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약탈혼 掠奪婚 .
그 부족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 흉노는 후한과 가까이 지내는 친한 정책 親漢 政策을 추구하다 보니, 장성 이남은 침범할 수가 없어,
혼인 적령기 適齡期의 처녀가 부족하였다.
노총각 병사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럴 거 같으면 북 흉노도 같은 종족인데, 용맹한 북쪽으로 월북 越北하겠다”라는
병사도 상당수 있다는 소문마저 나돈다.
그래서 일부 천부장들은 궁여지책 窮餘之策을 내놓았다.
남벌 南伐을 감행하여 한족의 아녀자를 납치하였던,
북 흉노를 역으로 침공하여 부녀자를 재납치하곤 하였다.
일종의 약탈혼 전쟁이다.
동족상잔 同族相殘이 벌어진다.
드디어 후한군이 바라던,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북침 北侵을 감행하는 그 뒤 배경 背景에는 북 흉노의 최고 무장 武將인 묵황야차를 물리친
막북무쌍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기를 사용하든, 맨손 격투기로 대결하든, 별호 그대로 뛰어난 무용 武勇으로 당대 當代에는 상대할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무술의 대가 大家, 막북무쌍 한준 소왕이 자기들의 등 뒤에
의연 依然하게 큰 바위 처럼 버티고 있었다.
남 흉노의 병사들은 든든한 천하무적의 막북무쌍 소왕을 믿고 북침을 감행한다.
공략 지역은 주로 고비사막 동쪽 지역으로 진입하여, 헨티산맥 남쪽 부근을 노리고 원정을 떠난다.
헨티산맥 지역은 남 흉노와 가장 가까운 근거리 지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악명 惡名 높은 묵황야차와 마주칠 가능성이 희박 稀薄하기 때문이다.
고원의 중심부 항가이 산맥에 주둔 駐屯하는 묵황야차는 별호 그대로 남 흉노와 한 군들에게는
야차 夜叉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로 각인 刻印 되어있었다.
비록 막북무쌍 한준 소왕이 지난 결투에서 승리하였다 하더라도 묵황야차,
그 별호는 남 흉노의 병사들에게는 꿈에서라도 마주칠까, 근심되는 거대한 괴수 怪獸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렇게 서너 번의 북침으로 아녀자 이 백여 명을 납치하여 전공 戰功을 세운
보육고와 고적타 천부장은 쏠쏠한 재미를 봤다.
이에 사기가 오른 남 흉노 측에서는 이제 군단 軍團을 꾸려 대규모 공략 攻略을 계획한다.
약탈혼 掠奪婚은 흉노족의 오랜 전통이다.
약탈혼은 남녀 성비 性比가 맞지 않는 흉노의 한 풍습 風習이었다.
초기부터 흉노 부족 간에 이루어져 왔으며, 인근의 다른 종족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당연한 연래 행사처럼 여기고 있었다.
서로 간에 죄의식도 크게 느끼지 못한다.
그런 까닭은,
땅은 넓은데 사람 수가 적으니, 험준한 산악지대의 오지 奧地에 고립된 부족 같은 경우는 평생,
다른 부족 사람들을 몇 명 만나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흔하였다.
그러니 근친혼 近親婚이 성행하게 되고, 그사이에 태어난 2세들이 근친혼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이런저런 심각한 유전병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뒤늦게 간파 看破하게 되었다.
다른 부족과 결혼하면 그런 근친혼의 부작용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충 넘어가기도 하는 풍습 風習이 생겼다.
초기에는 ‘과부 보쌈’해 오듯이 병장기도 없이, 몇몇 사람이 가볍게 옆 부족의 부녀자들을 납치해 오곤 하였으나,
그 보복성으로 인하여 약탈혼으로 부녀자를 납치하는 그 방법과 과정이 날이 갈수록 과격해져,
드디어는 병장기를 사용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족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험악한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약탈혼으로 인하여 부족 간의 전투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러니,
침공 해오는 상대 부족보다 힘이 약하면, 아녀자를 빼앗기는 피해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무술 연마로 스스로 힘을 키우고 활로, 창으로 무장 武裝하는 것이다.
