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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전향
[문학의 현장] “나는 오늘도 처음으로 시를 만난다” / 고은 | ||||||||||||||||
정리 = 박미산 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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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시론 시는 은유인가요? 은유가 아닌가요? 다른 사물을 끌어다가 어떤 사물을 장식하는 은유라면 그것은 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은유의 폭력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의 안에 다가가 그 사물의 밖이 되어 줄 때, 힘들 때, 헌신할 때, 하나의 실가닥 두 끝은 자아와 타자일 때, 비로소 시는 은유로 살고 은유로 죽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의 은유는 자아의 타자화이고 타자의 자아화입니다. 자아와 타자의 동시율을 이룰 때겠지요. 어디 그게 시뿐이겠습니까? 어디 그것이 생명, 또는 생물뿐이겠습니까? 연속공생설로서의 모든 생물은 지금도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신과 물체의 동시성, 마음과 육체의 공시성, 동시성. 우리는 그 사실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이 방 안의 이 동시성을 나는 갈망합니다. 여러분과 나와의 동시성 말입니다. 그렇다면 울음은 무엇일까요? 그 본능이야말로 생명의 율동으로 자신의 환경을 진동시키는 것입니다. 그 울음은 저 혼자만의 울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과 함께합니다. 이 공명음이야말로 인간의 첫 번째 시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가장 위대한 시는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터뜨리는 첫 울음소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 하나하나는 태어나자마자 본성으로서의 시인이 됩니다. 죽음 앞에서 생존자는 통곡합니다. 죽음을 통해서 시인의 울음, 시의 울음, 시에 꽃을 바칩니다. 이라크 지방에서 발견된 6만 년 전의 화석에서 소년의 주검 머리맡에 씨앗이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 충청북도 두루봉 동굴의 4만 년 전 화석에도 소년의 머리맡에 국화꽃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죽음의 하염없는 아주 오랜 슬픔과 꿈 또한 인간의 첫 울음과 함께 시의 생명이지요. 세상에 함께 있던 피붙이를 저세상으로 보낼 때 아주 좋은 곳으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 염원만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시입니다. 시는 뭔가요? 인간의 첫 울음입니다. 시는 무엇인가요? 시는 시입니다. 시는 시이고 시이고 시입니다. 그리고 어둠에서 밝음(빛)으로 가는 것이 시입니다. 모든 문제들 끝에 “그것은 시이다.”라고 대답하는데 바로 이것이 시입니다. 시는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닙니다. 그리스의 호메로스 훨씬 전, 상고시대 수메르의 시인이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시를 점토판에 발표했습니다. 그 이래 지구상의 수많은 시들이 시이기 전에, 언어 이전에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불려온 우주의 작은 울음소리가 바로 시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바람 속에서, 어둠 속에서, 우리의 핏줄 속에서 풀잎, 사자, 거위와 거위들의 새끼들이 울어서 시의 세계에 동참합니다. 그래서 시를 삶의 연가와 죽음의 만가 사이의 총칭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시란 무언가요? 시란 세상의 떨림, 즉 울림입니다. 시는 세계의 내어입니다. 즉 안의 언어입니다. 내어가 넘쳐 울음이 되고 노래가 되고 문자 형식의 언어가 됩니다. 이것이 곧 자유의 문법이고 문법의 자유입니다. 언어는 인간의 일차 언어로서 의사전달을 하는 일상 언어와 이차 언어로서 표현 언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차 언어로서의 일상 언어는 끝내 전복되기 때문에 이차 언어야말로 일차 언어 이상으로 근본 언어입니다. 처음에 시가 있고 일상이 있는 것입니다. 시는 절대로 혼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고려시대의 정지상은 “시는 자기 혼자 쓰는 게 아니라 귀신과 함께 쓴다.”고 하였습니다. 한 편의 시는 세계, 우주 혹은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이 총동원되어서 그것이 핵화되는 것입니다. 한 우화가 있습니다. 한반도 북방에는 활 잘 쏘는 동이족인 우리의 조상들이 있었습니다. 화살을 쏠 경우 고도의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고도의 정신력으로 집중하여 화살을 쏘아야만 고도의 적중률이 달성됩니다. 그들의 화살은 늘 고도의 적중률을 예감했지요. 환영, 표적, 적중, 관중 이런 말들은 역대 우리 조상의 오랜 사실을 우리에게 짐작하게 합니다. 활꾼은 귀신의 혼과 자신의 마음을 합하여 동시를 이룹니다. 이것이 무언가요? 정신과 육체의 동시, 원과 근의 동시, 적과 아군의 동시, 이 모든 것이 동시이겠지요. 또 하나의 우화는 ‘달걀이 운다’입니다. 달걀은 일생을 마칠 때가 옵니다. 달걀로만 있지는 않지요. 그냥 있으면 썩어버리니까요. 알 속의 노른자와 흰자가 섞여서 한 마리의 병아리로 변화됩니다. 《벽암록》 16측에 “줄탁동시(口卒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이라 하고, 이때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합니다. 