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불교의 궁극이라 할 수 없다. / 보경 스님
그댄 이미 바다의 사람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나무토막이 물결에 흘러가는 것과 같아야 한다.
물 양쪽 언덕에 닿지 않고, 사람 손에 붙잡히지도 않고,
귀신에게 막히지 않으며, 소용돌이에 머물지 않고,
썩지만 않는다면 이 나무는 결정코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정욕에 미혹되지 않고,
삿된 도에 휘말리지 않고, 정진하여 궁극에 이르면
필경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삶의 목표를 가진 사람은 분명 뛰어난 사람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는 항상 어떤 광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광기 속에는 또한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
영혼에 눈 뜬 사람은 세상을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본다.
부처님 45년간의 교화는
끝 아닌 순환…진리의 흐름
불교의 궁극이 깨달음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어떤 사유나 존재 법칙에는 순환구조가 있는 것이지,
“그것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면,
그랬다면 누가 기억하며 알아볼 것인가.
부처님이 깨달음 후에 45년간의 교화에 오르고
공자님이 천하를 주유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사막에서 돌아온 것은 오직 하나 사랑 때문이다.
당신들은 결코 완성에 머물지 않았다.
그 완성은 세상 속에서 영원히 추구되는 과정에 있지
어떤 끝이 아니다. 순환이다.
먼저 눈 떴기에 눈먼 군중을 가르쳐야 한다.
불교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존재의 근원임을 깨달아 중생들을 교화하고,
설사 지옥의 중생이건 축생까지도 거둬들이는 큰 사랑에 있다.
따라서 사랑이 무엇인지 눈 뜬 사람에게는
사랑만이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보여야 한다.
아무리 재물이 많고 명성이 높으며 건강한 육신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정상적이지 않다.
그는 사랑이라는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체의 질서를 갖는다.
이 질서 속에서 자연은 스스로 치유력을 보인다.
세상의 모든 쓰레기와 헛된 물건들이 바다에 들어가면
정화를 거쳐 하늘로 올라 다시 비가 되어 내려온다.
이 위대한 순환에 이마를 받쳐야 한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이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흐름을 잃지 말아야 한다.
강의 양쪽 언덕에 기댄다거나 사람들의 손을 타서도 안 된다.
스스로의 생각이 흐름을 가로막아서는 곤란하다.
소용돌이는 제 자리에서 진공상태를 만들기 때문에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렵다.
무엇보다 나무라는 존재 자체가
습한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썩어버린다면
대양에 이르지 못한다. 실로 먼 여행이다.
이 여행을 방해하는 것은
이성에 대한 헛된 열정, 그릇된 가르침이다.
한 왕이 마차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마침 길 가에는 머리에 짐을 지고 서있는 노인이 있었다.
왕이 보기에 그 짐은 너무 무거워 보였다.
왕은 동정심이 일어 마차를 세우게 하고는 노인을 태웠다.
안쓰러운 생각에 집까지 바래다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노인은 마차에 타고서도 짐을 머리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노인이 말했다. “내 몸 만으로도 무거울 텐데
짐까지 내려놓으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머리에 이고 있든 마차에 내려놓은들 달라질 게 없지만,
노인은 다르게 생각했던 것이다.
삶은 우리를 실어 나르는 마차와 같다.
진리의 흐름에 들었다면 진리적인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과거의 생각에 머물지 말라.
반복되지 않는 삶이 최상이다.
불교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