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이 단란하게 사는 한 가정. 11살이 된 소녀 안젤리키의 생일을 기념해 파티가 열렸다. 가족들은 안젤리키의 생일을 축하하며 키스를 해주고 춤도 함께 췄다. 그러나 안젤리키는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가족들이 파티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한다. 안젤리키가 자살한 것이다. 잿빛 콘크리트 바닥을 피로 붉게 물들이며 영화는 한 가족의 충격적인 비밀의 시작을 예고한다.
난간에 앉아 자살하기 직전 안젤리키 얼굴에는 섬광처럼 미소가 스친다. 영화 시작부터 강한 한 방으로 뇌가 잔뜩 쭈그러져 긴장상태에 놓여있을 때 즈음 우리는 느낀다. 그 미소가 단순한 미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미소 속엔 은밀한 슬픔과 허망감이 표표히 떠돌고 있었다.
관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영화는 소녀가 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슬금슬금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자살 이유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소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가족들은 슬픔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스러져 가는 큰 딸(죽은 안젤리키의 엄마)과 아내, 그리고 손녀들을 일으키느라 정신이 없다. 불안감에 떠는 큰 딸에게 약을 주기고 하고, 손자 손녀가 비뚤어지지 않게 가장의 권위를 세운다. 손주들의 학교생활에도 아주 적극적이어서 통학은 물론이고 교육부분까지 관여한다. 아픈 아내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제안하는 친절한 배려도 멈추지 않는다.
딸의 죽음 뒤,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운 가정
아버지의 권위와 폭력, 답답함이 느껴져
충격적인 사건이 뒤흔들고 지나갔지만 이들 가정은 중심을 잘 잡는다. 중심을 잘 잡는 정도가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화목하다. 지나치게 평화롭다. 아이들은 놀랄 만큼 말을 잘 듣는다.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생활한다. 학교에서 성적도 우수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함과 평화를 유지하는 이들 가족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게 만든다. 숨이 막힌다. 호흡기에 숨을 쉴 수 있는 구멍 100개가 있다면 99개는 막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머니, 큰 딸, 둘째 딸, 그리고 손녀와 손자. 이들은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질서와 권위에 대항하지 못한다. 입도 뻥긋 못한다. 절대 복종이다. 나머지 구성원들은 마치 아버지의 팔, 다리, 눈 등 신체 일부가 된 것처럼 행동한다. 소통 따윈 없다. 영화 속에서 소통을 상징하는 핸드폰이나 컴퓨터 등이 전혀 등장하지 않을 정도다. 대화가 메말라 있다. 아버지가 ‘~해라’라고 하는 일방적인 말과 명령만 집안을 떠돌 뿐이다.
아버지와 나머지 구성원의 비이성적인 행동은 안젤리키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발악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행동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진행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질적인 암세포처럼 수 십 년 전부터 자라고 있던 것이다. 구성원들의 이상한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 세 명의 딸이 있는 큰 딸 엘레니가 어머니에게 임신했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확실하냐”고 묻는다. 그런가 하면 둘째 딸 미르토는 허벅지를 면도칼로 그어서 피가 나게 만든 뒤 여성용 패드에 묻힌다. 월경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려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맥주를 몰래 먹으면서 둘째 딸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이처럼 가족들의 행동은 이상하게 뒤틀려 있다.
아버지의 폭력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족의 행동이 더욱 공포
아버지의 일그러진 폭력과 체제는 기가 차게 만든다. 아버지의 행동은 ‘충격적’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안 된다. 가족이라는 가면을 쓴 거대한 공포가 달려드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폭력과 권위보다 더욱 큰 공포가 있다. 바로 나머지 가족들의 침묵이다. 어머니, 큰 딸, 그리고 작은 딸까지 아버지의 폭압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모른다고 해도 확실히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끼고는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서 아버지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감추는 데 급급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집’은 열려있는 공간이다. 즉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은 집을 떠나서 경찰이나 사회복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고 친구 집으로 피신을 갈 수도 있다. 가출하거나 독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집을 떠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문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체제와 폭압의 검은 그림자를 알고 있으면서, 입을 굳게 다문다. 폭압에 대해서 가족이 침묵하는 상태, 이것이 가장 끔찍한 폭력이자 공포다.
폭력의 결과물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은 “그냥 들어가서 자라” 정도다. 큰 딸 역시 아버지의 폭력에 모르쇠로 일관한다. 질끈 눈을 감아 버린다. 잘못된 것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더욱 큰 파멸을 이끌 뿐이다.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 감독은 폭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족의 행동을 그리스의 현실과 같다고 말했다. 즉 우리는 잘못된 정치인들에게 투표를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의견을 제기하거나, 반항을 하거나, 가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방편이 열려 있듯이 그리스도 열려 있지만, 외면한다는 것이다. 똘똘 뭉쳐 모른 척하면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의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영화 ‘은밀한 가족’은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및 남우주연상 수상, 스톡홀름 영화제 각본상 수상한 수작이다. 부산영화제, 토론토 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 공식 초청되기도 했다. 한 소녀의 죽음으로 시작된 한 가족의 은밀하고 충격적인 결말을 담은 영화 ‘은밀한 가족’은 오는 4월 10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