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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카메라의 생산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진전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최초의 라이카는 1924년이 될 때까지 연속생산이 되지 못하였고 1925년이 되어서야 출현하였다. 그가 개발한 카메라가 드디어 판매에 들어가자 바르낙은 카메라와 관련된 개발에만 전념하였고, 표준화된 렌즈마운트, 레인지파인더, 그리고 수많은 액세서리 등을 개발하였다. 병약했던 그는 잦은 병치레로 고통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해서 그의 작업실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는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해 나갔으며 현대 기계산업에서 본보기가 되는 커다란 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그는 라이츠사에서의 25년간 일했으며, 1936년 1월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82년 웨츨러에 그의 기념비가 건립되어 라이츠공장의 맞은편에 있는 공원에 세워졌다.

막스 베렉(Max Berek, 1986-1949) 교수는 1914년 바르낙과 함께 라이카 카메라의 제작에 참여하여 오늘날의 라이카가 있게한 초기의 라이카렌즈를 설계하여 오늘날 라이카 렌즈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초기 leica I에 장착된 Anastigmat 렌즈를 설계했으며 라이카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클래식한 렌즈인 Elmar 50/3.5 렌즈를 설계했다. 물리학자였던 그는 1886년 실레지아(Silesia)에서 태어났고, 1911년 베를린 광물질연구소에서 광학유리에 관한 이론으로 학위를 받았으며, 1912년 라이츠에 왔다.
당시 라이카의 35mm 소형카메라 개발 제작담당이었던 바르낙에게서 새로 제작된 35mm 소형카메라에 장착될 렌즈의 설계를 부탁받은 그는 당시에 유명한 렌즈제작의 기본이 되었던 triplet 이론에 근거하여 f3.5 밝기에 3군5매의 구성을 가진 최초의 라이카 렌즈인 Anastogmat(1924~1925)를 설계하였다. 이 렌즈의 이름은 후에 Ernst Leitz와 Max Berek의 이름을 따서 Elmax(1924~1925)로 바뀌었다. Elmax는 아주 훌륭한 성능을 가진 렌즈였지만 생산비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렌즈재료가 개발되자 렌즈설계의 재구성을 통해 라이카의 역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렌즈인 엘마(Elmar, 1926-1961)를 탄생시켰다. 라이카의 성공은 그가 설계한 무코팅 4매구성의 50/3.5 엘마 렌즈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엘마는 성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침동식구조로 편리한 휴대성까지 가능케 했다. 라이카 A에 장착되었던 50/3.5 엘마렌즈는 샤프한 렌즈로 무한대에서 고정되는 포커싱 잠금장치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구조는 라이카 렌즈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당시 베렉이 초기 Leica 카메라를 설계할 당시, 그는 이 카메라에 장착될 렌즈를 f3.5 밝기로 설계하였다. 당시의 렌즈재질이나 기술수준에서 이보다 밝은 렌즈의 설계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킬 수 있었고 그는 당시의 조건하에서 가능한 최선의 렌즈를 설계하려 했던 것이다. 베렉은 렌즈를 설계할 때, 실질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갔다. 그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렌즈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같은 사실은 컴퓨터가 전공정에서 이용되는 현대에도 어쩔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당시의 기술적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렌즈를 설계했던 것이다. 사실 훨씬 후에 만들어지는 Summicron f2나 Summilux f1.4 렌즈는 Lak9같은 새로운 렌즈재료의 개발로 가능했다. 스미크론의 출현 이후 엘마는 과거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에서 많이 멀어졌지만 만들어진지 수십년이 지난 구형 엘마까지도 지금도 많은 라이카 사용자들에게 훌륭한 실용기로 사랑받고 있다.
