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님은 있는가
이만익
조용하고 고즈넉한 때, 조금은 피곤하고 당장 사는 일을 잊고 눈감고 싶을 때 마음을 적시면서 슬며시 일어나는 기억들, 이미 잊었어야 옳은 어린 시절의 것들이다. 알 수 없는 풀 냄새, 아 여름, 주위가 어두워 오는 초저녁, 교회 옆 작은 냇가였다. 그 때, 무엇을 찾고 있었다. 물에 빠진 손목시계를 찾고 있었다.
당황해하던 숙이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시계를 찾았던가 찾지 못했던가도 확실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의 가슴 두근거리던 일이 어두움과 여름의 무성한 풀 냄새로 되살아 난다. 학교가는 길에 같은 전차를 탄 날은 그를 보았다는 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일도 만날까 하여 그 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서 혼자서 그리움을 키우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 전, 사춘기에 들어서든 중 3 때 일이다. 사람은 왜 사람을 그리워 하는가. 그것도 이제껏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처음 만난 이성을 마음에 새겨 두고 스스로 그 영상에 길들여져서 사모하게 되는가. 자신의 심경을 적절히 표현할 줄 아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서도 그리움의 질은 같은 듯하다. 소월의 시구에 ‘한 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추거운 베겟가에 꿈은 있지만.’ 이라고 솔직하고 절실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다. 지금의 내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되새기는 이유는 이미 어린날의 순수에서 밀려나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순수하고 떳떳한 그리움을 가지고 싶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고 존엄한 일이다. 요사이처럼 모든 사람이 이기적인 자기 중심에 치우쳐 있고 순수해야 할 사랑의 감정도 육신의 저울로 달아서 파는 세상, 순수한 그리움과 사랑을 위해 자기 희생과 고통도 기쁨으로 전환하는 인내와 슬기아 없어진 세상, 그러해서 순수한 의미의 님은 너무도 귀한 것 같다.
님은 누구인가. 당신은 님을 모시고 있는가. 또 나에도 님은 있는 것일까. 마음을 가다듬고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만해 한용운은 범속한 인물이 아니다. 불교의 진리를 찾아 대해에 몸을 던진 사람이 세속의 불의를 떨어내기 위해서 몸으로 싸운 사람이고, 꺼져 가는 님의 숨결을 되살리기 위해 혼으로 노래한 사람이다. 그가 읊어 낸 님은 영원하다. 그의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라 느껴진다. 그토록 찬미하고 노래할 수 있는 님을 만해는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막히게 부러운 것이다. 그가 마음으로 길들이고 사모하여 생명처럼 키운 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소월의 젊은 날 밤새워 번민하고 그리워한 님과는 무엇이 다를까. 어린날 지극히 순수한 감정으로 마음으로 키웠던 나의 연모와는 얼마나 먼 곳에 있는 것일까. 오십 줄에 들어선 내가 이제 새삼스레 님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있다. 나는 정말 어떤 님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내 속에 님이 없다면 나도 어떤 님을 한 분 모셔야 할 것이 아닌가. 영원한 생명의 시로 노래하지 못하지만 뻗어도 닿지 않는 그리움의 대상을 마음 속에 간직하면 길이 조금은 보람되고 덜 지루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그 동안 만해의 ‘님의 침묵’ 중 몇 편을 그림으로 표현코자 시도해 보았다 만해의 시가 내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만해가 노래한 님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그림 속에서 되살아 날 것인가 고심했었다. 그리움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보고 싶다.’ ‘그림다’ ‘사랑한다.’라는 말로 어휘로 표현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리움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색으로, 선으로, 표정으로 표현하기는 심히 어렵다. 그것이 배고픔의 표정인지 누구를 사모하는 표정인지도, 그것이 보랏빛 그리움의 색인지, 공포의 색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시적 이미지를 시각적 구체성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애매한 연계성을 바탕에 깔고 재창조하는 길밖에 없다고 느낀다. 만해 자신도 그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 속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님이 어다에. 어떤 모습으로, 왜, 어떻게 계신가를 만해도 상세히 보여주지 못 하였다. 다만 만해처럼 자기가 형성한 열렬한 님을 자기 속으로 스스로 만든 사람만이 그 님을 알고 표현할 것 같다. ‘님의 침묵’은 총 88편의 시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지고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3편을 그림으로 그린 바 있다.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로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로 시작한 ‘님의 침묵’은 님과의 이별 이후에도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다는 믿음으로 재회를 기다리는 여인을 표현했고, ‘찬송’은 님을 신념화하고 혼으로 님을 노래한 만해의 심경을 표현했다. ‘사랑의 끝판,
’ ‘네, 네 가요.이제 곧 가요.’는 이제 님의 부축을 받고 님을 재회하기 위해 기쁨으로 길을 나서는니이 침묵의 맨 끝 편 시를 그린 것이다. 엔젠가 나도 내 속에 온 정성으로 모시는 님의 모습이 자리하고, 만해가 그 토록 사랑했던 님의 거처가 나의 님과 이웃하는 곳이 된다면 난 그때 스스럼 없이 만해 시 88편에 내 그림을 바쳐도 어색하거나 나무람 받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하는 바다. 만해가 고통받던 시절, 국권을 일제에 뻬앗기고 그가 이땅에서 이 곳 우리 사람들 속에서 키우고 가꾸며 살아온 님은 그를 떠난 채 돌아오지 못했다. 만회가 재회치 못 했던 님을 우리는 지금 마음 속에 모셨어야 옳은데 세상은 우리의 것으로 되돌아 왔다지만 그것도 반쪽, 온전한 우리의 님을 정싱으로 모실 날은 아득하기만 하다.
세상이 편해지고 살기가 나아졌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님의 밤을 지키기 위한 연약한 촛불을 살 정성도, 마음도 없다. 우리의 님이 들어와 살 마음의 자리를 남에게 거의 다 넘겨 주고 우리는 이미 우리다움을 경멸하고 업수이여기는 풍토에 빠진 듯하다. 산업화, 국제화, 세계화의 흐름을 기속사킬수록 우리다움의 근저가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아끼고 귀중하게 여길 마음의 님을 어리면 어린대로 크면 큰 대로 모시게 되기를 희망한다. 순수한 연정, 순수한 정열, 순수한 사랑이 누구에게나 남아 있다면 그 사회는 순순한 덩어리, 그 힘으로 더욱 영원하고 아름답고, 진리에 가까운 님을 모시게 되기 때문이다. 님은 오랫 동안 침묵하고 계신다. 언젠가 우리 님이 미소로 응답하기를 희망하면서 살았으면 싶다.
*이만익(1938-2012)
황해도 해주 출신.화가. 파리 유학. 한국의 설화 등 한국적인 소재를 특유의 화법으로 그려내는 가장 한국적인 현대화가 중 하나이다. 한국적 소재로 한국적 미감을 통한 독자적인 그림세계를 추구하였고, 한 민족의 자화상을 그려낸 한국적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미술감독, 제8회 서울 장애자 올림픽 미술감독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해왔다.
이만익의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