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읽기가 힘들어도 선생이 그 정도뿐이 안 된다 생각하고 집중하여 읽기를 꼭 당부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서정의 영역입니다.
해질 무렵
- 서은
눈앞의 것에 연연하지 말고 살라는 은총인지
노안은
시력은 흐려졌다만
신갈나무, 청미래덩굴, 까치박달이 뒤엉킨 험준한 지형들이
계곡 부와 능선 부로 나누어지며
해 질 녘 은은한 視界로 다가오는 거야
곧잘 토라져 섭섭하던 감정도
웬만큼 무뎌지고
접사로 꽃을 찍으면
그 주변의 배경이 지워지고
심도를 깊게 하면
우쭐하던 꽃도 한 점 조그마한 피사체로 남듯이 말이야
실눈을 뜨고
바깥에서 안을 보고
그려보는 곡면 창
어둠 살이 조용히 번져 올 때
점점 선명해지는 능선을 바라다본 적 있어?
창의 외부와 내부가 만나는 빗금 친 유리면에
투명한 시공이 걸터앉은 모습을?
우리는 늘 내 눈으로 대상을 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됩니다. 나는 대상에 대해 파악하고 문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나와 내 눈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눈에 의해 제약받으며 동시에 눈 역시 나에 의해 제약받곤 합니다. 그렇기에 <나의 눈-대상>이 아니라 <나-눈-대상>의 관계에서 '봄'의 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나에 대한 확신과 피가 끓어 넘칠 때는 <나-눈>을 하나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눈>과 동일하게 생각할 때 빚어지는 무리함도 함께 갖는 것입니다. 그런 동일함이 깨지는 때가 삶의 시간에서는 나의 성실성을 생이 배반할 때이고, 자연적인 생의 시간에서는 <눈>의 생물학적 기능이 약화될 때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눈>의 동일함이 깨지고, <나>와 <눈>이 서로를 의식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대상>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태의 체험을 시인은 노안이 왔을 때라고 말하며, "눈앞의 것에 연연하지 말고 살라는 은총인지/ 노안은"이라고 '은총'으로 정의합니다.
그럼 그 은총에 의한 변화를 시인은 어떻게 보고 있나요?
1) 일단 "시력은 흐려졌다만"이 됩니다. <나-눈>의 균열 그리고 <나>와 <눈>이 서로를 의식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시력을 흐리게 합니다. 생물학적으로도 눈의 기능이 떨어지면 마음 같지 않을 것입니다. 작고 가까이 있는 것이 잘 안 보이니 책보다는 영화 같은 것이 더 좋아질 것입니다. 가까운 것에 몰입하던 습관에 균열이 일어나며 전체를 보는 감이 더 소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눈앞의 것에 연연하지 말고 살라는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2) 두 번째로는 <나>와 <눈>이 서로를 의식하기에 생겨나는 반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눈이 흐려지면서 그동안은 동일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눈>과 <나>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때 '시력이 흐려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예가 적당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총을 쏴본 분은 아실 것입니다. 내 눈을 목표물에 겨냥하여 총을 쏘면 절대 목표물을 맞출 수 없습니다(이는 <나의 눈-대상>이 가지는 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말해줍니다). 목표물을 맞추려면 반드시 가늠자에 가늠쇠를 맞추고 그 위에 목표물을 올려놓아야 합니다. <가늠자-가늠쇠-목표물>으로 정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렬되려면 묘한 현상을 체험해야 합니다. 가늠쇠에 신경을 쓰면 목표물인 대상이 흐릿해지고, 목표물에 신경을 쓰면 가늠쇠가 흐릿해집니다. 따라서 일등사수가 되려면 흐릿해지는 가운데 어림잡아 쏘는 감을 익혀야 합니다(이런 것을 조준선 정렬이라고 하지요). 여기서는 가늠자만도 기늠쇠만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상태를 시인은 "시력은 흐려졌다만"으로 표현합니다.
