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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 거상 김만덕’을 읽고
- 조선의 여성 거상 김만덕’을 통해 본 조선시대 전후기의 상업구조-
20152604 김장미
목차
1. 들어가며
2. 국가가 관리하고 독점으로 운영된 조선초기의 상업
3. 사상의 발전으로 거상이 출현한 조선 후기의 상업
4. 조선 후기 경제가 변화하다.
5. 거상 김만덕에 대하여
6. 나오며
7. 참고문헌
1. 들어가며
열녀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만 조선의 여성인 것은 아니다. 의녀 대장금이도, 궁녀도, 기녀 황진이도, 상인 만덕도 모두 조선의 여성이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조선 사회에서도 여성들은 참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왔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농사짓던 땅은 못쓰게 되고,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포로로 끌려 갔다. 양반 평민 가릴 것 없이 전쟁의 상처는 무척 컸다. 하지만 여성들도 그 그늘에서 숨죽여 살지만은 않았다.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의 변화와 함께 남성 중심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여성도 생겼고, 나아가 불평등한 사회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생겼다. 조선 후기에는 백성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풍속화가 많이 그려진 풍속화에는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전문 직업을 가진 여성들도 등장했는데 의술을 배운 의녀, 전문 관리직이라 할 수 있는 궁녀, 예술을 배우는 기녀, 장사에 나선 상인들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평민이나 가장 하층인 천민 여성들이 전문직 일을 했으나 그들의 여성상도 조선시대의 하나의 인물됨이었다.
조선은 상업에 대하여도 초기에는 규제를 강화하여 규모가 큰 것은 점포의 크기, 상품의 종류, 수량, 가격 등을 국가가 통제하였다. 서울의 중심가인 운종가(雲從街)에는 규격이 통일된 시전(市廛)이 설립되어 90여 종의 물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였다. 그 중에서도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어물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렀다. 이들 상인들은 특정상품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받는 대신, 국가에 대하여 관수품(官需品)을 바쳐 납세에 대신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업이 크게 일어나고 화폐가 보급되면서 난전(亂廛)이라 불리는 사상(私商)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이래로 서울에는 이현(梨峴)·칠패(七牌)·종루에 새로운 상가가 번창하여 시전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그리고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貢人)들의 상업활동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관청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부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세곡운송을 통해서 교역로를 확보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이 한강을 중심으로 미곡과 어물의 수송과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또 개성의 송상(松商)들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인삼을 판매하며 대외무역에도 깊이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 중 사농공상의 조선사회에서 상인의 역할을 하였던 김만덕을 통해 조선 전후기의 상업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2. 국가가 관리하고 독점으로 운영된 조선초기의 상업
조선의 태종은 한양으로 천도하고 개경의 상인들을 이주시켜 종로 거리에 2600여 칸의 시전을 설치했다. 서울의 시전은 16세기 이후 명주와 종이, 모시, 삼베, 무명, 어물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했는데 이 여섯 가지 물품으로 인해 후에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시전 상인들은 기관에서 허용을 해서(관허) 상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어용상인(궁중이나 관청에 물건을 대는 상인)이었다. 이들은 왕실아l나 관청에 관수품을 공급하는 시역(市役)을 부담했지만 시전에서의 독점적 판매권을 인정받았다.
‘시전은 일반 백성이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고 조정이나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중히 여기는 곳’이라고 만기요람에 언급이 되어 있을 만큼 시전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경시서(세조 12년 에 평시서로 개칭)라는 기관을 통해 시전을 관리했다. 경시서는 시전에서 사용하는 자, 말, 저울 등의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 조절을 담당했다.
15세기 후반에는 전라도에서 장시가 등장하여 점차 3남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를 장시 또는 장문이라 했는데 당시 조선은 농업 중심국가였기 때문에 농민이 농업을 등지고 상업에 몰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 장시에 많은 백성들이 모여 조직화 되는 것을 염려하여 장시의 발전을 억압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시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으며 이는 결국 며칠에 한 번씩 열리는 정기 시장으로 발전하여 16세기 중반에는 전국적으로 장시가 확대된다.
3. 사상의 발전으로 거상이 출현한 조선 후기의 상업
16세기 이후, 한양으로 유입된 인구가 대부분 상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왜란으로 시전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자 한양에서는 난전이 늘어나게 됐는데 시전 상인은 이렇게 늘어난 난전으로 인해 이익이 줄어들었고 이를 없애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조선 정부도 왜란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시전 상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시전상인들은 난전을 배재할 수 있는 독점적인 영업권을 원했고 조선 정부는 시전에 소속되지 않은 상인의 활동을 금지하고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허용했다.
