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옥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신선하고 작품의 수준도 고르다. 그의 상상력이 변용적이라는 점이 그의 시적 장래를 믿음직스럽게 하고,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시선이 집요하다는 점도 튼튼한 바탕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 예컨대 당선작으로 뽑은 '어성전의 봄'에도 그러한 특징이 보이는데, 여기서 우리가 또 보는 것은 그가 사물의 겉만이 아니라 그 속까지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령 사물의 소리 뿐만 아니라 그 고요도 들을 줄 안다.
어느 한쪽만 들어 가지고는 그것을 잘 듣는다고 할 수 없다면 그의 안팎을 동시에 느끼는 더듬이는 역시 시적 재능을 기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어투나 음색에 과장이 없고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일치하는 안정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당선시 : 어성전의 봄
이은옥 : 1959년 강원 삼척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어성전의 봄
적송과 잡목이 어울려, 몇 겹의 산봉우리가 되고
마루 끝에 서서
잘 보이는 앞산부터 산의 허리를 센다
겨울 내내 쌓여 있던 눈이 아래 마을부터 녹기 시작하여
산 밑에 있는 기와집 근처 응달까지, 길어진 해 그림자가
봄을,
마당까지 실어 나른다
서서 말라버린 국화밭에도 햇살이 옮겨 다니면서
겨울의 냄새를 말린다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국화밭이 밭고랑을 드러내고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할 때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봄,
강이 뚜껑을 열고
고기들이 알을 까고 돌 밑에 집을 만들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어성전의 강, 강물의 흐름이 좋고 조용하여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 사람들은 이 마을을 어성전이라 한다
바다는 바다 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
아침 안개가 지나갈 때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옷에서 강 냄새가 난다
가끔씩 마을은 안개에 푹 잠겨 있고
새벽, 닭이 한집 한집에서 울기 시작해
온 동네는 조그만 소리들로 하루가 시작된다
방문을 열면 안개가 먼저 들어온다
햇살이 온 마을에 퍼지면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봄, 햇살이 동반하는 이 나른한 계절은 앉아 있기도 불안하다
겨울 내내 쉬고 있던 농기구들이 하품을 하고
아버지는 먼 산에서 해온 물푸레나무 자루를 다듬어
건너마을에 쟁기를 벼르러 간다
아버지는 조율사처럼
호미 자루며 도끼 자루 괭이 자루를 다시 갈아 끼운다
농기구들은 아버지의 건반이 되어 사계가 시작된다
나는, 슬그머니 강으로 나가본다
강은 아직 고요하다
강은 누가 먼저 알을 낳았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어성전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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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심사평 : 신경림 , 김주연
당선작의 영예에 오른 김지연씨의 '이런 세상 어떠세요'는 반어적, 동화적인 기법으로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맛깔스러운 작품이다. 얼핏 소품의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이 작자의 다른 3편도 골고루 일정한 시적 품격을 확보하고 있어서,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무방해 보였다.
특히 어린이를 시적 화자로 하고 있다든가, 어린이 문체를 훈련하고 있는 듯한 세계는 신선하다. 이러한 신선성을 앞으로 어떻게 줄기차게 밀고 나가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꾸며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김씨의 시인으로서의 앞날을 판가름해 줄 것이다.
당선시 : 이런 세상 어떠세요
김지연 : 1967년 인천출생, 제주대학 국문과 졸업
이런 세상 어떠세요
날이 찌뿌둥하군요.
할 수 없어요, 늘 같은 주말로 하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사람과
같은 반찬으로 밥을 먹어야겠어요.
외출은 삼가세요.
바깥 날씨쯤 잊어버려요.
당신의 영원한 TV가 다채로운 재방송을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시청률에 항상 주의해 주세요)
채널과 채널 사이 잡음은 신경쓰지 마세요.
다만 집 앞을 파대는 굴착기 소리에
심장 박동을 맞춰주세요.
곧 따끈한 아스팔트로 포장해 드릴게요.
잠깐, 채널을 바꾸지 마...세...
질퍽하고 부드러운 진흙바닥 위에
화면 가득 입을 쩌억 벌린 짱뚱어 두 마리
먹고 사는 입이 크면 그뿐
주먹도
피도
눈물도 없이
고개 꺽고 물러나네
먹고
사랑하고
천국 같은 진흙에 뒹굴다
물이 들면 파아랗게 뛰어올라
하늘에 젖는 짱뚱어 세상.
(아! 한가지 아쉬운 건 그곳엔
TV가 안 나온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테나 잊지 마세요.)
장경복의 '전망 좋은 방'은 활달하지 못하고 때로는 어눌한 목소리까지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멋있는 표현'만 읽다가 보니 신선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히 소외된 삶을 살고 있을 화자가 진부한 페이소스에 빠지지 않고 동적으로 세계를 보는 그의 의지가 행간에 숨어있는 것을 엿보는 순간을 이 시는 갖고 있다.
동봉한 '공사중'도 좋았으나 정초부터 비속한 표현을 선보일 필요는 없다는데 심사인 둘이 의견을 모았다. 독특하고 큰 시인이 되기를.
