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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매제(祧埋祭)
서 하 진
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보송보송한 솜털에 싸인 진보랏빛 꽃잎. 아버지의 엎드린 등 너머로 나는 가만히 할미꽃을 바라보았다. 타들어 가는 향의 연기가 한 줄기, 꽃을 스쳐 무덤 뒤로 사라지고 바람 없는 오후의 숲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된 듯 흠흠 헛기침을 하며 아버지는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 뒤따라 일어서는 사람들 틈에서 작은아버지가 첨작(添酌)*을 했다.
해묵은 마른 잔디 뿌리들이 꼭꼭 발꿈치를 찔러댔다. 초석* 자리를 둘러 가지런히 놓인 구두코에 내려앉은 고운 먼지를 보며 나는 느닷없이 터지려는 재채기를 참느라 으흐흠, 아버지를 닮은 헛기침을 했다. 늘월 할배 뒤에 선 두 오촌과 선은 할배, 운산 할배, 언하 할배, 도가 할배…… 그리고 나로서는 택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재들의 수굿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한꺼번에 내게로 향한다.
낙시(落匙)해라.* 늘월 할배의 말에 오촌 아재 둘이 상석 위의 잔을 거두고 수저를 내렸다. 작은아버지는 무덤 둘레를 빙 돌며 조금씩 퇴주* 그릇의 술을 뿌렸다. 한쪽에서 아카시아 잎을 뜯고 있던 어린 육촌들이 물린 음식이 담긴 함지 둘레로 모여들었다.
“요번 참에 여 나무를 화악 비았뿌고 짠디를 좀 심우만 싶구만요.”
아버지에게 다가앉으며 말을 건네는 저 사람은, 그렇지 놀월 아재다.
“인자는 여기 올 일도 줄 텐데, 굳이 놈해서* 일 벌일 거 있겠나.”
아버지가 천천히 대답했다. 누대에 걸쳐 봉양하던 제사를 당신의 대에 이르러 없애는 서운함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아버지의 목소리는 깊이 가라앉아 있다. 빈 상석 위에 작은아버지가 붙여놓은 담배 한 개비. 가느다란 연기가 상석 옆의 비석을 타고 올라갔다. 우툴두툴한 글자를 더듬어보며 아버지가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매안(埋安)해야지,* 음복(飮福)*은 나중에 하는 게다.”
늘월 할배와 도가 할배 선은 할배와 또 다른 아재들이 우스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촌 동희 아재가 봉분 한편의 신위 (神位)*를 모셔오고 작은아버지가 땅을 팠다.
얼마나 오랜 세월, 하 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았는지, 희끗희끗 칠이 벗겨진 나무함은 마르고 말라서 강한 햇살 아래 바스라질 듯 보였다. 드러난 나뭇결이 군데군데 갈라진 것을 보면서 나는 저 나무함을 들어내고 다시 모셔 넣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백 년쯤일까. 이백 년일까. 그보다 더 먼 옛날이었을까. 아버지로부터 누누이 들어왔건만 나는 그 시간의 길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체천위(遞遷位)* 제사. 내게는 육 대조가 되는 어른의 생전의 나날은 어떠했을까. 어릴 적, 동전으로 연못에 수란 띄우기를 하며 놀았을 정도로 여유로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만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생애가 이제야말로 온전히 땅에 묻히는 것을 나는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신위를 묻은 자리를 꼭꼭 누지르는 아버지의 마디 굵은 손에서 푸석푸석 흙먼지가 일었다. 고만 됐니더, 이리 오소. 누군가 아버지를 일으키며 잔을 건넸고 비운 잔을 내게 넘기며 아버지가 말했다.
“니도 한잔 해라. 고생했다.”
찰찰 넘치게 술이 담긴 놋잔은 아버지 손의 온기로 미지근했다. 고개를 외로 꼬며 나는 두 번에 나누어 잔을 비웠다. 청주 특유의 쌉싸름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고 술기운엔 듯 나른한 햇살이 번져가는 둔덕들이 눈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다.
종손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자들은 눈부터 동그랗게 떴다. 개중에는 요즘 세상에 칠 대든 팔 대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느 집이든 이대봉사(二代奉祀)* 하는 것이 상례가 아니냐고 제법 여유로운 질문을 해오는 여자도 있었다. 우리 집은 아직 사대봉사*를 하고 있으며 고조부 이하 할아버지들께서 상처하시고* 재취*를 하셨으므로 추석, 설 합해 일 년 제사가 열다섯 번이라고 말하면 여자들은 대개 그래요,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네들은 표 나게 새침해지는 것이다. 몇 번인가 슬쩍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저어 오늘은 즐거웠어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런 여자들에게 해마다 고향에 묘사(墓祀)*를 지내러 가야 하며 불천위(不遷位)* 제사까지 있다는 말을 보태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고 사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스물다섯 나던 해부터 내게 선을 보이기 시작한 어머니는 그 횟수가 오십을 넘어서기까지는 그다지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로서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신랑감인 당신의 아들을 몰라보는 뭇 처녀들에게 연연할 까닭이 없는 거였다. 선을 보기 전 혼담이 오갈 때부터 어머니는 당신이 지켜온 유구한 전통을 자랑스레 이야기 했다. 혼담을 시작한 사람이 직업 중매쟁이이건 아버지의 친구 분이건 어머니의 친지이건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ㅡ삼대가 과거를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재 할아버지께서 워낙 출중한 어른이시지만 그 윗대에도 불천위가 여럿 계시지요. 칠 대 종조께서 대사간*을 지내신 이후로 면면히 이어진 학덕이 여간 아니지요. 그렇다고 해서 선비가 글만 읽는 시절은 아니었으니 자연 재물이 일고 그러다 보니 인심 잃을 일 안 해도 되었고 뭐, 법도에 어긋나는 사람은 없는 집안입니다……
이쯤 얘기한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방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벽에 걸린 칠 대조의 교지(敎旨)* 쪽으로 끌어당긴 다음 누르스름한 교지의 글자 하나하나를 눈에 넣을 듯 바라보는 것이다. 문과 병과 급제(文科丙科及第)를 알리는 그 글귀를 보는 어머니의 눈빛에는 열아홉 어린 나이에 시작된 자신의 고된 시집살이, 마흔이 갓 넘은 홀시어머니와 학생 신랑을 섬기며 지냈던 그 간난의 시절과 그를 이겨내고 오늘을 이룬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 후 어머니는 당신의 가문론과 전통론 그리고 요즘 처녀론에 이르기까지 한바탕 도덕 강의를 설파하고는 당혹해하는 상대방에게 슬며시 웃으며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ㅡ사실, 힘이야 들지요. 그렇지만 그 영광이 또 얼맙니까.
모호한 웃음을 흘리며 벽난로 위의 내 사진 쪽으로 아쉬운 시선을 던지는 그 사람들이 당사자인 신붓감에게 어머니의 깊은 뜻을 제대로 전달할 리는 없는 것이었고 그렇게 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사 년이라는 것은 호텔 커피숍에서 여자를 만나고 탐색하는 가족들 틈에서 여자와 어설픈 대화를 나누는 일에도 익숙해져서 내가 선본 여자들에 대한 기록만으로도 한 권의 책을 엮을 만큼은 되는 긴 시간이었다. 아, 그렇지요?…… 그건 몰랐군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열 번쯤 번갈아 이런 대꾸를 하다 보면 여자들은 어느새 손마디를 꺾거나 머리카락읔 만지작거리고 빈 물잔을 들어보다 웨이터를 불렀다. 선을 보고 난 후에는 하나의 언덕을 넘은 기분에 나는 조금씩 흡족해지곤 했다. 다음 상대를 만날 때까지의 휴식. 그것은 내게 그만큼의 유예를 의미했다.
어머니는 결코 내게 채근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라고 늘 나를 위로했고 여자를 만난 후 내가 고개를 흔들며 돌아오면 때 아닌 성찬을 차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 애는 이마가 좁아서 나도 맘에 차지 않았다. 그러고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께 천연스레 음식을 권하는 것이었다. ―조기가 물이 좋던데, 찌개 맛이 어떠세요. 너무 맵지 않은가 모르겠네요. 아버지는 쓰다 달다 말 없이 수저를 드시고 나는 내 음모가 들키지 않은 데에 안도하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 었다.
어머니는 항상 해답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내게서 등을 돌린 여자들에게서 어머니가 찾아낸 결점이 아주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은 좁은 이마를 가졌거나 입술이 너무 얄따랗거나 광대뼈가 불거져 자색스럽지* 못하거나 수술한 흔적이 보이는 콧대를 하고 있거나 눈매가 사납거나 손발이 삐죽하여 반스럽지 않거나, 너무 말랐거나 키가 작거나 지나치게 큰, 용모파기* 가운데 한 가지에는 해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출신 대학이 좀 처지든지 명문대 입학이 불가능해 유학을 했든지 아들이 없는 집 딸이든지 전력이 의심스러운 형제가 있든지 장모감이 채신없어 보이든지 교회에 열심이든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모든 것에서 비켜난 운 좋은 여자는 반드시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ㅡ새침해서 종일 입 한 번 뻥긋 안 할 것 같더라. 그런 애랑 한집에서 어떻게 살겠니. 라거나ㅡ그렇게 덜렁대는 애는 내 보다 보다 첨이다. 또는ㅡ그런 처연한 표정으로 할 말 다 하는 애가 실은 의뭉스러운 법이다. ㅡ 이런 표현으로 평가를 내리는 어머니의 옆에서 아버지는 버스럭, 신문을 뒤집으며 으흠 헛기침을 하셨다.
봄가을 없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모시는 글’이 적힌 품위 있는 카드가 놓여 있었다. 김 국장은 벌써 둘째를…… 카드를 펼치며 내게 건너오는 그 눈빛에는 지치지도 않는 비난이 담긴다. 누가 뉘 집 딸을 며느리 삼았다든가 누구는 내달에 손자를 본다더라는 이야기 끝에 그 색시가 재작년에 너랑 선본 그 규수의 동생이 아니냐고 물으시는 아버지. 그 언니는 벌써 아들을 낳았다더라…… 아버지가 끊은 지 오래인 담배를 불 없이 물고 질근질근 씹다 내려놓으면 그 씹혀 졸아든 자국처럼 내 가슴은 오그라들었다. 누가 누구와 결혼을 하고 누구는 누구의 색시가 되고 누구는 누구와 사돈을 맺고……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오로지 결혼하기 위해서, 자식을 혼인시키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결혼하지 못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자격자였고 그것이 내 스스로 예비한 바였음에도 나는 때로 턱없는 낙오감 마저 느꼈다.
그럴 때면 나는 연희를 만났다. 내가 전화를 걸면 연희는 말했다. 왜, 또 딱지 맞았구나? 나의 실없는 웃음에 언제까지 너의 땜장이 노릇을 해줘야 하느냐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퇴근 시간에 맞춰 나를 만나주었다. 저녁을 먹고 연극을 보거나 함께 술을 마시는 동안 그녀는 이번 선수는 몇 번이었느냐고 짓궂게 물었다.
