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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密直副使致仕朴公墓誌
公諱華姓朴氏。先世密城郡籍。曾祖奇輔嘗以中軍錄事死於國事。官至大觀殿直贈某官。祖洪升故衛尉注簿同正贈衛尉丞。父諴故檢校軍器監贈禮賓尹。禮賓府君娶陰竹安氏女。封陰平郡夫人。是生公。實元朝憲宗皇帝第二年壬子歲也。至元十五年。由典理司書員。任全州臨陂縣尉。罷秩入內侍積年勞。歷板積窰直供驛司醞署令紫雲坊判官。至大三年。拜司憲糾正。出使慶尙道。照刷諸州。架閣文卷。擿發無隱。被効者側目。反爲所攻見免。延祐三年。長子仁幹。赴召太尉瀋王邸。起以選部散郞。岀知慶原府。尋致仕。泰定元年。仁幹從太尉王。迴自吐蕃。於是又起任廣州牧。明年以通憲大夫密直副使上護軍致仕。至後至元二年正月十二日病卒。享年八十有五。越三月八日。葬王京東大德山感恩寺之北麓。夫人趙氏封金堤郡。爲故相文良公諱簡之姊也。先公四年而卒。子男五人女二人。仁幹登庚子科。又中乙卯應擧試魁。盡誠秉義翊贊功臣匡靖大夫僉議評理。見任漢陽府尹。仁祉辛未科司設署令。仁杞左右衛散員。仁翊軍簿佐郞。仁宇乙卯科知丹陽郡事。女嫁中門祗候柳韶。版圖佐郞徐玶。孫男有六人女二人。公性恭勤。莅事惟謹。而廉於進取。其處家敎諸幼。槩以慈祥。必勸之從學曰。人無學無以立。苟有過則又嚴加切責。故五子奉承不敢怠忽。至於三人登科。皆以良能見稱。而其長公。從先王於絶域。艱險萬狀。主耳忘軀。卒就功名。蓋由義方夙激而成之也。少從仕官。雖低迴未達。晚因子貴。乃得高資厚祿以養。年及九秩而終。嗚呼又多望乎哉。予聞死事者。其後必大。亦其先報不騫也歟。銘曰。 嗚呼。公之次子仁祉。在大德六禩。甞與予同擧司馬試爲進士。距今三十有四年矣。予旣與其子而爲友。則不得不拜公猶諸父。故其長公弟畜我。我視其弟。又自處以兄。其誰曰不可。是以公之一門父子弟昆。於歿於存。義密情惇。玆其歸土宜有銘。我秉其筆。尙無媿于幽明。 |
고밀직부사치사(故密直副使致仕) 박공묘지(朴公墓誌)
공의 휘는 화(華)요, 성은 박씨(朴氏)인데 선대는 밀성군(密城郡)에 적(籍)을 두었다. 증조부 기보(奇輔)는 일찍이 중군녹사(中軍錄事)로서 나랏일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관직이 대관전직(大觀殿直)에 이르렀고 모관(某官)에 추증되었다. 조부 홍승(洪升)은 고 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인데 위위승(衛尉丞)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함(諴)은 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인데 예빈윤(禮賓尹)에 추증되었다. 예빈 부군이 나중에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진 음죽 안씨(陰竹安氏)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공을 낳으니, 이때가 원나라 헌종황제(憲宗皇帝) 2년 임자년(1252, 고종 39)이다. 공은 지원(至元) 15년(1278, 충렬왕 4)에 전리사 서원(典理司書員)을 거쳐 전주(全州)의 임피현위(臨陂縣尉)에 임명되었다. 임기를 마치자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 몇 년 간 봉직한 후 판적요직공역(板積窯直供驛), 사온서 영(司醞署令), 자운방 판관(紫雲坊判官)을 역임하였다. 지대(至大) 3년(1310, 충선왕 2)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제수되었으며,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나가 각 주(州)에 보관된 문서를 조사하여 비리를 숨김없이 적발해 내었는데, 탄핵을 받은 자들이 미워하는 바람에 도리어 그들의 공격을 받아 면직되었다. 연우(延祐) 3년(1316, 충숙왕 3)에 맏아들 인간(仁幹)이 태위 심왕(太尉瀋王)의 관저에 불려간 것으로 인해 공이 기용되어 선부 산랑(選部散郞)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지경원부(知慶原府)가 되었다가 얼마 후 치사하였다. 태정(泰定) 원년(1324)에 인간이 태위왕을 따라 토번(吐蕃)에서 돌아오자 이에 다시 기용되어 광주목(廣州牧)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 후지원(後至元) 2년(1336, 충숙왕 복위 5) 정월 12일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 85세이다. 3월 8일 왕경(王京)의 동쪽 대덕산(大德山) 감은사(感恩寺)의 북쪽 산기슭에 장사 지냈다. 부인 조씨(趙氏)는 김제군부인(金堤郡夫人)에 봉해졌는데 작고한 정승 문량공(文良公) 휘 간(簡)의 누님이다. 공보다 4년 먼저 졸하였으며, 자식으로는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다. 인간(仁幹)은 경자년(1300, 충렬왕 26) 과거에 등과하였고 또 을묘년(1315, 충숙왕 2) 응거시(應擧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진성병의익찬공신(盡誠秉義翊贊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으며 현재 한양 부윤(漢陽府尹)으로 있다. 