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부인 윤영자 ‘투사’로 변해
리영희 평전/[11장] ‘우상’들과 투쟁, 2년 감옥살이 2010/06/29 08:00 김삼웅리영희가 광주형무소에서 힘든 수형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가정은 부인의 막노동과 지인·학생들이 가끔 보내주는 푼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해직되고 한동안은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한양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의 한 사람으로 발령하여 월급을 보내주다가 반공법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부터 끊어졌다. 학교 재단을 경영하는 그로서도 ‘의식화의 원흉’으로 낙인된 사람을 언제까지나 도와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리영희 부인의 어느 날의 일기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집안을 치운 다음 홀로 밥상 머리에 앉았다.
벌써 남편이 끌려간지 1년 가까이 이런 생활을 해왔지만 오늘 따라 왜 이렇게 허전하고 괴로운지 모르겠다.
나는 수저를 놓고 목놓아 울었다. 아무도 듣는 이 없고, 보는 이 없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좀 시원해졌다. 나는 미친 듯이 “여보, 여보”하고 불렀다. 그러자 또 울음이 터져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 주인 없는 서재에 들어갔다.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한없이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려 밑으로 내려와 먹다 만 아침을 먹었다. 먹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굳세게 살아야지. 앞으로 1년을 열심히 뛰어야지. 1년만 1년만 참자. (주석 17)
독재시절 이 땅의 어머니들은 자식이나 남편이 반독재 시국사범으로 구속되면 가정살림을 도맡고, 나중에는 자신들도 ‘민주투사’가 되었다. 연이은 긴급조치로 구속자 숫자가 많아지면서 한국양심법가족협의회가 결성되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구속자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되고, 1976년 10월 14일 NCC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속자가족들과 관계인사들이 간담회를 갖고 양심범 가족협의회로 재발족했다.
양심범가족협의회는 ① 구속자 석방운동 ② 각종 성명서 발표 ③ 양심범 가족 관리 ④ 재판 방청 및 재판 소식 보도 ⑤ 구속자에 대한 영치금 차입, 면회 등 옥바라지 ⑥ 양심수 처우 개선 요구 ⑦ 어려운 가족 돕기 ⑧ 국내외 인권단체와 협력하의 인권운동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양심범가족협의회는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주석 18)
리영희 부인 윤영자도 양심범가족협의회에 참여하면서 점점 ‘투사’가 되어갔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집회와 거리 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어느 날에는 양심범 가족으로서 연단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윤영자는 미국 정부가 한국의 유신통치와 긴급조치에 방조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카터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여 미국대사관 앞에서 항의데모에 나섰다가 경찰에 끌려가 20일간의 구류도 살았다.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끝매듭은 경찰의 우악스러운 손으로 부러진 채 지금도 구부러져 있다.
이를 두고 리영희는 “폭력화한 국가 권력이 그의 신체에 남겨 놓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흔적” (주석 19)이라 표현했다.
기결수로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리영희는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대부분의 양심수들이 그렇듯이 리영희도 미결 상태에서는 차분하게 책을 읽기 어려웠다. 서대문형무소의 열악한 환경은 무거운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전등은 5미터 높이의 천장에 15와트짜리가 있을 뿐이고, 저녁 식사 뒤에는 곧 취침시간이라 책을 읽을 틈이 없었다.
그런 중에서도 미하엘 솔로호프의 영역본 <고요한 돈강>을 비롯하여 몇 권의 소설과, 현대문명 비판서인 바로우스 던엄의 <현대의 신화>, J.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 앤드류 화이트의 <그리스도계에서의 신학과 과학의 전쟁사>등의 일역본을 다시 읽었다.
기결수가 되어 광주형무소로 내려와서는 독서 환경이 한결 나아졌다.
60와트 밝기의 전등을 달아주고, 밤 늦게까지 책을 읽어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리영희는 1년여 동안 종교서적, 각 민족의 사상적 각성을 지도한 위인들의 자서전과 전기, 사상적 교양서적, 프랑스어의 연마를 겸해 불어로 된 소설·평론을 주로 읽었다.