내가 맘에 들었으나 여자가 나를 싫어하는 것이 일 번. 여자는 괜찮아하는 듯하나 내가 내키지 않으면 이 번. 여자도 나도 호감이 있으나 어머니 선에서 걸릴 듯한 경우가 삼 번. 아예 여자도 나도 전혀 생각 없이 차만 마시고 헤어지면 사 번. 여자가 내게 호감을 표하고 나는 도무지 매력을 못 느끼지만 어머니가 대만족하실 타입이 오 번. 도대체 이런 여자를 누가 소개했는지 당장 불러내어 한바탕 퍼붓고 싶은 참혹한 경우는 육 번…… 이런 식으로 규정해놓은 연희의 분류는 자그마치 열 가지가 넘었다.
연희는 어디에 속하는 여자일까. 삼 번이라는 것이 내 의견이었지만 그녀는 이런 내 말에 코웃음으로 일관했다.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구분의 대상이 될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연희의 그 단호한 태도 덕분에 그녀와 내가 십 년 가까운 친구로 머무를 수 있었음을 알면서도 매번 나는 쓸쓸해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에게 잘난 척 좀 그만 하라고 핀잔주는 것으로 내 속마음을 감추었고 이야기는 늘 거기서 끝나곤 했다.
어느 날엔가 취기에 기대어 연희에게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날 진지하게 대해봐. 사람이 왜 그리 솔직하지 못하냐.”
연희는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그렇게 재미있니? 내가 선을 보고 또 보는 얘기를 전해 듣고 그렇게 즐거워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도대체 왜 이 짓을 되풀이하는지 넌 정말 모르니?”
왁자한 실내의 소음을 이기기 위해 나는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고 연희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반나마 남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의 손을 나는 탁자 너머로 와락 부여잡았다.
“그렇잖아. 이게 뭐니? 우리가 왜 이러고 있냐 말야.”
내 손을 천천히 밀어내고 연희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기다리며 나는 그녀의 반듯한 이마를 바라보았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녀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도. 짙은 속눈썹이 지우는 그늘 속에 그녀의 뺨에 얼핏 경련이 일었다. 오뚝한 코와 꼭 다문 얇은 입술. 아홉 해가 넘도록 보아온 얼굴을 나는 처음인 듯 숨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빛나던 그 얼굴에 내려앉은 세월의 무게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싸우면서 자라는 형제처럼 끊임없이 다투면서 함께 지나온 날들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단발머리를 찰랑이던 신입생 연희. 서클에서 동기생 남자들을 휘어잡는 열변을 토하던 연희. 그만두겠다는 짤막한 메모를 남기고 고시촌을 떠나가던 날의 연희. 첫 월급을 탔다며 전화를 하던 날, 너만 ‘사’.자 붙었냐, 나도 교‘사’라고 호기롭게 외치던 연희…… 소심하고 말이 없는 편인 나와는 달랐던, 그렇게 분방하고 자유롭던 여자. 지금 앞에 앉은 연희는, 그러나 작고 여위고 너무도 약해 보였다.
문득 연희가 고개를 들었고 그때 그녀의 말간 눈에서 마치 그 눈과는 상관없는 듯한 눈물이 거짓말처럼 주룩 흘러 불빛에 반짝였다. 연희야…… 내 부름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연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로도 그녀가 내 앞에서 울었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도 연희를 생각하면 처연히 눈물을 담고 나를 보던 그 눈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날 그대로 헤어진 우리는 다음에 만났을 때도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연희는 변함없이 쾌활했고 나는 여느 때처럼 어긋난 만남을 늘어놓았다. 이따금 눈이 마주치거나 순간적으로 말이 끊긴, 그 휴지(休止)*의 공간에 우리 사이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끈을 잡으려 하지 않았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채로 사라져갔다.
제사를 줄이자는 말을 꺼낸 것은 어머니였다. 정월 차례를 지내러 모인 친척들이 막 아침상을 물린 때였다. 맵시 있게 담은 과일 접시를 앞앞이 내려놓으며 어머니는 때가 아니라도 이렇게 풍성하다며 포도와 수박을 권했다. 하기사 우리 아부지가 바나나를 아시능교, 오렌지를 잡솨봤능교 하고 작은아버지가 맞장구를 쳤다. 밤·대추·감·배가 전부이던 시절에 사셨으니. 한 것은 오촌인 대전 아재였다. 예전에는 설차사*도 이래 일찍 못 지냈지, 집집마다 자기 조상 모시고 큰집으로 모이니 해가 높다랗게 돼야 제관들이 모이지. 아버지의 음성 이었다.
아버지 말씀처럼 솔가한* 집에서는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위한 차례를 지내고 서둘러 종가에 모이게 마련이어서 설날 아침에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누나들과 여자 사촌들이 부엌을 들락거리며 잔심부름을 할 때 어린 남자애들은 주린 배를 안고 누부야, 어매요, 불러보지만, 절로 가 있그라, 점잖은 나무람만 돌아왔다.
내게 맡겨진 일은 손님들의 신발 정리였다. 일곱 살의 내게는 한없이 넓게 여겨지던 대구 집의 대청마루. 여덟 짝의 유리문이 한껏 밀쳐진 마루 밑의 댓돌에는 족히 오십이 넘는 신발들이 모이곤 했다. 여자들의 구두와 고무신은 왼쪽에, 남자들의 신은 오른쪽으로 가지런히 정리하다 보면 짝짝이 어긋나기 일쑤였기 때문에 누가 오는 기척이 나면 나는 냉큼 내려가 인사를 드리기 바쁘게 벗어놓은 신발들의 짝을 맞추었다. 칠성제화나 말표 고무신, 범표 털신처럼 상호가 확실한 신부터 맞추고 남은 것을 모양별로 짝을 지워 나란히 늘어놓고서 그때마다 나는 곱은 손을 문지르며 처음부터 수를 세었다. 스물이 서른으로, 다시 마흔을 넘어 쉰이 지나고 예순에 가까우면 차례상의 진설(陳設)*도 마무리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집이 서울로 옮겨 온 후로는 설날 아침의 신발 수도 스물 남짓으로 줄었고 차례 시간도 훨씬 앞당겨지게 되었다. 그 대신 정초 문안 손님으로 현관이 붐볐지만 그때는 이미 신발 정리는 올망졸망한 조카들의 몫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제사 때면 어머니는 나를 밤을 치거나 지방*을 쓰는 남자들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얇은 칼날로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밤을 쳐내는 작은아버지와 오촌 아재들 사이에서 나는 서투른 손놀림으로 이따금 손가락을 베어가며 밤 치는 법을 배웠다. 다이아몬드처럼 정방형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많은 손질을 가하다 보면 내 것은 원래 크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괴어놓은 무더기에서 단박에 표가 났지만 어머니는 항상 그것들을 맨 위에 올려놓았다. 그럭저럭 맵시 있게 밤을 치게 되면서 나는 수염자리가 거멓게 잡힌 고등학생이 되었고 과외 시간에 쫓겨 제사 참례*도 겨우 하는 형편이 되기까지 내가 친 밤도 족히 몇 말은 넘으리라.
시속(時俗)이 변하니 어째 우리만 고집하겠나마는…… 아버지가 말꼬리를 흐리며 언하 할배를 보고 있었다. 증조부 대에 솔가한 언하 할배는 아버지의 당숙*으로, 내 외조부께 글을 배웠다는 교전 할배의 아들이었다: 그 인연으로 어머니와의 혼사가 이루어졌대서 외가 쪽과의 연분도 각별했다. 어머니가 언하 할배 쪽으로 돌아앉으며 말을 이었다. ―변하는 세월에 맞춰서가 아니라 앞으로를 생각해야지요. 우리 사는 시절이야 이제 얼마 남았습니까. 아직 두량할* 능력 있을 때 정리를 해둬야 안 되겠습니까. 쟈들 대에 이르면…… 어머니는 나를 건너다보고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가르친다고 가르쳤지만 어떤 제사를 어찌 지내야 하는지 알겠습니까, 어데. 이대봉사 하기가 섭섭은 맘이야 우리도 있지요. 그리 되면 어른으로 보면 조부 제사가 없어지니 허전하실 만도 하지만, 또 묘사*가 있지 않습니까. 일 년에 한 번 두루 모시니 그때 더 정성을 드리면 되고…… 어머니가 말을 맺자 미리 의논이 있었던 듯 작은아버지가 체천위 제사 모시는 어려움을 이야기했고 그때까지 말이 없던 대전 아재가 그거는 동혁이 말이 옳다, 하며 거들었다.
불천위를 모시는 일과 달리 체천위 제사는 종가에서 치르는 행사가 아님으로 해서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 모시는 체천위는 아버지의 오 대조 어른이었다. 당신 생전에는 어른이 모시던 제사를 없애고 싶지 않았던 종조부*가 자신의 고조부 제사를 정자(亭子)에서 모시도록 했던 것이다. 본래 제사를 모시던 집안을 떠나서 다른 장소에서까지 계속 기제사를 올리는 것은 가신 어른의 뜻을 좀 더 오래 기리겠다는 정성이리라. 그러나 체천을 주장한 당사자가 돌아가고 나면 그 제사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천덕꾸러기가 되는 법이었다.
후두암으로 두 차례의 수술을 했으면서도 여든아홉까지 사셨던 종조부는 일찍 돌아간 당신의 형님, 즉 내 조부를 대신해서 문중의 대소사를 두루 관장하시며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을 뜨지 않으셨다. 성대 절제를 한 후에는 손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셨는데 조금 긴 말씀을 하실 때는 스피커가 달린 마이크 같은 기구를 이용하셨다. 작은 빨판이 달린 한쪽 끝을 목울대에 대고 말을 하면 그 울림이 줄을 타고 다른 끝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더걱더걱. 바람이 '성능 마이크를 스쳐 가는 듯한 둔탁한 소리에 이어 한참 후에 할아버지의 쇳목 잠긴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 소리는 인간의 음성과 기계음을 섞어놓은 듯한 묘한 것이어서 영화에서 본 로보캅의 목소리를 연상케 했다. 여윌 백로 여윈 작은할아버지와 로보캅의 목소리. 그것은 마치 성우의 음석이 잘못 더빙된 화면의 한 장면 같았다. 할아버지가 숨을 쉴 때면 주파수가 맞지 않아 지직거리는 전파음이 섞여들듯 가래 꿇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너희들이 고된 줄은 자알 안다. 허나, 세상사 근본을 모리믄 어지럽게 마련이다. 하니라꼬 하지만 내사 노상 이래가 될랴 싶을 때가 많타…… 숨이 차서 헉헉거리면서도 한사코 기구를 대고 있던 내 손을 거머쥐며 말을 멈추지 않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입을 열 때마다 목울대의 떨림이 기묘한 느낌으로 손을 타고 올라와 슬금슬금 내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잘 알고 있시임더. 인자 고만 누우시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여윈 몸을 눕혀드리면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소리가 되지 않는 마른기침이 쏟아졌다.