또한 대동법 시행에 따라 공인들이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상(私商 : 개인적인 상행위)의 침해를 받지 않는 가운데 특허 상인으로 날로 번창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금난전권 외에도 도고는 독점적인 도매 상업이 성행하였다. 도고 상인은 상인, 난전(서울의 사상), 공인, 지방의 사상 가운데에서 출현했는데 박지원 연암집에 나오는 허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금난전권과 도고들이 횡포하는 가운데 에서도 서울 난전은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금난전권이 시전들의 배만 불리고 정부가 원했던 한양의 활발한 물자 유통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을 고려하여 정조 15년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신해통공’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시전 상인들은 자유롭게 관상과 경쟁하면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이현(梨懸 : 오늘의 동대문), 칠패(七牌 :오늘의 남대문), 종루(종로)에서는 국내외의 다양한 물품들이 일반 시민을 상대로 거래되었다.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유통망에는 중간 도매상인도 등장하게 되는데, 송파, 이현, 누원(노원), 칠패 등 시장을 상대로 하여 물건을 떼다가 지방 장시에 공급하는 중도아가 등장하였다.
사상들은 한 자리에 앉아서 판매하는 난전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방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들을 교역하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여 판매를 확장하기도 했다. 또한 관에서만 다뤘던 대외 무역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서울의 경강 상인, 개성의 송상, 동래의 내상, 의주의 만상, 평양의 유상 등은 대표적인 거상으로 부상했다.
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장시간의 일부는 상설시장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통합과 폐합 과정을 반복하면서 대형화해 가는 동시에 전국적인 시장권을 확대해 갔다. 또한 장시가 발전함에 따라 물류의 원활한 이동을 위한 도로도 확충되어 충청도 강경, 전라도 전주, 경상도 대구, 마산, 안동, 황해도 은파, 함경도 원산, 강원도 대화(평창) 등이 새로운 상업 도시로 성장해 갔다.
또한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하던 것에 불과하던 포구에서의 무역도 발달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는데 이 규모는 장시보다 훨씬 컸다. 경강 상인은 선박을 이용하여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을 한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또한 이런 포구와 같은 교통 중심지에는 상품의 위탁 판매나 창고업, 화물 수송업과 금융업 등 여러 기능을 겸하는 중간 상인인 객주와 상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여각이 발달하기도 했다. 또한 타인간의 상행위 중개 및 토지와 가옥의 매매, 임차, 전당의 중개를 직업으로 삼는 거간 등 중간 상인들 역시 성행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전란으로 인해 전답을 잃은 농민들이 임노동이나 상업에 많이 종사를 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이 꽃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조선의 경제가 각 지방에 묶여 있던 것에서 전국구 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양민이 부를 축적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오게 되었다.
4. 조선 후기 경제가 변화하다.
임진왜란 이후 파괴된 농업 생산력의 회복과 증대를 위해 농지 개간과 농법 개량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농지 개간은 양반 지배층을 중심으로, 농법 개량은 농민층에 의해 진행되었다.
양반 지배층은 농민을 모집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그 대가로 농민에게 소작권을 지급했다. 처음에는 일정한 비율로 소작료를 내는 타조법에 따라 소작 농민이 지주에게 수확량의 절반을 소작료로 납부했다. 이에 소작 농민들이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소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게 되었다. 수확량의 절반을 내던 소작료도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납부하도록 하는 도조법이 확산되면서 소작 농민들은 지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농경을 하 수 있게 되었다.
도조법은 조선 후기의 지대법으로, 수확량의 1/2을 세금으로 바치는 타조법과는 달리 수확량의 1/3 정도를 지주에게 바치므로 소작인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도조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한 수확량을 바치는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도조법의 시행은 지주와 작인의 관계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서 벗어난 계약적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경작지 확대에 어려움이 있었던 농민들은 농법 개량 등과 같은 농업 기술 향상을 통해 생산력을 증대하였다.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한 농법은 이앙법(모내기)이었다. 이앙법으로 김매기의 수고를 덜 수 있었고, 수확량이 늘어났으며, 벼와 보리의 이모작도 가능했다. 특히 이모작을 하는 경우 보리 농사는 대체로 수확물을 농민들이 모두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이앙법은 봄 가뭄에 취약하였기 때문에 가뭄 피해를 우려한 정부가 모내기법을 억제했지만, 농민들은 제언이나 보 등 수리 시설을 확충하면서 모내기법을 확산시켰다.
