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환(尹桓)은 군부판서(軍簿判書) 윤수(尹秀)의 손자로, 충숙왕(忠肅王) 때 호군(護軍)에 제수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하자 대언(代言)에 제수되었다.
충숙왕이 원에서 복위하자 당옥(黨獄)이 일어나 윤환을 순군(巡軍)에 가두고 고신(告身)을 빼앗아 장형을 가하고 해도에 유배하니 마침내 원으로 도망하였다. 윤환은 일찍이 조익청(曹益淸)과 함께 충혜왕이 총애하였던 송팔랑(宋八郞)과 홍장(洪莊) 등을 붙잡아 순군에 가둔 적이 있었는데, 홍장이 이전의 감정으로 원한을 품고 참소하여 윤환을 칠원(漆原)으로 쫓아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윤환을〉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제수하였으며, 원에서는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郞)을 제수하였다. 조적(曹頔)의 난 때 〈왕을〉 시종하는 데 공로가 있어 수성양절보리공신(輸誠亮節輔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찬성사(贊成事)에 제수되었으며, 원에서는 행성낭중(行省郞中)에 제수되었다. 충혜왕이 삼현(三峴)에 새 궁궐 공사를 일으키고 노비를 충당하고자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각각 어여쁜 노비 한두 명씩을 바치게 하였다. 윤환과 강윤충(康允忠)·손수경(孫守卿) 등이 부득이하여 모두 왕명을 따르겠다고 하였는데, 채하중(蔡河中)이 마침 오자 왕이 윤환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들이 논의한 것을 정승에게 말하라.”하니, 윤환이 부끄러워 말을 못하였는데, 왕이 재차 재촉하자 윤환이 〈채하중〉에게 그대로 고하였다. 채하중이 말하기를, “왕께서 신에게 명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의논한 것도 며칠 되었으며, 하물며 명하신 것도 있는데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채하중이〉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노비를 청했다는 것은 예전에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충혜왕이 일찍이 윤환의 처 유씨(柳氏)와 정을 통하고는 윤환을 강릉(江陵)·교주도도순문사(交州道都巡問使)로 내보냈다. 충정왕 초에 〈윤환을〉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에 책봉하였으며, 수성양절선력보리공신(輸誠亮節宣力保理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충정왕이 일찍이 군신(群臣)에게 잔치를 베풀자 윤환이 정방제조(政房提調) 곽균(郭㻒)이 뇌물을 받았다고 헐뜯었다. 곽균이 대꾸하지 않자 윤환이 팔을 걷어 올리고 곽균을 구타하였는데, 좌우에서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공민왕 때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가 곧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수충협의동덕익찬공신(輸忠恊義同德翊贊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좌정승(左政丞)에 제수되었다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관직명을〉 고쳤다. 곧이어 죄를 지어 유배되었으나, 이후 불러들여 칠원후(漆原侯)에 책봉하였으며, 칠원백(漆原伯)으로 고쳐서 책봉하였다가 시중(侍中)에 다시 제수하고 추성병의동덕섭리익찬공신(推誠秉義同德變理翊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윤환은 본래 무인인데 왕이 〈그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임명하고 옥정아(玉頂兒)와 옥영립(玉纓笠)을 하사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되었다. 우왕 3년(1377)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어 〈윤환을〉 평장사(平章事)에 제수하였다. 우왕 6년(1380) 〈그를〉 다시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윤환은〉 곧이어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왕 12년(1386) 〈윤환이〉 죽으니 나이가 80세 남짓이었다. 윤환은 수염이 아름답고 키가 컸으며 풍채가 뛰어났는데, 5명의 임금을 섬겨오면서 3번 수상(首相)이 되어 집안은 존귀해지고 부유해졌다. 일찍이 칠원으로 돌아가고자 청하였는데 그 해에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가 되자 집안의 재물[家財]을 풀어 진휼하였으며 빈민에게 돈을 꿔주고 문서로 받은 것은 모두 불태웠다. 이때 한창 오랜 가뭄이 들었는데, 윤환의 밭에서 물이 솟아오르자 다른 사람의 밭에도 물꼬를 대주었다. 〈이에〉 풍년이 들자 경상도 백성들의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아들은 없으며 서녀(庶女)가 남좌시(南佐時)에게 시집갔다. 남좌시는 의성군(宜城君)에 책봉되었으며, 우왕 13년(1387)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