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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범사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 믿음은 언제나 기도와 분리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믿음이 있을 수 없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신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범사에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다윗은 왕이었고, 다니엘은 바벨론 총리였다. 구청장만 되도 얼마나 바쁜데 왕이나 총리는 어떻겠냐? 그러나 시5:3에 보면 다윗은 아침마다 기도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신약에서도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사도들도 하루 세 번 기도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계실 때 기도하는 일생을 보내셨다. 막1:35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마4:2에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다. 눅 22:39에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눅 6:12,13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날이 밝아지자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부르셨다. 눅 22:44에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하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눅 22;34,46에 임종의 순간에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기도로 일관된 생애를 사셨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기도하는 삶을 사셨을까?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싶은 사실은 모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하루에 3시간씩 기도했다. 루터는 오히려 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기도했다고 한다. 죠지 뮬러는 매일 성경을 통독을 하다가 감동이 주시는 구절이 나오면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다. 죠지 뮬러의 믿음의 기도에 의해 5만 가지 이상의 구체적인 기도응답이 있었다. 죠지 뮬러가 기도하면 하늘도 조용해 진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인도선교사인 하이드는 끊임없는 기도와 금식, 철야만으로 매일 1명의 영혼이 계속 기도응답으로 구원받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죤 웨슬리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오후 3시까지 금식기도를 했다. 매달 1번 이상 3일 금식을 하기도 했다. 초기 감리교인은 다 이렇게 금식기도를 했다. 조용기 목사님은 매일 3시간씩 기도한다고 한다. 방언으?! ? 1시간 반, 한국말로 한시간 반. 우리는 어떻게든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나님께 인정받고 쓰임받을 수 있다. 힘써 기도하고 애써 기도하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찾으며,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 가지 세상일로 우리의 삶에서 기도가 많이 약해져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핑계는 많으나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도할 것이다. 누가 그런다. 기도면 다냐고? 그렇다. 기도면 다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을 부족함이 없이 채우신다고 믿는 자에게 기도는 다다. 언젠가 박종훈이라는 은행원이 기도를 하루에 7시간 동안 하게 된 이야기를 간증 테입으로 들었다. 처음에 5분간 기도하는 것도 어려워하던 사람이 하루에 20,30분 기도하는 훈련을 하다가 나중엔 매일 2시간,3시간씩 기도하는 단계가지 들어갔다. 마침내 은행원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기도를 7시간씩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7시간의 기도도 처음 시작할 때와 나중에 훈련되어 있을때의 강도가 다르다고 한다. 이분은 특별히 신유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병이 낫는 간증을 했다. 놀라운 기도 생활에 대해 들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실력있는 사람이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이시고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자.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보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라 할 수 있다. 성경을 10번, 20번 봤다는 사람보다 기도생활이 깊은 사람이 존중되어야 한다. 당신이 기도생활이 빈약하다면 당신은 빈약한 그리스도인이다. 당신의 기도생활이 훌륭하다면 당신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기도생활만큼 위대한 그리?! 볕돛括? 없다.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보자. 신앙과 기도는 구분할 수 없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오직 기도함으로써 그의 신앙을 나타낸다. 당신은 기도하는가? 어느 정도의 질과 양으로 기도에 힘쓰는가? 그 모습이 바로 당신의 신앙을 보여준다. 당신의 신앙이 좋다면 분명 기도 생활이 훌륭할 것이다. 당신의 신앙이 좋지 않다면 분명 기도 생활이 훌륭하지 않을 것이다. 1) 기도의 정의 그럼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먼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Fellowship with God)이라 말할 수 있다.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밝혀 놓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어떤 사람과 교제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대화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해봤나? 대화는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방적인 공허한 외침이 아니다. 소리쳐 기도를 해도 의미 없는 독백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기도를 대화라 할 때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혼자 말씀하시는 것도 대화라 할 수 없다. 나 혼자 말해도 대화한다고 할 수 없다. 진정한 기도는 대화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하고, 우리의 사정도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기도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Asking for our needs)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도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 불가능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함으로 하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하고 기도로 때우려고 하면 그 기도는 응답이 안 될 수 있다. 