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었다고 해보자. 갈빗대 서너 개가 부러져서 근육을 뚫고 삐져나오고, 한때는 죽은 짐승의 시체와 죽은 식물의 잎새로 채워졌던 나의 내장이 주르르 흘러나왔다고 해보자.
그리하여 시뻘겋게 부릅뜬 내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이글거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내보지 못한 아니 내볼 수 없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이글거리던 두 눈이 서서히 풀어져 갈 때, 너를 쳐다보거나 죽은 이웃을 바라보는, 아아, 부드럽거나 서러운 그 나름대로의 명백한 눈빛이 아닌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눈빛이 지어질 테고, 너를 내 가슴에 안아 입을 맞추거나 허무와 절망에 찌들려서 내뱉던 신음소리가 아닌 그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신음소리를 낼 것이고, 그리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기 전까지는 나는 결코 옆구리를 곡괭이로 찍혔을 때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 것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여자 발 / 김영승
말간 소주
놋쇠 대야에 부어놓고
그 여자 발 하얀 그 발
조심스레 씻겨주며
내 한 잔씩 퍼마시면
아름답기에 잊은 번뇌
내 혀에 와 닿겠네.
술 얘기 / 김영승
제 버릇 개 주랴만
술이 좋아 좋구도 남지 좋아서 마신다
술은 그냥 술이로되
술 속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술은 액체로 된 꿈
떠올리고 싶을 때 떠올려지는
잃어버린 것들
사라져버린 것들 그런 것들
흐르고 흘러서 모여진
강의 하류와도 같은 것
흰 돛은 달 작은 배가
술잔 속에 어우러지면
여자들이 어머 너 예뻐졌다 하는 말처럼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리듯
자네 취했구먼
그럴 수 있어서 좋다
비오는 밤 술집에서 / 김영승
어둠 속에 전등불 불빛 적시며 튀기며
비가 내리고 있다.
소줏잔 만큼만 그 비를 받아
조금씩 마시고도 싶은
마시면서 아무 표정도 짓고 싶지 않은
이 밤
흐린 눈빛으로 無心히
의자 뒤로 한쪽 팔을 늘어뜨린
목이 긴 女子를 바라본다.
내 어머니의 웃음이나
그와 비슷하게 슬픈
그밖의 모습이 눈에 어리거나
꽹가리 치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출렁이는
긴 눈썹.
순대와 삶은 돼지대가리가 널려 있는
原色의 赤裸裸한 술집에서
나는 술을 마시고 있다.
비가 더 오기 전에 가야 하는데
비는 더 올 것만 같은데
미아리에서 서울역까지
발검음도 强하게
도장처럼 낙인처럼 꽝꽝꽝꽝
젖은 땅을 찍으며 가야 하는데
나보다도 옹졸하게
누군가가 울고 있다.
빗물에 발을 담그고 비를 맞고 싶은 이 밤
울고 있는 그 사나이
나는 결국 그를 만나고 싶어진다.
내 척박한 가슴에 온 봄 / 김영승
우리 동네 향긋한 들길 걸으면 두엄냄새
상큼히 코끝 찌르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학동들
등에 맨 예쁜 가방 위에 쌓인
변두리 황토 흙먼지
과수원 나무 사이사이 쥐불은 검게 타고
목장 젖소들 음매음매 되새김질 하는데
작은 교회 지붕에 숟가락처럼 걸린 십자가도
눈물겹고 이제 다시 돌아온 탕자의
무거운 발길 또 무섭다
무슨 변고가 또 있을까
나 같은 죄에 물든 미물도 다 살아가는데
새싹이 돋을 거라고 꽃이 또 필 거라고
그 무슨 못다 기다린 슬픈 사람이 남아 있다고
봄비가 내리듯 술로 적셔야겠다
썩은 고목에 버섯이라도 돋게 해야겠다.
괴로우냐? / 김영승
괴로우냐?
더 괴로워 하여라.
소뿔에 낀 때처럼
알게 모르게 반질반질
닳다가 닳은 채로 반짝이다가
처음 같은 끝
얻은 것 다시 돌려 주고 땜땜
발 구르듯 애타는 거.
그 그림자 아쉬워라 무슨
까닭으로 내 눈매에 얼음에 물 번지듯
물 그림자 엷게엷게 지는 것이냐.
헤아릴 수 있는 건
헤아릴 수 있기에 섧다.
