼 나실인,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는 특별한 사람은 본인이 특별한 일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그 일이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그것을 도저히 알지 못하고 본인조차 ‘내가 미쳤지. 내가 이 선지자노릇을 왜 하지?’ 하고 본인마저 원하지 않는 길을 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합쳐서 뭐라고 하느냐, 알 수 없는 지혜, 알 수 없는 그것을 터뜨리는 거예요. 현대인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기본 교육을 다 받았잖아요. 그래서 성경 본다 할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돼요. 왜 그런가, 자꾸 위에서 내려와요.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은 신학을 해놓고는 위를 잘라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천사는 위에서 내려와서 위로 올라가는데 신학자들은 영덕 게처럼 옆으로 범주를 넓혀갑니다. 오늘 본문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이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옆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에요.
‘예수여, 당신이 복음을 전하는데 당신은 어느 단체에서 나왔습니까?’ 옆이잖아요. 어느 단체, 사회적 힘이죠, 어느 단체에서 나왔습니까? 위가 아니라니까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해요. 옆으로 번져서 해석하려는 세력에 대해서 위와 연결시키는 예수님의 생각, 이것이 오늘본문의 핵심입니다. 이 말 들으면 자신도 예수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요. 역시 예수님 최고야, 이렇게 나오지만 평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보세요. 우리는 옆입니까, 위입니까? 백 프로 옆입니다. 백 프로! 기도하는 내용도 옆이에요. 전부 다 옆이에요.
‘애가 학교에서 왕따 당하면 그 애 좀 나오라고 해라. 내가 직접 손 봐야 되겠다.’ 다 이런 식으로 옆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 맞을 때 ‘누구야, 나에게 돌 던진 주동자 나와.’ 하고 옆을 봤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 맞을 때 주께서 사전에 다 조성해 낸 일임을 위에서 봤다는 거지요. 천사의 특징은 세상 눈치 안보지요. 왜냐하면 천사는 하늘나라 하나님 생각이 먼저 있고 그냥 그 행동에 따랐을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우리는 행동을 먼저하고 뒤처리 한다고 주섬주섬 뒤처리를 하지요. 그러면 그 행동은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욕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의 욕심에서 나와놓고 그것을 위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섬주섬 옆에서 처리하지요.
기업가가 국회의원한테 로비한다고 뇌물 줘놓고 들키니까 그것을 처리한다고 주섬주섬 옆 사람들, 법원이나 검찰에 아는 사람들을 모아서 처리하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려고 하는 것이란 말이지요. 세상의 모든 말들과 소설, 제가 소설 안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모든 문학작품과 글들은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그거예요. 전부 다 비겁한 변명이에요. 오직 한 책 빼놓고, 오직 성경말씀 빼놓고 공자 맹자 부처 이슬람의 모든 경전들이 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제가 한때 알라의 코란을 공부해 본적이 있어요. 무슨 소리 했나 싶어서 봤습니다.
응축 하니 딱 한 개 나와요. ‘인간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딱 그 거 하나였어요. 그것을 알고 난 뒤에 ‘아이고, 큰일날뻔 했다. 성경 말고 또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았다. 휴!’ 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요. 코란 불태웠다고 미군을 죽일 정도로 대단하게 여기는 그 코란, 거기에 목숨 거는 그 경전의 내용이 하나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은 노력하고 애쓰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에요. 여러분, 성경도 그런 식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비겁한 변명이에요.
자기 안에 죄가 있고 욕심이 있고 탐욕이 있고, 이것은 내가 나를 다룰 수 없는 거예요.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내 속에 죄가 있는데 이 죄는 내가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는 겁니다. 괴물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자기 속에 괴물이 있음을 알면서도 허겁지겁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것이 뭐냐, 코란이고 공자고 맹자고 윤리고 도덕인 겁니다. 죽을 때까지 비겁한 변명. 실미도인가 그 영화에 나와요. 김일성이 목 따러 가려고 실컷 훈련해놓고는 안된다고 하니까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하지요.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시 변명거리 하나를 집어넣기 위해서 열심히 큐티 하고 성경책 보고 신학공부하고 목사 되고 그렇게 합니다. 목사 된 사람 그 목사 떼어버려야 돼요. 괜히 걸치고 있으면 그것도 비겁한 변명입니다. 옆에서 세력을 얻고자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나는 목사니까 교인들이 있어야 되고 그것으로 나는 밥 먹고 사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라고 자기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거예요. 목사 떼버리라는 말이지요. 제가 어제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그 분이 목사님인데 그 분이 가슴을 찢는 아픔으로 몇 년째 그러고 있어요. 뭐냐, 그 분이 지금 당회장 목사인데 원로목사가 당회장 목사보고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돈 내서 교회 세웠다는 게 이유에요.
