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 바울도 이와 같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은 하나님의 '판단'(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 '헤아린다', 구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이라고 주장한다.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가운데 '파스'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는 '카타'('...에 반대하여')와 '크리노'('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너 자신을')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좀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롬 2: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찰하시어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부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와 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롬 2: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행하는 사람아 - 바르트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 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에 질식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 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할 책임을 회피했다.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니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덤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후 5:10).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는 '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행 19:6)라는 뜻이 있고, '에크퓨고'의 미래중간태이다. 죄인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롬 2: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곧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은 하반절의 '인자하심'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이라고 표현했다.한편 본절의 '용납하심'(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은 '어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시사한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톤'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과 부정접두사 '아'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는 '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을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한편 '그 날'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16절에 언급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