이후 라이카시스템의 확장과 더불어 그는 엘마와 다른 설계로 1931년 헥토르렌즈를 제작했고 또다른 설계방식으로 1933년부터 Summar 50mm Lens와 그 뒤를 이어 Summitar, Summarit, 85mm Summarex를 설계했다(일설에 의하면 이들 렌즈의 이름은 그가 아끼던 개의 이름 Hektor와 Rex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 렌즈들과 뒤이어 새로이 나타나는 렌즈들은 모두 가우스(gauss)방식을 기초로 제작된 것이다. 시간이 감에 따라 라이카 렌즈디자인의 개선과 발전은 계속되었다. 새로 설계, 제작된 렌즈들은 새로운 렌즈재료의 사용으로 기존의 렌즈에 비하여 성능이 향상되었다. 새로운 렌즈재료의 사용과 컴퓨터의 사용은 더 효율적이면서도 더 단순한 구조의 렌즈의 설계를 가능케 했다. 이후 라이카 캐나다공장을 필두로해서 렌즈의 디자인과 생산은 라이카사에서 더 중시되게 되었다(아래의 미들랜드 참조).
그는 40년대 초에는 나찌정권하에서 나찌에 가담할 것을 거부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 소신있고 양심적인 인물이었다 . 그의 교수직은 전후인 1946년에 복직되었다. 1949년 10월 Freiburg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20년 Ernst Leitz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 Ernst Leitz 2세가 사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사실 에른스트 라이츠 2세가 라이츠 상속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의 형 루드위그 라이츠(Ludwig Leitz)는 현미경 사업의 분화를 통해 라이카가 사진 사업에 뛰어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었고 라이츠 가문의 가업은 사실 그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루드위그 라이츠는 1898년 불의의 낙마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만일 이러한 사고만 없었다면 아마도 초기의 모든 라이카카메라에는 'Ernst Leitz' 대신에 'Ludwig Leitz'가 새겨졌을 것이다.
라이츠2세는 사업을 이어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카메라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용기있는 결정으로 바르낙 카메라의 상업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이 용기있는 사업가의 결단이 없었다면 라이카는 지금처럼 카메라의 최정상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카의 신화를 창조하고 완성해 나가는데 라이츠2세를 포함한 이들 라이츠가문 사람들의 역할을 절대 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3. 라이카 카메라의 발전
1913년에 바르낙(Oscar Barnack)은 라이카카메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UR-Leica 카메라를 발명하였다. Ur-란 최초, 기원 등을 의미하는 하는 복합접두어이다. 이 라이카의 원형 카메라는 1/40초의 고정속도를 가졌으며 영화카메라와 동일하였다. 그러나 라이카가 35mm 영화 필름을 사용한 첫 번째 콤팩트 카메라는 아니었다. 1908년에는 Lleo & Omens에 의해 35mm 카메라가 가장 처음 만들어 졌었다. 또한 이 시기에 다른 회사에서 몇 가지 35mm 스틸카메라가 출시되었었다. Homeos(1914), Mimigraph(1915), Tourist Multiple(1913), Simplex(1914)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다지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바르낙의 라이카 역시 불완전하기는 했지만 카메라의 기능이나 미적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인체공학적으로 이들을 앞섰다(Massimo Bertacchi의 Early 35mm Cameras 참조).

사진: 오리지널 Ur-Leica(Leica Camera AG 소장) 사진출처: History of the Screw Mount Leicas. 훗날 UR - 라이카로 알려진 프로토타입 카메라는 사실은 정확히 두 대를 만들어 그 한대는 바르낙이 사용하였고 나머지 한대는 언스트 라이츠 2세 (Ernst LeitzⅡ)가 사용하였다. 그들은 이 그 카메라를 1914년 봄 미국여행시 자신들이 직접 사용하였다. 재능있는 사진가이기도 했던 바르낙은 이 카메라가 가지고 있던 장점을 잘 이용하였다. 바르낙이 사용하였던 카메라는 바르낙의 사망후 그의 가족이 소장하였었다. 그러나 전쟁기를 Munich에 있는 '도이치박물관'에서 무사히 넘긴후 바르낙의 아들에 의해 팔렸다(전후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960년 다시 경매에 붙여져 팔린 후 지금 세계 어딘가에서 개인소장가에 의해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한 대는 오늘날 Leica Camara AG가 소장하고 있다.
