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주일 미사 참석차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을 찾은 정교회 신도들이 폴리스 라인에 막혀 있다/텔레그램 동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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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최대 성지인 수도 키예프(키이우)의 '페체르스크 라브라' 동굴 수도원 앞에 주일인 9일 신도들이 모였다. 경찰 당국이 출입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수도원에서 주일 미사를 올리지 못할 것으로 우려됐다. 경찰은 나중에 신도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한 뒤 들여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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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우크라이나 볼린주 부쟈치치(Будятичи)에 있는 '성스러운 샘' 근처의 성당에 작은 불이 났다. 이 지역의 명물 '이콘'이 그을리고, 성당 입구가 불탔다.
불에 탄 이콘/사진출처:UOC 텔레그램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내분이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두 사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혼란 속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지난 2018년 모스크바 총대주교 산하의 정교회(UOC: Ukrainian Orthodox Church of the Moscow Patriarchate)와 독립 우크라이나 정교회(OCU: Orthodox Church of Ukraine)로 분리되고, 친서방 우크라이나 정권이 종교적으로도 러시아에서 독립하자고 나서면서 터진 가장 최근의 사건들이다. 우크라이나 정권과 OCU가 UOC의 기존 종교적 권위를 박탈하고 UOC가 소유한 성당(수도원, 혹은 사원)과 성물, 유적들을 빼앗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종교 탄압'이라는 단어가 서방에서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 매체 가제타 루에 따르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 주일 미사 참석에 나섰던 UOC의 신도들은 9일 한동안 폴리스 라인에 막혔다. 아예 수도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사흘 전인 6일 UOC 사제(신부 혹은 수도사)들의 퇴거를 요구하며 출입문 3개를 봉인(폐쇄)했기 때문이다. 봉인 명령은 UOC 탄압(?)에 앞장서는 우크라이나 문화정보정책부(이하 문화부)에 의해 내려졌다.
정교회 성물로 여겨지는 '이콘'이 불탄 볼린주는 OCU 측이 공권력을 앞세워 UOC 소속 성당을 적극적으로 빼앗는 우크라이나 몇개 주의 하나다. 이들은 문화부의 성당 임대 계약 해지→ UOC 소속 사제들의 퇴거 요구 → 불응시 강제 퇴출이란 시나리오를 통해 UOC 소속 성당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는 UOC측과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성물중의 성물인 이콘이 불타는 '최악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역사적 배경과 정치종교적 이유가 있다. 우리가 흔히 '동방정교회'로 부르는 종파는 크게 그리스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으로 나뉜다. 신도수는 약 2억 6천만명. 우크라이나 정교회란 명칭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 산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지난 2014년 러시아계 인구가 많은 돈바스 지역(동부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와 크림반도가 사실상 러시아로 넘어가면서(우크라이나 사태) 모스크바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OCU)의 출범이다. 당연히 모스크바 총대주교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측은 사사건건 대립해 왔다.
그러던 중, 정교회 신도의 절반(러시아 1억명, 우크라이나 3천만명)을 갖고 있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위력에 눌려온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세계총대주교청)가 2019년 OCU를 인정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 견제 차원에서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동로마 제국' 이래 교회(정교회)의 최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지만, 정치 권력과 결탁된 러시아 정교회와는 조직력이나 영향력 면에서 한참 뒤진다. (이슬람이 대다수인) 터키와 그리스의 크레타(섬), 인근 국가에 퍼져 있는 그리스계 신도 공동체들을 관할하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정교회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동방정교회는 2개, 3개로 분열된 셈이다.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OCU)는 지난해 2월 전쟁 발발을 계기로 '독자 노선'을 가속화했다. 모스크바의 키릴 총대주교를 지도자 명단에서 배제하고, 모스크바에서 갖고 온 성유가 아닌 자체 성유를 미사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UOC가 전쟁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반감을 지닌 기존 신도들을 많이 확보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법. 여전히 수백만명의 신도들이 UOC 소속 성당에서 종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웅장한 모습의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사진출처:위키피디아
UOC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우크라이나 당국과 OCU가 생각해낸 방안은 바로 '활동 근거지'를 박탈하는 것.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일부 건물을 봉인하고 신도들의 접근을 제한한 이유다.
물론, 이 조치도 하루 아침에 내려진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문화부는 유서 깊은 성당·수도원 대부분이 소련 시절부터 모스크바 총대교구가 국가로부터 임대해 사용해 왔다는 점에 착안해 임대계약 해지에 나섰다. 첫번째 타깃이 상징적인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이었다.
