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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청주] 떠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콜로 1, 1 - 8
† 복음 : 루카 4, 38 - 44
★ 바오로 사도가 동료 티모테오와 함께 콜로새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권고한다. 곧 에파프라스에게서 배운 대로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희망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충실히 믿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제1독서).
★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의
일상이 그려진다. 낮에는 시몬의 장모를 돌보아 주시고, 해 질
무렵부터는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 모두를
고쳐 주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으시고 홀로 기도하시다가 다른 마을로 떠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들을 관찰해 봅시다.
첫 번째로 시몬의 장모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해 주십사고 간청합니다. 다른 이를 위한 간청과 기도는 하느님을
기뻐하시게 합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시몬의 장모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낫자마자 시중듭니다.
하느님께 얻은 은총이 결코 그 자신을 위한 은총만이 아님을 시몬의
장모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병자들입니다.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겸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다른 이들의 도움을 통해서도
예수님께 다가서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로 마귀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당신이 왜 우리 일을
방해하느냐?’는 투의 항변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예수님을 붙잡는 군중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깨달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에 대한 인간적인 집착입니다.
첫 번째의 것은 영적인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내 드리게 할 수 있지만,
두 번째의 것은 결국 정화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으신 채 헌신하시면서도 기도하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는 환대를 뒤로하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위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누구를 가장 닮았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떠나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9월4일 연중22주간 수요일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가 4,38-44)
떠날 때를 안다는 것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임을 잊지 맙시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
(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많이요!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 착각들
2013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몇 년 전, 성지에서 본당으로 가라는 인사이동을 받고 그 날짜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성지를 찾으신 분들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성지에 계속 계시면 안 돼요? 신부님 안 계신 성지를
상상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정말로 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성지를 떠나서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된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성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떠난 성지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뒤로 몇
명의 신부님이 바뀌어서 지금은 정말로 그럴싸한 성지로 발했습니다.
저 때에는 성당이 없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야외에서 미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현재는 아름답고 멋있는 성당이 있어서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있을 때에는 야외 조경이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어수선했으나, 지금은 깨끗하게 잘
정리된 조경으로 많은 이들에게 편안함을 줍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없기 때문에 지금처럼 아름답고 멋있는 성지로 거듭
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속에서 종종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중심이 되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은 믿음과
겸손한 마음만이 자신 안의 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다른 의사에게서 본 일이 있었을까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마귀들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요. 이런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 있다면 질병에
걸릴 염려도 없고, 마귀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며, 배가 고파도
굶어죽을 염려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 본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간청을 뿌리치기가 쉬웠을까요? 사람들의 간청에
응답해서 그 자리에 머무른다면 분명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고,
나중에 있을 십자가의 죽음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면서 그러한
간청을 가볍게 뿌리치십니다.
이렇게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외딴곳에서 하신 기도에
있었습니다. 즉, 인간적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로지 기도에만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인정받고자 하는 유혹. 그래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착각들...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만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빌 게이츠)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주시는 예수님.
얼마나 행복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질병에 걸린 이들을 하나하나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시지요. 당시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단순히
병에 걸렸다는 생각보다는 죄 중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즉,
죄가 많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병자들은 곧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병으로 아파 힘들어 죽겠는데,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은 더 큰 고통 속에 빠지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죄인이라면서 피하는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따뜻이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병을 고쳐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이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지금 역시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얼마나 기뻐하며, 또 얼마나 행복해 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며,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이라면서 기쁨과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이기심과 욕심을 버린다면, 그 기쁨과 행복은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한 말씀만 하소서. 저의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루카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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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하늘 나라에 간 어린 친구가 떠올랐다.
이름은 정 현진 스테파노, 나이는 12살이었다.
서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풋내기 신부로서 남대문 시장
상인 사목과 주로 피정 지도로 나름대로 열정을 쏟고 있을 때였다.
전화기가 울어댄다. 인천의 어느 본당에서 열심히 사목회
전례분과장으로 활동하시던 분의 음성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저에요. 신부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신부님, 아이를 하느님께서 불러가시려나 봅니다.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분의 말씀은 병자성사를 부탁한다는 말씀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정말 어렵게 생활하며
신앙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던 분이었다.
너무 사람이 좋아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의 눈에 들었고 공장장 역할을
하던 정말 착실하고 소위 세상이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분이셨다. 그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가정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찾아온 것이다. 일단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 순간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한 구석에서 슬픔과 분노가
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부모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 가능하단 말인가!" 등등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약속한 날이 되었고 차를 몰고 강남으로 향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도저히 무슨 말로 부모들을 위로할 수 있을 지 난감했다. 결국 병실
문 앞 이름표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는 순간까지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병실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창문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고, 엄마는
아이의 침대에 올라앉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아이를 내려다
본다. 머리에는 아기 손만한 혹이 서너 개가 나와 있었고 한 쪽 눈도
암 세포가 번져 퉁퉁 부어있는 상태로 감겨져 있었다.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스테파노가 복사를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와 복사를 처음하고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티없이 잘생긴 모습이 순간 지나쳐 간다.