인지(仁祉)는 신미년(1331, 충혜왕 1) 과거에 급제하여 사설서 영(司設署令)으로 있고, 인기(仁杞)는 좌우위 산원(左右衛散員)이며, 인익(仁翊)은 군부 좌랑(軍簿佐郞)이며, 인우(仁宇)는 을묘년(1315, 충숙왕 2) 과거에 급제하여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로 있다. 딸들은 중문지후(中門祗候) 유소(柳韶)와 판도좌랑(版圖佐郞) 서평(徐玶)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주로는 손자 여섯과 손녀 둘이 있다. 공은 성품이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일에 임하여 신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고 재물을 취하는 데에 조심성이 있었다. 집안에서 어린 자식들을 가르칠 때는 대체로 자상한 태도로 반드시 학문에 힘쓰도록 권하면서 “사람이 학문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설 수가 없다.”라고 하였지만, 허물이 있으면 또 엄하게 질책을 가하였기 때문에 다섯 아들이 가르침을 받들며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게 되자 모두들 어질고 재능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 가운데 맏아들은 머나먼 이역 땅까지 선왕(先王 충선왕)을 수종(隨從)하여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며 오로지 임금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잊다가 마침내 공명을 이루었으니, 이는 일찍부터 자식을 올바른 도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은 젊어서 벼슬길에 나온 이래로 관직이 비록 현달하지 못하고 낮은 자리로 맴돌기는 하였으나, 만년에 아들이 존귀해짐에 따라 높은 자급과 후한 녹봉의 봉양을 받게 되었고 나이 90이 다 되어 세상을 마쳤으니, 아, 여기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내가 듣기로 나랏일을 위해 죽는 자는 그 후손이 반드시 크게 된다고 하였으니, 또한 그 선대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 어긋나지는 않은 듯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공의 차자 인지가 / 嗚呼公之次子仁祉 대덕 육년에 / 在大德六禩 나와 함께 사마시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니 / 嘗與予同擧司馬試爲進士 지금으로부터 삼십사 년 전의 일이로다 / 距今三十有四年矣 내가 이미 그 아들과 벗이 되었으니 / 予旣與其子而爲友 공을 아버지뻘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도다 / 則不得不拜公猶諸父 그리하여 그의 맏형은 나를 동생으로 아껴주고 / 故其長公弟畜我 나도 그 아우들을 대함에 / 我視其弟 또 형으로 자처하였으니 / 又自處以兄 이를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 其誰曰不可 그러므로 공의 집안 부자형제들과 더불어 / 是以公之一門父子弟昆 돌아가신 분이건 살아 있는 사람이건 / 於歿於存 의리가 친밀하고 정분이 도타웠다네 / 義密情惇 지금 흙으로 돌아감에 묘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 玆其歸土宜有銘 내가 붓을 드는 것이 / 我秉其筆 그래도 유명에 욕되지 않으리라 / 尙無媿于幽明 |
박인간(朴仁幹,미상∼1343) : 박화(朴華,1252∼1336)의 큰 아들
고려 말기의 문신. 1315년(충숙왕 2)에 고시관(考試官) 이진(李瑱)이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그해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직보문각(直寶文閣)으로 상왕(上王)인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1320년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충선왕이 토번(吐蕃: 티베트)으로 유배될 때 수종(隨從)하던 재상 최성지(崔誠之) 등이 모두 도망을 쳤으나, 대호군 장원지(張元祉) 등 18인과 함께 유배지까지 시종하였다. 1324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진성병의익찬공신(盡誠秉義翊贊功臣)에 봉해졌으며, 뒤이어 밀직사를 거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원나라가 왕제(王弟)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 뒤에 공민왕)를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자 정승 채하중(蔡河中), 전첨의평리(前僉議評理) 손기(孫琦) 등 30인과 함께 수종하여 원나라에 갔으며, 이곳에 있던 원자(元子: 忠穆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