생전에 여러 여자를 보셨던 종조부는 세 할머니에게서 아홉의 소생을 두었는데 그 할머니들이 서로 친구처럼 지냈던 탓에 나는 한참 자랄 때까지도 할아버지들은 원래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종조모가 대구에 살면서 아홉 자식의 학교 바라지를 하는 동안 젊은 청송 할매는 고향에서 작은할아버지를 모시고 문중 일을 도맡았으며, 외지에 나가실 때의 동반자는 영천 할매라 불렸던 또 다른 할머니였다. 종조모 태생의 오촌들이 일찌감치 서울과 대전 등지로 떠났기 때문에 고향을 지키는 것은 청송 할매의 맏이인 동택 아재의 몫이 되었고 동택 아재를 앞세우고 선산을 돌보거나 묘사 채비를 일러주는 것이 총조부 말년의 유일한 낙이었다.
종조부가 돌아가신 지도 오 년이 넘어 이제 고향의 대소사는 동택 아재가 주동이 되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일은 많고 공은 없다고 청송 할매가 늘어놓는 하소연이 해마다 길어진다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언젠가 입대 전 상경하여 하룻밤을 나와 지냈던 동택 아재를 생각했다. 암만 생각해도 니 참 장타. 책장에 즐비한 법전들을 눈으로 훑으며 아재가 드문드문 말했다. 니, 생각나나. 국민학교 이 학년 땐가, 니는 일등하고 나는 사십등해서 사십이 더 많으이 더 좋은 거 아니냐꼬 내가 우기며 울든 거. 그때 할매들캉 아지매들이 손바닥을 치며 웃었제·……
그와 나는 동갑이었다. 같은 국민학교를 다니며 아재, 아재 하고 쫓아다니던 내게 그는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였다. 공부는 잘했으나 약골이던 내 대신 가방을 들고 내 옆을 그림자처럼 지키며 그는 느그덜, 우리 덕이 건들었단 봐라, 하고 눈을 부라렸다. 우리는 형제처럼 가까웠으나 내가 서울로 전학 온 오 학년 이후로 그와 나의 세계는 그 거리만큼이나 멀어졌다. 내가 어머니의 정성 어린 새벽밥을 먹고 기사가 모는 차에서 모자란 잠을 자며 등교를 할 때 그는 큰엄마라고 부르던 내 종조모가 방바닥에 던져 주는 버스비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내가 바라던 대학의 법대에 입학했을 때 그는 대구의 어느 전문대에 들어갔고 내가 고시에 합격하여 졸업만 기다리던 그즈음에 그는 입대를 위해 상경한 것이었다.
딱 바라진 어깨를 움칠하며 그가 말했다. 아부지에 대한 원망 같은 거 이전에도 없었고 그거는 지금도 매한가지다. 하나, 걱정시러븐 거는…… 아재는 말꼬리를 흘리며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때 그는 아마도 제대 후 자신의 거취를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결에 그에게 지워진 자신의 아버지, 종조부의 삶과 그 뒤에 이어지는 고향의 일들. 그것이 본래는 종손인 내 일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보는 아재의 검은 얼굴에 갓 결혼한 그의 아내, 동글방한 눈으로 두릿두릿 어머니와 나를 건너다보던, 도무지 영문을 몰라 하던 그 표정이 겹쳐지고 모르는 사이에 내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며 그만 자도록 하라고 세 번째 채근하는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주무시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불을 껐고 아재는 더 말이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와 긴 한숨 소리가 번갈아 들려쐈다. 그 한숨은 내게로 옮겨 와 그와 나는 뒤척거리며 번갈아 한숨을 토해냈다. 가끔씩 돌아눕던 서로의 발이 닿곤 했지만 우리는 잠든 척 숨을 고르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이 들었다.
부엌의 수군거림도 멎고 어머니의 조용조용한 말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날의 논의는 한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체천위 제사는 또 그렇지마는 이대봉사를 하는 것은 간단히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언하 할배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강한 어조로 언하 할배에 맞선 사람은 대전 아재였다. 작은할아버지의 장남으로서 작은집의 기둥이어야 할 대전 아재는 항상 여색에 묻혀 자신과 종조모를 등한히 했던 부친에 대한 포한*을 아직껏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부지 생전에 이대봉사 하도록 했어야 되는 일을 가주고 와 여지껏 의논이 많은교. 당신이야 그 일밖에는 할 일이 없었이니 그렇제마는 자식들도 뒷전이고 밤낮으로 그저 귀신 모시는 일만 죽자꼬 해대는 그기 어데 할 짓입니까? 퉁명스레 말하는 대전 아재는 종조부가 돌아가신 후 백 일 동안의 상식* 드리는 것도 생략해서 두고두고 집안의 뒷공론이 많았다. 대전 아재에 이어 작은아버지와 뒤늦게 도착한 종고모*의 설득이 계속됐지만 언하 할배는 자신의 의견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하기까지는.
쟈 혼사 문제도 있고…… 아버지의 음성은 한없이 낮았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얼핏 나와 눈이 마주친 언하 할배의 그 표정. 어머니가 나를 건너다보며 보일락 말락 고개를 저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왔다. 내가 나온 후 조매(祝埋)*제사에 대한 의논이 이어졌고 묘사를 봄으로 옮기고 택일하는 문제까지 마무리 지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나는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고 아무도 묻지 않은 것이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정월 차례로 시작해서 제사와 제사 사이로 계절이 지나갔으며 그믐달, 조부 제사를 지내야만 비로소 일 년이 마무리되는 것. 태어날 때부터 익숙했던 그런 날들이 사라진 후의 집안을, 아버지를 나는 쉽사리 상상할 수가 없었다 느슨해질 만하면 닥치는 제사로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는 군대처럼 새정 비되는 집안. 제사를 지내는 동안의 집안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 조선 중기 어디쯤에 머물러 있었다. 사전에서도 찾기 힘든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고집이 얼마나 공고한 것인지 새삼스레 놀라곤 했다. 그 견고한 성채 안에 기꺼워하며* 갇혀 있는 어머니. 제삿날에만 성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돌아가는 누이들. 그리고 나는……
그러나 한편으로 제사 덕분에 나는 사 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성문을 지키는 사천왕처럼 달력의 장마다 두어 번씩 들어 있는 제사를 핑계 삼아 나는 싫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고 내 소심함을 정당화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힘든 고민에 빠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미리 겁먹은 처녀들을 쉽사리 내게서 달아나게 할 수 있었다. 그 많은 제사가 내게는 감옥이면서 또한 구원이었다.
제사를 줄이기로 결정한 그날 이후 아버지는 한동안 까닭 없이 화를 내시곤 했다. 아침 밥상에서는 국이 짜다고 나무라셨고 저녁 퇴근길이 막혔다고 애꿎은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셨다. 집 안이 알맞게 훈훈할 때도 덥다고 창을 열어젖혔다가 밭은기침 *을 하며 두꺼운 스웨터를 내오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성 품이 불같기야 예전부터였지만 그처럼 작은 일에도 빈번히 화를 내는 것은 아버지답지 않은 일이었다.
봄이면 이유 없이 숙면을 못 이루는 아버지가 이 봄 유난히 더 꺼칠해지신 것을 느낀 것은 어제 내게 비행기표를 건네주실 때였다. 김 기사가 대구공항에 마중 나올 거다. 공항에 늦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아버지는 내게 두툼한 봉투를 주시며 고향에서의 쓰임새를 일일이 일러주셨다. 어른들 뵈면 용돈도 드리고 느그 오촌, 동택이 말이다. 거기도 한 이십만 원 주고 그 댁들한테도 돈 십만 원씩 주도록 해라. 아아들도 보는 대로 용돈 좀 주고. 산에 놉해 온 사람들도 약줏값 좀 낫게 주고. 느그 엄마가 미리 다 했겠지만 니도 이제 그럴 나이가 됐다…… 아버지는 잠자코 서 있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우리 먼저 출발하마, 하시며 차에 올랐다. 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부쩍 늘어난 흰 머리카락이 아버지를 노인처럼 보이게 했다.
육십을 바라보는 전 생애를 가문을 융성케 하는 일에 바친 아버지로서는 이번 행사가 마치고 싶지 않은 숙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암전(暗前)의 등화(燈火) 같던 아버님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대학생이던 신혼 초. 어머니께 보낸 편지들에는 할아버지의 돌연한 사고 이후 아버지가 짊어진 무거운 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이따금 한지로 바른 상자 속의 편지들을 꺼내 보며 그 시절의 아버지를 얘기해주곤 했다.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경성부, 지금의 서울 시청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셨던 할아버지는 그때로서는 드물었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젖먹이였던 작은아버지 위로 두 고모가 세 살, 다섯 살이었고 아버지는 배재중학이 학년이던 해의 일이었다. 창졸간에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사 남매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조부와 삼촌에 기대어 학업을 계속해야했다.
내가 철들 무렵까지도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면서 잔을 드리고 나서 어이어이 낮게 곡을 하셨다. 어린 우리들에게 낯설고 무서운 느낌을 가지게 하던 그 곡소리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졌지만 대신 안경을 벗고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지르는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서울에 정착하고 지위가 올라가면서 아버지가 맨 먼저 하신 일은 할아버지를 모셨던 부하 직원을 찾는 것이었다. 열세 살의 아버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할아버지는 임종하신 후였고 작은할아버지와 증조부가 올라오시기까지 그 뒷수습을 해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할아버지 밑에서 일했다는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아버지는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유실되고 보존 기한이 지나 잊힌 문서들을 뒤적이고 신문에 광고를 낸 끝에 아버지는 기어코 노인이 된 그 사람을 찾아냈다. 그 사람을 찾아갔던 날. 할아버지의 함자를 확인한 아버지와 그 사람이 손을 맞잡고 놓지 않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과장님이…… 하며 할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그 사람 앞에서 아버지는 어린 소년처럼 다소곳한 자세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버지에게 일깨워 준 것 중 하나가 항상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아버지는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태에 대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한 번도 긴 여행을 같이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비행기를 이용할 때 아버지는 차를 타셨고 가까운 나들이에도 아버지는 차를 두 대 준비시키고 나를 뒤따라오게 했다. 차들에 묻혀 아버지가 탄 앞차가 보이지 않을 때, 이따금 나는 다른 길로 한번 가볼까 생각해 보지만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곧 카폰이 울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어디쯤 오고 있느냐, 괜찮으냐. 아버지는 마치 오래전에 혜어진 사람처럼 묻곤 했다.
