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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문제집>이라는 용어가 있다. "출제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문제들을 골라 엮은 책"을 말한다.
"공인중개사 예상 문제집" "공인전기기능사 예상 문제집" "기말고사 예상문제집"
오늘 본문은 일종의 부활에 관한 예상 문제집이다.
사도 바울이 부활에 대해 회의적인 일부 고린도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소개를 했다(12-34)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강조했다.
그런 후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부활 예상 문제 두 가지를 출제했다. "누가 묻기를.."(35)
실제로 이렇게 바울에게 누군가가 질문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에 누가 이렇게 질문한다면.."이라는 의미이다.
"..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공동번역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한다면,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
두 가지 예상 문제다.
1.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가?(HOW)
2. 만약 살아날 수 있다면 어떤 몸으로 살아나는가? (WHAT)
"죽을 당시의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는가?" 아니면 "제일 상태가 좋았을 때의 몸을 가지고 살아나는가?"
우리도 궁금하다.
100세 때 사망했다면 그 당시의 몸으로 우리가 부활하는가?
아니면 몸이 제일 좋았을 때 그 몸으로 부활하는가?
본문에는 이런 예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소개된다.
오늘은 2024년 부활주일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의 기쁨과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한다.
일반적으로 부활주일이 되면 성도들이 들을 수 있는 부활 설교 카테고리는 크게 두 가지 정도 될 것이다.
1.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가? 예수 부활 사건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설교이다.
2.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 사건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설교이다.
첫 번째 카데고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팩트인가? 아닌가?라는 사실을 다루는 영역이다.
"예수님이 진짜로 살아났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중요한 문제이다.
중요한 문제이긴 한데,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역사적 사실로 증명이 된다고 해도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이런 예를 든다.
음주 뺑소니 운전자로 인해 가장을 잃은 유가족이 있다. 큰 슬픔에 잠겼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었다.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경찰관이 범인을 체포했다.
담당 형사가 유가족을 찾아가서 범인을 체포했다고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유가족이 기뻐하겠는가? 너무 기쁜 나머지 춤을 추겠는가? 환호성을 지르는가?
아니다.
사실 경찰관으로서는 아주 큰 일을 했고, 사건을 해결하려면 범인을 체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유가족 입장에서 범인 체포는 별 의미가 없다.
왜? 범인이 체포되었다고 해서 죽은 가장이 살아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까요?
음주뺑소니운전자가 재벌이라 그로부터 보상금을 아주 많이 받았다손 치더라도 그 가정의 가장은 살아나지 못한다.
범인이 체포된 사실은 유가족가족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부활이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는 자체가 매우 어렵지만, 요행히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 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사람은 믿고, 여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부활의 진의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저 성도들은 이런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반면에 두 번째 카데고리에 해당하는 설교는 청중들에게 팩트(사실)보다는 부활의 진의 즉 부활의 참 뜻을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유형의 설교는 2000여 년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청년 예수의 부활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오늘 설교도 두 번째 유형의 설교이다.
부활의 의미, 부활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본다.
성도들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도록 돕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그 의미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부활이라고 말한다면, 성경에는 여러 번의 부활이 소개된다.
예를 들자면 기근의 때에 엘리야가 사르밧 여인의 집에 잠시동안 기거했었다(왕상 17장)
이때 사르밧 여인의 외아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여인이 하나님과 엘리야를 원망했다.
"왜 하나님의 선지자가 우리 집에 머물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면 푸념을 늘어놓았다(왕상 17:18)
그러자 엘리야는 여인의 죽은 아들을 안고 자신이 머물던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자신의 침대에 누인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이 아이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이 돌아오게 해 달라"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마침내 사르밧 여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다시 살아났다(요한 11장)
나사로는 아주 극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는 죽은 지 무려 4일 만에 살아난다. 예수님 보다 하루 더 무덤 속에 있었다.
심지어 그는 무덤속에 시신으로 누워있다가 수의를 입은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이 기절초풍을 했을 것이다.
나사로도 살아났다.
이렇게 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살아남을 부활이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다시 살아남과 이들의 다시 살아남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살아남은 단지 한 사람의 살아남이었다.
나사로의 살아남은 개인의 부활이었다. 사르밧 여인의 아들의 살아남도 개인의 살아남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살아남은 개인의 살아남을 넘어 온 우주의 살아남이 되었다.