밭농사는 16세기 후반 이후 한 땅에서 서로 다른 작물을 1년에 두 번 경작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농민들은 밭을 낮게 파인 부분인 고랑과 높게 올라온 부분인 이랑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보리는 고랑에, 다른 작물은 이랑에 파종했다. 이러한 농법을 견종법이라 한다. 견종법이 가능했던 것은 대형 쟁기를 사용하여 밭고랑을 깊이 팔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농법 보급으로 인하여 가뭄과 서리를 방지하고 노동력도 절감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농민들은 쟁기 사용 확대, 거름주기의 개선, 농기구 개량 등으로 수확량을 증대시켰다.
모내기로 노동력을 덜게 된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늘려 광작에 나섰다. 지주는 대부분의 농지를 작인에게 빌려주고 일부만을 직접 경영했지만, 광작이 가능해지자 빌려 준 토지를 회수하고 노비나 머슴을 부려 직접 경영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광작의 유행으로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했고, 지주도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농민은 경작지를 잃고 도시로 나가 영세 상인이 되거나 임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18세기 경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쌀, 인삼, 담배, 채소, 약재의 재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해졌다. 일부 농민들은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 농가 수입을 올렸다. 목화, 담배, 채소, 약재와 인삼 등을 많이 심었는데, 가장 인기 있는 상품 작물은 인삼과 담배였다. 18세기에 재배법이 개발된 인삼은 청과 일본에서 수요가 높아, 개성을 중심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각지에서 널리 되었다. 기호품 혹은 약재로 취급되던 담배 역시 전국적으로 재배되었다. 17세기 초 일본에서 전래된 담배는 농촌의 소득 증대에 이바지했다. 서울 근교의 왕십리, 송파 등지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행했으며, 쌀이 많이 거래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도 활발했다.
농법 개량, 상품 작물 재배, 광작 경영 등을 통해 소득이 늘어난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했고, 지주도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은 부세와 고리대의 부담 등으로 토지를 헐값에 팔아 빈농으로 몰락해 갔다. 이런 농민들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금 노동자가 되었으며, 일부는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가 임금 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그 결과 농민층의 계층 분화 현상 나타났다.
조선 후기의 수공업 활동은 관청이 주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민영 수공업이 발달했다. 수공업자들은 국가에 장인세를 바치고 자유롭게 수공업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상품 경제의 발달로 도시 인구 늘어나면서 수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이에 주문 생산이 아닌 시장에 판매하기 위한 생산이 활발해진다.
조선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업도 발달했다. 정부는 시전 상인에게 점포세와 상세를 내게 하고,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도록 했다. 대신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인 금난전권을 인정하고, 물가를 조정하는 관청인 평시서를 통해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시하거나 통제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농촌에서 이탈한 농민이 도시로 몰려들어 이현(동대문), 종루(종로), 칠패(남대문) 등에 사상에 의한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시전 상인은 정부로부터 얻은 금난전권을 앞세워 사상들의 상업 활동을 금지했다. 시전 상인의 탄압 속에서도 사상들은 장시와의 연결을 토대로 성장해갔다. 17세기 후반 사상들은 이현과 칠패 등에 근거지를 마련했으며, 도성 외곽에서 상권을 확대해갔다.
대규모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공인들과 서울 및 중 도시의 사상들은 도고 행위로 물품을 거래했다. 특히 사상들은 전국의 지방 장시를 연계하여 물화를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었다. 지방 도시에서도 거상이 등장했다. 서울의 경강상인, 개성의 송상, 동래의 내상, 의주의 만상, 평양의 유상 등이 유명한 거상들이었다. 이들은 국제 무역에도 참여하여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송상은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인삼을 재배•판매하였으며, 대외 무역에도 종사하여 부를 축적했다. 경강상인은 한강을 근거지로 대동미 등 정부 세곡과 한성 지주들의 소작료 운송을 주도하며 거상으로 성장했다. 경강상인의 활동으로 뚝섬에서 양화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루터가 생겼다. 경강상인은 자본력, 상업 조직망,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며, 일부는 대외 무역에 종사하여 상업 자본을 축적해 갔다. 의주의 만상은 청과의 사무역을 통해 성장했고, 내상은 동래를 중심으로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 개성의 송상은 인삼과 포목의 도고 상업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고, 의주와 동래 상인을 매개로 청•일 간의 중계 무역에도 종사하여 부를 축적했다.