만약 껍질 안의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껍질 바깥 어미 닭이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겠지요. 이 ‘줄탁’의 과정에서처럼 어느 한 쪽의 힘이 아닌 동시적인 힘이 모아졌을 때 비로소 병아리는 세상의 밝은 빛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껍질을 깨는 아픔이 없으면 한 생명이 태어나지 못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안과 밖의 행위가 동시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가 울며 나타납니다. 시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우주를 움직여 시가 태어나는 것이지요. 시란 태아만이 아니라 난생설화를 통해서 난생으로도 태어납니다. 시는 난생뿐이 아니라 습생으로도 태어납니다. 젖으면 뭔가 돋아나지요. 습생뿐만이 아니라 화생으로 태어납니다. 나아가서 시는 지수화풍과 함께 태어납니다. 길가메시의 끝에는 아주 재미있는 반전의 대목이 나옵니다. 길가메시는 권력의 허무 저 끝에서 진리를 찾으러 헤매다가 인도양 끄트머리에 있는 선술집에 들어갔습니다. 길가메시가 주모에게 물었습니다. “세계의 끝을 갈망하오. 세계의 끝을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가르쳐 주오.” 주모 왈 “여보, 술이나 한잔 드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없소.” 이 말엔 생의 유한의 끝, 욕망의 끝, 그가 가지 못한 세계의 끝이 내포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합치와 일치라는 동시 말고 길가메시는 없는 부동, 부동 역시 동시입니다. 그가 가지 못한 세계의 끝, 없는 그 끝, 그 부동, 그 모순조차도 동시인 것입니다. 술 한 잔에 주저앉은 길가메시는 거기에서 자신의 서사 밖의 시세계를 뜻밖에 만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이 방에서 저의 시적인 독백이 어떻게 대화가 되는 건가요? 대화가 되려면 저와 여러분과의 동시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말하자마자, 아니 말하기 전에 이미 나를 여러분이 들어 버리는 것, 이것이 시입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그것이 시가 태어나는 현장입니다. 숲 속에서 새가 울기 전에 이미 새가 노래한다고 적는 것이 시입니다. 그리고 처참한 전쟁이 끝났을 때, 송장이 널브러져 있을 때, 거기에서 그림자처럼 모든 송장들을 바라보고 가장 마지막에 돌아보는 궁극의 행위가 시입니다. 그러므로 시는 최초가 있고, 최후가 들어 있는 생사입니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젖어 버리는 것이 하나의 시가 태어나는 것이 습생이고 우리가 습생에 젖었을 때 벌레들이 우글대고 있을 때가 바로 시입니다. 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입니다. 바로 처음으로 만난 시가 제가 꿈꾸는 시이지요. 1920년대 단테의 《신곡》이 우리나라에 온전하게 번역되기 전에 《신곡》 지옥 편에 태양을 ‘해’라 노래하지 않고, ‘별’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말은 나에게 이태리의 고전이 아니라 싱그러운 근대의 이태리의 낯선 경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와 같이 시는 태어나는 그대로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처음으로 시가 됩니다. 문자언어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에 화학물질처럼 전혀 다른 언어 세계를 여는 것이 시의 운명입니다. 시는 실체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시는 넋입니다. 무거운 형식의 전통과 봉건적인 관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입니다. 시가 시인을 저주한다는 두보의 탄식과는 달리 시는 그 시를 낳은 시인조차 시를 만들어버리는 상태, 이것이 시입니다. 나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9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습니다. 입학하고 일본어와 조선어를 함께 공부하다가 2년 후엔 일본어만으로 학습했지요. 모국어 사용이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논어》와 《시경》은 어렸을 적에 공부했고, 동네 머슴한테 한국어를 따로 배웠습니다. 집에서는 아버님께서 《장화홍련전》을 밤에 소리 내어 읽으시곤 했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공연히 울음이 나왔습니다. 우리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 슬픔을 몸으로 느꼈고, 음독으로써 소리를 전달하는 우리 모국어의 중요성을 알았던 겁니다. 초등학교 3학년에 해방이 되고 중학교를 들어가서 처음으로 시를 만났습니다. 그 시는 이육사의 〈광야〉입니다. 〈광야〉에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놀랍게 나타납니다. 보통의 시간이 아니라 까마득한 끝도 시작도 없는 태초의 시작인 천지창조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냥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산맥이 차마 범하지 못한 신성성이 있는 공간인 광야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도 보통 인간이 아니라 천고의 세월이 흐르고 백마 탄 초인이 나타납니다. 이육사의 〈광야〉는 대시간과 대공간과 대인간이 있습니다. 결국 이 시를 만났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나는 시인이 되었던 거지요. 16번이나 감옥을 간 이육사는 결국 16번째 북경감옥에서 고문사 당한 시인 아닙니까?