3) 그런데 흐릿해진다고 하여 맞출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등사수는 영원히 없겠지만 일등사수들은 늘 있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일등사수의 눈에는 흐릿해지면서도 어림잡을 수 있는 어떤 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의 내용을 이루는 핵심은 목표물에만 신경을 쓰지도 않고, 가늠쇠인 눈에만 신경 쓰지도 않고, 추제인 나인 가늠자에만 신경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목표에만 신경 쓰지 않을 때의 현상은 "신갈나무, 청미래덩굴, 까치박달이 뒤엉킨 험준한 지형들이/ 계곡 부와 능선 부로 나누어지며/ 해 질 녘 은은한 視界로 다가오는 거야"로 표현됩니다. 자세하게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전체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아니, 자세하게 보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전체를 읽으려 하기에 흐릿해지며 커다란 윤관이 잡히고 그 윤곽 안에 세세한 것이 놓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두 번째로는 주체인 내가 달라져야 합니다. 아상(我相)의 집착을 덜어야 합니다. 이를 "곧잘 토라져 섭섭하던 감정도/ 웬만큼 무뎌지고"로 표현합니다.
4) 이때 가늠쇠(<눈>에 해당함)의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접사로 꽃을 찍으면/ 그 주변의 배경이 지워지고/ 심도를 깊게 하면/ 우쭐하던 꽃도 한 점 조그마한 피사체로 남듯이 말이야". 여지껏 우리는 <나의 눈-대상>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나-눈-대상>의 관계에서는 <눈>의 조절로 <대상>을 수없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아무리 무엇인가를 의도해도 <눈>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되고, 또 <눈>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가장 작은 물질을 입자로 보려고 그런 실험도구를 가지고 실험하면 입자로 보이고, 파동으로 보려고 그런 실험도구를 통해 보면 파동으로 보인다는 묘한 말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만을 내세워도 안 되고, '이것만이 객관이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만을 내세워도 안 되고, 객관만을 내세워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를 위해 일단 어떤 것도 절대화시키지 않고 어림잡을 수밖에 없는 '흐릿한 눈'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눈에는 <주체인 나>와 <명명백백한 대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흐릿해질 때, "실눈을 뜨고/ 바깥에서 안을 보고/ 그려보는 곡면 창// 어둠 살이 조용히 번져 올 때/ 점점 선명해지는 능선을 바라다본 적 있어?/ 창의 외부와 내부가 만나는 빗금 친 유리면에/ 투명한 시공이 걸터앉은 모습을?"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투명한 시공이 걸터앉은 모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마 그 세계가 조준선 정렬을 마친 일등사수의 감으로 보는 세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조준선 정렬을 마쳤다는 것은, 주관에도 객관에도 치우치지 않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자유자재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존재를 노자할배는 다음처럼 노래하지요.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머뭇거리는 신중한 모습이 겨울냇가 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망설이는 조심하는 모습이 두려워 사방 주위를 살피는 것 같고,
儼兮其若客,(엄혜기약객)
근엄하게 함부로 하지 않는 모습이 정중한 손님의 그것과 같고,
渙兮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흩어지는 고집하지 않는 모습이 녹으려는 얼음과 같고,
敦兮其若樸,(돈혜기약박,)
도타운 그 넓게 마음 쓰는 모습이 통나무의 그것과 같고,
曠兮其若谷,(광혜기약곡,)
텅 비어 구애됨이 없는 모습이 골짜기의 그것과 같고
混兮其若濁.(혼혜기약탁.)
혼돈스러이 세상과 한데 섞여 있는 모습이 흐린 물과 같다.
- 도덕경 15장에서
-글/ 오철수 시인
노안이 세상을 살아온 중후한 느낌으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깊은 경지를 열어놓은 서은누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고 샘의 해설 또한 금상첨화 입니다 정말 고개 숙여집니다
중후함과는 넘 거리가 멀어서 숨고싶으이.
겨우겨우 출석입니다. 떠그럴, 다음카페도 조만간 음성프로그램이 못 읽겠메요. 수시로 바뀌는 스크렙트 폼에 올라운드 플레쉬화. 댓글 하나 읽는데, 올리는데, 각각 이젠 오분이 넘게 걸리다니. 곧, 복창 터지고 말겠네요.
수시로 바뀌는 카페 환경에 병걸 고생이 많겠네. 그렇다고 복창 터지면 안 되니 댓글 읽기 자제 바람.
저 바다건너 어디쯤에 서은언니가 호박도 심고 몽골돌도 밟으며 詩밭을 거닐고 있겠지 가늠하며 거제도가 보이는 남해에 앉아 하염없이 노을을 보고 돌아왔더니 이렇게 아름답고 깊은 시를 만나네요.