직장 일이든 공부든 가사 일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또 이렇게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것을 기도해서 응답 받을 때 우리의 믿음이 강건해지고 그런 기도가 진짜 기도라 할 수 있다. 셋째, 기도는 마귀와의 영적인 전쟁(Spiritual War with Devil)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눅 18:3) 신앙생활에는 원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원수를 패배시키고(이미 원수는 패배했지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국지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그 기도응답의 분량이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분량과 같으며, 이는 곧 원수의 역사가 좌절된 분량과 같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원수와 영적 전쟁을 해야 하며, 기도는 분명 원수의 역사가 좌절되게 만든다. 여기서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또는 사단)과 그 수하에 있는 영적 존재들이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원수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 리 형제자매들아, 힘써 기도하도록 하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 10:35)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믿음은 춧쯔파(chutzpah)이다. 춧쯔파란 히브리 방언인 이디쉬(Yiddish)의 속어로 ‘강심장’, ‘철면피’, ‘어떤 행동에 있어서 극단적인 확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말로 하면 춧쯔파를 가진 사람이란 ‘어떤 것을 막무가내로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춧쯔파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전적인 예화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이 자신이 고아라는 이유로 재판에 자비를 요청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춧쯔파이다. 마가복음 2장에서 지붕을 뜯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네 친구처럼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가 구하는 것이 믿음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옷을 다 버려놓고 집에 들어와서 큰 소리 치는 딸을 보았나? 우리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어떤 경우에도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있으면 응답을 볼 수 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가 담대히 기도할 수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반듯이 응답하실 것이다. 또 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실상이란 말은 원어로 법적인 권리를 의미한다. 실제 땅이나 주택을 갖고 있지는 않아도 등기권리증만 가지고 있으면 실제 그 땅이나 주택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실상이란 말은 그런 의미다. 우리에게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이미 우리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므로 이렇게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다. 당신은 그 약속을 믿는가?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의대생이 눈 나쁜 여자와 연애를 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눈이 나쁜 것을 알자 그 남자는 “나중에 안과의사가 되면 네 눈을 평생 보살펴 줄께!”하고 약속했다. 의대생은 성가대도 하고 믿음도 좋았다. 그러나 여자는 첫 해부시간 끝내고 온 남자친구에게 술 사줄 정도로 믿음이 없었다. 어떡하다가 두 사람이 헤어졌는데 20년이 지나서 보니 믿음 없는 여학생은 목사 사모가 되었고, 오히려 의대생은 믿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다니 교회도 안 다니고 믿음이 식어버렸다. 사모가 된 옛 애인이 새벽기도를 끝내고 렌즈를 끼려고 식염수에 씻는다는 게 화장수에 씻었다. 눈이 쓰리고 아파서 야단이 났다. 교인 하나가 좋은 안과의사가 있으니 가보라고 명함을 주어 이름을 보니 옛 애인과 이름이 같았다. 찾아갔더니 정말 그 애인이었다. 옛 애인은 믿음이 식어버린 자기와 자기 가정을 위해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이 사모님은 옛 애인에게 물었다. “옛날에 약속한거 기억나니? 안과 의사되면 내 눈을 평생 보살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그리곤 자기가 개척교회 목사 사모니까 공짜로 라식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수술비용이 300만원인데 이걸 안 받고 수술을 해주었다. 사모는 선물로 작지만 부부성경공부교재, 자녀를 위한 어린이 성경책을 사주었다. 그러자 의사는 꼭 필요한 거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사모님이 그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가 남편 목사님도 눈이 굉장히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냐며 부탁을 해서 목사님도 공짜로 수술을 해주었다. 어느 날 자기 교회에 중앙아시아에서 선교사님이 오셔서 선교보고를 했는데 ?! 遣? 눈이 굉장히 나빴다. 또 이분도 데리고 가서 공짜로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선한 사람은 옛날 애인과의 약속도 이렇게 지킨다. 예수님은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시겠나? 당신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아, 믿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자. 2)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전능하신 하나님도 일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러나 그 전능하심을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안 하실 일 하시겠으며,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하실 일 못하시겠느냐는 생각을 우리는 종종 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만 관철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써 어느 정도 자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제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우리 인간들이 왜곡되게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우리를 놀래키는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뭐고 이런 일은 뭐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없는 한 우리는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밤 기도 열심히 할지 아실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모르실 수도 있다. 또 우리가 무슨 기도할지 아실까? 역시 모르실 수 있다. 우리의 의지에 맡겨두셨기 때문이다. 물론 내 마음이 이미 확정되었다면 아실 것이다. 