주석
17) 리영희, <역설의 변증>, 292쪽.
18)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310쪽.
19) 리영희, <역설의 변증>, 300쪽.
학교에서 해직되고 한동안은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한양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의 한 사람으로 발령하여 월급을 보내주다가 반공법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부터 끊어졌다. 학교 재단을 경영하는 그로서도 ‘의식화의 원흉’으로 낙인된 사람을 언제까지나 도와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리영희 부인의 어느 날의 일기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집안을 치운 다음 홀로 밥상 머리에 앉았다.
벌써 남편이 끌려간지 1년 가까이 이런 생활을 해왔지만 오늘 따라 왜 이렇게 허전하고 괴로운지 모르겠다.
나는 수저를 놓고 목놓아 울었다. 아무도 듣는 이 없고, 보는 이 없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좀 시원해졌다. 나는 미친 듯이 “여보, 여보”하고 불렀다. 그러자 또 울음이 터져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 주인 없는 서재에 들어갔다.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한없이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려 밑으로 내려와 먹다 만 아침을 먹었다. 먹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굳세게 살아야지. 앞으로 1년을 열심히 뛰어야지. 1년만 1년만 참자. (주석 17)
독재시절 이 땅의 어머니들은 자식이나 남편이 반독재 시국사범으로 구속되면 가정살림을 도맡고, 나중에는 자신들도 ‘민주투사’가 되었다. 연이은 긴급조치로 구속자 숫자가 많아지면서 한국양심법가족협의회가 결성되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을 계기로 구속자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되고, 1976년 10월 14일 NCC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속자가족들과 관계인사들이 간담회를 갖고 양심범 가족협의회로 재발족했다.
양심범가족협의회는 ① 구속자 석방운동 ② 각종 성명서 발표 ③ 양심범 가족 관리 ④ 재판 방청 및 재판 소식 보도 ⑤ 구속자에 대한 영치금 차입, 면회 등 옥바라지 ⑥ 양심수 처우 개선 요구 ⑦ 어려운 가족 돕기 ⑧ 국내외 인권단체와 협력하의 인권운동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양심범가족협의회는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주석 18)
리영희 부인 윤영자도 양심범가족협의회에 참여하면서 점점 ‘투사’가 되어갔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집회와 거리 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어느 날에는 양심범 가족으로서 연단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윤영자는 미국 정부가 한국의 유신통치와 긴급조치에 방조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카터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여 미국대사관 앞에서 항의데모에 나섰다가 경찰에 끌려가 20일간의 구류도 살았다.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끝매듭은 경찰의 우악스러운 손으로 부러진 채 지금도 구부러져 있다.
이를 두고 리영희는 “폭력화한 국가 권력이 그의 신체에 남겨 놓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흔적” (주석 19)이라 표현했다.
기결수로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리영희는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대부분의 양심수들이 그렇듯이 리영희도 미결 상태에서는 차분하게 책을 읽기 어려웠다. 서대문형무소의 열악한 환경은 무거운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전등은 5미터 높이의 천장에 15와트짜리가 있을 뿐이고, 저녁 식사 뒤에는 곧 취침시간이라 책을 읽을 틈이 없었다.
그런 중에서도 미하엘 솔로호프의 영역본 <고요한 돈강>을 비롯하여 몇 권의 소설과, 현대문명 비판서인 바로우스 던엄의 <현대의 신화>, J.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 앤드류 화이트의 <그리스도계에서의 신학과 과학의 전쟁사>등의 일역본을 다시 읽었다.
기결수가 되어 광주형무소로 내려와서는 독서 환경이 한결 나아졌다.
60와트 밝기의 전등을 달아주고, 밤 늦게까지 책을 읽어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리영희는 1년여 동안 종교서적, 각 민족의 사상적 각성을 지도한 위인들의 자서전과 전기, 사상적 교양서적, 프랑스어의 연마를 겸해 불어로 된 소설·평론을 주로 읽었다.
주석
17) 리영희, <역설의 변증>, 292쪽.
18)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310쪽.
19) 리영희, <역설의 변증>, 3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