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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7 순국선열의날 비봉 비봉공원 자전거 라이딩
☛hiking시간 및 거리 : 8:30-16:30(8시간)
30.0km 왕복 60km
☛hiking코스 : 익산역-목천포자전거길-참새방앗간-춘포-봉개산-익산천-왕궁-함벽정-보석박물관-진천송씨우산정사-비봉-일문구의사사적비-비봉공원-유습장군사적비-유습장군묘역-일문구의사추모행사참석-귀로
자유인 조동화는 익산 서부역을 출발 참새방앗간에 들러 목을 축이고 순국선열의 날에 비봉면 달이실을 목표로 자전거페달을 굴리었다.
비봉면 달이실 비봉공원에는 유습장군의 돌로 세긴 사적비와 일문구의사 사적비가 있으며 11/17 일문구의사추모행사가 완주군수와 완주군의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유습장군은 고흥유씨이며 9명의 일문구의사 유습장군의 후손이며 유희태완주군수와 유의식완주군의회의장께서도 독립운동가 고흥유씨집안입니다.
고흥유씨는 비봉과 고산에 많이 살고 있으며 유관순열사도 유습장군의 후예로 고흥유씨는 나라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었네요.
본관 고흥유씨 유습장군은 우리나라 5천년역사에서 대마도를 징벌하고 항복을 받아냈으니 세종대왕은 그 공을 길이 빛나도록 하였다.
유습장군이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달이실에 가장 좋은 옥토망월형묘자리를 찾게 했고, 묘 앞의 괘등석에서 등불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의 땅을 고흥유씨에게 사패지지로 하사해서 수십만평의 달이실 대부분의 땅이 고흥유씨 소유이다.
유습(1367-1439 73세별세)장군은 약 600년전 사람으로 세월의 시공을 뛰어넘어 조동화는 유습장군의 흔적을 비봉 달이실에 와서 찾아보고 묘역을 답사하였다.
일문구의사추모행사를 참관후 귀로길이 바빠 자전거 페달을 굴리어 왕궁으로 이동하여 왕궁천을 따라 만경강자전거길로 귀로하였다.
자전거타기는 대지를 달리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땀을 흘리므로서 몸안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신진대사를 이루는 것이다.
두눈이 있어 자연을 감상할수 있어 감사하고,
두발이 쓸만해 자전거하이킹을 할수 있어 감사하고, 집에 까지 무사히 귀로 할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하루가 흘러가다.
감사한 마음으로 세월을 낚으니 행복하였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감사합시다.
건강합시다.
<만경강자전거라이딩하는 동호인들은 참새방앗간에 들려 커피와 물을 먹고 라이딩 준비를 한다.
예비물병을 챙겨 삼일교회성도님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자전거라이딩 출발하였다.>
<한벽정에 들렀다.
벚꽃이 만발한 4월에 들러야 경치가 아름다운데 초겨울에 들르니 낙엽이 떨어지고 을씨년 스럽다.
김칠환소장님은“기적소리에 전하는 익산통신”에 함벽정을 구경한 소감을 기록해 놓았는데 2005.4.18. 어머님을 모시고 구경시켜 주었네요
함벽정(涵碧亭)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왕궁저수지(王宮貯水地)의 제방이 완성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고장의 대부호 였던 송병우(宋炳雨)가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기 위해 건립(建立), 누각으로 일반 정자보다 월등히 크고 한쪽에 온돌방도 만들어져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게 했으며,
일제강점기 3.1운동이 일어난 기미년(1919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창고를 활짝 열고 기근을 해결하는 등 서민들의 아픔을 같이하고,
당시의 가장 큰 농사일에 걱정거리 였던 가뭄해결 위해 저수지 축조하고 그곳에 정자 세워 문인과 교류한 장소로 활용하는 등 큰 의미를 지닌 누정으로,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저수지 수문 옆 50여m 높이의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변에 벚꽃 나무를 심었으며,
주변 연못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하얀 연꽃을 심었다 하며,
푸른빛이 감도는 저수지의 맑은 물을 그려 함벽정(涵碧亭)이란 이름을 붙였고,
봄에 벚꽃이 반발하여 저수지 물에 비칠때 함벽정(涵碧亭)이란 정자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송병우(1874.5.23.-1942.12.19. 69졸)는 어떤인물이냐면 만석군의 손자로 태어나 일제하 왕궁수리조합장을 하면서 왕궁저수지를 축조하는데 공이 컷고, 참봉으로 근무했으며 왕궁저수지위에 함벽정(涵碧亭)"을 지었다.
