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타르는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오랫동안 숭배되던 사랑의 여신이다. 바빌로니아가 자리 잡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과거에 수메르 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고 수메르에서는 이 여신을 이난나(Inanna)라고 불렀다. 기원전 4000년 전쯤 이 여신은 고대 수메르의 번화한 도시, 우루크의 수호신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사랑의 여신이라는 점에서 아프로디테와 비슷하지만 동시에 전쟁의 여신이라는 점에서 아테네와도 비슷하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사랑과 전쟁이 각각 다른 신들의 역할로 분할되어 있지만 이난나-이슈타르 여신은 마치 서로 상반된 듯이 보이는 힘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땅과 하늘의 풍요를 위해 온 세상에 사랑의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자신을 분노케 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전쟁도 불사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술수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생명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여신이라는 점에서 고대 여신의 원형적 풍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땅과 하늘의 모든 생명을 움직이는 사랑의 여신인 그녀가 더욱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메(ME)’라고 부르는 신비한 토판들을 소유하게 되면서다. 메는 원래 이슈타르의 것이 아니었다. 메의 주인은 에리두(Eridu)라는 도시의 수호신인 엔키(Enki) 신이었다. 그런데 이슈타르는 메가 탐이 났다. 그래서 엔키를 찾아가 그에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한 다음 수백 개의 메를 훔쳐 달아났다. 술에서 깬 엔키가 바다괴물인 압갈루(Abgallu)를 시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는 이슈타르를 붙잡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신전이 있는 우루크로 도망친 후였다. 이슈타르는 결코 착하고 다소곳한 여신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할 만큼 대담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슈타르의 이러한 대담한 기질이 잘 드러난 사건이 바로 그녀가 여동생인 에레슈키갈(Ereshkigal)이 다스리는 지하세계로 여행을 떠난 일이다. 이슈타르는 땅 위에 사는 모든 것과 하늘에 나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강력한 권능을 지니고 있는데도 죽은 자들이 거하는 지하세계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어떤 힘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장 지하세계를 방문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영토인 그곳은 여신에게도 너무 위험한 장소였다. 이슈타르는 자신의 또 다른 여동생인 닌슈부르(Ninshubur)를 불러 놓고 당부한다. 자신이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북을 두드려 모두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엔키각주1)신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온갖 화려한 장신구와 향료로 온 몸을 아름답게 치장한 다음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떠났다.
머리에는 황금으로 만든 빛나는 왕관을 쓰고 손에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청금석)]로 만든 홀(笏)을 쥐었다. 목에는 작은 라피스 라줄리 목걸이를 하고 가슴에는 황금으로 된 판을 대고 그것을 두 줄로 꼰 황금실로 묶었다. 팔에도 역시 황금팔찌를 끼었다. 이 모든 장신구는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메의 상징이다.
드디어 저승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저승의 문지기인 네티가 이슈타르 앞을 가로막았다. 이슈타르는 네티를 협박한다. “네가 문을 열지 않아 내가 들어가지 못한다면 나는 문을 부수고 빗장을 부술 것이다. 나는 문설주를 부수고 문을 없애 버릴 것이다.” 이슈타르의 대담함과 뻔뻔함에 에레슈키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슈타르가 저승의 문 앞에 당도하면 자신이 걸치고 있는 모든 옷과 장신구를 벗어 놓으라 명하라!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는 저승에 들어올 수 없으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 결국 이슈타르는 저승으로 내려가는 일곱 문을 통과할 때마다 자신이 걸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벗어 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승의 맨 아래 에레슈키갈의 옥좌 앞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옷과 장신구는 물론이고 신성한 힘과 권위도 모두 잃어버린 채 알몸으로 서게 된다. 그러자 그녀에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예순 가지의 약점이 덮친다.
눈과 머리, 온몸에 인간의 모든 고통이 파고들었고 여신으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병과 늙음, 나약함을 알게 된다. 에레슈키갈 곁에는 저승의 심판관인 일곱 명의 아눈나키(Annunaki)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슈타르는 에레슈키갈과 아눈나키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눈나키를 바라보았다. 이슈타르가 아눈나키의 돌처럼 차가운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슈타르에게 죽음이 덮쳤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도살된 짐승처럼 벽에 못 박혀 거꾸로 매달렸다.