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을 경우도 아실 것이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경우 우리는 우리 뜻대로 할 자유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위의 말씀을 잘못 오해하여 야곱은 마치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에서는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이 미워하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는 말씀은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야곱이 죽은 후 거의 1400년이 지난 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었다(말 1:2). 그럼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걸까? 야곱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짓을 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말씀을 잘 살펴보라.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 9:10) 광야에서 무슨 포도송이가 열릴 것을 기대할 수 있겠나?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무화과의 첫 열매도 처음이기 때문에 열매 맺은 것을 보고, ‘야, 요렇게 열매를 다 맺었네!’하고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 처음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은 광야에서 포도송이가 열리듯이,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듯이 이스라엘(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다)을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보셨던 것이다. 우리도 기대치 못한 선한 모습을 보여 하나님을 놀라게 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과 못 받을 사람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할 탓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기대치 못한 선한 모습을 보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많은 것을 위임하셨다.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고 힘써 기도하자. 혼자 있는 시간에 힘써 기도하자. 또한 금요심야기도회와 캠퍼스 기도회에 나와 함께 기도하도록 하자. 자신의 자유의지를 주도적으로 사용하여 힘써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겔 36:37)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신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에 응답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기도함으로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신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지원 안해 주세요. 감동이 안 와요!”라고 말하며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기도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항상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눅 18:1). 그럼 할 수 있다면 항상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따라서 감동이 안 되더라도 기도하려고 결심할 때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셔도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기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마음 먹은 대로 할 자유가 있다. 하기에 따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아나? 그러므로 우리는 할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기도를 힘써 해야 한다. 그러면 오히려 기도할 마음을 더욱 주실 것이다. 찬송가 528장의 가사처럼 “주여, 당신 뜻이라면 나를 고쳐주소서” 하면 안 된다. 병고침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병이 들었을 때 “나으면 감사하고 안 나아도 할 수 없지”하는 안일한 태도로 기도한다면 낫기 어렵다. 오히려 ‘나는 반드시 나아야 돼’ 하고 확고한 결의를 가져야 빨리 고쳐주신다. 전도도 성령충만하기만 하면 가만 있는데도 “어어, 이거 왜 이러지... (저절로 입이 열려서) 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뭐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도하려고 결심하고, 직접 입을 벌려 전도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강권적으로 역사해주세요!” 그러나 이런 기도는 별로 응답받기 어렵다. 하나님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강권적으로 잘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의지를 사용해야 한다. 3) 내공이 쌓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기도응답은 내공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아구가 차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셨다(갈 6:7,8). 나쁜 것을 심었으면 나쁜 것을 거두고, 좋은 것을 심었으면 좋은 것을 거둔다. 나쁜 것을 심었는데 좋은 것을 나오게 하고, 좋은 것을 심었는데 나쁜 것이 나오게 할 능력은 주님도 없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사업이 부도나려고 하니까 3일동안 금식하고 철야를 하며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부도가 안 낫는 경우를 본다. 혹 옆에서 볼 때 “저 사람은 평소 기도도 하지 않던 사람인데 어떻게 응답해주시나?” 하고 의아할 때가 있다. 그러나 배수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응답이 속히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경우 3일의 기도만으로도 기도분량이 아구가 차서 응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10kg의 기도분량이 필요한 문제를 놓고 매일 100g의 무게로 기도를 하면 100일 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될 수 있다. 101일이 되야 조금씩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느낄 것이고 110일이 지나 11kg 분량의 기도가 차도 서서히 응답될 수 있다. 그러나 10kg의 기도분량이 필요한 문제를 놓고 3일 동안 결사적으로 기도하여 15kg 분량을 채운다면 기도는 바로 응답되고, 오히려 아구가 차고 넘친 5kg 분량은 평소 바라던 것까지 응답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이신다. 다만 경우에 따라 기도분량이 아구가 차지 않아 응답될 때까지 시간이 걸릴 때가 있다. 축복과 형벌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에 대해 축복하신다. 또 우리의 악행에 대해 반드시 벌하신다. 그러나 죄를 지어도 바로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을 본다. 이때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형벌을 안 하시는줄 알고 더 담대히 죄를 짓는다. 