조선후기에는 사상의 활동이 늘어나 전국적으로 장시가 발달했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에 1,000여 개소에 달했다. 18세기 말 광주 송파장, 은진 강경장, 덕원 원산장, 창원 마산포장 등은 상업의 중심지로서 전국적인 유통망을 연결했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렸으며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교역하였고, 보부상들은 여러 장시를 돌면서 들른 지역의 물품을 공급하였다. 장시는 지방민의 교역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 교환과 축제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장시는 인근 장시와 연계되어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였으며 일부는 상설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장시에서 활동한 보부상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보부상단이라는 조합을 이루었다. 보부상은 봇짐장수와 등장장수를 말한다. 이들은 상인 조합을 결성하고 여러 장시를 돌아다니며, 엄격한 규율 밑에서 상행위를 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자기 자본을 이용하여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한 후 직접 판매하는 수공업자들이 늘어났다. 이들이 생산한 제품은 시장권이 통합되어 수요가 커지면서 보부상을 통해 전국의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 역할을 하던 포구가 조선후기에는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선상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전국 가지의 포구는 하나의 유통망을 형성해 나갔다. 선상은 선박을 이용하여 지방의 물품을 사와서 포구에서 거래했는데, 대표적인 선상으로 경강상인을 꼽을 수 있다.
포구나 지방의 큰 장시에서 상행위를 주도한 상인은 객주나 여각이었다.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이 물품을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을 위탁 받아 다른 상인에게 팔거나 매매를 주선했다. 이들은 부수적으로 상인의 숙박, 화물의 보관, 운송 등의 영업도 했으며, 자금 대부와 어음 발행 등 금융업까지 수행했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장시의 발달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힘입은 것이었고, 유통 경제의 발달은 다시 농업 생산력 발달을 자극했다. 이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사회가 근대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 거상 김만덕에 대하여
‘5만원권’이라는 새로운 고액권 화폐 발행이 결정된 2007년 한국에서는 화폐도안 대상을 두고, 국민 여론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이 때 제주도에서는 ‘김만덕’이라는 18세기 후반의 여성을 넣자고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조선시대의 여인이라고는 인수대비와 장희빈, 혜경궁 홍씨, 명성황후 등 왕실의 여인과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등만 알고 있던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 김만덕.
1739년 제주에서 태어난 김만덕은 부모의 죽음으로 관기가 됐다. 그녀는 제주의 특산물을 내다 팔아 시세 차익을 남기거나 여러 객줏집을 운영하면서 거상이 됐다. 부를 쌓아 관기 신분에서 벗어난 뒤에도 근검절약하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도왔다. 1795년 제주 백성 1만8천여명이 굶어죽는 흉년이 닥치자 김만덕은 "재물은 어차피 흐르는 것"이라며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곡식 450석을 관아에 바쳤다. 더 적은 곡식을 바친 양반들은 조정으로부터 벼슬까지 받았으나 김만덕의 선행은 알려지지 않았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려 했지만 그녀의 소원은 상금도, 벼슬도 아니었다. 그녀의 두 가지 소원은 “서울에 가 임금님의 용안을 우러러보는 것, 그리고 조선인의 마지막 꿈인 금강산에 가보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에는 출륙금지법으로 인해 허가증이 있어야 제주를 떠날 수 있었고, 여인의 경우는 아예 제주를 떠날 수 없었으며 육지인과의 혼인도 금지됐다. 그녀의 소원은 제주 출신, 여성, 관기라는 굴레에 얽매였던 여인의 세상을 향한 당찬 외침이었다.
제주의 거상
1739년, 평민의 딸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한 김만덕은 기생의 몸종으로 의탁하였고, 다시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가무를 익혀 제주도에서 한때 가장 유명한 기생으로 살았다.