그 원로목사는 나이가 74세가 되었으니까 노회법적으로 목사를 못하잖아요. 제가 보면 그 사람도 바보라, 서울에 가면 70세 넘어도 목사 할 수 있는 새로운 노회들이 많아요. 거기 가서 하면 되는데 거기까지는 머리가 안도는 모양이라. 젊은 목사 하나 세워놓고 시키는 대로 하게 하는데 가만 보니 자기가 가르치는 것과 다르니까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어제 그 목사님이 전화한 자세한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원로목사가 하는 말이 삼일절이나 광복절 같은 날은 교회에서 애국가를 불러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나라가 없으면 교회도 없다는 논리에요. 나라가 없으면 교회가 없다는 그것이 성경에 나옵니까?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이미 우리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 생명이 하늘에 있다고 되어 있고 다니엘에 죽 보면 이 세상 나라는 바벨론나라에 속한 것으로 그것은 짐승의 나라이며 주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인자의 나라,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 그 제국에 소속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외치면서 나올 것이라고 이미 예언되어 있잖아요. 애국가를 왜 불러야 됩니까? 그 심보가 뭐냐, 사람은 비겁한 변명들이 사회적 힘을 구성합니다. 옆에서 옆으로 퍼지니까, 우리나라가 잘돼야 우리 서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을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다 아는 마당에 아는 것을 공통적으로 모아서 교회 하나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그 말인 거예요.
비겁한 변명들 모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것은 코란입니다. 그것은 코란이지요. 사람은 자기 행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는 코란 정신이지요. 비겁한 변명들이 모여서 교회 만들어놓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교회의 그 내막을 모르니까 전화하자마자 묻는 것이 ‘목사님, 교회에서 ○○(?)가 분리가 됩니까, 안됩니까?’라고 물어요. 일단 교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복음을 외치는 현장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교회가 현상적으로 발생되는 거예요. 복음을 안전하면 교회 없는 것이고 복음 전하면 교회 생기고, 그런 겁니다.
왜, 위에서 권세라는 것이 그래요. 그것이 구약에서는 뭐냐, 천사가 나타나서 말씀전하면 전하고 천사가 사라지면 말씀이 없어지고, 그런 겁니다. 그것은 천사에게 해당되는 것이 이제는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공로가 바탕이 되어서 이제는 그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가 옛날 천사와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그 귀한 것……, 처음에 아까 했지요. 임산부가 애기 가지면 애가 중요하기에 그 임산부가 행동을 다 조심한다고요. 우리 속에 들어온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십자가 안에 티격태격 서로 상충되고 충돌하는 것이 들어 있어요.
그게 뭐냐, 네가 지금 살아가는 것이 누구의 힘으로 살아가느냐, 라는 질문이 계속 우리 속에서 쏟아지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 질문을 우리가 삭제하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매일 같이 그 질문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이 모든 예수님의 말씀, 바리새인과 주고받는 말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십자가가 이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오히려 본격적으로 이런 말씀을 우리 안에서 완전히 발생시키는 능력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20장의 이 반박의 질문과 다툼은 남들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이미 우리 내부에서 내가 나에게 시비 거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놀러가는 것이지 이게 뭐 주님의 은혜로 가겠어? 목사님은 그렇게 이야기해도 나는 그렇게 안 느껴져. 내가 시간 남아도니 심심풀이로 교회도 가는 거지?’ 라는 질문을 하다가 같이 계시는 성령에 의해서 바로 그 질문이 누가복음 20장의 질문이라는 거예요. ‘네가 평소에 누구 힘으로 살아가?’ ‘돈의 힘으로 살지요. 아니, 사회가 있어야 나도 살지.’라고 옆으로 퍼지는 권세를 은연중에 원하고 있는 습관화된 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욕할 것이 아니고 딱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같은 입장에서 평소에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운을 떼기 전에 먼저 쉬운 것부터 말씀드리는 겁니다. 구약부터 한 번 다시 정리합시다. 구약에서의 특징은 옆에 있는 권세와 위의 권세가 이미 싸우고 있습니다. 그 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사울이라는 왕이 등장할 거예요. 평신도들이 성경 볼 때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모세, 알았어, 알았어. 여호수아, 바통 넘겨받았구나. 알았어.’ 그냥 설겅설겅 넘어갑니다.
