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기스칸 어록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 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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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줄 모르는 칭기스칸.
그러나, 지난 1천년 중 인류사에 영향을 준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칭기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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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에 불과한 몽골족은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서로 죽고 죽이며
부족간의 동족상잔이 끊이지 않았던 몽골족을 하나로 통일하여 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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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은 나폴레옹과 히틀러,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했던 면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 후대인 쿠빌라이칸 때에는 중국을 점령하여 그 규모는 두 배 이상 늘어나게 된다.
100만~200만의 인구를 가지고 단시간내에 모두 정복하고 150년 동안이나 그 제국을 이끌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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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명한 판단력.
징기스칸은 글자를 읽을 수 없었으나 현명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바른 판단을 내렸다. 그는 결심권자로서 뛰어난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징기스칸은 기예와 기능이 뛰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그는 여러 지식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독서를 대신했다.
2.몽골인을 단결시키는 비전.
그는 동족들에게 “이 좁디좁은 고원에 갇혀서 동족들끼리 서로 뺏고 죽이고 할 것이 아니라 저 광활한 초원의 푸른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잘 살 수 있고 피흘리는 동족상잔의 싸움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몽골인들의 시선을 지평선 너머의 새로운 세계로 돌려놓았다.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이 제시하는 비전에 크게 고무되었고 거듭되는 승리에 신바람이 나서 흥분과 열광으로 유럽으로 중국으로 질주해갔다.
3.청빈과 공평한 분배.
대신에 칭기스칸은 철저하게 개별 약탈을 금지하였다. 당시 유목사회에서 개별 약탈은 오랜 전통이었기에 이것을 금지하는 칭기스칸의 조치는 한마디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개별 약탈은 조직의 활력과 결속력을 떨어뜨리고 구성원들의 신바람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놀랍게도 칭기스칸은 이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칭기스칸은 항상 검소하게 살았으며 부하들과 똑같이 입고 먹었으며 자신의 것을 부하들과 공유했다.
4.종교의 존중.
징기스칸은 모든 신들을 존중했다. 최초 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불칸산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호라즘 점령후 이맘(이슬람 승려)이 경전을 설교하도록 했다. 장춘(長春) 도인을 사마르칸트에 초청하여 도교 진리를 들었다. 징기스칸은 그 지역의 종교를 존경하여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5.지식인의 존중.
장로, 성직자, 법률박사, 법관 등 수천명에 대해 보호령을 내리고 엄중히 지켰다. 징기스칸은 그 지역의 지식인을 존중하고 종족에 상관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 그래서 그 지역 통치에 활용했다.
6.기술인의 존중.
정복 지역의 기술자를 살려 주고 우대하여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나라 정벌이 공성법과 수공법을 배우고 호라즘 공격시 공성기, 투석 제작 그리고 항아리에 석유를 넣어 던지는 법을 배워 활용했다. 기술자는 절대로 죽이지 않고 살려주고 활용하도록 했다.
7.상인의 존중.
징기스칸은 대상(隊商, 상인)들을 보호하여 오늘날과 같은 유통 체제를 활성화 하도록 했다. 그래서 몽골군이 가는데는 항시 상인들이 들끓었고 몽골군은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었다. 상인들을 보호하여 이슬람 상인들은 징기스칸을 도왔다. 실제 서아시아 정보는 상인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