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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은 언제나 오해나 반발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커피가 그랬다. 16세기 에티오피아에서 이스탄불을 거쳐 유럽에 유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커피를 이슬람의 와인이라고 배척했다. 특히 당시 교황은 커피를 사탄의 음료라 규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상류층에서 커피가 소비되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여자들에겐 커피마시는 게 금기였다. 이 같은 사실은 바흐의 커피칸타타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이 곡은 커피마시기를 좋아하는 젊은 딸 리센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 쉬렌드리안 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그의 딸에게 커피는 해로우니 마시지 말라고 수없이 당부하지만 딸은 ‘아버지, 너무 그렇게 까다롭게 굴지 마세요! 커피를 하루에 세 잔 이상 마시지 못하면 전 고통에 차서 쪼그라들고 말거예요.’ 라며 들은 척도 안한다. 나아가 ‘아. 커피 맛은 정말 기가 막히지. 키스보다도 더 달콤하고, 맛 좋은 와인보다도 더 부드럽지. 커피, 난 커피를 마셔야 해. 내게 즐거움을 주려거든 제발 커피 한잔을 따라줘요!’ 라며 커피 예찬론을 편다.
아버지는 딸에게 커피를 계속 마시면 산책도 하지 못하게 하고 집에 가두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커피를 안마시면 예쁜 옷을 사주겠다고 달래 보기도 하지만 딸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커피만 마시지 않는다면 곧 결혼을 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자 딸은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며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신랑감을 물색하는 동안 딸은 아버지 몰래 방을 붙인다. 즉, 자기에게 청혼하려는 자는 언제나 커피를 마셔도 좋다는 약속을 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바흐는 이 코믹한 칸타타를 통하여 고루하고 보수적인 성격의 구세대를 대표하는 아버지와 명랑하고 개방적인 성격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딸의 대화를 통하여 둘의 차이점을 잘 대비시켜 주고 있다. 이 칸타타의 초연은 콜레지움 무지쿰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커피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딸의 재치로 인해 모든 사람이 웃음을 띄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딸에게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얘기지만 그 당시 사회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5세기경 콘스탄틴노플에 카페가 처음 생기고 그 후 규모가 커지면서 실내 장식도 화려해 졌으며 손님들을 즐겁게 하고자 각종 게임 및 음악, 댄스홀까지도 마련되었다고 한다. 금욕을 으뜸으로 삼았던 이슬람세계에서 신도들이 커피를 마시고 춤과 음악에 빠져 쾌락을 일삼게 되자 카페가 일제히 폐쇄를 당하게 되고 커피를 마시다가 들키면 태형과 같은 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억압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커피는 더욱 유명해지게 된다.
커피는 잠을 쫓는 각성 작용이 있어 군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터키가 오스트리아에 진출했다가 패하면서 군용품을 버리고 갔는데 그곳에 커피도 있었다. 당시 큰 공을 세웠던 콜시츠키란 병사에게 이 커피를 넘겨주었는데 그는 이 커피를 갖고 그의 집을 카페로 만들었다. 이것이 비인에 생긴 최초의 카페이다. 17세기에는 여타의 유럽에도 카페가 문을 열게 된다. 1615년 베니스, 1644년 마르세이유, 1651년 런던에 카페가 각각 탄생했다.
커피가 유럽에 전파된 뒤에도 커피금지에 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커피가 너무 빠르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움직임은 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일부 가톨릭 지도자는 와인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슬람교에 불만을 갖고 이슬람교도가 마시는 커피를 마셔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커피를 마셔도 되는가를 두고 여러 논쟁이 이어 졌으나 16세기 교황 클레멘트 8세에 이르러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신자들이 이교도의 음료인 커피 음용을 금지해 달라고 청원을 하자 어느 날 교황이 직접 마셔보았는데 그 맛에 반하였다. 그래서 ‘악마가 마시는 거라지만 참으로 맛있도다! 이 맛있는 것을 이교도만 독점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라며 커피에 세례까지 주고 음료로 허용하는 칙령까지 발표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커피는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는데 처음에는 남성들만 즐겼다고 한다. 그것은 커피가 여자와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칸타타에서 아버지가 딸의 커피음용을 만류한 것도 이런 사유로 짐작된다.
