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하변오(言下便悟)>
‘언하변오(言下便悟)’란 말을 듣자마자, 혹은 어떤 행위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각 깨닫는 것을 말한다. 언하대오(言下大悟)와 같은 말이다.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가장 빨리 최상의 지혜를 증득한 자가
바히야 다루찌리야(Bahiya Daruciriya)였다.
바히야가 부처님을 찾아가서 설법을 청했다.
그러나 그때 부처님은 탁발 중이었다.
그래서 탁발을 끝내고 설법하겠다 했으나
바히야는 지금 법을 설해달라고 졸랐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바히야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부처님께서는 선 채로 법을 설하셨다.
“바히야! 네가 어떤 것을 볼 때 너는 네 보고 있는
그 자체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여라.
네가 어떤 소리를 들을 때에도 듣는
그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분명히 그것을 인식하여라.
네가 어떤 냄새를 맡을 때, 혹은 어떤 음식을 맛볼 때,
무엇을 만질 때, 또 네가 어떠한 것을 생각할 때에도
너는 항상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여라.
즉, ‘견견 문문 각각 지지(見見 聞聞 覺覺 知知)’ 하라는 말이다.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은 듣기만 하고,
느끼는 것은 느끼기만 하고, 아는 것은 알기만 하라.’ 이런 뜻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그것들이 다 마음의 대상일 뿐임을 알아
거기에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집착이나 싫어함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간단한 가르침을 듣자마자 바로
그 순간 바히야는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언하변오 한 것이다.
이러한 ‘언하변오(言下便悟)’란 말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언하(言下)’란 말이 떨어지자 마자라는 뜻이고,
‘변(便)’은 문득이라는 뜻이다.
‘언하변오’는 조사선(祖師禪)의 특징 중 하나이다.
말 아래 - 말끝에 문득 깨닫는 것을 말한다.
‘언하변오’를 풀어서 ‘언하(言下)에 답하다’라고도 한다.
견처(見處-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경지)가 밝아
상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응답하는 지혜를 이른다.
따라서 선문답은 언하에 답할 수 있어야
깨달은 자의 견처라 할 수 있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이라는
게송의 구절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時時勤拂拭)”라는
신수(大通神秀, 606?~706)의 게송에 대응해
헤능(慧能, 638~713)이 제출한 견처이다.
신수가 경론에 의거해 체계적인 점수의 방법론으로 깨달음을 세웠다면,
혜능은 번뇌가 본래 공한 줄을 돈오한 곳에서 닦음이 없는 무수지수(無修之修)를 강조했다.
그리고 신수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라”고 한 게송이
제도불교의 귀족적인 점수 선(漸修禪)의 상징어라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서민을 중심으로 한 돈오선(頓悟禪)의 상징어라 할 수 있다.
즉, 혜능이 노 행자(盧行者)의 신분으로 한 마디 말 아래
단박 깨달아(言下便悟) 제6대 조사가 된 파격적 입도(入道)의 기연은
점수를 뛰어넘어 남종의 돈오선 사상이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6조 혜능 선사가 언하변오 했기에 그 가르침이 선종의 특징이 됐다.
혜능이 체험한 바를 바탕으로 법을 편 게 조사선(祖師禪)의 시발점이 됐고,
이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이어져 선종이 부흥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달마(菩提達磨, ?~528) 대사를
중국 선종의 초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선이라는 새로운 선문(禪門)을 처음으로 열어젖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조는 혜능 선사이다.
언하변오의 깨달음을 말하는 선법(禪法)은
육조 혜능의 견성 체험에서 시작돼서,
마조(馬祖道一, 709∼788)와 석두(石頭希遷, 700-791) 등의
남종 선(南宗禪)으로 계승됐다.
즉, 혜능에서 시작하고 마조에서 완성된 언하변오의
새로운 중국 선(禪)이 이후 중국을 위시해 한국이나
일본으로 전파된 선불교의 기본 토대가 됐으며,
특히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으로 계승됐다.
따라서 혜능의 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바로 중국 선을 이해하는 것이다.
혜능이 경험한 두 번에 걸친 별안간의 깨달음(言下便悟)은
모두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 ―
마땅히 머물음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구절을 듣고서 깨달은 것이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내어라
[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所住而生起心)]」
여기서 혜능은 언뜻 스치는 글귀에 깨친바가 있어,
그 게 무슨 경이냐고 여쭈었다. 무식하지만 순수한 그의 심성은 열려 있었다.
다행히 주인 선비는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금강경>이라고,
그리고 황매현 동쪽 빙모산(憑母山)의 오조 홍인(弘忍, 601~674) 선사가
늘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라고 강조하는 바라고 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황매현(黃梅縣) 빙모산(憑母山)의
오조 홍인(弘忍, 601~674) 선사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혜능이 오조께 자신의 깨달음을 말한 구절이
<육조단경>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어찌 자성이 본래 깨끗함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生滅)하지 않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모자람 없이 완전함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만법(萬法)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위와 같이 혜능이 말했다는데, 이 말은 결국 아래와 같은 의미이다.