남해에 다녀 가셨군요. 에구, 그럼 전화라도 하지. 저도 낼 하고 모레 같이 공부하는 님들과 공고지와 내도에서 무박2일입니다.
출석확인했습니다^^
출석하란다고 다 하는 이상한 학생들.
깊은 시에 깊은 철학의 해석, 이게 아모르파티에서만 볼 수있는 미덕이지요. 선명한 판단력 대신 흐릿한 시력의 미덕을 몸으로 익혀가고 싶습니다.
강물의 철학성은 탁함을 맑히는 그 흐름의 변화에 있다지요? 그래서 그런지 조신한 강물님 발자욱 소리가 싫지 않아요.
어제 여주제2대교를 건너면서 유리창 너머로 안개에 싸인 양섬을 봤습니다. 모래톱이 모여 섬을 이루고 그 속에 새들을 키우고 물살에 밀려온 씨앗들을 고스란히 싹을 틔워 품고 있는 작은 섬.. 넝쿨들이 느티나무를 올라가 밀림을 만들어도 조용히 받아주는 그 섬이 형체만 조용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텅 빔으로 곧 다시 채워진 삶 같았습니다.
바다도 망망대해보다 그 물결에 섬이 몇 개 갈앉아 있으면 훨씬 보기가 좋던 걸요. 멀리서 보면 전복이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파도가 해조음처럼 메아리로 쌓여 너울너울 물밀져 오는 것 같아서요.
헐떡 헐떡~! 일단 출석이요..ㅎ 대낮(?)에 올만에 들어와서리.. 스크랩 일단 해 가서,,그 담에 쁘린뜨해서 읽겠씀돠..간단한 감상이 아니라서요^^
헐떡 벌떡~! 출석확인 저도 힘드네요. 그러게 대낮(?)엔 제발 주무시라니까요.
요즘도 너무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는 것에만 의지하며 사나봅니다. 해질 무렵의 그 선명함을 바라볼 때의 아릿함. 가늠자와 가늠쇠, 목표물이 하나로 두리뭉실해질 때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력이 생기는 거겠지요. 시도 좋고 선생님 품있는 글도 좋구......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의 차이, 가을엔 유독 더하지요? 그 왜 김명인의 <안정사>라는 시에나오는 바람 이야길 다시 찾아보아야겠어요. 바람님 시가 또한 당도할 즈음인데.
저는 서은님의 연령과 그 생애의 깊이를 잘 모릅니다만 어쩐지 더 넓어질 수 있는 마음의 창이 안으로 옹송그려 모아지는 것 같아서, 그 모아짐의 의지력으로 바라보게 되는 창이 어쩐지 첫 연과 잘 어울리지 않는것 같아서... 조금은 자연스럽지가 않네요. 그러나 그 모든것을 뛰어넘은 2연은 정말 좋았습니다. 내 가까운 것들과 먼 것들이 한 눈에 들어와서 함께 아름다움으로 화하는.... 거기에는 우리의 의지에 의한 시력을 넘어서는 자연의 또 다른 아름다운 그 무엇이 있겠지요.
새벽철길님, 첫 발자욱 반가워요. 귀한 말씀은 소중히 새기겠습니다.
아르케님이 올린 제 글 "어느 지상의 저녁"에 단 서은님을 보았습니다. 사실 깎두기도 제 별명이거든요. 세상의 김치란 김치는 죄 다... ㅋㅋ
좋은 시 고맙습니다. 요즘 쓰던 안경을 벗어야 가까운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거리에 있는 것은 안경을 벗으면 멀어서 흐리고, 안경을 쓰면 너무 가까워 흐리더군요. 며칠 전 시력 검사를 했더니 두촛점 렌즈를 쓰라고 하네요. 하하. 마침 서은 님 시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오늘은 자꾸 쳐지고 맥이 없어서 비실거리는데 회화나무님 덕분에 웃고 있습니다. 감사 ^^
서은시인님은 정확히 목표물을 겨냥할 줄 아는 특등사수로 한번 겨냥된 시상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는 저격수네요. 무서워요. 시와 평에 한참동안 맛이 가고 있습니다^^
낚싯줄 늘어뜨리고 앉아 시심을 건져올리는 구암님의 모습이 보이네요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