Ur-Leica (기본 원형, 1913년 생산)와 라이카Ⅰ(1924년의 첫 생산모델)은 외형이 거의 동일하다. 최초의 Ur-Leica는 이미 현대라이카의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24×36mm 필름포맷, 금속몸체, 프레임 카운터, 36매용 카세트, 프레임 타입 뷰화인더를 위한 몸체위의 액세서리슈와 침동식 렌즈 등. 그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웠고 새로운 사진시대의 전설적인 출발이었다. Ur-Leica의 최초의 렌즈는 50mm Kino-Tessar였다. 사진속의 렌즈는 6매형의 Mikrp-Summar 1:4.5/42mm 렌즈. 그러나 셔터는 아직 겹쳐있는 구조(overlapping)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름을 감는 동안은 필름이 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렌즈를 덮어야 했다. 그러나 이 최초의 Ur-Leica는 레인지화인더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그 소형 카메라는 발전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들고 길었던 시절, 바르낙은 그 초기디자인의 결점을 점검했고 필요한 개량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진지한 아마추어 사진가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가능한 모든 결점을 발견해 나갔고 개선시켜 나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오랜 시간의 땀과 노력이 요구되었다. 전쟁중에는 라이츠제품에 대해 알려진게 거의 없다. 단지 군용 쌍안경을 제작했으며 또다른 광학제품을 생산한 걸로 추측된다. 분명 바르낙의 카메라작업은 중단되었다. 독일군정보부가 서류를 촬영하기 위해 그의 소형카메라에 관심을 가졌었고 여기에 고무되어 라이츠는 1916년 디자인을 특허출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르낙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 번째로 알려진 원형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 카메라는 렌즈가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렌즈를 가졌는지 모른다.
1차세계대전 이후 바르낙은 자신이 설계했던 카메라를 상품화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1920년 독일의 경제상황은 무척이나 어려웠고 판매는 부진하였다. 1920년대 초 인플레이션의 증가와 현미경 생산의 감소로 라이츠는 고용자들을 해고해야하는 위기를 맞이했다. 새로운 제품의 필요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당시 사진계는 붐을 이루었고, 수백만의 아마추어들이 활발히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그는 회의에서 카메라를 생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실 바르낙의 카메라는 1913년 이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4부터 1918까지의 1차대전 이후 어려워진 경제적 상황하에서 모험적인 사업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라이츠의 경영진은 바르낙의 카메라를 강경히 반대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카메라 생산을 반대하는 측의 의견은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진유리건판을 대량 비축해 두었던 당시 사진기자재 판매상들의 이해관계도 또한 반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그 당시에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맞고 있었다. 값싼 35mm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는 35mm필름의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해 낸 반면 전통적인 기자재의 생산이익을 감소시켰다.
논쟁은 몇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사업이었기에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아침부터 3시간 30분 동안의 맹렬한 논의 후 평팽했던 의견의 대립이 거의 부정적으로 분위기가 흘러 갈 때, 라이츠에서 라이카카메라의 운명은 최후로 한사람에 의해 결정내려졌다. 마침내 라이츠 2세(Ernst Leitz II)는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바르낙의 카메라를 제조하겠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언스트 라이츠 3세는 라이츠사의 이사들과 그 문제를 논의했던 그 시기를 ‘가장 길었던 날들’이라고 회상한다. 과거 라이츠 공장건물의 벽에는 1924년 바르낙의 라이카 생산 결정이 이곳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현판이 걸려있다.