예수님의 살아남은 개인의 부활에 그치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온 인류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살아남만을 부활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가 고물가 고금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고금리정책을 국정기조로 삼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도 물가가 너무 올리 서민들의 삶이 녹록치가 않다.
뉴욕의 레스토랑 수제버거 한개 가격이 4-5만 원한 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서 고금리정책을 유지 중이다.
이런 상황인지라 사람들이 금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은행에서 금리를 어느 정도로 유지할지에 관해 뉴스에서 연일 보도 중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금리정책은 미국 금리정책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들이 미국 금리정책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가 미국이 금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주목한다.
한국금리는 한국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미국금리는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
사르밧 여인의 아들이나 나사로의 경우, 이들 살아남은 그 개인에게 국한되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살아남은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주의 부활을 의미한다.
우리가 슬기로운 부활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부활이라는 용어에 담긴 진의를 알아야만 한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부활이전의 삶과 부활이후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42-44)
다 같이 읽어보자.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다"(42)
부활체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떤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예수님은 비교법을 사용한다.
부활전의 몸과 부활후의 몸을 비교한다.
"썩을 몸으로 묻혔다가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천한 몸으로 묻혔다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약한 몸으로 묻혔다가 강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육적인 몸으로 묻혓다가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이 말씀은 훗날 우리의 부활할 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 부활 이전의 삶과 부활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 지를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 몸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부활 이전의 세계와 부활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설명한다.
이렇게 달라지게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개인뿐 아니라 우주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 사건이었다.
개인적인 변화를 살펴볼까요?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썩을 인생, 천한 인생, 약한 인생, 육적 인생을 살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는 우리 모두가 썩지 않을 인생, 영광스러운 인생, 강한 인생, 영적인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사는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우리가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이다.
에수님의 부활로 우리 인생이 달라졌다.
이런 사실을 성경 에베소서에서는 "옛사람을 벗어버렸다"라고 설명한다(엡 4:22-24)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옛 세계, 낡은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우주적인 변화를 살펴볼까요?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계절이 바꿨다.
부활이전의 세계가 겨울이라면 부활 이후의 세게는 봄에 해당한다.
봄이 되면 생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우리 주변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눈이 녹고 얼음이 녹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싹이 자라고 꽃이 핀다.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봄옷을 찾게 된다.
땅속에 굴속에 숨어있던 짐승들이 그 곳에서 달려 나와 새로운 시간을 즐기기 시작한다.
이 모든 변화가 봄에 부는 생명의 바람때문이다.
생명의 바람으로 인해 세계가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세계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에수님의 부활로 인해 개인과 우주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 몸속의 부활의 씨가 자라고 있다(42-44)
"심는다"라는 동사가 4번 사용되었다.
의미는? 씨를 뿌리다이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씨 뿌리는 장면에 비유한다. 의미는?
요즘 제가 도보로 출퇴근하고 있다. 왕복 8.5킬로 정도 걷는다.
딱 걷기 좋은 계절이다.
제가 걸어다니는 길에서 가끔 텃밭을 볼 수 있다.
구) 해운대 역사와 해리단 길 사이 공터에 드문 드문 텃밭이 있다.
지난 금요일에 출근하다가 우연히 목격한 장면이다.
주인장이 자신의 텃밭에 표시를 해 두었다. 작은 나무 조각 하나를 밭에 꽂아두었다.
그 나무 조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씨가 자라는 중입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자신의 텃밭을 조심해서 더루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추측이 된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 몸에도 부활의 씨가 자라는 중입니다"
에수님께서 부활하셨다. 그 부활사건은 단순히 다시 살아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부활사건은 모든 인류의 부활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통해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인류가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셨다.
사랑하는 미준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24년 부활주일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모두를 부활절 예배에 초대하셨다.
다시 한 번 축복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초대한 이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가 슬기로운 부활생활을 하게 되기를 기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몸에 부활이라는 씨를 뿌려 놓으셨다.
그 씨가 지금 우리 몸속에서 자라고 있다.
이 부활의 씨가 자라서 훗날에 우리가 전혀 다른 육체를 입게 된다.
그러니, 어둠의 옷을 벗어던지고 부활이 주는 생명의 힘으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