이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정신적 뿌리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에 필적할 만한 정교회 유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051년 성 안토니우스가 세운 수도원인데, 드네프로 강가 절벽에서 '라브라 동굴'이 처음 발견되면서 슬라브 정교회의 발상지로 꼽힌다. '라브라 동굴'의 지하무덤에는 성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
모스크바 총대교구가 UOC와 함께 우크라이나 문화부의 임대계약 해지→퇴거 명령을 거부하고 법정 투쟁에 나섰으나 1심에서 패소했다. 현재 2심이 진행중이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1심 판결을 근거로 수도원 장악에 나섰으나, 페트로 레비드(영어식으로는 파블로) 대수도원장과 UOC의 오누프리 총주교 등이 신도들에게 수도원 사수를 호소하면서 물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건물 하나씩 둘씩 봉인해 들어가는 상태다.
안타깝게도 수도원은 이미 두 조각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넓은 수도원안에서 '낮은(혹은 아래쪽) 라브라'(нижняя лавра)는 러시아 정교회 산하의 UOC측이 지배하고 '높은(혹은 위쪽) 라브라'는 독립한 OCU 관할에 들어가 있다. 지난 4월 부활절 예배도 두 곳에서 따로따로 열렸다. 지난 6일 우크라이나 당국이 봉인한 건물도 '낮은 라브라'에 속한다.
그동안 '낮은 라브라'에 있는 사제들을 한명씩 강제로 끌어내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으나, 신도들이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우크라이나 당국은 유혈충돌을 우려해 취소하곤 했다.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한다는 서방측 비판 여론도 감안됐다고 한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내 '낮은(하부) 라브라'의 모습/사진출처: dzen.ru olegapx
수도원 앞에서 대치하는 우크라이나 경찰과 신도들/사진출처:스트라나.ua
UOC 소속 사제들은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은 교구민들과 사제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이지, 국가가 지은 것이 아니다"고 항변한다. 실제로 소련의 공산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면서 성당과 수도원도 국가 재산이 됐다. 정교회는 소비예트 정권과의 임대 계약을 통해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UOC 퇴출 작업을 멈출 기세가 아니다. 정치적 이유가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종교적 독립'을 추진 중이다. 이에 앞장선 조직은 우크라이나 정보국(SBU)이다. 지난해 11월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과 서부 지역에 있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교구 등 UOC 소속 성당들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러시아 특수부대의 사보타주(비밀 파괴 공작)의 근거지이자 무기 저장시설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한달 뒤에는(2022년 12월) SBU가 러시아 점령 당국과 협력한 혐의로 우크라이나 정교회 사제 수십명의 국내 자산을 동결할 것을 제안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즉각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페트로 대수도원장 등 10명의 사제들에 대한 제재를 확정했다.
이같은 정치 권력의 지원 아래 독립 정교회 OCU의 공격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 곳곳에서 진행중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난 4월 "종교 전쟁으로 비화했다"며 "동부 지역에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서쪽에서는 UOC와 OCU 사이에 종교 전쟁이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이콘 화재 사건이 터진 볼린주도 양측의 전쟁이 치열한 곳(흐멜린스키주, 리브네주, 볼린주 등)의 하나다.
양측의 싸움(?) 과정에서 몹시 불길한 일도 생겼다. UOC측에 따르면 지난 4월 키예프(키이우) 지역(키예프 수도권, 우리식으로는 경기도)의 리포베츠 마을에 있는 UOC 소속 성당 장악에 나선 OCU 지지자 중 한 명이 갑자기 병에 걸려 사망했다.
실신해 쓰러진 OCU 지지자를 응급처치하는 모습/텔레그램 영상 캡처
러시아 매체 MK.ru(4월 11일자)에 따르면 UOC 측은 "한 번은 사고, 두 번째는 우연의 일치이지만, 세 번째부터는 추세라는 말이 떠오른다"며 "성당 습격자들이 1주일에 3명이 사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뜻/편집자)"고 주장했다. 특히 4월 2일에는 습격자 중 한 명이 돌아가는 길에서 실신해 쓰러졌으며,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예를 들기도 했다. 물론 이같은 일은 현지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다.
최근의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 봉인 작업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됐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우크라이나 경찰은 지난 6일 러시아 정교회의 UOC가 통제하는 '낮은 라브라'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문화부 직원들이 69동과 70동의 건물을 새 자물쇠로 봉인한 바 있다.
이스탄불을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만나고 있다/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스트라나.ua는 8일 "우크라이나 문화부는 (OCU의 독립을 인정한)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바르톨로메오 1세)와 합의를 지키기 위해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에서 UOC 세력을 몰아내는 작업을 가속화하고 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가 만나기 직전에 수도원 봉인 작업에 나선 건 우연이 아니다"고 분석했다.
해외 순방의 일환으로 터키를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전쟁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한 뒤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를 만나 "우크라이나의 영적 지원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에 대한 2차 항소심의 결론은 7월 말에 나올 것으로 전해졌다. UOC와 우크라이나 당국-OCU 간의 '종교 전쟁'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