카페에 남성이 모여 들며 귀가 시간이 늦어지자 가정주부들이 왕에게 카페를 폐쇄해 달라는 청원을 넣게 된다. 커피가 남성의 정력을 상실케 하여 부부 생활을 방해하고 가정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남성들은 반발하여 이는 오해이며 커피는 오히려 부부 생활에 도움을 준다는 반박문을 올리고 그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커피애호가였던 왕은 여성들의 주장을 기각하였고 카페는 살아남게 된다. 그 후 전 세계에 걸쳐 커피가 보급되며 이제는 여자들도 즐길 수 있는 대중 음료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건 고종황제 때다. 고종은 1895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며 커피를 마셨다. 그 후 독일인 손탁 여사가 중구 정동에 커피점을 차린 것을 시작으로 개화기와 일제 시대에는 명동과 충무로, 소공동, 종로 등에 자리를 잡았다.
나의 어머니도 1950년 후반 명동에 커피점을 차렸다. 그때는 커피점이 아니라 다방으로 불리었다. 명동공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많은 문인들과 화가들이 찾아 왔었다. 당시에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마땅히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집을 나오면 갈 곳이란 이런 다방뿐이었다. 물론 휴대폰도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연락처로 이용했다. 그래서 '김 사장님, 전화 왔어요' 라고 카운터에서 부르면 몇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문인들이나 예술인들 역시 차 한 잔 시켜놓고 이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마땅한 전시장이 없을 때라 다방을 전시장으로도 이용했다. 화가들은 돈이 없어 외상을 하거나 찻값대신 그림을 놓고 가기도 했다. 어느 화가가 어머니의 초상을 그려주었는데 몇 차례 이사를 다니다가 분실되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어린 나는 이곳 다방에서 지낼 때가 많았다. 어머니 말씀으론 내가 물총을 갖고 손님들에게 쏘기도 했던 악동이었단다.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소년을 만나 함께 신문팔이를 한 적도 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로부터 몹시 혼이 났었다. 만약 그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면 지금쯤 아마 부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해방 전까지는 우리 어른들이 원두커피를 상용했다. 해방이후 미군이 진주하고 PX를 통해 유출된 인스턴트커피가 시중에 나돌면서 커피하면 인스탄트 커피를 연상할 정도로 커피에 대한 소비문화가 잘못 전파되었다. 1970년 동서식품에서 처음으로 인스탄트 커피를 생산하며 커피가 크게 보급되었다.
1970년대는 젊은 층 위주의 DJ가 있는 음악전문 다방이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당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도 학비를 벌기 위하여 무교동에 있는 다방에서 DJ로 일했다. 당시 변변한 음향시설이 없었던 젊은이들은 다방에 와서 커피를 즐기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다. 고객이 메모에 신청곡을 적어 뮤직 박스 안에 있는 DJ에게 주면 DJ는 곡의 설명과 신청한 사람의 사연을 적어 음악을 틀어 주었다. 지금도 흘러간 올드 팝송을 듣노라면 당시 모습이 삼삼하다.
1인당 커피의 최대 소비국인 유럽 국가들은 커피하면 우리가 원두커피라고 부르는 커피를 뜻한다. 거의 인스탄트 커피가 소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커피하면 인스탄트 커피로 인식하고 원래의 커피는 원두커피라고 따로 불렀다. 1990년만 해도 원두커피의 소비율은 10%가 되지 않았다. 내가 금융회사에 근무할 때 거래기업을 방문하면 으래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주었다. 대부분이 인스탄트 커피여서 하루에 몇 잔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면 속이 메스꺼울 때도 있었다.
1998년 신세계그룹과 손잡은 스타벅스의 진출로 우리나라 커피문화는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된다. 원두커피의 시장이 열린 것이다. 그때 나는 어느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스타벅스의 개점으로 원두커피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은퇴를 하면 대안문화공간을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어서 커피에 대한 지식도 필요했다.
한번은 지인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분이 본인이 번역한 책이라며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란 책을 내게 주었다. 나는 그 책을 단숨에 읽었다. 커피에 대한 상식뿐만 아니라 스타벅스를 인수하여 대기업으로 키운 하워드 슐츠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소개되었다.
어느 날 한국커피문화협회가 있다는 걸 지인에게 듣고 찾아갔다. 회장은 강남역 인근에서 커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만나고보니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우리 회사와 거래관계에 있었던 한양주택에서 자금을 담당했던 그가 회사를 퇴직하고 창업을 한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나라 커피 시장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소개로 우리나라 커피 로스팅 업계의 1세대라는 P씨와도 친교를 맺었다.