그런데 십자가로서 구약을 보게 되면 사울 왕이 권세에 매여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어요. 처음에 사울이 왕 될 때는 권세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천사와 같았어요. 실제로 사울이라는 그 청년은 위로부터 성신을 받아서 신학교 가지도 않고도 벌거벗고 예언을 했어요. 그 정도였습니다. 처음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왕이 될 때에는 ‘왕 좀 해라.’ ‘안한다.’ 이렇게 밀고 당기다가 억지로 왕이 되었어요. 왕 하기 싫어서 피하고 숨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왕이 될 때 자기가 생각을 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그 생각이 위에 계신 분의 생각으로서 내 생각을 대신해 버린 겁니다. 안하려고 했는데 했다 그 말이지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양이나 치면서 사업 잘하고 있는데 주께서 나타나서 ‘내 백성이 고생한다. 가라.’ ‘안갑니다.’ ‘가라.’ 계속 실랑이를 하다가 하도 가기가 싫으니까 ‘저는 말을 못하기 때문에 안 가렵니다.’ ‘말 잘하는 아론 세워줄 테니 가라.’ 해서 가게 된 거예요. 그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당신이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할 때 할 말이 없어요. 헐! 그냥 할 말이 없다니까요. 내가 언제 하려고 했습니까? 요나도 그렇게 예레미야도 그렇고 에스겔도 그렇고. 심지어 예레미야같은 경우에는 선지자고 뭐고 때려 치려고 했고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도망도 치고 그랬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내 모든 행동과 생각은 정당하다는 것을 보람으로, 그런 희망이 있을 경우에만 사람 사는 재미가 있어요. ‘역시 나는 나야!’ 영화를 보러 갔었어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였어요. 영화를 잘 안보거니와 그런 영화는 더더욱 안보거든요. 그런데 위의 권세 때문인지 뭔지 하여튼 봤어요. 그것을 보면서 제일 마지막 대목에서 제가 평소에 듣고 싶은 것을 들어서 돈이 하나도 안 아까웠습니다. 마지막 멘트 한 마디 ‘바로 저거다!’ 범죄자가 마지막 이런 소리를 해요. ‘내가 이깄다!’ 그 모습이 모든 인간들의 행동하는 것, 야쿠자든 좋은 놈이든 그 모든 인간의 마지막 멘트, 비겁한 변명의 최종 결론이 뭐냐, ‘그래, 난 그래도 너한테 안 졌어.’ 그거예요.
이겨서 뭐할 건데? 이것은 평소부터, 그런 말을 내뱉기 전부터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나는 결코 누구한테도 안 져.’ 이거부터 출발해서 수십 년 인생을 살면서 내내 하는 그 행동 안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한테 질줄 아나? 내가 너한테 질 줄 아느냐?’ 나중에 얻어맞으면서 ‘내가 맞는 것이 아니라 내가 뺨으로 방어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래도 나는 너한테 안 졌어.’ 돈 다 빼앗기고 사기당하고 나중에 엉망진창이 되어서 죽어가면서도 ‘나는 결국 이겼어.’ 이것 하고 싶은 거예요.
저게 인간 맞다, 저거다. 몸은 죽어도 자존심 하나 살아 있을 때 그것 하나에 희망 거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내가 내 행동하나하나와 모든 말이 정당하다는 그 이유를 하나의 희망으로 삼는데 그것이 힘, 사회가 주는 힘이고 사람은 희망이나 목표가 없으면 못산다고 하는데 그 목표가 뭔 줄 알아요? ‘역시 나는 살아가는 것이 정당해.’ 라는 그 자기의, 그것으로 버티고 살아온 겁니다. 그것이 사울이 왕이 될 때에는 ‘나는 안한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왕이 된 뒤에는 ‘내가 왕이 됨으로써 이스라엘이 이만큼 잘 되었다.’ 하는 것으로 자기정당화 하는데 여기 나오는 유명한 단어가 ‘권세’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사무엘이 한 권세란 말이 파악 안 되면 오늘 본문 파악 안 됩니다.
