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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잉글랜드의 남서부에 위치한 헤리퍼드(Hereford)는 인구 5만6,000여 명의 한적한 도시다. 헤리퍼드셔주의 주도(county town)인 헤리퍼드는, 7세기 초 색슨족이 웨일즈의 침략에 대항해 성을 쌓은 것이 이 도시의 기원이다. 이후 17세기까지 헤리퍼드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고, 지금도 영국이 자랑하는 육군공수특전단(SAS) 본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랜 전란으로 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헤리퍼드에는 역사적인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물이 헤리퍼드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1056년 웨일즈 군대에 의해 소실돼 버린 것을 1079년 로싱아(Robert Losinga) 주교가 다시 세워 성모 마리아와 켄트의 왕 성 에셀버트(Ethelbert)에게 봉헌되었다.
헤리퍼드 구시가지 남부의 와이(Wye)강변에 위치한 헤리퍼드 성당은 5세기에 걸친 건축양식이 혼재된 건물로 유명하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롭고 귀중한 유물 두 개가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 그 하나는 중세 때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큰 마파문디인 세계지도이고, 또 하나는 중세의 많은 장서가 책장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체인드 라이브러리(Chained Library)다.
헤리퍼드 지도(Hereford Mappa Mundi)는 중세 그리스도 세계관을 반영한 마파문디 가운데 그레이트 맵에 속하는 지도로, 현존하는 마파문디 가운데 가장 크다. 이 지도는 원래 성당 제단 위에 안치된 세 폭 제단화(tripty)의 가운데 부분으로 왼쪽 패널에는 대천사 가브리엘, 오른쪽 패널에는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가운데 지도만 전해지고 있다.
지도는 벨럼(vellum)이라는 질 좋은 송아지 가죽에 먹색과 적색, 금색 잉크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그려졌다. 지도 전체의 크기는 세로 158cm, 가로 133cm이다. 패널에 쓰인 오크재의 벌채 시기와 벨럼에 사용된 송아지 가죽의 가공 시기, 지도에 쓰인 서체 등을 분석한 결과 연대가 1290년 전후로 추정되어, 지도의 제작 시기는 1300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서에 기술된 에피소드는
그림으로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리카르두스 드 벨로(Richardus de Bello)라고도 불리는 홀딩엄과 라포드의 리처드(Richard of Haldingham and Lafford)라는 성직자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본 결과 그는 1245년 잉글랜드 링컨셔주 슬리퍼드(Sleaford) 인근의 작은 마을 홀딩엄에서 태어났고, 1250~1260년 사이에는 링컨대성당에서 회계를 담당했으며, 1260~1277년에는 켄트(Kent) 교구의 사제로 딤처치(Dymchurch)의 세인트 피터와 세인트 폴 교회(St. Peter & St. Paul Church)의 최초 수급 성직자로 있었다. 그리고 1278~1283년에는 링컨대성당 내 라퍼드(Lafford, 슬리퍼드의 옛 명칭)의 수급 성직자로 있다가 1285~1300년 사이에 링컨에서 헤리퍼드 지도를 제작했다.
이후 그는 1305년 헤리퍼드로 옮겨와 스윈필드(Richard Swinfield) 주교로부터 헤리퍼드 대성당 내 노턴(Norton)의 참사회원으로 승진했다. 솔즈베리(Salisbury) 교구와 버크셔(Berkshire)의 부주교를 역임한 1313년 이후 그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망을 1326년으로 추정하는 것은 당시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헤리퍼드 지도는 전체적으로 상단이 삼각형으로 된 수직 형태를 이루고, 그 안에 직경 130cm 크기의 원형 세계지도가 꽉 들어차 있다. 지도 바깥쪽 상단 삼각형 부분에는 세계의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해 인류를 심판한다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그려져 있고, 가장자리에 둘린 장식 띠에는 “세계의 측량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시작되어…”라고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 시작된 아그리파(M.V. Agrippa)의 측량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또 하단 왼쪽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 사람의 측량관에게 칙서를 내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 그려진 시종을 거느린 말 탄 인물은 지도를 그린 작가로 추정한다.
지도는 몹시 복잡하게 그려져 있으나,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지도 본래의 목적인 지리적 내용으로 오케아노스(環海)에 둘러싸인 원형의 대지는 기본적으로 TO지도와 내용이 같고, 둘째는 성서에 기술된 에피소드나 사건을 그림으로 나타냈으며, 셋째는 고대로부터 상상되어 온 기괴한 인종과 짐승들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