자성이 본래 깨끗하니 다시 닦을 필요가 없고,
자성이 본래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으니 다시 생멸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고,
자성이 본래 모자람 없이 완전하니 보충해 넣을 것이 없고,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으니 고요함을 찾을 필요가 없고,
자성이 만법을 만들어내니 자성을 깨달으면 만법을 깨닫는 것이다.
자성이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고, 그래서 점차(漸次)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한데 무슨 차례가 있겠는가. 따라서 견성(見性),
즉 자성만 깨달으면 그뿐, 달리 수행은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돈교(頓敎)의 기본적 태도이다.
어느 날 법성사(法性寺)라는 절 앞을 지나갈 때였다.
당간지주에 걸린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두고,
두 스님이 쟁론을 벌이고 있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당신 눈에는 펄럭이는 깃발이 보이지 않습니까?”
“깃발에 발이 달렸습니까, 손이 달렸습니까!
깃발이 움직이는 주체라면 바람 없이도 움직일 수 있어야지요.
바람 없이 움직이지 못한다면 깃발이 주체가 아니라 바람이 주체지요.”
“뭐요? 바람이란 것이 실체가 있다면 스님의 말을 인정하겠지만,
바람이란 일정한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결국 깃발이 펄럭이는 현상을 통해서만 바람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오.
따라서 깃발이 펄럭이는 현상을 부정하고
따로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스님의 말은 옳지 않소.”
이렇게 두 승려는 서로 자기주장만 옳다고 맞서고 있었다.
이러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인 인종(印宗) 스님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혜능이 끼어들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점잖은 토론에 속인이 한마디 끼어들어도 괜찮겠습니까?”
편들어줄 사람이 아쉬웠던 두 스님이 동시에 말했다.
“당신이 말해 보시오. 깃발이 움직입니까, 바람이 움직입니까?”
그러자 혜능이 말했다.
불시풍동(不是風動) :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불시번동(不是幡動) :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인자심동(人者心動) :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이다.
문답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움직이는 건 바로 그대들 마음이라는
간결한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한 울림으로 표출됐다.
외부 현상은 덧없고, 어쩌면 마음의 작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불가의 진리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이란 실제 고정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無相].
대부분 이 사실을 모르고 대상에 고정관념을 일으켜
고유한 특성을 가진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헛된 관념들을 이리저리 엮어 온갖 주장을 펼친다.
그건 번뇌를 늘리는 짓일 뿐이다.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불이법인 자성을 깨닫는 것이 돈교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법의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세계의 온갖 법을 볼 때에 불이법으로 보는 것이 견성이다.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불이법을 보는 견성이 바로 돈교인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에 있어서는 오직 분별을 벗어난
불이법(不二法)인 견성(見性)을 말할 뿐인 것이다.
이것이 곧 선(禪)이고 불법(佛法)임을 천명하고 있다.
둘로 나누어지는 분별을 말하면 불법이 아니다.
따라서 혜능은 불법을 전하려면 사람의 분별심을 막아서
중도(中道)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불이(不二), 견성(見性)이므로 당연히 선정을 닦아
해탈을 이룬다고 하지 않으며,
유루니 무루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유위니 무위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중생이니 부처니 나누지도 않으며,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하고
나누지도 않는다.
언제나 모든 경우에 다만 둘로 분별됨이 없을 뿐이다.
그리하여 혜능은 이렇게 말했다.
“자성에는 잘못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
[돈오돈수(頓悟頓修)], 점차(漸次)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고,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일이 있겠는가!”
혜능은 이와 같이 수행의 과정과 방편을 초월해 상근기의
언하변오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다.
이처럼 돈교에선 문득 깨달음만 있을 뿐, 점진적인 수행은 없다.
문득 깨달아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면,
만법을 대함에 언제나 불이법문 속에 있으니 늘 한결같고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훗날 혜능 선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바른 견해를 일러 출세간이라 하고,
삿된 견해를 일러 세간이라 한다.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쳐 버리면,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해 흠이 없다.
이 게송은 돈교(頓敎)이며, 또 큰 진리의 배라 부른다.
어리석게 들으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깨달으면 찰나 사이일 뿐이다.”
“지금 만약 돈교문(頓敎門)을 만난다면
문득 자성을 깨달아 세존을 본다.
만약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혜능 선사가 경험한 깨달음은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이 언하변오(言下便悟)요, 이것이 혜능 선사의 돈오(頓悟)이다.
혜능은 홍인 대사가 계신 조실에서 한번 듣고서 듣자마자
곧장 깨달아 문득 진여인 본성을 봤다.
본성(本性), 자성(自性), 법성(法性), 불성(佛性), 실성(實性) 등은
모두 상(相)에 상대되는 개념인 성(性)을 가리키는 점에서
이름은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하다.
불교에선 마음과 세계를 설명할 때에 모습으로 분별되는 현상을
상(相)이라 하고, 분별되지 않는 본질을 성(性)이라 해서,
상과 성이라는 두 대립 개념을 방편으로 삼아 마음과 세계를 설명한다.
이처럼 현상과 본질을 대립시켜 설명하는 방편은
색(色)과 공(空), 사(事)와 이(理), 용(用)과 체(體), 제상(諸相)과
비상(非相) 등도 마찬가지이다.
혜능 선사의 선법은 자성(自性)의 발견으로 일관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