사흘 밤낮이 지났다. 그녀가 지하세계로 내려가 있는 동안 지상의 땅 위에서는 황소가 더 이상 암소를 사랑하지 않고, 수탕나귀가 암탕나귀를 무시하고, 남자가 여자를 멀리했다. 지상에서 사랑이 사라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제 세상은 어떤 꽃도 피어나지 않고, 어떤 열매도 맺지 않으며, 모든 동물이 홀로 밤을 지내는 황무지가 될 것이었다. 걱정으로 안절부절하면서 이슈타르를 기다리던 닌슈브르는 사흘이 지나도 여신이 돌아오지 않자 북을 두드려 사람들과 신들을 불렀다. 땅과 하늘의 최고신인 엔릴(En-lil)도 달의 여신인 난나(Nanna)도 고개를 저었다. 모두 에레슈키갈을 두려워했고 지하세계에 방문하기를 원치 않았다. 엔키만이 예외였다. 물과 지혜의 신인 엔키는 자신의 손톱 밑에 낀 때를 빼내 두 명의 정령을 만들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이들의 이름은 갈라-투라와 쿠르-자라였다. 엔키는 그들에게 생명의 물과 음식을 주고 지하세계로 내려보냈다.
이들이 지하세계에 내려갔을 때 에레슈키갈은 고통과 슬픔으로 뒤틀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정령은 에레슈키갈과 함께 울면서 그녀의 고통을 함께했다. 그러자 얼음처럼 차가운 에레슈키갈의 마음도 움직였다. 두 정령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이들은 엔키가 시키는 대로 이슈타르를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에레슈키갈은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이슈타르 대신 누군가를 지하세계에 대신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레슈키갈은 벽에 매달려 있는 이슈타르의 몸을 끌어내렸고 두 정령은 이슈타르에게 엔키가 건네준 생명의 물과 음식을 먹였다. 이슈타르는 눈을 떴고 다시 오던 길을 거슬러 지상으로 되돌아왔다. 지하세계의 일곱 개의 문을 통과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벗어 놓은 옷과 장신구를 하나씩 되찾았고 그럴 때마다 신성한 힘이 되돌아왔다. 마지막 문을 통과해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예전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레슈키갈이 딸려 보낸 죽음의 악령들이 그림자처럼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는 점이다.
이슈타르가 자신의 도시인 우루크로 되돌아왔을 때 양치기들의 신이자 그녀의 남편이던 탐무즈는 이슈타르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그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다른 여자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슈타르는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었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지하세계의 악령들에게 명한다. ‘저 자를 나 대신 지하세계로 데려가라!’ 이슈타르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탐무즈는 결국 악령들에게 붙들려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가게 된다. 하지만 탐무즈가 사라지자 그의 추종자들이 너무 슬퍼한 까닭에 에레슈키갈은 1년 중 절반만 탐무즈를 지하세계에 묶어 두었다고 한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탐무즈의 운명을 슬퍼하던 그의 누이가 1년의 절반을 대신 지하세계에 머무르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이슈타르는 이 여행을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하던 슬픔과 고통, 질병과 죽음, 빈곤과 나약함 등의 어두운 영역을 이해하게 된다. 저승을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행을 감행함으로써 더 강력한 여신으로 자리 잡는다.