이 권세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서 ‘인간속에 숨어 있는 괴물 나와. 잔챙이 말고 괴물 나와.’ 그 괴물이 이 지상에서 최종적으로 하늘나라에 정면 대결하는 작태, 모습이 뭐냐, 국가입니다. 권세가 모여서 국가가 있는 겁니다. 국가는 권세로 이루어 집니다. 그 국가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우리가 국가 만들고 국가 안에서 사회적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누가 봐도 정당하다, 그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슬람이 국가를 어떻게 만드느냐하면, 교육을 통해서 만드는데 그 교육의 제일 먼저가 뭐냐, 종교교육입니다. 알라는 자비하다, 알라는 영원하다, 알라는 모르는 것이 없다, 알라는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이 교육을 통해서 알라신을 통해서 국가가 되는 거예요. 그 속에는 권세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교육을 하는 줄 알았어요. 자기들이 그런 식으로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너는 어느 신학교를 나와서 누구 허락을 맡고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교육하느냐?’ 라고 나온 겁니다. 이것은 이들이 평소에 유대교라는 종교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교육시켜왔고 지시해 온 그들의 행위와 똑같은 행위를 예수님이 하는 줄로 알았던 겁니다.
그 모든 것은 이 눈에 보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권세만 있으면 되었지 국가를 부정하거나 국가를 전복하는 다른 나라의 권세는 필요치 않다고 우기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사회적인 힘이에요. 그래서 사회적인 힘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사람은 정치적인 동물,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했잖아요. 사람은 사회 없이는 못산다는 겁니다. 아브라함링컨같은 경우는 인간의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국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남북전쟁의 와중에 게티스버그에서 그런 연설을 했다 그 말이지요.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국가가 잘하나 못하거나 국가가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애국가를 불러야 된다 그 말입니다. 국가가 먼저 있고 국가가 유지되는 한 그 다음에 교회가 있는 것이지 국가 없이는 교회도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이야기고 오늘날 목사들이 그런 주장을 했고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 안에서 우리 내부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속에서 막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힘이 없으면 우리는 외로워서 못삽니다. 돈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외로우면 못산다고 하잖아요.
연세 많은 분들이 곧잘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신성일 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하죠.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여자는 언제까지 밝히면 됩니까?’ ‘힘 되는대로 밝히면 됩니다.’ 이 말은 사람은 외로우면 못산다는 뜻입니다. 외로워서 못산다고 그 사람은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우리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안 하고 있지만 우리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안 하고 있으면서도 행동하는 것은 ‘외로우면 못살아.’ 이런 식으로 행동에 옮기면서 ‘나는 외롭지 않아. 나는 천국만 있으면 돼.’ 이런 식으로 비겁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속에 십자가가 왜 귀하냐 하면 우리의 허상과 우리의 솔직함을 다 까발린다는 점에서 십자가가 아주 귀한 겁니다. ‘주여, 십자가의 용서 없이는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나는 십자가 없이는 천국 못갑니다.’라는 그것을 매일같이 까발려 주는 거예요. 바리새인은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속에 있는 심정을 그대로 내어놓으면서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대드는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이 나라를 전복할 모양인데 누가 이런 식으로 교육하라고 했느냐.’라고 권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천사를 보아라. 천사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잖아. 위에서 오잖아. 옆에서 끌어 모으는 권세가 아니잖아. 위에서 그냥 내려오는 권세잖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세례요한을 거론 합니다. 이점이 아주 어려운 점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세례요한의 권세가 위에서 왔더냐, 아래 사람들로부터 왔더냐.’ 라고 묻는 겁니다. 이 말이 왜 어려운가,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듣기에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데 하늘에서 온 힘으로 한다고 우기더냐, 자기 힘으로 하느냐, 라고 묻는 질문. 제가 어려울 줄 알았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힘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우기는 힘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지금 그 당시 대중들은 요한을 보기에 ‘나는 하늘에서 온 선지자다’라고 우기면서 하는 권세가 아니고 그야말로 하늘에서 온 힘으로 살아가는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 차이가 뭐냐, 권세가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권세를 일부러 팬클럽 관리하듯이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고 아예 그 권세 없이 일을 하면 그것이 위에서 온 권세입니다. 꼭 천사 같아요.
