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다
글 | 스텔라 박
우리는 잠든 상태이고 우리들의 인생은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깨어난다,
우리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만 깨어난다. 우리가 진실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진실이 아니고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해 정말 궁금한 것은 사후 세계가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과연 그것이 존재한들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 비트겐슈타인
호접지몽
바로크 시대의 스페인 작가인 칼데론은 <인생은 꿈>이라는 희곡에서 “한 순간의 꿈이 인생”이라고 말했다.
“인생은 변하는 환영(幻影)일 뿐, 짧은 순간 무대 위에 있다. 사라지는, 아무 뜻도 없는… 이 짧은 인생은 한순간의 잠일 뿐.”... 셰익스피어가 <멕베스>에서 내린 삶에 대한 정의이다. 꿈이 잠자는 가운데의 현상이란 점에서 삶을 꿈에 비유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드비히 홀베르의 <山사람 예프>는 “예프란 사람이 도랑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작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 자기가 가난한 농부였을 뿐이라고 믿게 된다. 다시 남작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사람들이 도랑 옆으로 옮겨 놓는다. 이제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예프는 자기가 남작의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이 꿈일 거라고 생각한다”라는 줄거리다. 거의 서양의 호접지몽이라 할 만한 이야기이다.
인생을 꿈에 비유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야기는 장자의 호접지몽이다. “옛날 장주란 사람이 꿈에 나비가 되었다. 활기차게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혼자 유쾌해 뜻에 맞았다. 자신이 장주인지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깨니 막 깨어난 모습의 장주였다. 장주는 알지 못했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장자(莊⼦, 369?-286BC)의 <제물론(⿑物論)>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 즉 나비의 꿈 우화다. 수백 번도 더 들었고 수백 번도 더 글쓸 때 인용하곤 했지만 나는 이제서야 호접지몽의 진짜 뜻을 이해한다.
꿈 속에서 꿈임을 알다
어느 날 내 꿈 속에 도둑이 들었다. 평소 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집에 현금을 숨겨놓은 적이 없는데, 꿈속의 나는 집안에 현금을 많이 숨겨놓는 사람이었고 어느 날 외출했다 집에 와 보니 서랍장이고 뭐고 다 열려 있고 난리가 났다. 곳곳에 분산해 숨겨놓았던 돈을 모조리 도둑맞은 것이다.
이를 발견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 땀이 났다. 목이 탔다. 몸에 힘이 탁 풀렸다. 꿈인데 뭔 몸의 감각이 그리 많냐고? 그렇게… 왜 그랬을까.
꿈이었지만 평상시의 내가 반복했던 수행이 빛을 발한 것이다. 나는 당황한 순간에, 이미 일어난 것을 붙잡고 고통받기보다 빨리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늘 하던 것처럼 현재 몸의 감각에 집중했다. 꿈속에서 나는 도둑맞아 엉망진창이 된 집 한가운데 서서 혼비백산 영혼이 탈출한 상태로부터 스스로를 수습하고자 몸의 감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알아차림의 뇌가 작동되어서인지 희한하게도 나는 이 상황이 꿈임을 알았다. “꿈인데 뭘 그렇게 당황해?” 꿈 속에 깨어 있던 또 다른 내가 꿈 속에서 당황해 하고 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꿈 속의 나는 “그렇게. 당황할 이유, 하나 없네. 꿈인데...”라며 쿨하게 깨어났다.
우리가 생시라고 믿고 있는 또 다른 꿈
꿈에서 깨어난 우리는 꿈이 꿈임을 안다. 꿈에서도 주인공은 늘 나다. 나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 꿈의 컨텐츠인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면 생시의 내가 있고, 꿈이 꿈임을, 즉 나와 내가 경험하는 세상으로 구성됐던 꿈이 꿈임을 안다.
생시라고 믿고 있는 삶도 마찬가지이다. 삶 역시 또다른 꿈이다. 삶이 꿈임을 아는 순간, 나라고 믿고 있는 자와 그 자가 경험하는 세상이 한 덩어리로 관찰된다. 즉 또 다른 의식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꿈 속의 나는 나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둘로 분리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보면 나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그저 꿈 속에서 펼쳐지는 ‘불이(Non Duality)’의 가상현실일 뿐이다.