1937년 김녕한(金寗漢)이 쓴 함벽정기 현판에 의하면 ‘재물을 바치고 정력을 기울여 제방을 쌓아 엄청난 물을 호수에 채워 가뭄을 해결한 공로자’라고 쓰여 있어 왕궁저수지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함벽정(涵碧亭)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왕궁저수지(王宮貯水地)의 제방이 완성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고장의 대부호 였던 송병우(宋炳雨)가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기 위해 건립(建立) 누각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비봉공원에서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 추모식'이 열렸다.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 추모식은 14:30부터 완주군수 완주군의회의장등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완주 비봉 내월리에서 출생한 고흥 유씨 가문으로 유중화, 유태석, 유영석, 유명석, 유준석, 유현석, 유연청, 유연풍, 유연봉 의사를 추모하였다.>
☛고흥유씨 일문 구의사 사적비( 一門九義士 事蹟碑)
-소재지 : 비봉면 내월리 산1-1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 있는 고흥유씨 일문 구의사 사적비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였던 고흥유씨 일문구의사를 기리기 위해 1982년 세워졌다.
一門九義士 : 고흥유씨 한가문에 9명의 독립유공자가 있어 일제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비봉 고산은 고흥유씨 집성촌이다.
일문구의사선양사업회 주관으로 매년17일 一門九義士 추모제가 열린다.
♣주요공적
-고흥유시 가문의 일문9의사는 비봉면 내월리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907년 유지명과 같이 의병을 일의켜 고산, 익산을 비롯한 전북일대에서 적을 토벌하였다.
-1909년 유지명이 체포되어 사형 순국하자 유지복을 중심으로 한 9의사는 경술국치 이후까지도 행적을 숨겨가면서 항일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이사실을 탐지한 일본 경찰은 1910년 10월에 유치복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
-1916년에 나머지 8의사가 체포되어 모두 10년이상 징역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조동화는 비봉 달이실(내월리의 옛지명)지나며 “一門九義士 事蹟碑”길 건너편 “유습장군사적비”를 관찰하였다.
본관 고흥유씨 유습장군은 우리나라 5천년역사에서 대마도를 징벌하고 항복을 받아냈으니 세종대왕은 그 공을 길리 빛나도록 하였구나.
유습장군이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달이실에 가장 좋은 옥토망월형묘자리를 찾게 했고, 묘 앞의 괘등석에서 등불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의 땅을 고흥유씨에게 사패지지로 하사해서 달이실 대부분의 땅이 고흥유씨 소유이다.>
☛비봉면 달이실(내월리의 옛 지명)유습장군 사적비
유습장군은 1367년(공민왕 16년)에 태어났고 본관은 고흥이며, 고려 말 시중 유탁의 아들이다. 시호는 양정공이며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의 도절제사를 역임했다. 유습장군은 세종원년 (1416년) 이종무장군(삼군도절제사) 이숙묘, 황의, 우박 (중군도절제사) 이지실장군(우군도절제사)등과 함께 대마도 정벌에 좌군도절제사로 참여했다. 왜구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500여 차례 이상 우리나라를 침략해왔다. 조선 수군 10,728명은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1416년 6월 19일(음력) 거제도 견내량을 출발했다. 하룻만에 대한해협을 지나 대마도를 정벌하고 왜구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대마도를 조선의 정치질서 속으로 편입하고 조선국왕이 관직을 내려 왜구통제의 의무를 주고 무역을 허락했다.
세종대왕은 1439년 애지중지하던 유습이 별세하자 정사를 멈추게 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묘 자리를 찾게 했다. 당대 풍수가(風水家)들은 비봉면 내월리 동리마을 중고개 부근의 옥토망월형의 명당을 추천해 장군의 묘는 이곳 달이실(내월리 옛 이름) 마을에 위치한다. 세종대왕은 묘 앞의 괘등석에서 등불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의 땅을 고흥유씨에게 사패지지로 하사했다.
5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괘등석의 불빛이 보이는 대부분의 토지는 고흥유씨 소유이다. 묘를 이장할 때 학 세마리가 묘지에서 날아갔는데 한 마리는 학소포로 한 마리는 비학골로 다른 한 마리는 학림사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전해지며 묘비에 새겨진 白首歸鄕口不言朝廷事(흰머리 돼 고향에 돌아왔으니 조정일은 말하지 않겠다)했다.
우리나라는 오천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았음에도 응징하지 못했으나 대마도정벌은 우리 역사상 큰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유습장군의 사적비에서 약 200m 떨어진 유습장군묘역을 답사하였다.
세종대왕은 1439년 애지중지하던 유습장군이 별세하자 당대 풍수가들을 불러모아 비봉면 내월리 동리마을 중고개 부근의 옥토망월형의 명당을 추천해 유습장군의 묘는 이곳 달이실(내월리 옛 이름) 마을에 위치한다.
세종대왕은 묘 앞의 괘등석에서 등불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의 땅을 고흥유씨에게 사패지지로 하사했다.