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의 시로 〈광야〉는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바다는 노련한 마도로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거대한 세계의 바다 앞에 노련한 마도로스가 아니라 소년으로 표상되어 있습니다. 이 소년은 물에 빠져 죽겠지요. 결국 이것이 우리 근대의 운명이고 근대시의 시작입니다. 거대한 바다에 대응할 수 있는 허먼 멜빌의 《백경》의 노련한 마도로스가 아니라, 거대한 세계 앞에 소년으로 시작한 것이 우리 근대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해서 10년 만에 김소월이 나오고 15년 만에 정지용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용운도 나옴으로써 근대시 100년이 되었습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우리나라의 현대시는 100년이 된 겁니다. ▼절실한 이야기입니다. 나도 죽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고민은 나와 같습니다. 시는 역시 이미지로 쓰면 죽음입니다. 시는 허영이 있습니다. 청탁이 왔으니 이 시를 쓰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하는 허영은 시인의 몫이 아닙니다. 시는 마지막 양심입니다. 시를 쓸 적에 이번에 쓰는 시는 늘 최후의 시로 여길 정도로 시를 써야 합니다. ―한하운 시집 때문에 시인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말씀해 주세요. ▼이육사의 〈광야〉를 처음 보곤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가 무서웠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화가 지망생이었습니다. 인텔리겐치아인 외삼촌의 미술책에서 고흐를 봤습니다. “고흐 아니면 나는 죽는다, 나는 무다”라고 책상 앞에 써 놓을 정도로 고호의 그림에 심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방과 후에 미술부에 있다가 집에 오는데 빛이 비추어서 가 보니까 한하운의 시집이 길가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분실한 방금 산 새 책이었습니다. 그 책은 운명적으로 나에게 온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하운 시초〉를 집에 갖고 가서 시험공부는 하지 않고 새벽 3시까지 울면서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내가 문둥병을 앓을까? 문둥병에 걸려서 발가락, 눈썹이 문드러지면서 시를 쓸까? 하면서 시인이 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 이후로 전쟁이 일어나면서 내 꿈은 사라졌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의 한계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을 입었던 겁니다. ―시는 최고의 진실은 허구로부터 나온다고 하셨는데, 저는 현실 체험이 없으면 시가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1958년 등단작인 〈폐결핵〉과 〈요양소에서〉 〈사치〉 같은 시들에서 없는 누이가 많이 나옵니다. 또한 폐결핵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각혈을 하는 시도 썼습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허구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최고의 진실은 허구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나의 확신입니다. 나에게는 누님이 없었습니다. 김춘수는 나의 누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노래했으나 나는 없는 누님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폐결핵을 앓은 적이 없습니다. 노재봉과 마해송은 폐병에 걸려 마산 가포리 요양소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처럼 가포리 요양소에서 자정까지 기침하다가 새벽쯤 되면 콜록대는 소리가 안 들리는, 그런 죽음을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폐병이 걸리고 싶어서 〈폐결핵〉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폐병을 앓지 않았기 때문에 약명을 몰라 하이드리지드라고 원고를 《현대시》에 보냈는데 하이드라짓드라고 고쳐 써주어서 그 시가 《현대시》 창간 등단작이 되었습니다. 에필로그 그 디오니소스적인 매력과 지난한 운명과 열정,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가 고은 시의 힘인 것 같다. 근대시인 1세대와 1950년대의 당신이 시적 시차 없이 같은 비구름 속에서 살아왔다는 그는 《만인보》를 끝내고 나서는 《처녀》라는 형이상학적인 시집과 동과 서의 사상과 관념이 들어간 〈운명〉을 기획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육지와 용궁 세계를 연관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와 동과 서의 사상, 관념, 그 밖의 모든 것이 들어간 시인의 작품을 곧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정리 / 박미산(시인)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대단히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리글을 쓴 박미산 시인은 시사랑회 수요반에서 합평을 같이 하던 시인입니다. 2007년 세계일보로 등단했습니다. 그의 글이어서 더 반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