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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주일) 야고보서 1:12~27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녀‘
바울은 오늘 본문 12절은 시험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생명의 면류관’에 대해 말합니다. 이 면류관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값진 상입니다. "면류관"은 그리스어 "스테파노스"에서 유래되었으며, "화려한 관" 또는 "승리의 관"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면류관을 수여했으며, 로마 시대에는 군사적 승리를 축하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레위기 8:9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봉사할 때 면류관을 착용하도록 명령했고, 잠언 4:9에서는 지혜를 얻는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28:5은 자기 백성의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고 ‘아름다운 화관’이 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신약성경은 계시록 2:10에 서머나 교회의 환난 중에서도 죽도록 충성한 자들에게 "생명의 관"을 약속하며, 계시록 3:11은 사데 교회에게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으며, 계시록 4:4에 보좌에 둘러 있는 24명의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관"을 착용하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첫째,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약1:12, 계 2:10, 계시록 3:11). 또한 생명의 면류관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시험을 극복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상입니다(약1:12). 셋째로 생명의 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입니다(딤후2:5). 특별히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이루는 영적인 승리를 상징합니다. 넷째로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상이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녀로 살아야 하는 데,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고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1. 시련 속에서 피어나는 인내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 합니다(12-15절).
1) 시련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니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는 인생의 시련을 악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3절에 시련은 믿음의 시험이며, 시험을 이겨낸 자는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영원한 상을 받을 것입니다. 2) 인내는 영혼의 아름다운 꽃입니다. 성도는 시련을 인내로 감싸 안아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인내는 시련이라는 거친 땅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영혼의 꽃입니다(14절). 3) 성도는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그 약속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15절).
원망'이란 사실상 '인내'와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 그 압박감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때 잘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자주 겪지 않습니까?
부부지간에도 어떤 다른 일로 큰 압박감이나 고통을 받게 되면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하찮은 일에도 상대방에게 짜증을 내게 되고 바가지를 긁게 되어 결국 큰 싸움이 되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회사에서도 상사의 기분이 무언가 저기압이다 싶으면 눈치 빠른 부하 직원들은 '아하, 오늘 같은 날 잘못 걸렸다가는 괜히 저 사람의 화풀이감이 되기 십상이겠구나.'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지적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신경을 쓰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똑같은 일이 한 교회 안의 성도들끼리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큰 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기부터 먼저 잘 인내할 줄 모르는 목사는 그것이 심리적으로 주는 부담감을 견디지 못하고 괜히 자기 교인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다느니 하면서 화풀이를 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교인 중에서도 사업이 잘 안되거나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 인내심을 발휘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런 불만감을 교회에 가져와서 폭발시키면서, 목사님에 대해서 이래저래 불평한다든지 다른 성도들에 대하여 구시렁구시렁하는 비난의 말을 늘어놓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는'식입니다.
인내할 줄 모르는 교인은 이처럼 성도들끼리 서로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투덜거림'을 통하여 결국은 교회 내에 큰 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에 불을 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은 성화 단계에 있는 까닭에 여러 가지 부족한 점, 약점이 피차 남아 있는 성도들 사이에서 서로 조금씩 더 인내하여 오로지 용납하고 사랑함으로써 '반드시 속히 오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주님의 몸 되신 교회 안에서 진정으로 화목하게 교제하고 있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내하는 자는 바로 "여호와 앞에서" 기다리는 자입니다.
우리 그 어떤 경우에도 '주의 강림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 경외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잠잠하게 참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여 말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야만이 우리는 이웃과 가족과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도와 진정 화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내하는 자는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악자는 그저 잠시 형통해 보일 뿐이지만 결국 이 땅에서의 궁극적인 축복도, 저 천국에서의 영원한 면류관도 역시 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참고 기다리는' 성도의 몫인 것입니다.
적용) 지금 나에게 찾아온 시련은 무엇입니까? 그 시련 속에서 회개해야 할 나의 욕심과 끊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2. 듣고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16-21절)
1) 지혜의 보고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는 마귀에게 현혹되거나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보고이며, 우리 삶을 인도하는 등불입니다(시119:105). 2) 속히 듣되 더디 말하고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급하게 말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언제나 온유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19,20절). 3) 더러운 것을 벗어 던지고 순수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도는 죄악과 악한 생각이라는 더러운 것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21절).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말씀 순종이 없는 신 앙인은 불행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생활에 변화가 없고 말씀을 행동화하려는 노력이 없는 신앙은 가짜 신앙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신앙의 실천이 따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다음이나 매일반 이라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철저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제직이라고 해서, 심지어 권사, 장로, 목회자라 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역사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빨리 파악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음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이중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늘 불만스럽습니다. 스스로 신자임을 자처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도 기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덕이 안 되며 본인에게도 거짓 신자라는 마음의 짐이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가는 곳마다 논쟁을 하는 것도 성도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성경 지식의 박식함을 자랑하는 것은 다른 신자의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들어서 조금 안다 해도 벽돌을 쌓듯이 우리의 지식을 하나씩 둘씩 순종으로 쌓아갈 때 견고한 믿음의 집, 신앙의 집을 짓게 됩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성경을 읽기는 합니다. 그런데 건성으로 말씀을 보고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설교를 듣습니다. 집중해서 듣고 보지 않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립니다. 머리가 나쁘거나 나이로 인해 기억력이 감퇴하여 쉽게 잊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어버리는 주된 원인은 들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기 때 문입니다. 본인이 직접 해 본 일은 기억에 잘 남습니다. 머리 속에서만 아는 것은 금방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특히 신앙은 행동으로 옮길 때 재미가 납니다. 그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화 [건축헌금에 대한 성령의 깨우쳐주심에 대한 순종] 서울 어느 교회의 이** 집사는 예전에 수정교회에 작정한 건축헌금을 반밖에 하지 않았음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소그룹에서 이 부분을 말했더니 한 집사님 부부가 자신이 50만원을 내겠다는 것에 힘을 얻어 나머지 금액을 내기로 순종하고 어제 저녁 실행에 옮겨 교회계좌번호를 묻고 즉시 입금했습니다. 결국 수정교회 이전헌금의 1%을 작정했던 그 서원을 100% 이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대한 순종과 실천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적용) 나는 지체들의 말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합니까? 말씀은 듣지만 불순종함으로 금방 잊어버리지는 않습니까?