아무 말 없이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이내 병자성사를 주려고
영대를 매고 책을 펼쳤다. 성호를 그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나를 도와서 성호경을 대신해준다. 정말 힘들게 병사성사를 집전하고,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 목례와 함께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날 저녁 전화가 걸려왔다.
"신부님, 아이가 성사를 받고 아주 평화롭게 갔습니다."
" ---- ---- "
이틀 후,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해 다시 성모병원을 향해 달려간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병원 영안실 옆에 장례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몇몇 안 되는 조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지칠 때로 지친
상태로 제대를 옆으로 하고 앉아, 관이 놓인 곳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그렇다. 정말 하느님은 이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구나."라는
어떤 깨달음이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미사가 시작되었고,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를 무척 사랑하시나 봅니다.
우리 눈물을 그만 흘립시다. 그리고 기쁘게 이 미사를 드립시다.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우리는 길어야 백 년을 산다고 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놓고 볼 때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여정이지요. 하지만 그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미움과 고통과 욕심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우리 앞에 누워 있는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
아이는 고작 열 두 살입니다. 이 아이가 죄를 지었다면 과연 무슨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성적표를 엄마에게 보일 수가 없어서 엄마 몰래
도장 꺼내서 찍은 것? 아니면 친구들하고 오락실 가고 싶어서 엄마
몰래 주머니 뒤진 것? 이것이 죄입니까? 우리들이 이 삶 안에서 짓는
죄에 비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슬퍼하지 맙시다. 이 아이는 하느님께서 천사로 쓰시려나 봅니다. 죄의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당신 옆에 두시고 싶을 정도로 이 아이를
사랑하셨나 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이 아이는 천사가 되어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엄마, 아빠에게 아무 걱정 말라고 말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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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을 받고 그 병을 치유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절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는 참 많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을 보면서 “하느님은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픈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치유해주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언젠가 말했듯이, 우리의 육체란 완전한 치유를 경험할 수 없다. 반드시
우리의 몸은 끝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치유의 대상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다. 그 치유를 위해
치유를 청해야만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2013년 다해 9월4일
지난 주일이었습니다. 오후 4시 가량 되었을 때입니다. 명동 성당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성당 앞에 있는 ‘고로케’를 파는 가게입니다. 매번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은 맛있는 고로케를 먹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주 진지했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기꺼이 줄을 서서 기다렸고, 지갑을 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명동 성당의 미사를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울의
대부분의 성당은 미사 시간에 줄을 서서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교중 미사 이외에는 자리가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사에 오시는
분들도 젊은이들은 보기 힘들고,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명동 성당은
조금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명동 성당이 주는 멋과 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구청 신부님들께서 새로 온 신부들을 위한 환영식을 하신다고
합니다. 제가 마장동에 있는 음식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였습니다. 신부님들께서 그러면 그곳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명동에서 청계천 길을 따라서 마장동까지 걸어가서 저녁을 먹고 오자고
하셨습니다. 명동에서 회식을 할 줄 알았는데 저의 말 한마디가
마장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왕 제가 예약하기로 하였으니, 오늘
명동에서 한번 걸어갔다 오려합니다. 음식도 한번 먹어보고 다음 주에
있을 회식에 최상의 음식을 준비해 주시기를 부탁하려 합니다. 아마도
음식의 맛도 중요하지만 청계천입구에서 마장동까지 함께 걸으면서
친교를 나누는 것이 더 의미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정’을 보았습니다. 그 열정은 예수님께서 가진 커다란
힘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베드로 사도 역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열정에서 자신감이 나옵니다. 그 열정에서 도전정신이 나옵니다. 그
열정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50년 전에
그 열정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인
나의 아들과 백인의 아들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꿈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버스를 타는 모습입니다.’ 그의 열정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작은 성당 중에 하나인 종로성당이 순례자들을 위한 성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곳에 포도청이 있었고, 그 포도청에서 20여명의
순교성인들께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서울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유적지가 있음을 알았고, 종로성당이 그 중에
한 곳임을 알았습니다. 어제는 순례자를 위한 성당 선포식이 있었습니다.
도심의 한 작은 성당이 신앙의 길을 보여주는 순례자의 성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본당신부와 공동체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헨리 제임스란 사람은 충고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런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충고를 한 마디
해 달라고 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난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머리를 하늘로 높이
쳐들고는 말하십시오. '나는 너를 이기고야 말 거야. 결코 너는 나를
꺾을 수 없어.'라고. 그리고 그 말 뒤에는 가장 위안이 되는 이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십시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아픔과 고난은 나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줄 거예요.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말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내 인생의
소음이 아닌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조화로운 멜로디.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병 치유기적 방법 중
2013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예수님의 병 치유기적 방법 중
예수님의 병 치유기적 방법 중 꾸짖으셨다는 방법이 마음에 듭니다.