바닷속 깊은 건 깊다고만 해야 된다
들어가 보면 끝이 있는 밑바닥이 드러날 테지만
끝이 없는 것처럼 놔두어야 한다.
괴로우냐?
더 괴로워 하여라.
情든 女子 / 김영승
곰보 女子와 살아도
오랜 歲月 함께 지내다 보면
곰보 그 구멍구멍마다 情이 담뿍 담겨
모든 게 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게만
보인다던데
머리털을 태워
따뜻하게 해주고 싶을 만큼
내 마음을 안타까왔는데
떠나간 사람.
나는 왜 술만 마셨을까
아아, 나는 왜 그토록 술만 마셨을까
울어야 하는데
이리처럼 새끼 잃은 野獸처럼
밤새도록 울어야 하는데
盞을 쥐고 또 히죽히죽
나는 웃고 있다.
그냥 술집 / 김영승
나는 내 곁에 남아 있는
巨大하지만 외롭고
그림처럼 풀잎처럼 다만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인
多數일 수 없는 나의 心友와
술집을 내고 싶다
나의 詩처럼
題하여 그냥 술집
人生을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술을 마시다가
日沒처럼 그냥 또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
아쉬움이나 서러움이나
한때의 醉興이나
모두모두 그냥 가져가 주었으면 좋겠다.
권태 / 김영승
아빠인 내가, 아니 '아빠'인지 '아비'인지 '아버지'인지 '嚴父'인지 'papa', 'father', 'daddy'인지 잘 모르겠는, 여하튼 그를 이 세상에 생겨나게 한 공범, 남성측 피고로서의 내가 특별한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서 그런지, 이제 19개월 된 내 아들 인겸이는, 부국사료주식회사 다니는 대머리가 지난 추석 선물로 갖다준 참치 세트의 참치 통조림을 갖고 노는데, 요즘은 그걸 아내의 화장대 위에 네 개씩 쌓아놓고는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그렇게 까르르까르르 좋아라 웃어서 나는 그것을 보고 譽之曰,
"多歪堂 吝醒軒 혜이室 主人詩人어人堂 金榮承之子吝謙天使菩薩四層사조 로하이 참치깡통寶塔"
이라 命名하고 나도 역시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그렇게 까르르까르르 좋아라 웃어본다. 그리고 나서
'아 고년들 참 되게 이쁘다'하며 신문을 들여다보는데 으잉? 동아일보 1991년 11월 8일 금요일자엔 '서울경찰청 여자 기동대는 7일 밤 이태원 등지의 <게이바> 3곳을 덮쳐 여장 남자 접대부 28명을 적발해 모두 즉심에 넘겼다 <石東律 기자>'라는 설명과 함께, 늘씬한 다리에 하이힐 영락없는 여자 같은 호모새끼들이 죽 서 있는 사진이 나온다. 또 보니까 역시 동아일보 1991년 11월 일요일자 사설엔 <12살짜리 접대부를 둔 사회>라는 제목의 사설이 나온다.
나는 딸이 없지만, 내 딸을 어떤 인신매매단이 납치해 갔다면, 나는 백사를 물리고, 나의 門徒 100만과 함께, 일제히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기관단총과 수류탄, 石弓, 毒針, 무반동砲 등으로 무장을 해서, 기관단총과 실탄은 첼로 박스에 넣고 수류탄은 산타클로스 그 선물 보따리 자루에 넣고, 전국 방방곡곡의 영계 술집을 찾아 다니는 게 아니라, 청와대, 경찰청, 대법원, 검찰청, 대기업, 병원, 신문사, 백담사, 송광사, 조계사, 국회의사당, 명동성당, 여의도순복음 교회, 독립기념관 등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아웅산을 만들어버릴 것이니, 찔리는 놈들, 그런 줄 알고 있어라.
봄, 희망 / 김영승
일곱달째 신문대가 밀려
신문도 끊겼다
저녁이면 친구인 양 받아보던 신문도
이젠 오질 않는다
며칠 있으면 수도두 전기도 끊길 것이다.
며칠 있으면
이 생명도 이 몸에서 흘리던 핏줄기도
끊길 것이다
은행의 독촉장과 법원의 최고장
최후통첩장
수많은 통고장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아내가 보낸 절교장도
그 위에 놓여 있다.
진달래가 피었노라고
아내에게 쓰던 편지 위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가장 빛나는 것을
나는 한 장 집어 들었다.