그러다 성인이 된 뒤 관아에 신분회복을 요구한 후 상인의 길을 걷게 됐는데,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조선 시대. 여성 상인이 장사로 돈을 버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였다. 하지만 김만덕은 전통적인 산업인 농업 이외에 수공업이나 상업, 유통 경제에 대한 인식이 깨어나던 18세기 변화의 바람을 타고, 상업과 유통 경제의 발판인 포구 무역과 객주업에 뛰어들어 외부에서 반입되는 쌀이나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금을 적절한 시기에 사고 파는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제주에서 나는 물품이 육지인 강경까지 가는 데에 유일한 방법이었던 나주나 영암에 도착해 말을 타고 가는 대신 칠산 바다라는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배로 한번에 강경까지 물건을 운반하는 유통의 혁신을 통해 제주도 최고의 여성 갑부가 됐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전직 기생이었던 김만덕이 만천하에 알려진 계기는 따로 있다.
전 재산을 기부해 제주도민들을 살려내다
1792년 제주도는 잇따른 흉년과 태풍의 피해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다. 설상가상으로 1794년, 바람과 해수 피해를 입자 제주 목사가 구휼미 2만 섬을 조정에 요청했는데, 이듬 해 5천 섬의 구휼미를 실고 제주로 향하던 배 12척 가운데 5척이 난파되는 악재가 발생했다. 결국 기근으로 인해 제주 사람 17만 명이 목숨을 잃고, 백성의 시신이 길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여가자 김만덕이 나섰다. 유통업으로 모은 자신의 전 재산으로 뭍에서 쌀 500섬을 사들인 뒤 굶주린 제주 사람들을 구한 것인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주도에는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다”라는 칭송가가 울려 퍼졌고, 제주목사가 이를 조정에 알리니, 정조 임금이 만덕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분부를 내렸는데, 만덕의 입에서 나온 소원은 신분 상승이나 세금 면제가 아니었다. ‘한양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대궐을 보고 금강산까지 구경한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한 것이다. 제주도민의 섬 밖 출입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는 당시의 법을 넘은 당당한 만덕의 소원을 정조는 기꺼이 들어주었고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그리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관공서가 만덕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자 만덕이 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여성으로서 놀라운 일을 행한 그녀를 칭송하였고, 만덕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정승 채제공은 그녀의 일생담을 기록한 <만덕전>을 남겼고 당대 문장가인 정약용과 박제가는 만덕을 위한 시를 썼는데, 그렇게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여성 CEO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김만덕은 1812년 양아들에게는 살아갈 정도의 적은 재산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제주에는 하나의 속담이 생겨났다. ‘개같이 벌어서 만덕처럼 쓴다
김만덕으로 지금도 제주도는 김만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김만덕 축제를 열고, ‘나눔 쌀 천 섬 쌓기, 만 섬 쌓기’ 등의 행사를 벌이고 있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을 가진 동시에 혁신적 사업가로, 선구적 기부가로 우뚝 선 김만덕은 허난설헌, 신사임당 등 반가의 여인과는 또 다른 여인상을 제시하였다. 그녀로 인해 조선시대 여성사가 단편적이지 않고 풍부해질 수 있었다. 또한 조선 중엽, 당시 유배지로 여길 만큼 먼 땅이었던 제주에서 여성 상인으로 활약한 김만덕. 자신의 전 재산을 굶어 죽어가는 제주민들에게 바쳤던 300년 전의 김만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상도란 무엇인가, 사람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6. 나오며
조선 시대 제주도 여성은 제주도를 떠날 수 없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여성상인 만덕은 1796년 관리의 안내를 받아 가며 제주도를 떠나 한양까지 왔다. 만덕은 왕과 왕비를 만나고 상으로 비단과 장신구도 받는다. 만덕은 한양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필자는 어떻게 제주도 여성 만덕이 한양에 올 수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본 글을 써내려갔다 만덕의 어린 시절은 김만덕은 영조 15년(1739년)에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 씨 사이에서 태어나. 1750년 전국을 휩쓴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기녀의 수양딸이 되고. 수양어머니는 만덕이 일도 잘하고 노래와 춤, 거문고도 잘하자 만덕을 기녀로 만들었다. 기녀는 천인 신분으로 기적(기생들을 등록해 놓은 대장)에 이름이 오르면 빠져나오기 어려웠는데 만덕은 스물이 넘자 관가에 찾아가 자신은 본래 평민 여자이니 기적에서 빼 준다면 돈을 벌어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만덕의 진심은 받아들여졌다. 만덕은 기생에서 벗어나 그동안 모은 돈으로 객줏집을 차렸다. 고아에서 수양딸로 수양딸에서 기녀로 기녀에서 상인으로의 파란만장한 삶을 거쳐 그녀는 삶의 지혜를 터득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새로운 여성상의 하나뿐만 아니라 거친 삶을 살아온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측면으로서 김만덕을 주목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덕은 제주도 특산물을 적당한 값으로 사 두었다가 육지 상인들에게 다른 데보다 싸게 팔았다. 