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들의 종
2024년 9월 1일 고전 1:18-25
1. 종들의 종
(1) 프란시스코 교황
천주교의 수장은 교황입니다. 현재 교황은 자신의 이름을 프란시스코라고 했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란시스는 12C 이탈리아 앗시시 출신의 성자입니다. 성 프란시스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하는 ‘평화의 기도’가 그의 기도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청빈과 나눔을 몸소 실천한 기독교 역사 속 대표적 인물입니다. 교황은 역사적으로 어떤 교황도 사용한 적이 없는 이 이름, 프란시스코를 자신의 교황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청빈을 강조한 것입니다. 교황은 교회가 가난한 자와 함께 해야 하고, 교회 자신과 성직자가 가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가난한 자를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가난한 자를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요즈음 보면 목사님들 가운데 부유해지려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한복을 입고 서양 춤을 추는 것처럼 맞지 않는 겁니다. 어떤 큰 교회의 목사가 교회 돈을 횡령했다하여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는 어마어마한 비자금을 조성하여 관리했다고 하지 않나 뭔가 좀 이상해졌습니다. 교회와 목사들이 자꾸만 커지려고 합니다. 교회성장이 지상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몸집이 커지는 것이 반드시 성장은 아닙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려고, 부유해지려고 합니다만 가난한 것이 맞는 겁니다. 교회는 가난해야 합니다. 성직자도 가난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재정부는 늘 가난한 살림으로 긴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우리 교회가 가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넉넉해지는 것이 문젭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이지만 우리의 가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 종들의 종
또한 프란시스코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의 맨 아래, 자신의 서명 앞에 교황이란 말 대신에 Servus Servorum 이라고 썼습니다. 라틴어로 ‘종들의 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종(Servant of the Servants of God)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 종이란 말이지요. 교황이라는 말에 비해 훨씬 겸손하고 정감이 가는 표현이지요. 물론 이 말이 프란시스코 교황이 처음 사용한 말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교황이 대내외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종들의 종! 참으로 뜻깊은 말입니다.
2. 고린도전서 1:18-25
(1) 십자가의 말씀
고린도 교회는 그 안에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열이 가장 중대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이고, 교인들 사이에서의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란과 문제들에 대하여 조언하는 가운데 이러한 문제들이 바로 십자가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고전 1:18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어리석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버는 것 다 써도 모자라 죽겠는데 무슨 헌금이야”, “쉴 시간도 없어 죽겠는데, 무슨 봉사야” 하는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사(下士, 미련하고 모자란 사람)는 도(道)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서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2) 세상의 지혜, 하나님의 어리석음
21절입니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대체로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어리석게 들립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고생만 실컷 할 것 같습니다. 나만 손해 볼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게 보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어렵게 사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어리석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어리석음이 어떻게 구원을 이룰까요? 이 역설적인 사실에 ‘기독교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23-24절은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일진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야겠습니다.
3. 십자가의 도
(1) 십자가의 도
고전 1:18을 개역한글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가, 십자가의 길이, 십자가의 말씀이, 십자가의 가르침이, 십자가의 설교가 미련하게 보인다는 데 유의하십시오. 하지만 정말 유의할 것은 이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 살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하는 찬송이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오늘도 많은 이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찬송처럼 십자가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십자가를 결코 놓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셨습니다.
(2) 십자가의 가르침으로
8월 31일, 어제 날짜로 이석주장로님 교직에서 정년퇴임하셨습니다. 35년 6개월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은퇴하신 장로님께 축하하면서 당부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데, 종들의 종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로 사시길 바랍니다.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이제까지보다 더 십자가 붙드시길 바랍니다. 하루하루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의 자격까지 얻도록 수학했지만 교직으로 접었던 목회의 꿈도 현실의 생활에서 이루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풍성하고 기름진 황혼의 삶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어디 이장로님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신앙적으로 분발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더욱 가난해져야 합니다. 청빈해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청빈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욱 더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게 되어야 합니다. 이 미련하고 어리석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음이!
창조절 첫째주일,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