비행기가 대구공항에 토착한 것은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마중 나온 차를 타고 금호를 막 지날 때 삐리릭, 카폰이 울리고 김 기사가 수화기를 뒤로 넘겨주며 어른이십니다, 했다. 아버지는 조금 쉰 목소리로 비행기는 어땠느냐, 점심은 먹었느냐, 피곤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작은집으로 오지 말고 곧장 우리 집으로 오너라. 나는 지금부터 감실(龕室)*을 둘러볼까 한다…… 아버지의 말은 우리가 고향을 떠난 후 비워둔 우리 집으로 바로 오라는 것이었다. 종파의 중시조*가 되는 칠 대조 어른이 지었다는 집은 내가 태어나던 무렵에도 이미 낡은 집이었지만 이제는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삭아 있어 고향을 방문할 때면 우리는 작은집의 별채에 묵곤 했다. 종조부가 말년에 약방을 경 영하신 탓에 총총히 방이 많은 작은집은 청송 할매와 오촌들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아직껏 말끔한 외양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비와둔 뒤채가 스러져 가기는 내 생가와 마찬가지였다.
포플러나무가 어린 잎을 거느린 길이 울울해지며 멀리에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다리가 보이고 올망졸망한 지붕들이 엎드린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다리 너머 면사무소의 유리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맞은편에 보이는 작은집의 회색 지붕이 언제나처럼 다소곳하게 다가왔다. 이따금 고향에 올 때마다 나는 다리 이쪽에서 바라보는 고향의, 그 변하지 않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대구에서 영천을 지나 금호를 거치기까지, 자갈이 튀던 길은 아스팔트가 입혀진 사 차선으로 바뀌었지만 방천*을 따라 달리는 길 이쪽과 저 너머 고향은 아무 상관 없는 곳 같았다.
버스라도 나타나면 이편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좁디좁은 다리를 지나자 낯익은 얼굴들이 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이고, 덕이 오는구나. 쪼글쪼글한 얼굴 가득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청송 할매가 내 손을 잡았다. 어머니와 동갑인 그녀의 나뭇등걸 같은 손을 마주 잡고 선 내게 동택 아재와 그 아래 동길, 동필 두 아재가 나란히 인사를 했다. 왕고모*와 종숙모* 들. 이제는 내 어깨에도 못 미치는 자그마한 키의 할매들과 아지매들은 여전히 어린아이 대하듯 내 등을 치며 니, 와 이리 말랐노. 장가 못 가 그런 거 아이가 하고 농을 던졌다. 그들에게 나는 언제나 큰집 덕이였고 어머니는 아직도 무실띠기 (무실댁: 어머니의 택호)였다.
아이고, 무실띠기 아인교. 자네는 서방 재미가 좋은가, 늙도 안 하노. 하는 식의 그 변함없는 언사에 어머니는 이따금 언짢은 기색을 보였지만 그들의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다. 앞뒤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런저런 물음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생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모퉁이를 돌아들자 녹슨 자물통이 달린 대문이 보였다. 어른 주먹만한 자물통은 열린 채여서 문은 삐거덕 소리를 내며 쉽게 열렸다. 촘촘히 풀이 돋은 마당 한쪽에 하얀 옥매화가 피어 있었다. 여리고 단아한 그 꽃이 생전의 내 할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비만 왔다 카믄 풀이 한 자 대기썩 돋으이. 내 뒤를 따르던 옆집 째보* 할매가 중얼거렸다. 사랑채의 기와마다 늘어진 마른 풀들. 풀들은 안마당을 지나 안채 앞과 뒤란*에도 소복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무너 내리는지 집채는 작년에 왔을 때보다도 더 낮아진 듯했다.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안채와 그 끝의 부엌, 한옆에 붙은 디딜방앗간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먼지가 보얗게 앉은 툇마루. 그 갈라진 틈마다 작은 자갈이 끼여 있었다. 이 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기함*을 하며 울었다던 것이 돌 전이라던가. 마루는 기껏 내 무릎에 미칠 만큼 낮았다. 디딜방아의 끈이 삭은 채로 매달려 있어 나는 어릴 적 보았던 할머니의 모습을 흉내 내어보았다. 끈을 잠고 방아에 올라서서 마치 시소를 타듯 올랐다 내렸다 하던 할머니. 저리 가거라, 다칠라.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의 음성이 들린듯했다. 돌아본 곳에는 어머니가 햇살에 부신 듯 눈을 찡그리며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위험하다, 내려오너라. 아버지는 감실에 계신다. 너도 들어오너라. 어머니의 음성이 할머니의 그것처럼 느껴져 나는 사
랑채로 사라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 하니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간 길에 아직 남아 있는 우물. 물은 깊었지만 지푸라기와 무언가 알 수 없는 검은 것들이 둥둥 떠 있었다. 우물을 들여다보며 나는 아―아― 낮게 소리를 내본다. 우물 밑바닥에서 웅웅 희미하게 떨리는 소리가 내게로 돌아오고 갑작스레 목이 메어왔다. 이제 신위를 옮겨 가고 감실이 비고 나면 이 집에 올 일도 없으리라. 감실을 잃은 집은 온전히 빈 채로 조용히 무너 내릴 날을 기다릴 것이다. 코끝이 찡해지며 썩어가는 물 위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어릴 적 다래끼가 자주 나던 나를 우물 위에 고개를 드리우게 하고 할머니가 떨어뜨리던 팥알들 같은 눈물.
아버지는 감실이 있는 사랑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따가 제사 지낼 거지만 우선 인사 올려야 한다며 감실 문을 열던 아버지가 무엇에 놀란 듯 흐음 신음 소리를 냈다. 이것 좀 봐라. 아버지가 가리킨 곳에 기다란 한지가 몇 장인가 겹겹 이 붙어 있었다.
감고 무진 입춘 정묘 이월 십칠일 자시 (敢告戊辰立春丁卯二月十七日子時).
감고 임신 입춘 임인 정월 초일일 축시.
감고 정유 입춘 정월 초칠일 인시.
감고 기사 입춘 무진 이월 이십팔일 해시.
감고……
비뚤비뚤하게 쓰인 글귀는 작은할아버지의 필적이었다. 힘주어 볼펜을 든 작은할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생각하며 넘겨본 한지는 열 개가 넘었다. 작은할아버지는 병든 몸을 이끌고 무시로* 신위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이렇게 왔다 가나이다, 하고 고했던 것이다. 기다란 종이쪽에 풀을 칠해 신위를 모신 감실 앞에 붙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 그것을 조심스레 떼어내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겹쳐 들었다. 작은할아버지로 하여금 신새벽에 잠 깨어, 혹은 모두가 잠든 한밤에 으스스한 기운마저 감도는 이 빈집의 감실로 걸음을 옮기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을 대면 그대로 바스러질 듯한 문종이들. 그 문을 열고 먼지 쌓인 방에 불을 밝히고 노구*를 숙이는 할아버지를 이 신위에 적힌 어른
들은 어떻게 내려다보았을까. 지금 영원히 땅에 묻기 위해 신위를 찾은 이 손길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자식의 혼사를 위해 조상의 제사를 없애는 후손. 정작 혼인할 당사자는 수많은 제사를 방패 삼아왔다는 것을 알까.
제사 준비로 분주한 집을 나는 조용히 빠져나왔다. 골목을 벗어나자 흙더미를 흘리는 낮은 담들이 나를 맞았다. 그 담 안의 집마다 머리가 하얀 할매들만 소복이 앉아 있던 정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누구랄 것 없이 나를 보면 아이고, 큰집 덕이 아이가 하며 반겨주던 목소리가 막 담을 넘어올 것만 같았다. 꺼멓게 변색한 이빨 사이에 삶은 삼 줄을 끼우고는 잘게 찢고 또 찢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놓던 횡계 할매. 장죽에 담배를 꼭꼭 눌러 담고서 탕탕 쇳소리 나게 놋재떨이를 두들기던 운산 할매. 늘 등이 가렵다며 효자손을 들고 살던 약방 할매. 나를 무릎에 앉히고 꼬깃꼬깃한 십 원짜리를 쥐여주던 할매들은 내가 커감에 따라 점점 니, 오나 한마디로 모든 반가움을 표시하였고 어느 새 하나 둘 돌아가서 이제는 그때의 아지매들이 손자를 보았지만 젊은 할매들은 청년이 된 내게 예전처럼 쉽사리 말을 건네지 않았다.
오랜 가뭄에 물줄기가 쫄쫄거리며 흐르는 방천을 따라 나는 작은집 쪽으로 휘적휘적 걸었다. 저 물을 볼 때마다 큰누이는 자기 손으로 내 똥 기저귀를 빨던 얘기를 했다. 여덟 살, 여섯 살의 두 동생을 거느리고 갓 난 남동생의 기저귀를 헹구고 있노라면 동네 아낙들이 니, 동생 꼬추 우째 생겼는지 봤나, 참하재 하고 놀려대서 귀밑까지 빨개졌었다는 얘기를 이제 마흔이 되는 누이에게서 들으면서 나는 무실댁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이 작은 마을을 얼마나 오래 흥분시켰는지를 생각했다. 임지에서 급히 내려오신 아버지는 그 세 해 전에 돌아가신 증조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고 종조부는 항렬자인 덕(德) 자 앞에 경(慶) 자를 넣어 이름을 지으시며 석 달을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하셨단다. 일찍 여읜 형에 대한 우애가 각별했던 종조부는 아들 하나만 더 낳으라고 어머니를 채근했고 두 해 뒤에 남동생 이 태여나자 집 안이 훤해졌다고 명(明) 덕이란 이름을 내려주셨다.
그 동생이 학생 데모에 앞장서다가 아버지에게 떠밀려 미국으로 간 것이 칠 년 전이었다. 가끔씩 부쳐오는 편지에 동생은 언뜻언뜻 돌아오지 않을 뜻을 비추곤 했지만 나는 부모님께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돌발적인 사건을 저지르기 좋아했던 그 애가 어느 날 노란 머리의 여자를 대동하고 나타나 형, 인사해. 내 아내야, 하더라도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저 동생에게 어머니께는 비밀로 하자, 고 당부하리라.
어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였는데 그 대부분은 동생과 관련이 있었다. 동생은 연희와 더불어 그때까지의 내 생활을 뒤흔들어놓기를 즐겼다. 너는 무슨, 이조시대 사람이냐는 질책을 받으며 연희와 입씨름을 하고 돌아가면 집에는 형님, 옥체를 보존하셔야지요, 하는 동생의 핀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나 빠져 들던 팔십 년대의 회오리에서 나는 그 가장자리에 서 있었고 동생과 연희는 태풍의 눈 가운데로 돌진해 갔던 것이다. 내가 그러지 못한 것은 내 결음이 너무 무거운 탓이었다. 단 한 번도 나는 어머니와 집안을 떠난 나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는 길은 언
제나 그들 모두와 함께였고 내 어머니를, 공직자인 아버지를 등에 지고 달려가는 나를 나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게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번, 내가 동생보다 앞서 달려갔던 기억. 대학 삼 학년 봄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어느 한 해 최루탄과 구호로 얼룩지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만 그해 유월의 바람은 유난스러웠다. 오전부터 술렁이던 과의 학우들이 무리 지어 서울역으로 향하고 나는 늘 그랬듯이 연희에게 이끌려 뒤늦게 전철을 탔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전철 안에서 나는 그 열기 때문만은 아닌 더위를 느끼며 자꾸만 땀을 흘렸다. 나를 돌아보던 연희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겁이 나면 그냥 구경 만 해. 아니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든지.”