나는 나라고 착각하고 있던 자가 된 꿈을 꾸고 있다. 또는 나는 나라고 착각하는 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고 있다. 그러니 그 꿈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드라마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 역시 결국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동안 소위 한 소식 했다는 이들의 법문이나 영성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삶이 꿈”이라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하지만 그 표현을 대할 때마다 삶이 지나고 나면 꿈 같아서, 덧없어서, 빨리 지나가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오해했었다.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메타포로 꿈을 비유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들의 삶은 꿈보다 좀더 리얼하고, 꿈보다 좀더 길고, 꿈보다 좀더 일관성을 지녔다. 하지만 길어도 꿈은 꿈이다.
대승경전인 금강경에도 이를 뒷받침해주는 붓다의 말씀이 있다
“일체의 함 있는 법(유위법)은 꿈같고 꼭두각시·거품·그림자이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내가 태어났고 늙고 죽는다는 연기에 따른 모든 것은 꿈같다는 말이다. “~~ 같다.” 라는 직유법으로 말씀하신 후에는 이것으로 부족해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라고 덧붙이셨다.
그러니 괴로워할 이유가 없다. 꿈에서 강도에게 쫓겨 도망다닌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꿈인 것을 알고 깨어나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해결이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세상
장자의 위대함은 꿈 속의 나비를 주체로 승격시킨 것이다. 우리들이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보자. “꿈에 내가 나비가 되어 날아 다녔어.”라고 말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꿈 속의 나를 여전히 “나”라 여긴다. 하지만 꿈속의 “나”는 “나”가 아니다. 장자는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를 의심했다. 즉 나비에게 꿈 속의 나와 동격의 1인 자격을 준 것이다. 내 꿈에서 나라 착각하고 있는 인물과 나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꿈 속의 각자 하나 하나의 개체를 나라고 믿고 있던 자의 대상의 자리로 떨어뜨릴 수는 없다. 내가 관찰할 대상은 나라 믿고 있던 자와 내가 세상이라 믿고 있던 나 아닌 세계 모두를 아우르는 전체 꿈으로 전환된다.
그 드라마 전체 덩어리가 꿈이다
지금 이 생생한 삶이 결국 꿈이다. 나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이라는 정교한 꿈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 꿈을 꾸면서 꿈인 줄 아는 자각몽처럼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이 무상 고 무아인 꿈임을 지켜볼 뿐이다.
꿈 속에도 법칙이 있고 한계가 있고 개연성이 있고 일관성이 있다. 삶이라는 꿈에서 역시 마찬가지 중력의 법칙,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 그 외 일관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역시 꿈 속의 설정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 꿈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죽음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꿈 속에서 삶이 꿈임을 알 수 있을까. 답은 “있다.”이다. 죽지 않고도 죽는 경험, 즉 철저히 나란 없음을 아는 에고의 죽음이다.
미국의 영성가인 앨란 와츠는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진정한 삶의 비밀이다. 당신이 현재 이곳에서 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결합되라. 일이라고 부르기보다 그것이 놀이임을 자각하라.” 꿈에서 깨어나 꿈을 관찰하면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이 사라진다. 견디기 힘든 사람도 없어진다. 그저 꿈일 뿐이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듯, 즐기면 된다. 꿈이 끝나고 나서도 꿈 속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슬퍼하거나, 화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끝으로 앨란 와츠의 또 다른 통찰의 명언을 소개한다. “삶의 의미는 그냥 사는 것이다. 평범하고 심플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은 삶 앞에 성취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듯이 엄청난 공포 가운데 분주하다.”
깨닫지 않았더라도 항상 기억하면 비슷한 효과가 난다. 삶은 꿈이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매순간 이를 염(念, 마음챙김)하다 보면 행주좌와 인지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홀연히 빛 한 자락이 들어오는 것처럼 삶이 꿈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