야단치는 것 꾸짖는 것은 상대가 알아듣는다는 것을 전제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람과만 꾸짖는 말을 하며 사는지 의아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몸의 아픈 부분이나 병이 나면 종종 대화를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야단은 못 치지만 너무 아프면 꾸짖고 야단도 칩니다.
간혹 부탁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면서 병원신세는 덜 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가장 반가운 단어, 치유
2013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루카4,38-44
"가장 반가운 단어, 치유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가장 기본적으로 꿈꾸는 소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 다하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큰 고생 않고 세상 떠나는 일입니다.
영안실에서 가끔씩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병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난 분의 장례식장에서 듣는 말입니다. “호상(好喪)이다!”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신 할머니, 평생 어디 한 군데 크게 아픈데도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민폐 한번 끼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도 안색이 안 좋다든지 특별한 이상 징후가 없었습니다.
평소처럼 오전 내내 텃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며느님이 차려준
점심 잘 드셨습니다.
다른 때와 다른 것은 오직 한 가지, 점심식사 후에 오랜 시간
정성껏 샤워를 하시고선 깨끗한 모시옷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며느님보고 낮잠이나 한잠 잘란다며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그 길로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정말 누구라도 부러워할 호상(好喪)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호상을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원치 않는 병고가 찾아옵니다. 하나의 병은 또 다른 병을
몰고 옵니다. 계속해서 다양한 병치레를 하며 괴로운 투병생활로
삶을 마무리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
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우들, 불치병 환우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ㅋㅋ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 받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 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아가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당신을 따르는 이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는 예수님
2013년 다해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복음 : 루카 4,38-44
< 당신을 따르는 이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는 예수님 >
2006년 5월 2일자 중앙일보에 ‘보은의 장기 기증’이란 제목으로 이런
기사가 오른 적이 있습니다.
신승경(1981- )선수는 2004년 프로축구 팀인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해
올 시즌 초반 선발로 출장했던 골키퍼입니다. 신 선수는 2006년 3월
중순 팀 훈련 도중에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주전 골키퍼이었기 때문에 신 선수는 물론 팀에서도 걱정이
컸습니다.
신 선수가 계속 운동을 하려면 파열된 십자인대를 제거하고 다른
십자인대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는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지난달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대를 기증받아 성공적으로 수술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신 선수 고향인 충북 제천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씨 없는 수박
농사를 짓고 있던 신 선수의 형 승우(35)씨가 지난달 29일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졌습니다. 병원에서는 회생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뇌사 상태 신 선수의 형을 보며 가족들은 슬픔 속에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신 선수의 형인 승우 씨의 장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삶을 보다 값지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버지 신순선(67) 씨는 "2남3녀의 막내인 승경이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돼 보답하는 마음에서 큰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엄금선(66)씨를 비롯한
전 가족이 이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승우 씨는 지난달 29일 서울 강동성심병원에서 자신의 장기를 7명의
난치병 환자에게 이식해주었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시 갚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또한 그 받은
사람에게 직접 갚을 수 없다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보은의 마음을
표현해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의 장모 집에 가십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다고 아룁니다. 예수님은 곧 가서
장모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직접 고쳐 주십사고 기적을 청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렸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도 치유해 주시는데 하물며 당신을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의 장모인데 그냥 모른 채 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베드로의 장모는 ‘화병’에 걸려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딸을 시집보내 놨더니 딸을 벌어 먹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예수라고 하는 가난한 사람을 쫓아다니며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위를
어떤 장모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성경엔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또 그의 집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것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바로 베드로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서 그의 빈자리를 더 큰 은총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당신께
잘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 많은 은총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떤 수도회의 수녀님들이 저를 그 수도회에
입회하도록 무던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더구나 수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 없었는데 자꾸
그러시니 적당한 핑계를 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형 둘이 대학을 못 갔으니 저라도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님이 “네 빈자리는
하느님께서 몇 배로 채워주실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가
사제로 살아보니 정말 맞는 말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몇 배로 저의 빈자리를 메워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집 핑계를 댈 수 없게 하십니다.
어디서 읽은 건데, 남편이 아내와 싸웠을 때, 화해하기 위해 쓸데없이
꽃이나 선물을 사오기 보다는 아내의 친정 부모님께 살짝 용돈을
드리고 오라고 권합니다. 물론 아내가 남편 모르게 시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면 그것만큼 남편을 기분 좋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면 그 배우자의 부모님 또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만큼 잘 키워서 나의 배우자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잘 키워서 당신 제자로 봉헌한 부모님들을
어찌 그냥 보고만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족을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아직 가족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가정 때문에 주저함이 있으신 분들은 걱정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내가 있을 때보다 주님을 따르면 훨씬 더 많은 은총이
가족에게 내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고마움을 잊고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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