그 후 한국커피문화협회에서 커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일본 커피업계를 방문했는데 나도 동행을 했다. 일행을 보면 거의가 커피업에 종사하는 분이고 나만 금융인이었다. 우리 일행은 동경에서 열리는 식품 박람회에 가서 커피관련 상품도 구경하고 지역 곳곳에 있는 유명 커피점을 방문했다. 그중에서 호리구치커피공방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 가보고 우리나라에서도 곧 원두커피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호리구치 도시히데는 1948년 동경에서 태어나 일본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무역상사 직원으로 메카에서 16년간 근무했다. 그는 그곳서 커피무역을 목격하고 회사에 사표를 낸 후 일본으로 돌아와 커피공방을 차리게 된다. 그의 공방은 20여평 남짓했는데 10여 평은 로스팅 룸으로 이용했고 나머지 공간은 볶은 원두커피를 봉지에 넣어서 팔았다. 동네주민들은 시장을 보거나 회사에서 퇴근을 할 때 그곳에서 커피를 사갔다.
다이부란 커피점은 도심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공간이 20평이 채 안되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주인이 아르바이트생 한명을 데리고 운영을 하는 커피점이 나온다. 한쪽에는 수동으로 커피를 볶는 통돌이 로스팅 기계가 있었고 구석에는 서가에 책이 꼽혀 있었는데 저녁에는 문인들이 와서 커피를 마시며 서로 관심사를 나눈다고 했다. 이밖에도 여러 커피점을 방문했다. 일본의 커피점들은 대개 역사가 깊었다.
일본 커피업계 시찰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얼마 있다가 회사 근처에 있는 커피미학을 찾아갔다. 그곳 주인은 우리나라 사람인데 일본인에게 시집간 후 이름을 일본명으로 개명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가 중년이 되어 고국에 일본식 커피점을 차린 것이다.
그때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하우스콘서트를 열고 있었는데 그녀가 하우스콘서트에 와본 후 커피미학 개점 기념행사에 우리 밴드를 초청했다. 우리 일행은 외부공연은 잘 하지 않는 편인데 그녀의 부탁으로 기념행사에서 30여 분간 연주를 했다. 우리 음악이 고객들의 정서에 맞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유럽에 여행가서도 꼭 커피점에 들렸다. 로마에 갔을 적에는 시내관광을 포기하고 1760년에 문을 연 카페 그레코를 방문했다. 개업한 지 250년이 넘는 카페다. 커피 한잔을 하며 그곳서 문화와 철학을 토론했을 옛사람들을 그렸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에도 카페 플로리안에 들렸다. 산마르코 광장 한편에 있는데 그곳 역시 1720년에 오픈하여 3백여년 가까이 영업을 하고 있는 카페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원두커피 시장이 곧 붐을 이룰 것이라고 예견해서 음악을 하는 딸아이에게 커피 배울 것을 권했다. 한국커피문화협회 초기 멤버였던 H씨에게 아이의 교육을 부탁했다. 그가 커피회사 임원을 퇴직한 후 압구정동에 로스팅하우스를 개점한 지 1년 남짓 되었던 때다. 아이는 얼마 동안 압구정동 커피공방에 가서 커피를 배웠다.
그 후 나는 아이와 분당에 필하모니라는 대안문화공간을 오픈하며 커피를 직접 내려 손님들에게 제공했다. 명동에서 다방을 경영했던 어머니와 나, 그리고 아이까지 3대에 걸쳐 커피관련 사업을 한 것이다. 아이에게 로스팅을 하며 본격적으로 커피사업하기를 권했지만 아이는 음악을 좀 더 배우겠다며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도 좀 아쉬운 일이다.
얼마 후 우리나라는 나의 예견대로 원두커피 시장이 활짝 열렸다. 스타벅스 뿐만 아니고 국내 브랜드 여러 곳이 창업을 했다. 커피시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과거 한국커피문화협회 회원이었던 사람들도 이곳저곳에서 나름대로 커피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은 스타벅스 커피보다 자신들의 커피 맛이 좋다며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당연한 주장이다.
스타벅스의 커피는 세계적으로 균일한 맛을 내야하기 때문에 일단 대량의 커피콩이 필요하다. 게다가 경제성까지 있어야 한다. 당연히 질이 좋은 스페샬티 커피를 쓸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인들은 소량의 커피를 구매하여 맛좋은 커피를 소수의 개인에게 제공할 수 있다. 맛만 본다면 개인 카페가 더 우수하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커피점은 커피 맛뿐만 아니라 그곳의 문화도 중요하다. 바로 스타벅스의 커피사업이 번창하는 이유다.
요즘은 일본처럼 동네 어귀에 개인 로스팅 가게를 오픈한 분도 있다. 그곳에서 동네 분들이 모여 커피도 마시고 볶은 커피를 사가는 모습도 정겹다. 은퇴 후에는 커피 볶는 기술을 배워 일본의 호리구치처럼 자기만의 공간을 운영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동네 골목을 지날 때마다 고소한 커피 냄새가 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백만기 manjo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