연희의 음성에는 비난의 기색이 없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귓불이 홧홧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회에 참석하는 일은 잦았지만 시위 행 렬에 가담하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토론이라면 나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책을 읽었고 어떤 질문에도 응대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생각을 했다. 한차례의 소용돌이가 지나고 나서 반성과 평가가 있을 때면 나는 뒷자리에서 갑론을박하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는데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끝이 내게는 너무도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끝난 자리에서 하릴없이 계속되는 소모전. 연희는 그것이 끝이 없는, 끝이 있을 수가 없는 싸움이라고 말했다.
“너는 그 생각 때문에 망할 거야, 미안하지만.”
연희는 나를 비웃었지만 내가 그렇게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질리지도 않고 토론장마다 나를 끌고 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철이 서울역을 그냥 통과하는 바람에 뛰다가 걷다가 다시 뛰기를 되풀이한 나와 연희가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그날의 시위에는 무언가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서울역과 시청으로 이어지는 길의 인파가 여느 때보다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철시한* 상가 앞에 모여든 사람들. 육교 위에서 시위대와 진압 경찰을 내려다보던 사람들. 길 한편에 차를 세우고 공방전을 지켜보던 사람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보다 더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경주를, 끝내 터뜨려지기 위해 꼬리를 그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폭죽을, 한발 재겨 디딜 틈도 없이 벼랑 끝에 몰린 맹수를 보는 듯한 초조함이 있었다. 연희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는지 내 팔을 잡는 그 손이 가늘게 떨렸다.
팽팽한 긴장이 끊어진 것은 누군가 칼을 대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구호를 선창한 순간이었다. 타도하자, 타토하자, 타도하자…… 그것은 신호탄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로 솟아올랐고 곧 그에 응답하는 최루탄 소리가 타, 타, 타, 타 터져 나왔다. 스크럼*을 짠 학생들과 어깨를 겯고 그들과 함께 밀고 밀리면서 줄곧 나는 구호를 선창하던 목소리를 생각했다. 메가폰을 통해 쇳소리로 울렸어도 목소리는 어딘지 귀에 익었고 그것이 어쩌면 동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를 자꾸 대열에서 처지게 만들었다. 곧 앞쪽부터 흐트러지던 무리가 몸을 돌려 덕수궁 옆쪽과 조선호델 뒷길로 몰리기 시작했다. 뭐 해, 빨리 뛰어. 연희의 재촉을 들으며 나는 정신없이 어느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동생을 본 것은 내가 한 건물의 지하 다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막힌 곳으로 도망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쯤 모르지 않았지만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눈에도 푸른 제복을 입은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생각할 겨를 없이 다방 문을 밀었다. 컴컴한 실내에는 여자 가수의 흐느끼는 듯한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붉은 비닐 커버의 의자에 막 앉으려는 찰나 누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보았고 곧 동생의 긴장 어린 눈과 마주쳤다. 손가락을 입에 대고 아무 말 말라는 시늉을 해 보이며 동생은 나를 끌고 주방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찻잔을 씻는 여자와 차를 준비하는 남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동생과 내가 한편에 쌓여 있는 음료수 상자를 밀치고 만든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거칠게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매운 최루탄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거 웬 바람이 불었어, 그래?”
부산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나자 동생이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형? 형이 믿는 사람 장례식 치르자는 날이야.”
동생은 입 꼬리를 비틀며 낮게 속삭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고 화형식 치르자며 종이 인형에 불 지르지 않은 날이 있더냐고 말하지 않았다. 매일처럼 똑같은 구호로 죽이자, 찢어 죽이자 하지 않았느냐고도 말하지 않았다. 형이 믿는 사람. 동생의 그 말이 나를 침묵하게 했다. 침묵하는 내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동생은 모르고 있었다.
“이만했을 때 집에 가, 형. 어쩌려고 그래?”
그 순간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나를 잡는 동생을 제치고 거리로 달려 나갔다. 거리에는 매운 연기를 씻어 내리는 비가 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처음보다 오히려 불어나 있었다. 나는 타도하자, 타도하자, 고 소리 높여 외치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나도 살아 있다, 나도 믿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곧 구둣발에 차이고 곤봉에 두들겨 맞으며 차에 갇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날 내가 연신 욕을 해대는 순경 앞에서 반성문이라는 것을 쓰고 나온 것은 동생 때문이었다. 무더기로 갇힌 학생들 틈에서 형, 하며 나를 부른 동생의 손에 들린 내 운동화 한 짝 때문이었다. 이거 없이 어떻게 집에 가려고 그래. 엄마한테 뭐라 그럴 거야? 운동화를 흔들며 그 애는 사람들을 비집고 내게 다가왔다. 어디서 벗겨졌는지도 몰랐던 내 신발 한 짝. 나와 동생을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아, 나도 저렇게 챙겨주는 사람, 어디 없나 하는 소리도 들렸다. 쏟아지는 그 웃음은 나를 향한 조롱처럼 들렸지만 짓이겨진 신발을 내미는 동생의 눈은 너무도 진지해 보였고 나는 그 애에게 화를 낼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나는 묵묵히 신을 받아 들고 흙투성이인 한 발을 집어넣었다.
밤늦게 대문을 여는 어머니에게 시위 때문에 길이 막혀 꼼짝도 못했노라고 변명을 하는 내게서는 아직 매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여서 어머니는 쿡쿡 기침을 하며 저녁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에게서 돌아서면서 나는 뒤늦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를 비겁하거나 나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는 남들과 다른 일이 있고 나는 그것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들이 무어라 하더라도 그런 내가 잘못된 것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의 손에 들린 그 더럽혀진 신발 한 짝. 그것은 내가 얼마나 오만했던가를 내게 일깨우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두려웠던 것이다. 신발을 잃고 집으로 돌아갈 일이,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설명해야 하는 일이. 그리고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밤이…… 그것이 나였다…… 그 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밤을 새웠고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로 하여금 끊이지 않고 연희를 만나게 한 것은 그녀의 삶에 대한 한없는 동경이었다. 연희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는 여자였다. 나를 만나면 그녀는 언제나 답답하다고, 너를 보면 갑갑해 미치겠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생활을 따라잡으면서 내가 얼마나 힘겨워했는지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연희가 다니는 야학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그녀와 함께 어린 공장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를 떠올렸다. 졸업 후 연희가 벽지의 산업학교에 부임했을 때 나는 함께 먼 길을 기차에 흔들리며 달려가 회 먼지를 뒤집어쓴 학생들을 만났다. 당연한 순서처럼 그녀가 전교조에 가입 했을 때도 나는 연희의 곁에서 격문을 작성하고 팔을 휘젓는 나를 상상했다. 학교에서 쫓겨난 그녀가 작은 출판사에 들어가고 그곳을 나와 스스로 사무실을 얻어 출판과 편집을 시작할 무렵, 나는 널찍한 책상에서 판결문을 쓰면서도 내내 좁은 방 한편에서 교정을 보는 나를 생각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숨을 쉴 수 있었고 내게서 연희는 다른 세계로의 작은 통로였다.
사랑이 그 사람의 삶을 보듬는 일이라면 나는, 그렇다. 나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연희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내 아내가 된 연희를 상상할 수는 없었다. 내 세계로 들어온다면 연희는 더 이상 연희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그녀를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내 주위를 빙 도는 원을 그리고 나는 행여나 내가 그 금 밖을 벗어나 연희에게 다가갈까 봐, 혹시라도 연희가 금 안으로 들어설까 봐 늘 조바심치며 지내야 했다. 때로 연희 주위의 원 안으로 지나치게 깊이 들어선 나를 의식할 때면 나는 소스라치며 발을 빼내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런 술래잡기 같은 나날이 견디기 힘들어질 때마다 나는 나로 인해 부서지고 망가질 연희의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내 바람을 가차 없이 잠재웠다. 내 삶의 한 부분이 된 그녀의 생활을 온전히 내게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한 언젠가 우리의 만남이 끝날 것임을 나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고 나는 가능하다면 영원히 그것을 늦추고 싶었다.
내려오기 전날, 전화를 걸었을 때, 연희는 없고 자동 응답기의 단정한 음성이 메모해주세요, 연희입니다 하고 말했다. 고향에 가는 길이야. 한 이틀 걸릴 거야, 다녀와서 연락할게, 하고 나니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선을 안 봤어. 그래서…… 그래서 네게 연락할 일이 없었다는 말처럼 여겨져 그 말을 지우고 싶었지만 테이프는 착실히 돌아갔고 내 하릴없는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담길 것을 생각하며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면사무소 마당에서 차를 닦고 있는 김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줄줄이 늘어선 차들은 경북·대구·대전·부산의 다양한 번호판을 달고 있었고 그사이 두어 대 더 늘어나 있었다. 열린 작은집 대문으로 왁자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매 제사에는 조매되는 어른의 친지가 모두 모이는 법이어서 내가 모르는 얼굴도 여럿 있었다. 오천 정씨 문중에서 온 오대 조모와 풍천 임씨였던 고조모의 집안사람들일 것이다. 할머니와 종조모가 모두 오천 정씨여서 정씨 집안과는 겹사돈인 경우가 많아 촌수를 따지기가 어려웠다. 나는 두루 목례를 나누고 자네도 장가가야지 어쩌고 하는 인사말들을 들었다. 안채로 들어서자 할매들과 아지매들이 방금 본 듯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오니라꼬 욕봤지러, 이리 내려 앉그라.”
청송 할매가 아랫목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들기며 정겹게 말했다. 가늘고 높은 음색은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고왔다. 그녀의 젊은 시절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그 목소리뿐인지도 모른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방학 철마다 내려오면 만나는 그녀가 내 어머니였으면…… 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보다도 더 다정하고 더 예쁘고 나긋했다. 나를 보면 언제든지 활짝 웃으며 마련해둔 군것질거리를 내주었고 겨울 내내 저물도록 썰매를 타고 험한 꼴로 돌아와도 결코 나무라는 법이 없었다. 동택 아재와 함께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면 아이고, 야들아, 감기 든다 하며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로 씻겨주었다. 자란 후에도 이따금 고향에 들블 때면 그녀는 어린 닭을 잡고 된장독에 묻어놓았던 콩 잎을 얹은 상을 미안스러운 듯 내게 디밀고는 달게 밥을 먹는 내 앞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키고 앉았다가 밥그릇이 비기 바쁘게 또 하나 가득 밥을 퍼 담았다.