상인들은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만덕의 객줏집으로 모여들었다. 또 기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반집 여성들이 좋아하는 옷감, 장신구, 화장품을 팔았다. 자연스레 만덕의 객줏집에는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규모가 큰 무역 거래소가 되었다. 만덕의 재산은 날로 늘어나 소문난 부자가 되었다. 만덕은 늘 돈을 벌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그때가 왔다. 1792년에서 1795년까지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식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나라에서 구호 식량을 보냈지만 풍랑 때문에 그마저도 얻을 수가 없었다. 제주도 사람들의 처지는 말할 수 없이 어려워졌다. 이때 만덕은 상인들에게 돈을 주어 뭍에서 곡물 500석을 사 오도록 했다. 500석을 실은 배가 무사히 제주도에 들어왔다. 만덕은 이 중 50석을 친척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주고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청에 보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도록 했다. 이를 제주 목사는 이 일을 임금님께 알렸다. 남성이라면 벼슬을 내렸겠지만 여성이라 벼슬을 내릴 수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여성이라도 남성과의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상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김만덕에게 소원을 물어보고 어려운 일이더라도 특별히 들어주어라." 제주 목사는 만덕에게 임금님의 뜻을 전하고 소원을 물었다. "제게 세 가지 소원이 있사온데 첫째는 한양에 가는 것이요, 둘째는 임금님을 뵙는 것이고, 셋째는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 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정조는 만덕을 내의원 의녀로 임명하여 서울로 오게 했다. 그때 만덕은 57세였다. 한양에서 반년 동안 머물렀다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제주도로 돌아갔다. 평생 섬을 벗어난 적 없는 만덕은 한양 땅에 닿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금강산을 구경하고 임금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만덕의 소원, 참 당당하다고 사료된다. 즉 열녀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만 조선의 여성인 것이 아니야. 의녀 장금이도, 궁녀도, 기녀 황진이도, 상인 만덕도 모두 조선의 여성이라는 것이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조선 사회에서도 여성들은 참 다양한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인 것이다. 만덕 말고 다른 여성들도 장사를 한 사람은 매우 많았다. 만덕이 객줏집을 열어 열심히 장사한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여성들이 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서울 종로 거리에 큰 시장이 있었는데 이를 시전이라고 한다. 시전에는 '여인 전'이라고 해서 여성들이 직접 장사를 하는 가게가 있었다. 여인 전에서는 과일, 엿이나 사탕, 채소, 생선, 젓갈 같은 먹을거리와 연지와 분, 바느질 도구 같은 여성들이 쓰는 물건을 팔았다. 또한 가게를 차리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서 파는 여성들은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여성들은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며 가정 경제에서 큰일을 맡았다.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이 점점 더 발전했고 화폐도 널리 쓰였기에 여성들도 장사를 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이런 조선시대의 시대상과 새로운 여성상을 거상 김만덕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이후의 사회의 변동과 맞물려 장시가 성행하고 상업의 중요성이 이전과 비해 확연히 올라간 시대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는 인물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요목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이로써 성리학과 농업의 국가 조선에서 시대 전후기의 상업의 모습과 그 속의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7. 참고문헌
안대회ㆍ이종묵ㆍ정민의 매일 읽는 우리 옛글 80 (만덕전 外) , 채제공 外,안대회, 이현일 역 | 민음사 | 2016.10.26
거상 김만덕,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정창권 저, 푸른숲, 2006.03.29.
자본주의 맹아론과 조선후기 상업 변동: 강만길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을 중심으로, 고동환, 한국사연구, 12/2009, Issue 147
만화 『객주』로 알아보는 조선 말 상업 사회, 전병철, 중등우리교육, 09/1996
공인문기(貢人文記)를 통해 본 조선후기 여성의 상업 활동과 소유의식, 한효정, 조선시대사학보, 06/2014, Volume 69회, 전병철, 중등우리교육, 09/1996
서평(書評) : 『조선시대 시전상업 연구』, 고동환, 경제사학, 2013, Volume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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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구의 책을 읽었는지, 서지사항이 필요함.
사회상이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데도 단호하게 행동했던 김만덕을 통해 많은 교훈을 다시 얻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