이런 사람은 저주받는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죄는 아구가 차면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된다. 430년 동안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관영하자(충만하게 아구가 차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셨다. 430년 동안 계속 죄를 지었어도 아구가 찰 때까지는 심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양이 차자 결국 심판을 받았다. 결국 가나안 족속은 심판을 받아 전쟁으로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땅을 차지했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물론 한번 죄를 짓더라고 아구가 차게 극심한 죄를 지어버리면 현장에서 바로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아구가 찰 때까지 시간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선행도 마찬가지다. 천국에 가면 최종적으로 선행에 대한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땅에서도 선을 행하면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도 계속 선을 행해도 하나님이 상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낙심치 않고 선을 계속 행하여 그 선행이 양이 차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을 주신다. 혹 억울한 일을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신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한 후 당장 축복을 하시지 않는다고 낙심할 이유가 없다. 기도할 때도 바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이유가 없다. 상황을 볼 때 상달되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기도는 이미 하늘에 상달되고 있다. 양을 채우면 마침내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보고 만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 적극적인 의지를 사용하여 기?! 되溝돈? 하자. 4) 기도응답만이 열매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열매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은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만을 진정한 열매로 다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농부로 비유된다. 농부에게 열매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무화과나무, 내지 포도나무에 비유된다. 무화과나무는 꽃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하지 않다. 열매만 의미있다. 무화과는 언제든지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나무다. 제대로 안 익었을 때도 왠만하면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어떡하냐? 땅만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찍어버릴 수 밖에 없다. 또 포도나무도 그렇다. 포도나무는 덩쿨이 휘어있어서 목재로도 쓸수 없고 불쏘시게 밖에는 할 수 없다. 잣나무는 재목으로도 쓴다. 열매도 쓰지만 다른 것도 용도가 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전혀 다른 용도가 없다. 열매만 기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예표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인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열매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7,8,16) 위의 말씀을 주의해서 살펴보라. 기도응답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열매인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나 성경에서 열매는 기도응답과 연결되어 표현된다. 또 이 기도응답은 사랑과 연관되어 표현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열매로 우리가 기도응답 받을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기도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를 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도없이 아무리 잘 되어도 그것은 진정한 사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진정한 열매라고 할 수 없다. 기도없는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모두 무효다. 우리는 기도를 배우면서 열매맺는 것을 배운다. 열매는 익어서 맺는 것이다. 억지로 맺을 수 없다. 반드시 그렇다. 그러므로 진정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기도하자.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보자. 또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만 큰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도를 많이 하면 체험이 많아지고 신령해진다. 영력을 얻게 된다. 권력없는 정치가, 재력없는 사업가, 체력없는 운동선수, 영력없는 그리스도인은 다 불쌍한 사람이다. 세상의 조롱을 받을 것이다. 무능한 것 같이 악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현장은 주검이 있는 곳이다. 생명이 없는 것만큼 더럽고 추한 것은 없다. 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장은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곳이다. 잔꾀를 부리지 말자. 우직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를 많이 하여 신령한 능력을 얻자. 신약에서 가장 하나님께 많이 쓰임받은 바울은 기도를 누구보다 많이 한 사람이었고, 그 결과 그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가 끊이지 않았다. &n! bsp;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롬 1:9,11)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8) 또 그리스도인은 깊고 은밀한 기도를 통해서만 온전한 성화와 헌신을 이룰 수 있다.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이라도 깊고 은밀한 기도가 없으면 제대로 헌신하고 성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깊고 은밀한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풋내기요 미숙한 사람에 불과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둘만의 비밀이 있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벗(친구)이라 부를 수 있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되자. “그(아브라함)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5) 기도의 요소 우리는 기도할 때 찬양(Adoration, 자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간구(Supplication)의 요소를 포함시킬 수 있다. 