지하세계를 다녀오는 과정을 통해서 이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프시케 이야기에서도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테세우스가 미궁 속에 들어갔다 살아 나오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저승, 저물어가는 땅, 몰락해 가는 것 들의 영토, 슬픔과 고통의 장소, 어둠의 땅 등으로 여겨지는 에레슈키갈의 영토는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곳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처럼 우리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은 대부분 터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두려움은 신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신들조차도 에레슈키갈의 영토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 저승의 여왕인 에레슈키갈의 고통은 다른 무엇보다도 외로움의 고통이었으리라. 얼음같이 차가운 에레슈키갈이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슬퍼해 준 두 정령의 공감 때문이었으니까. 지하세계가 지닌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슈타르는 자발적으로 이곳을 방문한다. 그녀의 이러한 행로는 하늘의 여왕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권위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에레슈키갈의 영토에 들어가야만 하는 때가 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슈타르처럼 용감하게 스스로 그곳을 방문해 보고자 하는 호기심과 대담함을 지닌 사람도 있다. 하지만 거의 모두는 소멸과 몰락, 죽음을 두려워하며 어쩌다가 그런 사건들과 만나게 되면 얼른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우리는 늙지 않으려 하며 병에 절대 걸리지 않으려 하며 약해져서도 안 되며 싸움에 져서도 안 되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려서도 안 되고 무엇인가를 내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몸에 좋은 모든 것을 먹고 바르고 저축하고 보험을 들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보다는 이기는 편에 선다. 그 결과 평균수명은 100세까지 길어졌다고 하며 그러한 통계치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더 많은 보험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일과 더 많은 걱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마치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길가메시처럼 영생을 바라고 모든 소멸과 몰락을 거부하고 저항한다 하더라도 인생에 찾아오는 갖가지 굴곡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로 우리는 원치 않는 중병에도 걸리고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도 경험하며 예기치 못한 손실도 경험한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던 에레슈키갈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대면하게 된다. 에레슈키갈은 이슈타르와는 반대로 아무것도 낳을 수 없고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찬 화려한 빛을 뿜어낼 수도 없다. 그녀는 늘 뒤틀린 얼굴을 한 채 차가운 얼굴의 아눈나키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세계로 끌려온 자들을 냉혹하게 심판할 뿐이다. 우리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졌을 때 세상은 모두 어둠에 잠긴 듯하고 세상 사람 모두 에레슈키갈이나 아눈나키들처럼 보일 것이다.
이슈타르가 저승으로 내려가면서 자신의 권능이자 메의 상징인 장신구를 모두 벗어 놓았듯이 그동안 쓸모 있다고 생각하던 것들, 권위와 자존감을 뒷받침해 준다고 여기던 모든 것이 휴지 조각처럼 쓸모없어지는 때도 있다.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가는 길목에 우리가 벗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장신구는 우리의 이력서를 구성하고 있는 학력, 경력, 자격증, 재산, 지위 등 살아가면서 나의 권능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들이다. 에레슈키갈의 영토에서 이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녀는 저물어가는 땅의 여왕으로서 이런 모든 것을 쇠약하게 만들고 아무런 힘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어떤 단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상황이 달라지면 모두 불필요하고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것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생 집 한 채를 소유하기 위해 돈을 벌기만 했는데 마침내 꿈에 그리던 그 집을 소유하게 되자 갑자기 중병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얻기 위해 고통을 참아가며 성형과 다이어트를 계속했는데 그 때문에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면,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포기하면서 자식의 학력을 쌓아 주려 고군분투했는데 갑자기 대학 입학사정에서 그 모든 경력을 무시하겠다는 발표가 난다면, 갑작스럽게 닥친 태풍에 그동안 쌓아온 모든 재산과 가족마저 잃게 된다면 등등 삶의 예기치 못한 배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걸 정말 배신이라고 한다면 삶이 우리에게 행하는 최고의 배신은 우리가 애써 쌓아온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에레슈키갈을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언젠가 무섭고도 두려운 에레슈키갈을 만나야 한다면 이왕이면 이슈타르의 방식으로 만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녀의 방식은 자발적 방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니 한번 가서 알아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서 에레슈키갈의 그림자가 올라오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듯이 미리 그곳을 제 발로 찾아가 보는 일이다. 이것이 모든 고대 사회에서 이루어지던 입문제의의 의미였다. 말하자면 죽음과 몰락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입문제의가 비단 성직자들과 신비가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신비제전이던 엘레우시스(Eleusis) 제전이라든가 오르페우스 교단의 신비제의 등은 모두 우리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언젠가는 한번쯤 만나야 하는 죽음을 영접하고 또 다른 출발을 예비하게 하는 행사였다.
