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의 향기/靑石 전성훈
순천은 몇 번이나 찾아간 정감 어린 추억의 고장이다. 오래전 어느 해 가을 강천산에서 아름다운 단풍 구경을 하며 맨발로 숲길을 걸었던 기억, 십여 년 전 형제들과 순천만 정원 갈대숲을 거닐던 기억, 가족과 함께 함양과 순천을 즐겁게 여행하던 추억도 떠오른다.
조금 쌀쌀한 날씨에 평소보다 30분 일찍 도봉문화원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50분 정도 걸려서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선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안성휴게소에서 잠시 멈춘다. 덕분에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미세먼지가 심하다. 고속도로 주변 산하에는 봄의 상징인 연둣빛 물감이 쏟아져서 나뭇잎이 새파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새벽에 일어난 탓에 연신 하품이 나오고 눈도 저절로 스르르 감겨 잠을 청한다. 앞뒤, 옆에서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어느덧 잦아든다. 한동안 달콤한 쪽잠을 자고 나서 졸작 시집 ‘산티에고 가는 길’을 꺼내 든다. “아아, 이곳은 이렇게 바꾸면 더 좋은데, 저곳은 행을 바꿔서 배치하면 좋았을 것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끝도 없어 고치고 수정한다.
버스 안에서 도봉문화원 해설사가 “여수에 가서 돈 자랑,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숨 가쁘게 달린 관광버스는 오전 11시 40분경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입장료는 다른 사찰보다 저렴한 편으로, 성인 3천 원, 순천 시민과 70세 이상은 무료이다. 주차장에서 입장료 받는 곳을 지나 일주문까지 1km 조금 넘게 걷는다. 산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자갈이 깔려 있다. 오랜만에 자갈길을 걷어본다. 좀처럼 보기 힘든 왕벚꽃이 만발한 숲길, 바람을 타고 코끝을 파고드는 꽃향기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제야 아득히 먼 옛날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50년도 넘는 옛날이야기다. 싱그런 젊음의 대학 1학년 가을 답사, 그 당시 승주군 선암사를 거쳐 억새가 장관을 이루었던 조계산 굴목재를 넘어 송광사를 찾았던 일이 생각난다. 선암사 경내에 매화, 벚꽃, 동백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그야말로 꽃동산 같은 느낌이다.
선암사(仙巖寺)는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고려시대 이후 조계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해방 이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규로 인하여 선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태고종이 공동 관리한다. 선암사 창건에 대해서 신라 법흥왕 때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 창건설과 신라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 창건설이 있다. 선암사는 통도사(通度寺), 부석사(浮石寺), 봉정사(鳳停寺), 법주사(法住寺), 마곡사(麻谷寺), 대흥사(大興寺)와 함께 ‘산사, 한국의 승지 승원’이란 명칭으로 1080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중생이 부처와 하나 되는 마음으로 통과하는 의미가 있는 일주문, 선암사 일주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아름다운 승선교를 건너서 대웅전에 이르니 가림막이 설치되어 본존불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괘불이 걸려 있어 의아한 생각을 했는데, 대웅전 불상에 새롭게 ‘금칠’을 하는 의식인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진행 중이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선암사의 3대 명물로, 선암매, 승선교, 해우소를 꼽는다고 한다. 가을 단풍이 짙게 물든 계곡을 연결하는 아치형의 멋진 다리를 찍지 않으면 사진작가가 아니라는 속설이 있다는 승선교(昇仙橋),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물로 지정된 다리는 선녀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절집 경내를 돌아다니다가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매화의 고고한 뜻을 느끼고 싶어, 천연기념물 제488호인 선암매 나뭇가지를 슬그머니 어루만지며 쓰다듬는다. ‘뒷칸’이라는 나무 명찰을 매달은 채 손님을 맞이하는 해우소, 몸과 마음의 온갖 근심과 걱정거리를 없애준다고 자랑하는 측간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알 수 없는 그 깊이를 가늠해본다. 경내를 돌아본 후 사찰을 뒤로하고 일주문 쪽으로 되돌아 나오다가, 절에 들어갈 때 무심히 지나쳐 보지 못한 돌장승을 발견한다. 멋쩍게 서 있는 돌장승을 보는 순간 왜 그런지 생경하다는 느낌이 든다. 좌측 장승에는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푼다는 뜻의 “방생정계(放生淨界)”, 우측 장승에는 불법을 보호하는 착한 신이라는 의미의 “호법선신(護法善神)”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뜻이야 더없이 좋지만, 고즈넉한 절집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느낌은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인데 마음속에 오래 새겨둘 이유는 없다. 하찮은 안목으로 고단한 중생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봄날의 따뜻한 향기를 만끽하고 일주문을 벗어나 사바세계의 문턱으로 들어서며, 반야심경 마지막 말씀을 떠올린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가자 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 모두 함께 저 피안의 세계로 가자, 오 깨달음이여 축복이어라). (202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