청송 할매. 그녀가 작은할아버지의 눈에 띈 것은 스물이 채 못 되었을 시절, 이곳 사람들이 대구사변*이라고 부르는 10·1폭동에 남편을 잃고 난 그녀가 작은집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던 때였다고 한다. 대구에서 시작된 폭동이 영천을 지나 이곳까지 밀려들어 고향에는 아직도 그때의 불탄 흔적을 그대로 지닌 채 허물어져가는 집들이 있었다. 젊은 과수댁은 한사코 작은할아버지의 첩이 되기를 거부해서 작은할아버지가 한동안 애를 태웠고 결국 종조모가 그 일을 성사시켰다고 했다. 청송댁에게 고향에서만은 안주인의 지위를 확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과 자식을 낳으면 대구에서 책임지고 교육시키겠다는 이야기로 설득을 편 결과였다고 하나 그런 확실한 언질이 아니더라도 타성바지*의 가난한 과부로서는 작은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은 폭도였고―그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모두 그렇게 말했다―불탄 집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경원의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청송댁이 물 한 그릇 떠놓고 절하는 예우도 없이 작은집의 안방 살림을 시작한 그해, 내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안동에서는 누구라 하면 다 알 만한 유림의 선비였던 외조부는 아버지를 단 한 번 보고 그 자리에서 막냇사윗감으로 결정하셨다고 한다. 시부*도 없는 집의 맏며느리로 보내고 싶지 않다고, 외조모가 극구 반대를 했어도 외조부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하였고 곧 사주단자가 교환되고 혼삿날이 정해졌다. 외조부로 하여금 아버지를 그토록 마음에 두게 한 것은 아버지가 명문 대학의 학생이거나 학덕 있는 집안의 장손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외조부는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어보시고는 단박에, 크게 될 인물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불볕이 내리쬐는 유월에 치러진 혼인날, 정작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신부인 어머니보다도 작은집의 새 안주인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종가의 학생 신랑의 배필보다는 그 당시의 고향에서라면 누구도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작은할아버지의 첩실이 더 홍미로운 대상이었으리라. 강한 눈매와 힘이 느껴지는 골격에 거침없는 성품인 어머니와 여리고 곱다란 청송 할매는 대조적인 생김만큼이나 다른 신접살림을 시작했을 것이다. 상객(上客)*으로서 딸의 혼인에 참석해서야 집 안의 기울기가 짐작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아신 외조부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안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끝내 눈시울을 붉히셨는데 그것이 어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외조부의 눈물이었다. 외조부가 염려한 대로
그때의 우리 집 살림은 곤궁하기 그지없어 혼인 다음 날, 새벽밥을 지으려고 쌀독에 바가지를 넣었을 때 득득, 바닥 긁히는 소리가 가슴을 치더라고 어머니는 거짓말 같은 얘기를 누누이 들려주곤 했다.
이따금 어머니는 할머니가 애꿎은 꾸지람을 내릴 때면 반드시 청송댁의 일이 끼여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청송 할매가 할머니께 어머니보다 더 맵시 있게 바느질한 저고리를 드렸다든가 저녁거리를 한 바구니 보내오는 날이면 섬 약한 할머니는 당신의 며느리를 대놓고 나무라지는 못하고 다른 트집을 잡으셨다는 것이다. 주로 그 대상은 내 누이들이었다지만·……
“자네도 참 곱디이만은 인자 마 다 늙었고마.”
고모할머니가 청송 할매를 흘낏 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지도 한 대 주이소.”
청송 할매가 건네받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느다랗게 연기를 뿜어올렸다.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배운 담배가 늘었다고 변명처럼 말하며 나를 보는 청송 할매에게는 아직껏 수줍음이 남아 있다:
“어무이는 와 안 오시노?”
청송 할매에게 있어 어머니는 이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자신의 시어머니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집안일을 준비하고 사람을 부르고 자식을 고향에 묶어두고, 그리고 제사를 없앨 채비를 한다. 준비가 미흡하다고 나무랄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그녀는 부엌 쪽에다가 소리를 질렀다.
“야들아, 여 덕이 떡 좀 갖다줘라.”
부엌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을 하던 청송 할매의 세 며느리가 한꺼번에 예에 ― 하고 길게 대답했다.
“그래, 니는 우얄라 카노. 색시는 안 얻을 작정 이가?”
고모할머니가 담배를 비벼 끄며 느릿느릿 물었다. 멋쩍게 웃는 나를 보며 청송 할매가 자꾸 그카지 마이소, 가가 어데 장개갈 데 없어 걱정인교, 하고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감실은 어떻트노, 노상 소제해도 먼지가 많제?”
내가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 동택 아재의 큰아이가 할매를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바짓가랑이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이는 낯선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내 앞의 떡 접시로 손을 뻗었다.
“아이고, 야야. 서울 아재 옷 베릴라. 니 씻고 온느라, 어여 가자.”
황급히 아이를 돌려세우고 밖으로 나가는 청송 할매의 뒷모습이 한 손에 들 듯 작아 보였다. 아아들이 다 그렇제, 흙구뎅이서 또 놀 낀데…… 고모할머니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담뱃갑을 끌어당겼다.
음식 냄새가 온 마당을 휘돌고 아이들이 놀다 지쳐서 잠들 무렵에야 제사 준비가 마무리되었다는 오촌 아재의 전갈이 있었다. 상을 맞잡은 오촌들과 제기를 담은 지게를 진 동택 아재의 뒤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어머니, 할배들, 아지매들이 줄레줄레 감실을 향해 걸었다. 어둠이 짙은 길에 사박사박 사람들의 발소리가 울리고 동네 개들이 컹컹 짖었다. 내일이면 모시고 나올 신위를 오늘 밤까지는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이 번거로운 행보. 어느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아 우리는 마치 한밤에 야습을 위해 행군하는 병사들 같았다.
임시로 끌어들인 알전등이 마당 곳곳을 비추는 집은 낮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을씨년스러웠다. 상을 펴고 제기에 음식을 쌓아 올리는 손에 간간이 기물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편(떡)은 이쪽에 놓고 도적(屠炙)*이 괜찮겠나. 괴어놓은 생선과 전을 다시 손보는 어머니의 음성에, 평접시가 넓어서 괘안심더 하는 누군가의 대답이 이어지고 덕아, 진설해라 하고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마당에 우르르 모여든 제관들이 감실 밖의 대청에 올라서고 아버지가 초석 자리에 꿇어앉는 것으로 제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오른쪽에서 잔을 치고 그 잔을 작은아버지가 받아 상에 올렸다. 모셔낼 신위가 많아 잔 수가 끝이 없었다. 잔을 모두 올리고 나서 아버지가 두 번 절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사람들이 엎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밥)상 들여라. 아버지의 낮은 소리를 따라 국과 밥을 얹은 상이 들어왔다. :
절을 마친 아버지가 낭랑한 음성으로 축문을 읽어 내려갔다.
유세차― 갑술 ㅡ 삼월 ㅡ 정유 一 삭― 십 일 일 一 정축 一 효현손 一 동
휘 一 감고소우,
현고조고통정대부행용양위부군 (顯高祖考通政大夫行龍穰衛府君)
현고조비숙부인풍천임씨(顯高祖妃淑夫人豊川任氏)
현고조비숙부인오천정씨 (顯高祖妃淑夫人鳥川鄭氏)
“……”
지사대국시개례사지양대심수무궁분즉유한(止四代國施改禮祀止兩代心雖無窮分則有限)
“……”
감청신주출취옥우공신존헌(敢請神主出就屋字恭伸尊獻).
사 대조와 고조부의 경우는 조매를 위한 고유(告唯)를 하고 증조부와 조부의 신위는 서울로 모셔 갈 것임을 고하는 길고 긴 축문을 읽는 아버지의 간간이 떨리는 음성이 숨죽이고 선 사람들의 머리 위로 퍼져나갔다. 매안하기를 감히 청하는 마음이 창망하기* 이를 데 없으나 백 번 절과 맑은 술로 고하노니 현손(玄孫)*의 뜻을 받아주십사는 것과 경성으로 옮겨 누옥*이라도 마련하여 모시고자 감히 아뢰노라는 뜻임을 띄엄띄엄 알아들으며 나는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탕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오르고 메에 꽂힌 수저는 비스듬히 기울어 누군가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축문이 끝나고 내가 아헌(亞獻)*을 한 후에 할배들과 아재들이 돌아가며 잔을 올리고 아버지의 뒷걸음질을 신호로 모두가 방을 나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고함을 들은 혼백들이 청작서수(淸酌庶羞)*를 골고루 맛보시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묵묵히 서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은 부복하는* 것이 원칙이나 여름 제사가 많은 우리 집에서는 간혹 농사 일에 지친 제관들이 조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해 여름. 코 고는 소리가 낭자할 정도로 깊이 잠든 선은 할배를 보신 할아버지가 그때부터 서서 묵념 하도록 바꾸셨다는 이야기를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사람들의 발치에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 다른 제사 때면 오 분쯤 걸릴 이 시간이 오늘은 유난히 길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머릿속을 휘저을 많은 상념들.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아버지의 옆모습을 나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무쭐한 느낌이 드는 저 어깨. 아버지는 이제 당신의 길을 정리하고 계신 것이다. 당신이 그 많은 날 동안 지켜온 세계를 고스란히 내게 전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아픔이 저 목덜미에 주름으로 내려앉은 것일까.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의 거뭇한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릴 동상 같았다.
오늘 왔나…… 언제요, 어젯밤에 안 왔십니까. 준비하니라꼬……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작은아버지와 언하 할배다. 갓지기(산소지기) 집에 묘사 준비시키고, 매안할 산소 둘러보고, 또 그 안 있습니까. 기관장들이 저녁 낸다꼬 어찌 캐쌌는지 경주 가서 자고 왔심다. 작은아버지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저런 사유들로 아버지를 만나고자 하는 이 고장 사람들을 아버지를 대신해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을 먹는 것이 작은아버지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과묵한 편인 아버지와 달리 작은아버지는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사람 사귀기를 즐기는 활달한 성품이었다. 너무 어려서 부친을 여읜 탓에 그 기억이 그를 짓누르지도 않았거니와 꼬장꼬장한 할머니도 작은아버지에게만은 언제나 유순하셨다. 총각 시절,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큰 키에 깔끔한 인상을 풍기는 작은아버지에게는 늘 여자 전화가 걸려오곤 해서 할머니의 속을 썩이기도 했었다. 공부에는 뜻이 없던 작은아버지가 어렵사리 대구의 이류 대학을 마치고 처음 시작한 일은 집을 지어 파는, 소위 건설업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을 딴 부류로 취급하는 아버지는 하나뿐인 동생을 무언가 그럴듯한 자리에 앉히고 싶어 숱하게 사람을 소개시키고 직 장을 마련했지만 작은아버지는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참지 못해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안면으로 취직이 가능했던 은행, 신문사, 중소기업들. 기껏 들어간 직장을 두 달, 혹은 한 달도 못 견뎌 나오기를 십수 차례 한 끝에야 아버지는 동생의 ‘사업’을 인정 했는데, 그것은 작은아버지에게 지쳐서가 아니라 할머니의 성화에 따른 마지못한 허락이었다. 작은아버지에게는 아버지가 형이 아닌 부친과도 같은 어려운 사람이었다. 결혼하기까지 한집에 머물렀던 작은아버지가 아버지 앞에서 흡사 꾸중 듣는 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을 나오는 순간부터 야야, 경덕아. 니 요번에도 일등했지러, 하며 큰 소리로 나를 칭찬하고 형수씨, 신냉이 짠지, 이거 진짜 죽이네요, 하는 찬사로 어머니를 웃게 했다. 할머니의 방에서 작은아버지는 어리광 피우는 막내 노릇을 충실히 해서 입이 짧은 할머니가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시게 했고 온 집안 식구가 말리지 못해 애를 쓰던 할머니의 담배에 불을 붙여드리는 사람도 작은아버지 뿐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작은아버지가 부도를 내고 한밤중에 찾아온 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신혼 초였던 숙모가 울음 잠긴 음성으로 전화를 걸어온 지 사흘 만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전혀 수배자 같지 않은 말쑥한 열굴로 내 방문을 불쑥 열고 들어와 덕아, 내 여기 좀 재와도고, 하기가 무섭게 잠들어 버렸다. 막내아들의 기척에 잠을 깬 할머니가 내 방으로 들어와 잠든 작은아버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셨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할머니로서는 작은아버지의 돌연한 방문이 놀라웠으리라.