3.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믿음의 진정성을 보여야 합니다(22-27절)
1) 말만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22절). 2)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23,24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입니다. 3) 말보다 실천을 더 중히 여겨야 합니다. 말만으로는 세상을 속일 수 없습니다(25절).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통해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4)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27절).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삶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들의의 삶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로 사용하는 말씨가 달라집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 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고 했습니다. 행동으로 보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혀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언어 생활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말씨에서 무언가 다른 점을 보입니다. 경건한 사람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은 자기 입에 재갈을 물린다고 했습니다. 남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입을 다스려 늘 조심합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와 부단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생활화를 이룬 사람의 첫번째 변화된 모습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가 달라지면서 사용하는 말씨가 변합니다. 둘째로 약한 사람을 돌보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절)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신앙을 가졌는지 아닌 지는 약한 사람을 돌보는 여부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 종류의 사람을 약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고아와 과부와 장애인(불구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이십니다. 만일 이들이 억울함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이들을 괴롭힌 사람을 벌주십니 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함부로 대하거나 남편 없다고 과부를 무시 하거나 부모가 없다고 고아를 천대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당사자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기보다는 약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임을 기억하며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울 때 우리에게 더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늘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고 필요할 때 적절히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이 점차 생활화되어 갈 때 우리의 신앙이 튼튼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성결해지고, 깨끗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적용) 환난 중에 있던 고아와 과부처럼 내가 돌아봐야 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지체는 누구입니까?
[큐티인간증, 욕심의 면류관, 김혜정님]
저의 아버지는 자녀 교육을 위해 고향 집과 땅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점을 여셨는데, 곧 망했습니다. 이후 저는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커서 부자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그러다 20대에 친정 오빠와 화장품 도소매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잘 되어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을 도우며 제게 사랑을 고백해오던 이가 있었고, 저는 더 큰돈을 벌려는 욕심에 이끌려 그와 함께 친정 오빠의 한 사업장을 인수하며 결혼했습니다(14절). 그런데 사업장이 날로 번창하던 때 저는 남편과의 작은 갈등으로 결혼한 지 3년 만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혼했습니다.
그 후 종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교회에서 하나님 없이 열심히만 살던 삶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다 2년 후에 저는 사별하고 어린 딸을 기르던 목회자와 안정된 삶을 꿈꾸며 재혼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어린 자녀들을 내 생각대로 양육하며 억지로 참으니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재혼의 삶 속에서 갈등과 원망으로 지쳐갈 때쯤 [가정아 살아나라]는 책을 읽고 큐티하는 공동체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야생마가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 훌륭한 말로 거듭나듯이 저의 모나고 거친 부분들이 말씀으로 다듬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죄를 보며 내 생각을 절제하는 상태가 ‘온유함’이라고 공동체를 통해 배우게 하셨습니다(21b). 그러자 말씀으로 내 안의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인 미움과 분노와 생각을 보고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21절).
결혼의 목적은 행복이 아닌 거룩임을 알려주시고 욕심의 관을 쓰지 않도록 말씀 공동체에서 저를 양육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길 소망하며 제게 맡겨주신 교회 소그룹 리더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겠습니다(12절). 적용) 큐티한 내용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교회 소그룹 SNS 대화방에 나누겠습니다. 저의 이혼과 재혼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받은 것을 소그룹 지체를 돕는 약재료로 나누겠습니다.
4. 결론
소설가 ‘이창동’씨가 쓴 ‘두꺼비와 달’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김흥남’인데, 이 사람은 6.25전쟁고아이며, 생의 밑바닥에서 질경이처럼 세상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억만장자인 친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속고 속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흥남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심증은 충분했지만 자기 재산을 탐낸 사람들의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흥남에게 ‘자기와 서로 헤어지던 그 당시의 기억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 때 아들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으니 극적인 옛 상황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흥남은 옛 일을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전혀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동안 까맣게 잊혔던 그날의 사건이 너무나 뚜렷하게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그 어른이 아버지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흥남은 자리를 박차고 정신없이 아버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흥남은 돌아가신 그 분이 바로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피 맺힌 주장을 폈지만, 그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미친 사람 취급뿐이었습니다.
만약 소설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았더라면, 그의 삶과 신분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밑바닥 인생을 살지 않고 억만장자인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여기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들로 인정하신다면 천하에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49:5절에서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라고 고백하며, 다윗은 시편 18:1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는 선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조건은 아니지만,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련을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인내로 이겨내고,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체적으로 삶 속에서 실천하며,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녀가 되어 영원한 축복을 누리시는 모든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