자기의 가족. 자신이 속한 부족은 자기 스스로 지켜내는 도리 道理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러한 악습 惡習은 먼 후일, 징기스칸 대 代까지 이어진다.
테무진도 약탈혼의 희생자이다.
생모 生母 호엘룬은 처음에 메르키트족에 시집갔으나, 테무진의 부친 예수게이가 호엘룬의 미모에 반하여
약탈해 왔으며 후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메르키트 부족은 예수게이의 장남,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약탈혼의 명분으로 다시 납치해 간다.
이처럼 대 代를 이어가며 정신적인 고통과 가족이 이산 離散되는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더구나, 약탈혼으로 야기 惹起된 사건으로 인하여,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Tatar) 부족으로부터
독살 毒殺 당하였고, 어린 테무진은 자라나면서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그 여파 餘波로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후계자 문제까지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부인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 납치되어 1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다.
전투에서 이기고 보르테를 다시 데리고 왔으나 아홉 달 후,
장남 長男 주치(Juchi, Jochi)를 낳았다.
‘주치’란 이름은 징기스칸이 직접 지어주었는데, 몽골어로 ‘손님’이란 뜻이다.
초원에서는 손님은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기도 하지만,
아마 자신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는 의미도 내포 內包된 것 같다.
그러나 약탈혼이나 과객 혼의 관습이 있는 흉노인들은 지난 과거를 구태여 따지거나 캐묻지 않고,
부인이 낳은 아이는 당연히 자기의 자식으로 여긴다.
하긴, 자기의 힘이 약해서 아내를 다른 부족에게 빼앗긴 것이니 그 책임론을 따진다면,
먼저, 본인 자신을 책망 責望하여야 할 것이다.
주치는 자라나면서 메르키트족(靺鞨族 말갈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의혹 疑惑으로 인하여
형제들 간에 불화 不和가 깊었다.
보르테는 다 같이 자신의 배를 앓아가며 낳은 귀한 자식들인데, 형제간에 서로 다투니 참으로 괴롭다.
이런 애매한 상태 때문에 후계자 문제 때 다른 형제들과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 둘째인 차가타이와의
대립이 심했다. 형을 보고 “메르키트 놈의 오줌”이라며 대놓고 모욕 侮辱을 주었을 정도다.
그 후 유럽 원정을 떠난 주치는,
“연합하여 적을 공격하라”라는 아버지의 명령도 어기고 결국, 유럽 원정에서 돌아오지도 않는다.
이에 분노한 아버지 칭기즈 칸이
“주치를 직접 토벌 討伐하겠다”고 주변에 원정 선포 宣布까지 했었다.
곧, 부자 父子 지간에 전쟁이 벌어질 상황이라, 옆에 있던 보르테가 며칠을 두고 애원하고
말려서 겨우 진정시켰다.
이래저래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은 주치는 울화병 鬱火病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주치가 정벌한 러시아 부근 영지 領地는 그의 아들들이 나누어 가졌는데,
맏아들인 오르다는 백장한국(白帳汗國)을 세웠으며,
둘째 아들인 바투는 킵차크 한국(金帳汗國)을 세웠다.
이러한 결과만 본다면, 말갈족이 유럽과 러시아까지 진출. 정복 한 것이다.
장남과 장손 長孫이 유럽에 뿌리를 내리고 귀국하지 않으니, 후계자 문제가 대두 擡頭되었다.
결국, 확실한 후계자를 내세우지 못하고 징기스칸은 운명 殞命한다.
약탈혼은 대를 이어가며 그의 가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상당수의 흉노인들이 겪는 악습 惡習이다.
징기스칸은 의형제였던 자무카(札木合)와 퉁구스 부족을 격파시키고 몽골을 통일시켜,
대칸 (大汗)으로 즉위하고 얼마 후, 약탈혼을 국법 國法으로 엄격히 금지 禁止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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