할머니는 쪼그리고 앉아 막내아들을 한참 들여다보시다가 슬그머니 그 옆에 누우셨다. 야야, 니 와 여서 자노. 할머니가 가만가만 작은아버지를 흔들었다. 끄응 몸을 뒤채며 작은아버지가 할머니 쪽으로 돌아누웠다. 잠결에도 작은아버지는 어무이요, 와 안 주무시고…… 하다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밤에 할머니가 당신의 두 배는 넘을 아들을 부둥켜안듯 팔을 두르고 잠든 모습을 보며 나는 책상 서랍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일기를 꺼냈고 몇 장인지 셀 수 없을 만큼의 글을 썼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지 않는 할머니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아버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막상 아버지가 묵묵히 눈자위를 붉히셨던데 비해 작은아버지는 우리들의 가슴이 울리도록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쓰시던 이부자리, 늘 방에 깔아놓아 할머니가 피우던 담배 불똥이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 나일론 이불을 끌어안고 작은아버지는 어매요, 어매요 하고 할머니를 부르며 울었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어머니가 작은아버지의 학생 시절 가죽 가방을 발견했을 때 작은아버지는 그 끈 떨어진 낡은 가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대학에 붙었다꼬 어무이가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래, 학교도 안 나가면서 가방은 열심히 들고 댕겼지요…… 손잡이의 연결고리에 거뭇하게 녹이 슨 그 가방을 지금도 서울 작은집에 가면 볼 수 있다.
서 있는 발끝에 쥐가 나는 듯,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즈음 아버지가 흠흠 기침을 하시고 내가 방문을 열었다. 타들어 간 촛불의 녹지근한 기운과 깎은 향이 피우는 냄새가 가득 찬 방. 숭늉 그릇이 들어오고, 메의 수저를 숭늉으로 옮긴 다음 첨작의 순서로 제사는 계속되었다. 낙시해라 하는 아버지의 말에 작은아버지와 내가 물그릇의 숟가락과 적(부침) 위의 젓가락을 가지런히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고 합식기들의 뚜껑을 모두 닫았다.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는 두 번 절을 마친 아버지가 철상(撤床) 해라* 하선다.
상 위의 음식을 들어내는 것은 젊은 사람들 몫이지만 나는 마당으로 내려서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내일도 날은 좋을따.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피곤하시지요, 들어가서 음복하셔야지요. 내 말에 대답 없이 아버지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시고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이 지나는 소리. 축축한 밤공기를 가르며 멀리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일찍 산소에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사람들을 다독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아버지와 나는 작은집을 향해 걸어갔다.
군불을 때서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몸을 누이자 등줄기를 타고 피로가 몰려들었다. 가무룩하게 의식 이 엷어지면서도 정작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오촌들의 목소리와 안채 쪽에서 나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귀를 간질였다.
“느그 아아도 내년에는 학교 드갈 낀데, 니는 우얄라 카노.”
동택 아재가 동생인 동필 아재에게 묻고 있었다. 신입생이 고작 열 명이라는 이곳 국민학교에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동필 아재는 흘낏 내 쪽을 보고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사 대구 나가믄 되지만 히이(형)야말로 우얄 끼고. 아까도 부엌에서 형수가 그 얘기를 하드락 카든데…… 뭐 하나 갈챌 데가 있나, 아아가 아프이 델꼬 갈 소아과가 있나, 어무이 모시고 대구 나가 살아도 이마이는 안 살겠나꼬…….”
동택 아재가 부스럭거리며 담뱃불을 댕기는 기척이 들리고 싸아한 연기가 내 쪽으로 밀려왔다. 아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느냐고, 거기 일은 다 누가 하느냐고, 그 일 맡기려고 집이랑 논이랑 지 앞으로 해주지 않았느냐고 단호하게 말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흐릿한 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아재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내 생각뿐, 나는 갑작스레 밀려든 잠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꿈 때문이었다. 꿈에서 나는 연희를 만났다. 연희는 자동응답기에서처럼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떠나려고 해. 어디로 가느냐고 내가 물었지만 연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내 머리 위를 빙빙 돌며 날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날고 싶었지만 내 발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연희야, 연희야. 내 부름이 연희를 따라가고 그녀가 날아가는 곳에 휘황한 빛을 밝힌 성채가 있었다. 초록과 주홍과 노란 빛이 아롱거리는 성을 향해 연희는 너울너울 춤추듯 날아가고 그 뒤로 햇살이 눈부시게 뻗어 있었다. 빛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나는 그녀를 안타깝게 불렀다. 가지 마.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가지 마, 제발 가지 마아아아…… 어느 순간 연희는 사라지고 나는 진흙 속에 누워 있었다. 뻘밭처럼 진득한 진흙 구덩이에서 나는 굳어버린 석고인 양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끝이 없이 흘러 강이 되고 내 몸은 그 강 위로 둥둥 떠내려갔다.
“이제 다 끝났다. 내려가자:.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 산에서의 일들. 몇 달을 벼르던 일을 마친 아버지는 탈진한 사람처럼 허황해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남은 음식을 챙기고 기물과 자리를 걷어내는 사람들을 지나 아버지와 나는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곳곳마다 엎드린 무덤이 좋이 스물은 넘어 보였다. 오종종한 무덤마다 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저 안의 유골은 풍화되어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리라.
산을 내려와 갓지기의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우리는 출발을 서둘렀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먼저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신 후, 작은아버지 내외와 종고모가 차로 출발하고 다른 친지들도 대구로, 대전으로, 부산으로 떠나가고 나는 한 번 더 집을 돌아볼 요량으로 맨 나중까지 남았다. 종조부가 쓰던 방은 한편에 과수 재배에 관한 책이 놓여 있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돈사*를 지어 돼지를 기르던 동택 아재가 저온 창고를 빌려 사과와 양파 도매를 시작한 것도 몇 해 된 일이었다. 어느 것에도 그다지 이윤을 남기지 못해서 이곳, 작은집의 생활은 문중 논에서 나는 곡수(穀收)*와 매달 아버지가 선산 관리비 조로 보내오는 얼마간의 돈으로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문갑 위, 비닐커버의 검은 공책에 쓰인 자잘한 숫자들이 동택 아재의 신곤한* 삶을 말하는 듯 내 눈을 아리게 했다.
자개가 떨어져 나간 경대 위의 구형 라디오. 그 옆의 사진틀에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와 종조부, 학생복을 입은 아버지가 있었다. 누렇게 바랜 사진 속의 얼굴들을 나는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고추를 드러내고 앉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저 아기는 아마도 나일 것이다. 자신의 친아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위하셨던 작은할아버지. 삐죽이 열린 문갑 서랍 안에 낯설지 않은 물건이 있었다. 둥그런 흡착판이 달린 청진기 모양의 그 기구는 할아버지의 목울대에서 그 떨림을 감지해 소리로 전해주던 바로 그것이었다. 얇은 관을 통해 울려 나오던 할아버지의 음성. 그 합성음과, 소리가 기구를 잡은 내 손을 지날 때의 지릿하던 느낌이 되살아나 나는 오래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빛이 사라져 부연 막이 낀 듯하던 할아버지의 둔탁한 눈동자. 그 눈에 당신의 뜻을 담으려 그렇게도 애쓰던 할아버지의 간절하던 손짓이 떠올랐다. 그러나 기구를 통해 나오던 할아버지의 음성이 사라진 지금 그 기구는 그저 버려진 도구일 뿐이었다. 낡고 더러운 플라스틱 줄과 매달린 흡착판은 아이들 병원놀이에나 쓰임직 해 보였다.
“니, 안즉 안 갔나.”
등 뒤에서 동택 아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게 그은 얼굴에 잔뜩 웃음을 담고 선 동택 아재는 그 순한 눈을 끔벅이며 내게 말했다.
“니 얼굴이 마이 안돼 보인다. 얼른 가서 쉬야제.”
아재의 얼굴은 그사이 더 검어진 듯했다. 작년 가을 들여놓았던 양파값이 오르는 기미가 보여 묵혀두었다가 때를 놓치는 바람에, 결국 창고에서 썩어나도록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한숨을 쉬던 어젯밤의 동택 아재를 떠올리며 나는 아재를 한 번 보고 할아버지의 기구를 다시 보기를 되풀이했다. 빈 창고에 또 다른 과실을 채워 넣고 때맞춰 들어내고…… 경운기를 몰고 가는 길 옆에 피어난 꽃을 보고 벌초할 때를 생각하고 그 꽃이 지면 묘사를 위해 제기를 찾아내고…… 아재가 하는 일은 생전의 작은할아버지가 하시던 일 그대로였다. 아재의 시간은 멈추어버린 시계의 그것이었다. 똑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며 해를 맞고 보낸다. 아재는 참으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을까. 나는 그렇게 묻기가 두려웠다. 어쩌면 내 시간도 똑같이 이 낡은 기구의 끈끈한 플라스틱 관 속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을·…… 나는 그 기구를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고 서랍을 닫았다.
“늘월 큰아부지 산소에 말이다.”
아재가 선 채로 느릿느릿 말했다. 나를 보면 아재는 늘 산소나 제사나 대소가의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곤 했는데 아재로서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얘기를 할 때의 아재의 태도는 나보다 십 년은 연장인 어른 같았다. 그 음성조차도 작은할아버지의 그것을 쏙 빼어닮아 나는 흠칫 놀랄 지경이었다.
“내, 형님한테는 말 안 했다마는 우째 그래 풀이 우거지는동, 참 이상트라·…‥ 다른 산소보다 똑 시 번은 더 결음을 해야 되이 말이다……”
하마터면 나는 아재에게 그러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말할 뻔했다. 쌓이고 쌓인 아재를 향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짜증으로 치밀어올라온 탓이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풀 자라라고 물 주기를 했느냐, 거름을 내기라도 했느냐, 왜 내게 그런 얘기를 하느냐, 우거지면 우거진 대로 두면 될 게 아니냐, 그만하면 됐으니 아재도 이제 여길 떠나라…… 자칫 빠져나올 뻔한 말을 삼키며 나는 아재에게 쭈뼛쭈뼛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애 많이 썼제, 아재 아니믄 누가 이 일을 하겠어.”