가을 새벽 / 김영승
- 떠나간 아내의 생일
새벽 바람이 벌써
차다
라면을 사야할 돈으로
소주를 마셨던 지난 날
포근한 아내의 품이
그립다
올해도 내 가슴엔 먼저
눈이 쌓였다.
교회당 톱밥 난로 같은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
덜컹거리는 소리……
물에서 건진 듯
전깃줄이 깨끗하다.
슬프도록 아늑한 게 뭘까
생각 안 날 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춥다.
겨울 슬픈 겨울 / 김영승
동창이 밝았느냐 동창이 밝았으렴
굶는 늙은이 우지진다 굶는 늙은이 우지지렴
개 잡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개 잡는 아이는 푹 쉬렴
쓰레기 더미 속 야윈 똥개는 잡아 무삼 하리요
태평가를 부르거나 절명시를 쓰거나
세상은 제멋대로 웃고 울고 개판인데
길은 미끄럽고 눈발은 흩날리는데
보따리 든 내 어머니 뇌진탕 걸리시겠네
술 취한 젊은 시인 또 돌아가시겠네
동창이 하염없이 끝없이 천 번 만 번 밝았으렴.
몸 하나의 사랑 / 김영승
몸 하나의 생김
몸 하나의 흔들림, 몸 하나의 쓰러짐
하늘로부터 굵게 꺾어진
꺾어져서 땅 위에 박힌
펄떡 펄떡 뛰는 이 부드러운
빛나는
몸 하나의 나뉘어짐, 몸 하나의 흐트러짐
그 치솟는 힘에 짓눌리어
찢어져 가는
몸 하나의 노래
아무 까닭 없이 꿈틀거리는
비비 꼬이다가 다 풀어질 때까지
그냥 그러기만 하는
몸 하나의 시뻘건 자국
땡볕 속에 모래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몸 하나의 그림자
몸 하나의 없어짐
나팔꽃 / 김영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뒷뜰 나무담장에서도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은
밤새도록 하늘은 썩고
하늘은 물이 되고
물이 되어 맺힌다 눈물이 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 되어
빨간 살점 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위에
그리고 웃는다
찢어진 나뭇잎 새로
햇살은 방울방울 구비구비 흐르고
내가 입술을 대기 전에
벌써 떨린다
내가 입술을 대면
주르륵 흐르는 눈물
그러나 나는 먼저 울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빨갛게 타오르다가
내가 입술을 떼기 전에
내 발에 밟힌다
그리고는 또 언제나 그랬던 여름을 보내 버린다
취객의 꿈 / 김영승
댁은 뉘시요?
그저 일개 초개와 같은 과객이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가 또 아쉬워 예서제서 숨을 찾는 뿌려진 꽃잎 같은 취객이올시다. 내 앞에서 흐르는 이제는 슬픈 한 여인을 바라보며 바닷가에 앉아 모래처럼 부서진 내 영혼을 세며 기나긴 세월 쉽게쉽게 보내지요. 하얀 조가비 그걸 집어 내 몸 어디부터 가릴까요? 하얀 조가비 그 예쁜 잔에 맑은 술을 따라 출렁이는 바닷물 같은 이 식은 대지를 마셔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설 땅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래서 댁은 무얼 하십니까?
남들처럼 외롭고 마셔 버리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득한 생각에 잠겨 있지요. 내 손이 닿아보지 않은 그리고 노형의 손도 닿아보지 않은 저 하늘을 처녀막처럼 찢고 그리고 피를 흘리겠습니다. 하늘의 푸른 빛 그건 바로 내 핏줄 속을 흐르는 내 피의 빛이고 싶습니다.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신사처럼 내 머리에 쓰고 다녔던 저 하늘을 벗고 그리고 정중히 죽어야지요. 죽음은 이 무례한 놈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사입니다.
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었다고 해보자. 갈빗대 서너 개가 부러져서 근육을 뚫고 삐져나오고, 한때는 죽은 짐승의 시체와 죽은 식물의 잎새로 채워졌던 나의 내장이 주르르 흘러나왔다고 해보자.