이 4가지 요소는 영어의 머릿글자로 보면 ACTS로 사도행전(Acts)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또 우리의 기도 속에는 방언(Glossolalia)과 중보기도(도고, Intercession)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의 기도에는 찬양(Adoration)이 있어야 한다. 막연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언제나 너무너무 좋은 일만 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훌륭한 찬양이 될 것이다. 이렇게 찬양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을 때도 따뜻하게 저를 축복하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관대하심을 찬양합니다.” 기도에는 자백(Confession)이 있어야 한다. 자백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것이다. 역시 구체적일수록 좋다. 막연히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는 죄가 너무 많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자백이라면 좋지 않을까? “하나님 아버지, 제가 수영이와 얘기할 때 철수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지난번 찬양팀 모임 때 철수가 사람들 앞에서 제게 무안을 주어서 저도 모르게 철수를 미워하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용서해주시고, 제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무엇이든 허물을 깨닫게 되면 즉시 자백하는 것이 좋다. 언젠가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는지 누군가 물었을 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가를 말한 일이 있다. 얘기를 끝내고 돌아서자 성령께서 ?! 駭腑? 하셨다. “니가 잘해서 건강한거니? 다 하나님의 은혜지.” 즉시 나는 자백을 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마치 제가 잘해서 건강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자백은 즉시 이루어지면 제일 좋고 그날 그날을 넘기지 않고 매일 자백하도록 한다.
기도에는 또 감사(Thanksgiving)가 있어야 한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감사하는 것이 좋다. 성서적으로 감사와 은혜는 같은 의미다. 은혜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셨을 때도 감사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일이 있을 때도 범사에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몸이 굉장히 많이 아팠을 때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 그 동안 오랫동안 저를 건강하게 지켜주셨군요. 이번에 오랜만에 아파서 고생을 하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지요? 하나님 아버지, 저를 내적으로 강건하게 만들어 주셔서 몸이 아플 때도 찬양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들이 원망할만한 상황에서도 감사! 한다. 밤낮 술만 퍼마시며 일도 잘 하지 않는 남편을 둔 분식집 아줌마가 이렇게 감사하는 것을 들을 때 누가 감동을 안 받겠나? “하나님, 우리 남편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남편이 아니었으면 예수님도 안 믿었을거에요. 하나님, 감사드려요.” 또 기도에는 간구(Supplication)가 있다. 우리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간절히’라는 말은 고문대에서 고문당할 때의 격한 심정을 나타낸다. 그런 뜨거운 열심으로 간구하도록 하자. 또 방언(Glossolalia)을 빼놓을 수 없다.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도이며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2). 방언기도는 7가지 유익이 있다. 마지막으로 중보기도(도고, Intercession)를 빼놓을 수 없다.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너무나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한다면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기도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Jesus First), 다른 사람을 두 번째 자리에(Others Second), 당신 자신을 세 번째 자리에(Yourself Third) 놓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더욱 놀라운 기도응답과 신령한 기쁨(Joy)을 주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원한다면 기도할 때마다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기도와 간구의 제목에만 몰두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에게 더욱 몰두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것이다. 기도할 때마다 매일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찬양과 감사야말로 진정으로 능력있는 기도이다. 또 자백기도를 잘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나 기도가 막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시험에 잘 들지 않을 것이다. 반면 자백기도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심령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퍅하게 되기 싶다. 찬양, 감사, 자백, 중보의 기도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것이다. 반면 간구의 기도와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원수를 대적! 하며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찬양, 감사, 자백, 간구, 방언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힘써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자. 6) 믿음으로 기도하라 우리가 그분께 효력 있는 기도를 하고자 한다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기도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먼저 마음을 잠잠케 한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사 30:15) In repentance and rest is your salvation. In quietness and trust is your strength(NASB).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비결은 돌이켜 안식하는데 있다. 힘을 얻는 비결은 잠잠하고 신뢰하는데 있다. 기도할 때 마음을 분요케 하지 말라. 혼자 막 떠들다 공허해지지 말라. 잠잠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라.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말고 돌이켜 조용히 안식하라. 믿음은 내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다. 둘째, 끈질기게 구한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끈길긴 태도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끈질기게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밤중에 친구에게 가서 빵 세 덩이를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럴 때도 계속 끈질기게 부탁하면 들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1:5-9). 또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주 가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면 얼마동안은 듣지 않겠지만 계속 끈질기게 구하면 설사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도 귀찮아서 들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끈질긴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응답을 볼 것이다(눅 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7,8)