1923에는 더욱 발전된 표준형 35mm 카메라가 만들어 졌다. 이것이 Leica Null series camera(0-Series)이다. 이것은 판매용이 아니라 생산전 테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선택된 일부 사진가들에게만 제공되었다. 1923년 에른스트 라이츠의 생산결정에 따라 평가용으로 시리얼번호 #101∼125까지 25대의 생산전단계 시리즈(Preproduction Series)를 생산하였다. 초기의 7대는 포컬플레인 셔터였으나 재장전시 자동적으로 닫히진 않았다. 때문에 카메라몸체의 작은 고리에 끈을 단 렌즈캡을 사용하였다. 두 번째로 만들어진 카메라들은 자동으로 닫히는 셔터였으나 이 특징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뷰파인더는 접는 타입과 안으로 끼워 넣는 타입이 있다. 렌즈는 Anastigmat, Elmax, Elmar가 장착되었다.

* 사진: 오리지널 Leica Null-series(Leica Camera AG 소장). 사진출처: History of the Screw Mount Leicas
최초로 상품화된 바르낙의 발명품 Leica I은 1925년 4월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처음에는 바르낙카메라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나 회사 밖에서 바르낙은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었기에 상품화될 카메라의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Leitz Camera에서 두음을 따서 따서 'Leca'라고 불렀다. 첫 번째 팜플랫에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지만 곧 발음이 쉽고 더 어감이 좋은 Leica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명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Leica'란 명칭은 레인지파인더가 내장된 라이카Ⅱ가 나오기까지 카메라에 표기되지 않았다. 단지 각 카메라에는 Ernst Leitz와 D.R.P(Deutche Reichs Patent : 독일의장등록)란 문자 그리고 일련번호가 음각되었다. 번호는 내부 부속품에도 부분적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로써 훗날 어떤 주요부분이 개량되었는지 점검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공식적인 생산시기는 192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5년 봄 라이프찌히 박람회(Leipzig Fair)에 그 카메라가 공식적으로 대중에 선을 보였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1924년에 생산되었고 그 해 겨울 몇 대의 카메라가 출시되었다.

* 사진: 라이카 I(A) 오른쪽은 당시 라이카 I의 사용설명서에 있는 사진. 부착 레인지화인더를 장착한 라이카 I(A) 모델이다. Leica I은 모든 35mm 카메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35mm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Leica I이 없었다면 다른 35mm 카메라들은 오늘날 나타나지 않았거나 현재의 카메라의 형태와는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라이카 I은 라이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갖는 카메라이다. 그러나 라이카 I 역시 레인지화인더(Rangefinder) 카메라로 부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라이카 I은 아직 레인지화인더를 갖추지 못했고 정확한 초점조절을 위해서는 'Scale Focussing'에 의존해야 했다. 'Scale Focussing'이란 우측 사진에서 보듯 거리를 측정하는 별도의 레인지화인더를 카메라 위에 부착하여 거리를 잰 후 이를 렌즈 조절링을 조절해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프레임은 수직의 기다란 레인지화인더 옆에 부착된 뷰화인더를 통해 설정한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여자가 카메라를 든 사진에서 카메라위로 막대처럼 길게 올라와 있는 것이 바로 부착 레인지화인더이다. 이것을 촬영자의 방향에서 본 것이 바로 좌측사진이다. 부착 레인지화인더의 하단의 접안부로 피사체를 보면서 상단의 거리측정나사(B)를 돌리면 A와 C로 통해 보여지는 피사체의 이중상이 일치하는 순간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둥근 거리측정나사위의 거리표시를 통해 피사체와의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진의 예에서는 3m가 카메라와 피사체의 정확한 거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진가는 렌즈의 포커스링을 돌려 거리조절을 3m로 설정하여 놓으면 정확한 초점의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것은 비록 렌즈와 거리조절 연동은 되지 않지만 레인지화인더를 외부에 부착해 놓은 것과 같다. 따라서 약간 억지를 부린다면 어떤 면에서는 최초의 레인지화인더 카메라라고 볼 수도 있겠다.