그리하여 시뻘겋게 부릅뜬 내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이글거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내보지 못한 아니 내볼 수 없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이글거리던 두 눈이 서서히 풀어져 갈 때, 너를 쳐다보거나 죽은 이웃을 바라보는, 아아, 부드럽거나 서러운 그 나름대로의 명백한 눈빛이 아닌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눈빛이 지어질 테고, 너를 내 가슴에 안아 입을 맞추거나 허무와 절망에 찌들려서 내뱉던 신음소리가 아닌 그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신음소리를 낼 것이고, 그리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기 전까지는 나는 결코 옆구리를 곡괭이로 찍혔을 때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 것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여자 발 / 김영승
말간 소주
놋쇠 대야에 부어놓고
그 여자 발 하얀 그 발
조심스레 씻겨주며
내 한 잔씩 퍼마시면
아름답기에 잊은 번뇌
내 혀에 와 닿겠네.
술 얘기 / 김영승
제 버릇 개 주랴만
술이 좋아 좋구도 남지 좋아서 마신다
술은 그냥 술이로되
술 속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술은 액체로 된 꿈
떠올리고 싶을 때 떠올려지는
잃어버린 것들
사라져버린 것들 그런 것들
흐르고 흘러서 모여진
강의 하류와도 같은 것
흰 돛은 달 작은 배가
술잔 속에 어우러지면
여자들이 어머 너 예뻐졌다 하는 말처럼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리듯
자네 취했구먼
그럴 수 있어서 좋다
비오는 밤 술집에서 / 김영승
어둠 속에 전등불 불빛 적시며 튀기며
비가 내리고 있다.
소줏잔 만큼만 그 비를 받아
조금씩 마시고도 싶은
마시면서 아무 표정도 짓고 싶지 않은
이 밤
흐린 눈빛으로 無心히
의자 뒤로 한쪽 팔을 늘어뜨린
목이 긴 女子를 바라본다.
내 어머니의 웃음이나
그와 비슷하게 슬픈
그밖의 모습이 눈에 어리거나
꽹가리 치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출렁이는
긴 눈썹.
순대와 삶은 돼지대가리가 널려 있는
原色의 赤裸裸한 술집에서
나는 술을 마시고 있다.
비가 더 오기 전에 가야 하는데
비는 더 올 것만 같은데
미아리에서 서울역까지
발검음도 强하게
도장처럼 낙인처럼 꽝꽝꽝꽝
젖은 땅을 찍으며 가야 하는데
나보다도 옹졸하게
누군가가 울고 있다.
빗물에 발을 담그고 비를 맞고 싶은 이 밤
울고 있는 그 사나이
나는 결국 그를 만나고 싶어진다.
내 척박한 가슴에 온 봄 / 김영승
우리 동네 향긋한 들길 걸으면 두엄냄새
상큼히 코끝 찌르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학동들
등에 맨 예쁜 가방 위에 쌓인
변두리 황토 흙먼지
과수원 나무 사이사이 쥐불은 검게 타고
목장 젖소들 음매음매 되새김질 하는데
작은 교회 지붕에 숟가락처럼 걸린 십자가도
눈물겹고 이제 다시 돌아온 탕자의
무거운 발길 또 무섭다
무슨 변고가 또 있을까
나 같은 죄에 물든 미물도 다 살아가는데
새싹이 돋을 거라고 꽃이 또 필 거라고
그 무슨 못다 기다린 슬픈 사람이 남아 있다고
봄비가 내리듯 술로 적셔야겠다
썩은 고목에 버섯이라도 돋게 해야겠다.
괴로우냐? / 김영승
괴로우냐?
더 괴로워 하여라.
소뿔에 낀 때처럼
알게 모르게 반질반질
닳다가 닳은 채로 반짝이다가
처음 같은 끝
얻은 것 다시 돌려 주고 땜땜
발 구르듯 애타는 거.
그 그림자 아쉬워라 무슨
까닭으로 내 눈매에 얼음에 물 번지듯
물 그림자 엷게엷게 지는 것이냐.
헤아릴 수 있는 건
헤아릴 수 있기에 섧다.
바닷속 깊은 건 깊다고만 해야 된다
들어가 보면 끝이 있는 밑바닥이 드러날 테지만
끝이 없는 것처럼 놔두어야 한다.
괴로우냐?
더 괴로워 하여라.
情든 女子 / 김영승
곰보 女子와 살아도
오랜 歲月 함께 지내다 보면
곰보 그 구멍구멍마다 情이 담뿍 담겨
모든 게 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게만
보인다던데
머리털을 태워
따뜻하게 해주고 싶을 만큼
내 마음을 안타까왔는데
떠나간 사람.
나는 왜 술만 마셨을까
아아, 나는 왜 그토록 술만 마셨을까
울어야 하는데
이리처럼 새끼 잃은 野獸처럼
밤새도록 울어야 하는데
盞을 쥐고 또 히죽히죽
나는 웃고 있다.