내 손을 내려다보며 아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울에 올 때면 차비를 찔러 넣는 내 손을 거머잡고 니, 그라지 마라. 암만 그케도 내가 니보다는 어른이다며 밀어내던 그였다. 나는 문갑 위 한쪽에 봉투를 내려놓고 아재의 손을 잡았다.
“그래, 니도 이번 참에는 고생 많았다. 맘 씨이는 일 다 끝났으이 인자 마 잊었뿌고 가그라.”
그런가. 과연 맘 쓰이는 일은 다 끝났는가. 낡은 신위함을 묻듯이 그렇게 간단히 묻어버린 것인가. 아재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나는 아재의 등 너머 벽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낀 듯 가무룩히 때가 탄 벽면. 벽을 타고 파리가 몇 마리 기어올랐다.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파리를 쫓으며 퍼뜩 가그라, 길 막힐라. 아재가 나를 재촉했다. 방 밖에서 아재를 부르며 우는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 나는 다리를 건너고 포플러의 손짓을 따라 길을 달렸다. 멀어지는 고향 마을이 옆 거울 속에 머물러 있다가 점점 작아지고 이윽고 빈 하늘만 남게 되었을 때 나는 무언가를 남겨두고 온 사람처럼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하나 둘, 옆을 스치는 나무 그림자가 내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거둬 가기를 되풀이했다. 고향의 사람들은 이제 놋그릇에 마른행주질을 하고 남은 음식을 집집이 돌릴 것이다. 손님을 맞던 방의 불씨를 죽이고 가득한 재떨이를 비워내고 쓰레기를 모아 불 지르는 일로 분주할 것이다. 그 연기가 사라질 때쯤 나는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탁 트인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차들이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 갔다. 아버지가 탄 비행기는 벌써 서울에 도착했을 터이며 곧 아버지는 차로 전화를 걸어오리라. 막 도착했다, 너는 어디냐 하고 물으실 것이다. 이제 남은 한 가지 일. 나는 조수석에 소중히 모시고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부모의 신위를 내려다보았다. 분홍 보자기에 싸인 그것은 차의 흔들림에 맞춰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서울에 도착하면 서재 방 벽장 안에 마련한 감실에 신위를 모셔 들이고 옮겨 왔노라 고하는 잔을 올리고…… 그것으로 몇 달에 걸친 행사는 완전히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이제 서재 방 출입하는 발걸음이 더 조심스러워질 것이고 혼자 있을 때도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시선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되리라. 달그락. 달그락. 내 생활 속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들의 소리가 좁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대전쯤에 이르자 차들의 속도가 뚝 떨어치며 점차 차간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빨갛게 불이 들어온 앞차의 제동 등이 눈을 어지럽혔다. 기어가듯 천천히 차를 몰기를 한 시간 남짓 하고 나서도 정체된 길은 좀처럼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는 서버린 차량들에서 하나 둘 빠져나온 사람들이 갓길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십 여 미터 앞서 간 차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기도 했다.
해거름에 땅거미가 내려앉아 차들의 제동 등은 한층 더 붉고 강한 빛으로 눈을 찌르고 나는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저마다 자유로운 차림새의 사람들이 주말의 행락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 길을 나는…… 목을 죄는 넥타이와 짙은 빛깔의 양복을 차려입은 나는 그림자를 모신 이틀을 보내고 이제, 그림자를 모시고 돌아가는 것이다. 내 삶에, 내 의식에 조용히 스며드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 안전벨트에 묶인 채 의젓이 앉아 있는 신위를 내려다보던 나는 문득 그 옆의 전화기를 보았다.
밤·대추만 알고 살던 어른들을 카폰이 달린 차로 모시고 가는 내 모습을 생각하자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나 오래, 이렇게나 질기게 나를 감싸는 보이지 않는 그물.
사방에서 나를 둘러싼 차들의 틈바구니에는 어디 한군데도 빠져 나갈 여지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덫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발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이대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하고 혼자 투덜거리는 내 귀에, 가다 보면 길이 열리겠지 하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 것 같았다. 나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둑한 뒤편에 보이지 않게 도사린 물체가 있는 듯싶었다. 아무도 없는 뒷좌석에서 누가 금방이라도 불쑥 몸을 일으켜 내 뒷덜미를 움켜잡을 것 같았다. 오싹 소름이 끼쳐왔다. 손을 내뻗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도 나는 불안해진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가다 보면 길이 있고, 길을 가면 일을 만나고…… 그것은 아버지가 늘상 하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할아버지의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조수석 의 신위를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닫힌 상자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쓰옥 올라와 내 팔을 잡을 것만 같았다. 분득 이 길 한옆에 신위 보자기를 버리고 간다면…… 하는 느닷없는 유혹이 나를 감쌌다. 달리는 차에 받혀 나무 상자는 조각조각 깨어지고 신위의 검은 글자가 적힌 종이는 갈가리 찢겨 바람에 날리고……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며 황망해하지 않고도 간단히 신위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이까짓 나무 상자쯤은 단숨에 박살이 날 것이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실 것이다. 어머니는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냐고 꼬치꼬치 물어오리라. 이처럼 쉽게 신위를 유기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르도 나는 갑자기 유쾌해져서 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미한 아들을 둔 죄로 밤새워 아버지는 빈 감실 앞에 꿇어앉아 계시리라. 내일이면 다시 깔끔한 나무를 깎고 떨리는 손으로 지방을 쓰시겠지만, 그렇더라도 지금 당장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나는 차 안에서 질식하고 말 것만 같았다.
차 안은 내 거친 숨결이 만들어낸 습기로 가득 차고 유리창에는 부옇게 입김이 내려앉아 밖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갇힌 기분. 그때였다. 주춤주춤 움직이던 앞차들이 웬일인지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나를 향한 경적이 빠앙― 요란스렉 울렸다. 한번 속력을 내기 시작한 차들은 그대로 내처 달아나고 나는 들었던 신위 보자기를 엉겁결에 바닥에 팽개친 채 앞차를 따라 속력을 올렸다. 그 충격에 덜커덕 신위 상자의 뚜껑 이 열렸다. 나무 면에 붙은 하얀 종이와 그 위의 검은 글자들. 어둠 속에 도드라진 그 글자들은 나를 향한 누군가의 눈처럼 보였다. 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면서 나는 황급히 그 까만 눈 위에 보자기를 뒤집어 씌웠다.
매끈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분홍 보자기와 보이지 않는 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한낱 나무 상자일 뿐인 것이 나를 이렇게 숨 막히게 한다면 그 상자를 모신 거대한 성 같은 집은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요새를 지키는 불침번처럼 문마다 붙어 있는 세콤 장치는 기실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닌가. 한 걸음 걸어 나가면 훈련된 진돗개가 막아서는 정원. 밤새도록 밝혀져 있는 방범등을 바라보며 나는 또 잠을 설칠 것인가.
내게는 통로가 필요했다. 신위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내게는 또 다른 조매제가 있어야 했다.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어떤 것. 나는 그것을 묻어야만 한다. 그때 구원처럼 따르릉 카폰이 울렸다.
“돌아오는 길일 것 같아서…… 잘 끝났어?”
연희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찌잉 하는 울림이 가슴 가운데를 타고 내려갔다. 이 여자와의 망설임을 묻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아무런 것도 묻지 못할 것이다.
“잘 끝났어. 곧 서울에 도착할 거야.”
그럼 돌아와서 연락하라고 그만 끊겠다고 말하고서도 연희는 여전히 저편에서 숨소리를 전해왔다. 십 년 세월을 어쩌면 내가 그랬듯이 연희도 숨죽이며 내 곁을 지켜왔으리라는 생각이 나를 조바심치게 했다. 나는 다급하게 연희를 불렀다.
“연희야. 끊지 말아봐.”
이 도련님이 오늘은 웬일이냐고 장난스레 묻는 연희에게 나는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말이야…… 견디는 것이 말이야…… 사실은 말이야…… 견디면서 사는 일이 미련해 보여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뛰쳐나오는 것이 반드시 위대한 것이 아니란 말이야. 내 말은, 그러니까 그 견딘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가 문제라는 거지.”
전화의 감이 좋지 않다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도대체 뭐라는 거냐고 연희가 묻고 있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한껏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네가 필요해, 연희야! 내게는 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야 견딜 수 있단 말야!”
연희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가. 수화기에서는 찌지직 소리만 흘러나오고 연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모르겠·…… 안 들…… 여보세요?…… 여……요?”
연희의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어지며 들려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지날 때면 으레 통화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전화기가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저만치에 붉은 경고등이 반짝이는 터널 입구가 보였다. 차가 터널에 들어서기 전에, 전화가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나는 무어라고 더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한 채로 차는 터널 안으로 진입하고 기어이 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터널 안에서 급히 연희의 번호를 눌렀지만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안내 방송만 나올 뿐이었다.
연희는 내 말을 들었을까. 똑같은 말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다시 한다면 그녀는 웃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십 년을 변하지 않던 남자가 갑자기 웬일일까 의아해할 것이다. 언젠가처럼 해답이 뻔한 얘기를 시작하고 싶지 않다구 말할는지도 모른다. 나의 말을 자신을 방패삼아 살겠다는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오해? 그것은 어쩌면 오해가 아닐 것이다. 나는 언제나 연희를 도피처로 삼아왔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그 피난처를 내가 살아가는 땅덩어리 안으로 옮겨오려는 것이다. 그러면 내 갇힌 울타리 한쪽이 무너질는지, 혹은 오히려 피난지가 차츰 잠식되어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인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느 쪽으로도 나는 확신을 가짙 수 없었다. 연희를 연희이게 남겨두는 길이 정녕 연희를 사랑하는 일일까. 봄이 가기 전에 낯모르는 여자와 또다시 마주 앉는 것이 연희를 위하는 일일까. 가다 보면…… 그렇다, 가다 보면 길이 있을 것이다.
터널의 출구가 눈앞에 커다랗게 다가왔다. 터널을 나오자마자 나는 깜박등을 켜고 천천히 차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통화를 방해할 만한 산이 사라지는 곳, 어둠이 내린 너른 벌판이 펼쳐진 곳에 이르러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문을 활짝 열고 연희의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눌렀다.
띠리릭, 띠리릭.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먼 곳에서 연희의 음성이 울릴 것이다. 나는 전화기를 바짝 거머쥐었다. 차량들의 행렬, 내가 빠져나온 그 끝없는 행렬들이 내 앞에 부신 빛을 퍼붓고 사라지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학과사회』 31호(1995년 가을) ; 『책 읽어주는 남자,! (문학과지성사 1996)
서하진(徐河辰)
1960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4년 『현대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그림자 외출」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로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결혼과 가족제도, 일상 속에서의 갈등, 그리고 그 안에 묻힌 여성의 불온한 욕망이나 일탈의 욕구 등을 간결한 문체로 그려냈다.
소설집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라벤더 향기』 『비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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