라이카Ⅰ은 모두 금속재질로 무게는 425g이며 A, B, C형의 세가지 종류가 생산되었다. 1925년 처음 출시된 라이카 I(A)는 렌즈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교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면 스크류마운트(screw mount) 바디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러나 1933년까지 생산되었던 C형은 렌즈교환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라이카 I(A)는 초첨거리가 50mm, f3.5인 렌즈가 고정되어 있었고, 1/25~1/500초의 포칼플레인 셔터를 가진 매우 단순한 구조였다. 그 당시 작은 포맷의 롤필름은 6x9cm이였고, 많은 사진가들이 9x12cm 네가티브나 13x18cm 네가티브 또는 더 큰 플레이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작은 금속상자는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라이프치히 박람회의 방문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모두들 이러한 작은 사이즈의 네거티브는 대형 사이즈의 네거티브만큼의 사진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25년 850대가 만들어 졌으며, 1926년엔 1550대, 1927년엔 3200대가 판매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라이카는 점차적으로 사진가들에 의해 그 실질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고 1928년(7600대)부터 급속한 성장을 보여 1929년에는 15000대가 판매되었다. 라이카 I은 카메라 가격이 비쌌던 당시에 총 5만7000대 이상이 생산되었을 만큼 성공작이었다. 라이카 I은 이전까지 생산되었던 어떤 35mm 카메라도 이루지 못했던 상업적 성공을 이룸으로써 사진 역사에서 35mm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등장시키는 역사의 커다란 한 획을 그었던 것이다.
1931년도는 모델을 변경한 해로 불황까지 겹쳐서 그 결과 생산량이 1만 1천대에 그치게 되나 1932년 카메라 제작이 전반적으로 재개되면서 매년 평균 3만대에서 3만 5천대의 라이카가 제작되었다. 1936년에 40000대의 생산을 보였고 1938년 44000대의 생산이후 1942년 6000대로 급격히 생산이 감소했다. 1925년 초부터 전쟁이 끝난 해까지(1945년) 총 400,000대 정도의 라이카가 생산되었다.
1928년부터 1936년 바르낙의 사망까지 라이츠의 연구진들은 15가지의 다른 모델들을 개발했다. 각각의 모델들은 몇 가지의 타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르낙의 사망이후에도 라이카의 제품개발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졌다. 라이카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향후 모든 개발의 핵심이랄 수 있는 디자인에서 2가지 개념의 도입이었다. 첫 번째는 1930년에 도입된 렌즈 교환방식 마운트의 채택이다(초기에는 카메라에 새겨진 일련번호의 첫 세자리 숫자를 렌즈에 음각시킨 형태로 특정한 카메라에 특별히 맞춰진 일련의 렌즈군에 한해 교환이 가능하였다.). 두 번째는 모든 렌즈에 자동적으로 연동되는 레인지 파인더를 내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1931년 모든 카메라 렌즈가 카메라 바디에 언제든 편리하게 장착될 수 있도록 렌즈와 필름막사이의 거리가 표준화되었고, 일년 후인 1932년 초기렌즈들은 물론 제작된 모든 렌즈의 시리얼번호가 확인될 수 있게 되었고 Leica II model에 레인지화인더를 장착하였다.

* 사진: 라이카 II 모델
1932년 출시된 Leica II는 레인지화인더가 장착되고 35-135mm의 렌즈를 표준화된 방식으로 교환 장착할 수 있는 최초의 카메라였다. 드디어 명실상부한 레인지화인더 카메라가 탄생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사실 콘탁스 I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탁스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콘탁스의 셔터시스템의 불완전성 때문이었다. Leica II 역시 I과 더불어 라이카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카메라이다. 라이카 II는 레인지화인더, 렌즈교환방식, 50mm 화인더, 1/20 - 1/500의 셔터스피드를 갖춘 최초의 실질적인 시스템 카메라였다. 라이카 II 이전까지는 별도로 부착된 레인지화인더에 의한 'Scale Focussing'에 의존해야 했다. 바디를 덮고 있는 볼커나이트는 아주 질겼고 짜이스 콘탁스 바디의 약하고 부수어지기 쉬운 커버보다 훨씬 우수했다.