그냥 술집 / 김영승
나는 내 곁에 남아 있는
巨大하지만 외롭고
그림처럼 풀잎처럼 다만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인
多數일 수 없는 나의 心友와
술집을 내고 싶다
나의 詩처럼
題하여 그냥 술집
人生을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술을 마시다가
日沒처럼 그냥 또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
아쉬움이나 서러움이나
한때의 醉興이나
모두모두 그냥 가져가 주었으면 좋겠다.
권태 / 김영승
아빠인 내가, 아니 '아빠'인지 '아비'인지 '아버지'인지 '嚴父'인지 'papa', 'father', 'daddy'인지 잘 모르겠는, 여하튼 그를 이 세상에 생겨나게 한 공범, 남성측 피고로서의 내가 특별한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서 그런지, 이제 19개월 된 내 아들 인겸이는, 부국사료주식회사 다니는 대머리가 지난 추석 선물로 갖다준 참치 세트의 참치 통조림을 갖고 노는데, 요즘은 그걸 아내의 화장대 위에 네 개씩 쌓아놓고는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그렇게 까르르까르르 좋아라 웃어서 나는 그것을 보고 譽之曰,
"多歪堂 吝醒軒 혜이室 主人詩人어人堂 金榮承之子吝謙天使菩薩四層사조 로하이 참치깡통寶塔"
이라 命名하고 나도 역시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그렇게 까르르까르르 좋아라 웃어본다. 그리고 나서
'아 고년들 참 되게 이쁘다'하며 신문을 들여다보는데 으잉? 동아일보 1991년 11월 8일 금요일자엔 '서울경찰청 여자 기동대는 7일 밤 이태원 등지의 <게이바> 3곳을 덮쳐 여장 남자 접대부 28명을 적발해 모두 즉심에 넘겼다 <石東律 기자>'라는 설명과 함께, 늘씬한 다리에 하이힐 영락없는 여자 같은 호모새끼들이 죽 서 있는 사진이 나온다. 또 보니까 역시 동아일보 1991년 11월 일요일자 사설엔 <12살짜리 접대부를 둔 사회>라는 제목의 사설이 나온다.
나는 딸이 없지만, 내 딸을 어떤 인신매매단이 납치해 갔다면, 나는 백사를 물리고, 나의 門徒 100만과 함께, 일제히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기관단총과 수류탄, 石弓, 毒針, 무반동砲 등으로 무장을 해서, 기관단총과 실탄은 첼로 박스에 넣고 수류탄은 산타클로스 그 선물 보따리 자루에 넣고, 전국 방방곡곡의 영계 술집을 찾아 다니는 게 아니라, 청와대, 경찰청, 대법원, 검찰청, 대기업, 병원, 신문사, 백담사, 송광사, 조계사, 국회의사당, 명동성당, 여의도순복음 교회, 독립기념관 등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아웅산을 만들어버릴 것이니, 찔리는 놈들, 그런 줄 알고 있어라.
봄, 희망 / 김영승
일곱달째 신문대가 밀려
신문도 끊겼다
저녁이면 친구인 양 받아보던 신문도
이젠 오질 않는다
며칠 있으면 수도두 전기도 끊길 것이다.
며칠 있으면
이 생명도 이 몸에서 흘리던 핏줄기도
끊길 것이다
은행의 독촉장과 법원의 최고장
최후통첩장
수많은 통고장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아내가 보낸 절교장도
그 위에 놓여 있다.
진달래가 피었노라고
아내에게 쓰던 편지 위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가장 빛나는 것을
나는 한 장 집어 들었다.
가을 새벽 / 김영승
- 떠나간 아내의 생일
새벽 바람이 벌써
차다
라면을 사야할 돈으로
소주를 마셨던 지난 날
포근한 아내의 품이
그립다
올해도 내 가슴엔 먼저
눈이 쌓였다.
교회당 톱밥 난로 같은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
덜컹거리는 소리……
물에서 건진 듯
전깃줄이 깨끗하다.
슬프도록 아늑한 게 뭘까
생각 안 날 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춥다.