우리는 살면서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을 경험하고 변화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 입학하고 학년이 올라가고 마침내 졸업하게 되는 것처럼 살아가면서 하나의 단계를 끝내고 또 다른 단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낡은 것들과의 이별을 내포한다. 거꾸로 내게서 무엇인가가 떠나간다면 그것은 삶이 새로운 시작을 예비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대체로 늘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있어서 삶이 선사하는 변화에 두려움을 가지고 저항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낯선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뒷걸음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늘 가던 길을 벗어나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길에 들어선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흥분과 설렘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슈타르는 아무도 가 보려 하지 않은 지하세계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그녀를 추동하는 힘은 아마도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낯선 길 앞에서 느낄 흥분과 설렘이었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앞에 낯선 사건과 상황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두려움은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예상이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있다.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이슈타르가 저승 문지기에게 호통을 쳤듯이 ‘네가 문을 열지 않으면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후에 이슈타르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녀는 받아들이고 긍정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의 여왕이 벽에 못 박혀 거꾸로 매달리는 일까지 경험한 마당에 더 이상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이슈타르가 저승의 문지기에게 호통을 치면서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곱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한 후에 맨 아래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사흘 밤낮을 보낸다. 그녀는 이때 죽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가 경험한 죽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일단 자신이 갖고 있는 권능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내세우는 것도 불필요하고 아무것도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거꾸로 매달렸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거꾸로 매달리면 모든 것이 뒤집혀 보인다. 거꾸로 매달려 사흘 밤낮을 보내는 것은 그동안 유지해 온 모든 관점과 견해, 가치관 등을 뒤집는 기간을 거친다는 의미다.
사흘이라는 기간은 밤하늘에 뜨는 달이 자취를 감추는 기간이기도 하다. 신화 속에서 죽음을 거쳐 부활하는 모든 존재는 사흘 만에 부활한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인류 최초의 상징이 달이기 때문이다. 달은 보름달을 거쳐 기울어 가는 동안에는 자신의 왼쪽 부분만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다가 사흘간 검은 달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른쪽 부분만을 보여 주기 시작해 마침내 만월에 이른다. 달은 죽음을 거친 후 다시 태어나며 죽음 이전과는 다른 면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면 한 달이라는 기간은 달이 자신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움직이는 전체성의 만다라인 셈이다.
이슈타르의 권능이 지하세계 방문을 통해 완성되고 더욱 강력해졌듯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종류의 몰락과 손실 경험은 우리 한평생의 삶을 완성하고 우리를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우리는 피하고 싶던 슬픔이나 외로움, 분노 등을 경험함으로써 생명이 지니고 있는 어두운 면모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이 사실은 전체로서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부분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전체로서의 생명은 우리의 편의대로 정해 놓은 좋은 모습만 지니고 있지 않다. 부패도, 쇠퇴도, 몰락도 모두 생명의 한 모습이다. 커다란 생명의 일부분인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꽃처럼 피어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장차 태어날 열매를 위해 시든 꽃처럼 뚝뚝 떨어져 내려야 할 때도 있다. 자연의 사이클이 자라나는 시기와 줄어드는 시기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와 완전한 어둠에 빠지는 시기를 모두 거쳐 하나의 완성된 원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의 삶 역시 성장과 쇠퇴라는 두 과정을 모두 거침으로써 완전해진다.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05, 183쪽, 187쪽.
저자 김융희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홍익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7년 동안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화와 상상력, 예술철학 등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펼쳐보기
저자 김융희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홍익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7년 동안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화와 상상력, 예술철학 등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빨강-매혹의 에로티시즘에서 금기의 레드컴플렉스까지》, 《검은 천사, 하얀 악마-흑백의 문화사》가 있고 함께 쓴 책으로 《철학, 예술을 읽다》, 《예술, 인문학과 만나다》 등이 있다.저자 김융희는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홍익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7년 동안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화와 상상력, 예술철학 등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신화와 상상력 등의 주제를 일상의 삶과 연결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학자 김융희. 어른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보여 준 매혹적인 내용 그대로 ‘신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