천사가 언제 일하면서 누구에게 아부하고 자기변명하고 자기 정당화하는 이런 것이 아예 없어요. 권세 그런 것은 나에게 필요 없다, 그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세 번째 시험이 권세문제였습니다. ‘나에게 절하면 일이 더 잘될 것이다. 나와 협동해서 일하자. 나에게 절하고 같이 협조해서 잘 해보자.’ 그렇게 나온 거예요. 예수님은 권세라는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성도도 그렇잖아요. 순수함이라는 것은 내 자신이 가장 죄인임을 느낄 때 가장 순수해져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안 들키기 위해서 근사하게 변명해서 의인으로 바꾸려 할 때는 이미 이것은 순수로부터 거리가 멀어요. 벌써 사람이 지저분해요. 그런데 죄가 죄로 그냥 드러날 때 더 이상 가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개인데 뭐. 그럴 때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씨는 그 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성령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왜, 성령이 미리 작업을 했기 때문에. ‘너는 개야. 너는 무슨 짓을 해도 너는 죄인이야. 입 다물라. 너는 뭘 해도 죄인이니 잘난 체 하지 마.’
이미 성령께서 작업을 해 놓았기 때문에 성령으로부터 얻어터지고 난 뒤에 나오는 행동 같으면 더 이상 자기를 포장한다든지 자기를 예쁘게 본다든지 그런 것이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뭐냐, 위로부터의 권세 성령의 권세가 아니라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런 수, 계산에 들어가요. 수도 높지도 않으면서 다 들통 날 수 써가면서 행동을 이렇게 하면 저쪽에서 이렇게 나올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고, ‘나는 돈 먹고 공 던지고 그런 짓 안 했습니다.’ 해 봐야 나중에 검찰에서 다 들통 나지요.
그러다 한 방, 인생은 한 방인데 예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고 혼자 알고 있으면 돼요. ‘주여, 맞습니다. 미안합니다. 먹고 살려고 하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아요. 이게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마귀가 어떻게 협박 공갈을 할 여지를 만들지 마세요. 마귀한테 놀아나지 마세요. 마귀는 내 에서 잘하려고 하니까 마귀가 자꾸 달려드는 것이지 마귀보다 더 세신 분이 우리를 조져놓아 버렸는데 뭐. ‘마귀야, 안녕.’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마귀보다 더 세신분이 나를 완전히 황폐하게 박살을 내놓아 버렸는데 마귀가 새삼스레 뒤에 와서 ‘너 까불면 욕 얻어먹는다.’ 하면 ‘그래, 욕 그냥 얻어 먹어라.’ 이럴 수 밖에 없어요.
세례요한이 죽을 때 쟁반에 목 베여 죽었습니다. 이걸 세례요한이 알고 있었어요. 자기가 어떻게 죽고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자기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를 다 압니다. 알아도 자기는 그냥 죄인이다 그 말이지요. 나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되니까. 바로 이런 선지자의 권세가 그대로 예수님에게 주어지게 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릴 때 그냥 ‘아버지여, 다 이루었나이다.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 이것이 코란과 성경의 차이점입니다. 코란은 ‘사람이 하나님과 잘 사귀면 네 정당함과 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되지만 성경은 위에서 온 권세가 작용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지도 않아요.
날마다 변하니까. 왜 그렇게 변덕쟁이인지.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왜 그렇게 변덕을 부립니까? 정상이십니다. 당연한 것이고. 변덕 안한다고 큰 소리 치면 안돼요. ‘내가 술 끊고 담배 끊는다, 한 번 봐라.’ 안 믿습니다. ‘내가 앞으로 공부 잘할게요.’ 안 믿습니다. 왜냐, 본인이 그것을 안 믿어요. 오늘 이 말씀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사람이기 때문에 나라는 인간도 내가 만든 내 작품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기에 바로 위에서 온 권세, 성령이 임해 버리면,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너는 네가 원하는 네가 되고 싶어도 네 속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는 허락지 않겠다. 너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내가 끌고 가겠다.’
바로 이 작업, 이러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논쟁이 우리 속에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이러한 십자가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