장군묘역답게 석물이 여러 가지가 설치되여 있었다.
우측에 장군 유습묘와 정부인 우주황씨묘가 합장되여 있는 비석이 설치되여 있고, 봉분 가운데 상석이 있으며 우측에 정부인 밀양박씨, 정부인 미원함씨 비석이 설치되여 있는 것으로 봐 부인이 셋이로다.
유습장군의 묘역아래에는 우주황씨 묘역이 아주 잘 꾸며져 있는데 정부인이 우주황씨여서 묘자리를 우주황씨에 준 것으로 보인다.
속된말로 각시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다가도 절을한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상석-넓적하면서도 장방형의 돌로 된 상으로 성묘할 때 그 위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비석-돌로 만든 비. 주로 돌아가신 분의 행적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이다.
☞장명등 1기-장명등은 분묘(墳墓) 앞에 불을 밝힐 수 있게 돌로 만들어 세운 네모진 석등(石燈)을 말한다.
☞석호(石虎) 양옆으로2기 : 석호는 왕릉이나 귀족의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를 말하며, 수호신으로서 산과 능을 지켜주는 의미로 설치하였는데 석호는 침입을 경계하는 형태로 밖을 바라보는 모습을하고 있다.
☞양옆에 망주석2기-망주석은 이름처럼 멀리서도 묘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묘역의 좌우에 세우는 석주형의 표지석이다.
☞무덤을 지키는 무인석2기-투구를 쓰고 있으며 무기(칼)를 들고 있다.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유습장군의 묘역아래 엄청난 우주황씨 묘가 잘 단장되여 있는데 유습장군의 정부인이 우주황씨라 명당자리를 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주황씨10世 중시조 문숙공 휘 거중의 묘이다.
고흥유씨의 선산에 문숙공 거중의 묘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문숙공 거중의 딸이 고흥인 도총제 유습장군한테 출가하였기에 이곳 묘자리를 잡은 것 같다.
유습장군의 장인어른이 이곳에 잠들어 있구나.
우주황씨 문숙공 거중은 영의정 호조판서 역임하였다.
문숙공 거중의 묘역의 위치는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유습장군묘역 바로아래에 있다.>
10세 중시조(中始祖)인 거중(居中)은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거중(居中)은 조선개국(朝鮮開國)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 공조전서(工曹典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한 후 낙향(落鄕)하여 우주(紆州)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우주로 삼았다.
거중은 고향인 왕궁면 장암(場巖)에서 꽃을 심고, 사람들을 평안하게 두루 만났으며, 거문고를 벗삼아 때로는 술과 시를 즐기시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으며,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유감(有感) 등 시(詩)와 여제생설(與諸生說) 등 문장(文章)이 있다. 거중(居中)은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김제의 구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우주황씨1세(시조)-9세조 제단전경
전북완주군비봉면내월리>
사는일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칠월과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성현군자께서 말씀하시길,
老覺人生 萬事非(노각인생 만사비)
늙어서 생각하니 만사가 아무것도 아니며.
憂患如山 一笑空(우환여산 일소공)
걱정이 태산 같으나 한 번 소리쳐 웃으면 그만인 것을.
온 세상이 훨씬 넓고 아름답게 보이고 편하고 진실하게 보이네
人生事 空手來 公手去 (인생사 공수래 공수거)
인생사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을........
===좋은글===
**더 늦기전에**
이제는 늦기 전에 인생을 즐겨라
되게 오래 살 것 처럼 행동하면 어리석다.
걷지도 못 할 때 까지 기다리다가
인생을 후회하지 말고
몸이 허락하는 한, 가보고 싶은 곳
여행할 곳은 가보라
질병을 기쁨으로 대하라
가난하건 부자건, 권력이 있건 없건
모든 사람은 생로병사의 길을
갈수 밖에 없다.
혹시 병들더라도 겁먹거나
걱정하지 마라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 아닌가?
몸은 의사에게 맡기고
목숨은 하늘에게 맡기고
마음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기회있을때마다 옛동창, 옛동료, 옛친구들을
만나라.
그 회동의 중심은 단지 모여서 먹는데
있는게 아니라
인생의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은데 있다.
돈!
은행에 있는 돈은 내 돈이 아니다
돈은 쓸 때에 비로서 돈이 되며
죽기전에 쓸 수 있는 돈만이 내 돈이다.
나이들어 쓰는 돈은 절대로 낭비가
아니다.
돈과 사랑이 남아 있다면 얍삽하게
아끼지 말고 베풀어라
늙어가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잘 대접하는 것이다.
사고 싶은 것 있으면 꼭 사고 즐길거리
있으면 꼭 즐겨라.
아껴야 할 것은 노년의 시간이고
노년의 생각이고 노년의 건강이다
자신이 자신을 진정한 최고로 대접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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