셋째,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한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가끔 우리는 우리가 응답받기 원하는 기도제목에 사로잡힌 나머지 마치 하나님께 협박하고 강요하듯이 기도할 때가 있다. 우리가 소원을 따라 기도하더라고 언제나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또 처음부터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더욱 담대하게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 안에 평안히 거해야 한다. 또 그분의 말씀이 편안히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포도나무인 주님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열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동 맺혀질 수 밖에 없다. 기도응답은 일종의 열매다. 기도의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 때 자동 맺혀질 수 밖에 없다. 다섯째,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고 통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할 필요가 있다. 가장 능력있는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여섯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는 바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신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기도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분을 대신하여 그분의 사랑과 감정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나를 잊고 그리스도가 기도하시는 것처럼 기도하자. 우리의 모든 기도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약속하신 말씀처럼 기도응답을 확신할 수 있다. 언제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7) 역사하는 기도를 위한 제안과 조언
① 시간을 만들라- 시간이 나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 까지 사역을 하느라 바쁘셨다. 어쩔 때는 식사를 하기 어려울 만큼 바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바쁜 일과 속에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다(막 1:35). 바쁘게 생활해야 하게 되는 시간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일을 뒷전으로 하고 라도 기도할 시간을 내셨다(눅 5:15,16). ② 가장 좋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라-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은 아침 일찍이 좋다(시 5:3). 가장 능률적인 것은 하루 시작전에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루 생활이 정상적으로 리듬을 탈 수 있다. 그러나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은 억지로 일찍 일어나 봐야 졸려서 깊은 기도를 하기 어렵다. 매일 좌절만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심야시간을 기도시간으로 잡을 수도 있다. 데이빗 윌커슨은 매일 밤 12-2시까지 기도와 말씀의 시간을 가졌다. 늦게 자는 것이 습관적이 된 사람은 이것도 한 방법이다. ③ 최소한 일정한 기도시간이 확보되야 한다- 10분이 되었든, 20분이 되었든, 40분이 되었든 매일 최소한 일정한 기도시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변함없이 평생 기도하는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다. ④ 은밀한 기도처를 확보하라- 기도하는 장소는 한적한 곳이 좋다(막 1:35). 은밀하고 조용한 기도처가 좋을 것이다. 기도 안 하던 곳에서 기도하려면 적응이 필요하다. 일정한 기도처가 있으면 기도에 집중하기 좋다. 집 여건이 안 되면 옥상이나 가까운 교회를 찾을 수도 있다. 큰 소리로 기도해도 좋은 곳이면 제한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⑤ 창조적이 되라- 바쁘면 바쁠수록, 기도할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 창의적 기도를 할 수 있다. 학교운동장으로 가서 천천히 걸으며 기도할 수도 있다. 밤늦게 버스나 전철이 안 다니는 어두운 길을 갈 때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매일 새벽 2시에서부터 4시까지 기도하고 말씀을 봤다. 중국내지에 있을 때는 성냥불을 그어가며 성경을 본 후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잤다. ⑥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라- 하루종일 순간순간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 대해 항상 기도하는 법을 배우라. 즉시즉시 기도해버리라. 이는 씨를 심는 것과 같다. 약속시간에 기다릴 때, 버스나 전철을 기다릴 때, 운전 중, 공부․일 시작 전, 심지어 종이접기를 하고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다. ⑦ 간절히 탄원하는 법을 배우라- 하나님은 강하게 구할수록 기뻐하신다. 고문대에서 고문당할 때의 격한 심정으로 간절히 배수진 치는 기도를 하면 기도의 응답을 더 잘 받을 수 있다. ⑧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라- 야곱과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기도했다(창 32:9-12; 출 32:7-14).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면 믿음으로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부모라면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정말 선하신 아버지시므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신다.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언제나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 ⑨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 첫째, 불신-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기도가 방해를 받는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아무 능력도 행하실 수 없었다(막 6:5,6).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용서하지 않는 마음-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 11:25)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막힌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풀어야 한다. 