당시 라이카에 맞선 짜이스의 카메라는 1932년에 생산된 콘탁스(Contax)였다. 콘탁스는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카메라로 가장 넓은 레인지화인더기저(100mm)를 가졌으며, 수직주행방식의 11개의 날개(blade)의 금속 포컬 플레인 셔터는 사용에 편리하도록 하나의 셔터다이얼내에서 최고 1/1000의 셔터속도까지 설정할 수 있었다. 거기다 렌즈교환이 가능한 베이요넷 마운트는 20mm에서 500mm에 이르는 12종류의 뛰어난 칼 짜이스 렌즈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월등히 앞선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콘탁스가 라이카와의 경쟁에서 밀린 이유는 앞서 말한 셔터시스템의 불완전성등의 카메라의 내구성 때문이었다. 바르낙의 라이카는 실질적인 면에서 앞섰다. 아무리 성능좋은 카메라라도 너무 고장이 자주 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라이카는 뛰어난 품질의 사진을 만들어주는 신뢰성 있는 카메라로 인정받으면서 경쟁자들을 하나 둘 제치고 최고의 카메라로 명성을 쌓아 나갔다.
라이카 II의 등장과 더불어 여러가지 악세사리(accessory) 및 교환렌즈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자 엘마(Elmar) 렌즈 고유의 구성요소를 가지면서 렌즈의 수차를 약간씩 변형시켜 다양한 형태의 초점거리를 갖는 여러 가지 형태의 Elmar design의 렌즈가 50mm 표준렌즈에 이어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Elmar형 렌즈로는 1931년 제작된 35mm 와 135mm 렌즈가 있으며 1932년 제작된 90mm 와 105mm 렌즈가 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초기 라이카의 렌즈들은 아주 좋은 품질을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감광유제는 매우 거칠어서 입자들이 보일 정도였다. 거친 입자로 인한 사진의 낮은 화질과 배경의 노이즈로 인해 사진의 디테일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에대한 대책으로, 라이카 렌즈를 설계한 막스 베렉(Max Berek)은 그 당시 감광유제의 특성에 맞춘 광학적 공식을 선택했다. 당시 라이카 카메라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 당시 표준이었던 6x9cm 또는 9x12cm의 밀착인화물과 라이카의 24x36mm 필름에서 확대된 인화물이 사진으로서 동등한 품질을 갖는 것이었다. 바르낙과 베렉은 13x18cm 크기의 고품질로 확대된 인화물을 목표로 수많은 테스트를 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모든 시스템을 정밀하게 설계하고 제작했다.
1930년 1월 18일 라이츠사는 합병되어져서 가족회사에서 G.m.b.H(Gesellshaft mit beschrankter Haftung), 요컨대 미국합작의 주식회사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2차대전 후까지 이 명칭은 카메라에 표기되지 않았고 단지 이전까지 사용해오던 D.R.P 대신 D.B.P(for Deutsches Bundesrepublic Patent)가 쓰였다. 동시에 이 표기는 전쟁전후에 생산된 다른 카메라에도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9년 이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게 되고 새로운 표기가 사용되었다. 라이카는 세계적인 명성의 토대 위에 몇가지 기본 모델의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렌즈도 전통적인 엘마 f3.5 50mm 렌즈에서 35mm 광각 그리고 표준렌즈로부터 73mm, 90mm, 105mm, 135mm, 200mm를 망라한 망원계통의 렌즈로 그 폭을 늘려나갔다.
첫댓글 소 비 자들은 그 저 돈 만 지불하고서 사 용만 하 면 된다 ㆍ 그노고를 알 라고도 하 지 않으나
저작자 저자는 그러하더라도 독 자는 읽 기만 하면은 된 다 ㆍ
굉 장 히 좋 아 ㆍ 오 래 되도 . 수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