겨울 슬픈 겨울 / 김영승
동창이 밝았느냐 동창이 밝았으렴
굶는 늙은이 우지진다 굶는 늙은이 우지지렴
개 잡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개 잡는 아이는 푹 쉬렴
쓰레기 더미 속 야윈 똥개는 잡아 무삼 하리요
태평가를 부르거나 절명시를 쓰거나
세상은 제멋대로 웃고 울고 개판인데
길은 미끄럽고 눈발은 흩날리는데
보따리 든 내 어머니 뇌진탕 걸리시겠네
술 취한 젊은 시인 또 돌아가시겠네
동창이 하염없이 끝없이 천 번 만 번 밝았으렴.
몸 하나의 사랑 / 김영승
몸 하나의 생김
몸 하나의 흔들림, 몸 하나의 쓰러짐
하늘로부터 굵게 꺾어진
꺾어져서 땅 위에 박힌
펄떡 펄떡 뛰는 이 부드러운
빛나는
몸 하나의 나뉘어짐, 몸 하나의 흐트러짐
그 치솟는 힘에 짓눌리어
찢어져 가는
몸 하나의 노래
아무 까닭 없이 꿈틀거리는
비비 꼬이다가 다 풀어질 때까지
그냥 그러기만 하는
몸 하나의 시뻘건 자국
땡볕 속에 모래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몸 하나의 그림자
몸 하나의 없어짐
나팔꽃 / 김영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뒷뜰 나무담장에서도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은
밤새도록 하늘은 썩고
하늘은 물이 되고
물이 되어 맺힌다 눈물이 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 되어
빨간 살점 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위에
그리고 웃는다
찢어진 나뭇잎 새로
햇살은 방울방울 구비구비 흐르고
내가 입술을 대기 전에
벌써 떨린다
내가 입술을 대면
주르륵 흐르는 눈물
그러나 나는 먼저 울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빨갛게 타오르다가
내가 입술을 떼기 전에
내 발에 밟힌다
그리고는 또 언제나 그랬던 여름을 보내 버린다
취객의 꿈 / 김영승
댁은 뉘시요?
그저 일개 초개와 같은 과객이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가 또 아쉬워 예서제서 숨을 찾는 뿌려진 꽃잎 같은 취객이올시다. 내 앞에서 흐르는 이제는 슬픈 한 여인을 바라보며 바닷가에 앉아 모래처럼 부서진 내 영혼을 세며 기나긴 세월 쉽게쉽게 보내지요. 하얀 조가비 그걸 집어 내 몸 어디부터 가릴까요? 하얀 조가비 그 예쁜 잔에 맑은 술을 따라 출렁이는 바닷물 같은 이 식은 대지를 마셔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설 땅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래서 댁은 무얼 하십니까?
남들처럼 외롭고 마셔 버리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득한 생각에 잠겨 있지요. 내 손이 닿아보지 않은 그리고 노형의 손도 닿아보지 않은 저 하늘을 처녀막처럼 찢고 그리고 피를 흘리겠습니다. 하늘의 푸른 빛 그건 바로 내 핏줄 속을 흐르는 내 피의 빛이고 싶습니다.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신사처럼 내 머리에 쓰고 다녔던 저 하늘을 벗고 그리고 정중히 죽어야지요. 죽음은 이 무례한 놈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사입니다.
첫댓글김영승 시인을 존경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위선이 없고 솔직한 시인...시를 쓰는 마음이 이분처럼 써야 하는데... 글이 뒷바침 되지 않으니 때로는 시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끝없이 갈등하며 자신을 낮추어야 진솔한 글이 나오는데 마음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교만의 잔뿌리가 뽑히지 않으니 큰 걱정입니다. 김영승 시인의 시...감사합니다 저 자신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술과 외로움' 이라는 시에 더 마음이 머뭅니다
첫댓글 김영승 시인을 존경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위선이 없고 솔직한 시인...시를 쓰는 마음이 이분처럼 써야 하는데... 글이 뒷바침 되지 않으니 때로는 시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끝없이 갈등하며 자신을 낮추어야 진솔한 글이 나오는데 마음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교만의 잔뿌리가 뽑히지 않으니 큰 걱정입니다. 김영승 시인의 시...감사합니다 저 자신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술과 외로움' 이라는 시에 더 마음이 머뭅니다
김시인은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랍니다. 지금은 대학 강단에 계시고....
그러시군요. 모든 걸 갖추신 분이시군요
이태백도 지금은 주선이니 시선이니 하지만은....본인은 몰랐을거라....그 것을 본인이 의식했다면 그런 시가 나올 수 없었을 거고...문득 그런 생각이 나는구나....나도 어젯밤 술 먹으며 써 놓은 거....무슨 글자인지 봐야것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