당선시 : 전망 좋은 방
장경복 : 1968년 서울 출생, 충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전망좋은 방
눈을 뜨는 일도 밖을 살피는 일이다
자전거가 내리막에서 급하게 길을 긋거나
아이들의 고무줄놀이가 이곳까지 합창을 날려도
하늘이 가까워 위를 본다, 머리 위엔
길거리만큼 복잡한 햇살의 골목이 있다
떨어진 나뭇잎이 새로 난 신작로를 알려준다 그 도로의 끝엔
임종을 앞두고 화장을 하는 늙은 계절이 있을 것이다
오시지 않는 손님을 마중하러 사람들이 몰려갔다
몇몇은 구석에 숨어 담배를 피웠고 저들끼리 싸우는 축도 있었다
연탄 실은 리어카가 그들을 가로질러 갔고
꼬마들이 검은 흔적을 찾아 비닐봉지처럼 날렸다
잘못 켜진 가로등이 창백한 낯빛을 숨겼다
보이는 것은 모두 숨으려 한다 언덕마다
노출된 숨결이 바람을 맞고 오는 동안 야위어갔다
저 혼자 흔들리는 빨래들 속에 피곤한 몸들이 채워질 것이다
겹겹이 채워도 커지지 않는 그림자들
엉킨 전선줄이 헛그물질을 한다 건져지는 것은
해마다 떠나리라는 잡초 같은 소문이었다
발 밑에 별이 깔리기 전에 바빠져야 한다
복잡한 햇살의 골목
급한 참새 한 마리 뛰어나오다
바람에 치여 떨어졌다
당선작으로 뽑은 윤을식의 '자전거에 대하여'는 자전거라는 일상적인 사물을 소재로 하되 그 일상성을 허물면서 신선한 미적 공간을 형상화하는 솜씨가 훌륭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노래하는 자전거는 목적이 사라지고 수단만 존재하는 이 시대에 대한 제유가 되고 자전거를 타는 과정이 삶의 과정을 암시함으로써 시각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있다. 사물의 세부를 정확히 묘사함으로써 시적 보편성을 획득한 점 역시 돋보이는 점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당선시 : 자전거에 대하여
윤을식 : 1971년 충남 금산 출생, 추계예술대 문창과 졸
자전거에 대하여
두 바퀴 위에 한 사내
수평으로 나란히 전진해야 하는 바퀴들
구른다, 그때마다 살끝에서 잘리워지는
햇살들, 같이 아파할 겨를도 없이
회생한 그림자 속에 웃음들이
쏟아진다
추억이 현실을 앞서갈 수는 없어
뒷바퀴가 따르는 만큼의 일정한 거리로
앞서가는 또 하나의 둥근 얼굴이 있어
나는 늘 그 사이 수평의 불안감으로
페달을 밟는다
수많은 이름들의 햇살을
만들고 지우며 다시 만들고
바퀴들이 나아가는 만큼
어깨를 뒤로 젖혀 자리를 옮기는
돌멩이들 가끔 그들의 이탈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나는
모퉁이에 다가선다
한번쯤 얄팍한 끈으로 브레이크를 잡지만
가는 몸부대끼며 쇳소리 우는 불안을
감당할 수는 없어
아직 숙련된 멈춤을 배우지도 못했는데
두 바퀴 위에 한 사내
간혹 세 바퀴, 네 바퀴 위에 아이들
보인다 추억과 현실을 저울질 하듯
위태로운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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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박미란씨의 '목재소에서'를 올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으로 뽑는다. 목재소의 생목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깨달아가는 생명의 환희와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해놓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아름다움 속에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진한 사랑이 숨어 있다. 부분적으로 너무 많이 쓰이는 상투적인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 나무의 생애를 통해 삶의 교훈을 얻어내는 알레고리적 상황제시가 신선하고, 그 앞날에 신뢰가 간다. 생목을 슬그머니 시적 자아로 만들어가는 동화적 분위기도 호감이 간다. 시인의 인생관과 언어적 표현 사이에 보다 구체적인 힘을 기른다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다.
당선시 : 목재소에서
박미란 : 1964년 강원 출생, 계명대 간호학과 졸업
목재소에서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도 눈이 부시다
윤지영씨의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는 얼핏 보면 시가 매우 단조로워 보인다. 언어에 대한 감각도 사고력의 깊이도 문맥에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가 보여주는 단조로움은 방법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은 감각의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 작품을 뽑은 데는 두 가지의 미덕을 보여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는 일상적 삶을 그 이상의 것으로 단순화시켜 한 시대의 풍속화로 그려낸 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의 목소리,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세계를 단순화시켜 의미화할 수 있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응모작에 잠깐 보이는, 시가 요구하지 않는 형태 파괴는 삼가야 한다.
당선시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윤지영 : 1974년 충남 공주 출생, 서강대 국문과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식구들이 잠들어
오히려 부산한 여름밤
방충망 사이 모기가 부산스럽다.
모기 날개 위에 달빛이 부산스럽다.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 우유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버터는 냉장고 속에서도 녹아 있었다.
우유는 냉장고 속에서도 상해 있었다.
노트북도 배가 고픈지 하얗게 화면이 지워진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수진수영종...... 깜빡이는 커서가 사라지고, 깜빡이는 그리움이 사라진다.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무엇이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가? 그것을 우리는 말로 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된' 시들과 '덜 되었거나 안 된' 시들의 차이에 대해서 느낄 수는 있다. '된' 시들은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 안에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마치 자석 부근에 쇠붙이들을 일정하게 몰려있게 하는 자성처럼, 우리의 눈을 자기쪽으로 이끌리게 하기 때문이다.
한번 올라가면 좀체 내려오기 힘든 시의 제단에 이병률이라는 낯선 이름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축하한다. 그가 제시한 시들이 어느 수위 위에서 고르다는 것, 이미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 뭔가 자꾸 드러내려 하는 데서 오는 邪됨이 없다는 것. 흔한 말로 상상력이 새롭다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했다. 적어도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임을 본 그의 시선은 남다르고, 또한 따뜻하다. 그 따뜻함에 녹아나는 세계를 그가 앞으로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좋은 사람들 , 그날엔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원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그날엔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