셋째, 범죄-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나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한다 할지라도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기도 응답을 원한다면 먼저 죄를 해결해야 한다. 넷째, 정욕으로 구함-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정욕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하다. ⑩ 기도응답의 네 방식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Yes로, No로, 아니면 Wait로, Better로 응답하신다. 대부분의 기도는 물론 Yes로 응답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와 바울은 각각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사단의 가시가 제거될 것을 위해 기도했지만 거절당했다. No도 하나님의 응답이다. 다니엘은 기도하자마자 응답을 받았는데 그 응답은 21일을 더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다리게 하시는 것(Wait)도 하나님의 응답이다. 경우에 따라 등록금을 해결하려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는데 전액장학금을 주셔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기도 한다. 더 좋은 것(Better)을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으로 주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오직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자. ⑪ 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라 예수님은 마 6:7에서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중언부언은 의미없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다. 따라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런데도 여러 이방 종교에서는 주문처럼 의미없는 말을 반복할 때가 있다. 이런 걸 예수님은 중언부언한다고 말씀한다. 왕상18:26에서 바알선지자들은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며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행19:34에서 에베소 사람들이 “크다 에베소 사람의 에데미여” 하며 두시간씩 이 말을 반복하며 외쳤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주문 외듯이 반복하여 그들의 신을 부를 때가 있다. 또 어느 종교에는 기도할 때 기도문이 들어있는 북을 돌리는 풍습이 있다. 기도윤당이라고 한다. 기도를 못하겠으니까 기도윤당을 돌리면 기도한 것으로 쳐준다. 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면서 염불한다. 염불하는 수를 세기 위해 염주를 사용하기도 한다.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불상 앞에 삼천배를 한다. 윤지원 스님과 함께 하는 매월 삼천배 철야기도. 이런 경향은 가톨릭에서 묵주를 세는 것에서 나타난다. 주기도문을 150회 반복! 하여 왼다든지 하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유대인들도 하루 세 번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했다. 그 시간만 되면 모든 것을 멈추고 쉐마(Shema)를 낭송했다. 쉐마는 신6:4-9, 신11:13-21, 민15:37-41의 말씀인데 습관적으로 이 쉐마를 외웠다. 또 매일 반복해서 낭송하는 18개의 기도문이 있었다. 이를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라 한다. 18이라는 말인데 나중에 19개가 됐으나 옛 이름대로 쉐모네 에스레라고 부른다. 이 기도문들은 짧고 훌륭한 기도문들이다. 경건한 자는 쉐마나 쉐모네 에스레를 진심으로 기도드렸으나 대부분 여러 번 반복되는 동안이 의미 없이 중얼거리기만 해서 형식에 그치게 되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을 위해 요약된 기도문도 나왔다. 기도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말로만 지껄이는 경향이 되고 말았다. 대부분 이렇게 기계적으로 기도하면서 어떤 소원을 비는 것은 자신의 이기적 동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삼천 배를 하면서 소원의 성취만 바란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마26:44에 보면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동일한 기도를 3번 반복하여 드리셨다. 시136편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란 말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기복 신앙이 문제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기도하는 의미가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바꾸어 어떻게든지 자기 뜻대로 해달라고 설득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솔직히 토해내라.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효력있는 기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무슨 주문이나 외서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무속신앙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 뿐이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아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기도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두 손을 든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항복한다는 의미이다.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 대해 대단히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신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께 우리의 진심을 토하며 결국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해야 한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우리는 어찌하든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다른 시간은 몰라도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적지 않은 비중을 두고 우리의 시간을 사용해야겠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막 1:35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다. 또 눅 6:12에 의하면 철야로 밤이 맞도록 기도했다. 구약에 보면 솔로몬의 기도도 굉장히 길었다. 평소 대화를 하지 않던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하려면 이상하게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대화를 많이 한 사람과 얘기할 때는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다. 기도도 하나님과 교제를 많이 하면 할수록 길어진다. 어쩌다 한 번 기도하려니까 기도할 내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짧지 않은 시간을 기도에 투자해야 한다. 이것보다 더 투자한 것에 대한 이익배당이 많은 것은 없다. 믿음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 痢? 모두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