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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囷 黃有定 先生의 家系와 生崖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1.글을 들어가며
미균(米囷) 황유정(黃有定)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외적으로 원명(元明)교체기였으며 대내적으로는 려말선초(麗末鮮初)의 혼란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기를 선생과 관련된 문헌이 잘 보존되지 못해 그의 생애나 관역,학문,문학 등 선생의 삶의 모습을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선생의 가계는 원(元)나라의 영향하에서도 이미 조부대(祖父代)와 부친대(父親代)에서 고려왕실의 중앙관료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선생또한 그에 힘입어 중앙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던것 같다.
특히 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외가(外家)는 외조부인 근재(謹齋) 안축(安軸)과 안헌(安軒), 안보(安輔), 안집(安輯) 형제를 비롯하여, 외삼촌인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 외사촌인 집현전 교리 안경온(安景溫),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안경량(安景良),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恭) 등 당대의 명문가로 이름이 놓았던 순흥안씨였다.
또한 선생은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專)을 처남으로 두었다. 그의 처가는 고려에서 형부상서를 지낸 염의(廉義) 정운경(鄭云敬) 선생을 장인으로 두었으며 처남인 참판 정도존(鄭道存), 한성판윤 정도복(鄭道復) 등도 당대의 실력가들이였다.
이와함께 진외가는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종제(從弟)인 우평(禹호)을 진외조부로 하고있어 선생이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신진사대부로 성장하는 발판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기록과 문헌은 상대적으로 잘보존되어있으나 정작 선생에 대한 기록은 그 어느곳에서도 찿아볼 수 가 없다.
<평해황씨대동보(平海黃氏大同譜)>나 <고려사(高麗史)>,<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합천군지(陜川郡誌)>,<초계군지(草溪郡誌)>,<서울시사(市史)>,<영천지(榮川誌)>,<영주지(榮州誌)> 등 선생이 발자취를 남긴 옛 문헌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았으나 선생과 관련된 흔적은 찿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본고에서는 기존 문헌속에 기록된 선생의 삶을 정리하고 이러한 문헌자료의 부족함으로 인해 선생이 활동하던 시대적 상황과 당시 선생에게 영향을 미친 친족관계를 통해 선생의 삶을 간접적으로 조명해 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와함께 기존의 여러문헌에 천편일률적으로 기재되어있는 선생의 관역을 정리하는데 다소나마 노력해보았다.
2.미균(米囷) 황유정(黃有定) 선생의 가계(家系)
1) 본가(本家)
平海黃氏世系 始祖 洛 - 1世 溫仁 - 2世 佑精(軍器小尹) - 3世 裕中(門下侍中) - 4世 璡(檢校軍器監) - 5世 之挺( - 6世 原老(寧海府使) - 7世 瑾(直提學) - 8世 有定(典書) - 9世 銓(持平) 鉉(祭酒) 鏈(訓導)
미균 황유정 선생(先生)은 1343년(고려 충혜왕 복위 4)에 고려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황근(黃瑾)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휘(諱)가 유정(有定)이고, 호(號)가 미균(米囷)으로 본관(本貫)은 평해(平海)이다.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 중국 후한대의 학사로 구대림(丘大林) 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지금의 월남)으로 가던길에 풍랑을 만나 이곳 평해에 표착(漂着)하여 살았다는 황락(黃洛)을 시조로 한다. 후손에 3형제가 있어 이들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봉토를 받았는데 장남 갑고(甲古)는 기성군(箕城君), 둘째아들 을고(乙古)는 장수군(長水君), 세째아들 병고(丙古)는 창원백(昌原伯)에 각각 봉해져 3관(貫)으로 분관(分貫)되었다. 평해황씨는 바로 장남 기성군(箕城君)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그후 계대(系代)가 분명치 않아 갑고(甲古)의 후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 금오장군(金吾將軍)과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2세 황우정(黃佑精)이 군기소윤(軍器少尹), 3세 황유중(黃裕中)이 문하시중(門下侍中), 4세 황진(黃璡)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각각 지냈다. 5세는 황지정(黃之挺)이고, 6세 황원로(黃原老)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한후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냈는데 그가 이곳 영천(榮川,지금의 영주) 초곡리(草谷里, 푸실)에 옮겨오는데 바로 미균(米囷) 황유정 선생의 조부(祖父)가 된다.
선생의 조부 황원로(黃原老)는 1260년(고려 원종1)에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강릉최씨(江陵崔氏)로 전서(典書) 최사립(崔斯立)의 따님이다. 그는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록참군(司錄參軍),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황원로는 일찍이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비둘기 일곱 숲 가지에 나누어서 길러졌으니 (籌鳩分養七林枝)
각각 남북으로 갈라져 왕래가 드물게 되었도다(各分南北往來稀)
하였으니 그는 이 시(詩)를 통해 그의 아들 7형제가 각기 흩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던것 같다.
하지만 현재 <평해황씨족보>에는 여섯 형제만이 기록되어 있어 한사람이 누락된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선생의 부친인 황근(黃瑾)은 영해부사(寧海府使) 황원로(黃原老)의 넷째아들로 1302년(충렬왕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귀성군부인(龜城郡夫人) 단양우씨(丹陽禹氏)로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종제(從第)인 우평(禹평)의 따님이다. 우평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다. 일찌기 공민왕(恭愍王)때에 우헌납(右獻納)으로 정언(正言)인 김속명(金續命)과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당시 지진(地震)이 일어난것이 후궁(後宮)과의 관계에 엄격하지 못해서 발생했다고 극언(極言)을 하여 임금의 뜻에 거슬려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좌천(左遷)되었다가 제학(提學)이 되었다. 그는 좌천(左遷)되어 귀양(歸養)도중에 한강 배위에서 신총사(信聰師) 스님의 시(詩)를 차운(次韻)하여 읊었는데
백성의 물에 임금의 배를 실은 것을 알고자 하면 (欲知民水載君舟)
요컨대 충성을 다하고 편안히 노는것을 경계하노라 (要盡忠誠誡逸遊)
사간원에서 경계가되는 직언(樂石)을 올리지 못하여 (諫院未能語樂石)
장사(長沙)에 귀양을 당했으니 근심할 것 없도다. (長沙見謫不彦萩)
라고 했다. 일찍이 서거정(徐居正)은 말하기를 이 시(詩)는 신하의 도리와 체통을 다했고 세상 교화에 도움을 준다라고 했으니 그의 저술(著述)에는 볼만한것이 많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이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증직되었다.
2) 외가(外家)
미균의 외가(外家)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외조부는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1282~1348) 선생이다. 순흥안씨(順興安氏)는 고려 신종조에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정7품)을 지낸 안자미(安子美)선생을 시조(始祖)로 한다. 안자미는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귀(貴)로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정3품)에 추봉되었다. 시조 안자미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 안영유(安永儒)의 후손들을 1파(派)로, 둘째아들 안영린(安永麟)의 후손들을 2파(派)로, 세째아들 안영화(安永和)의 후손들을 3파(派)로 구분하였다. 안축 선생은 3파로 안영화의 아들 안득재(安得財)가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안득재의 아들 안희재(安希재)는 안축의 조부(祖父)로 호장을 지냈으며, 안축의 부친은 안석(安碩)으로 1282년(충렬왕 8) 십운시(十韻詩)로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미균의 외조부 안축은 안석의 둘째아들로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이다.
그는 고향 순흥의 죽계(竹溪)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층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근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그곳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학정(成均學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관동와주 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져 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당하였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 등에 등용되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를 지내고,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내고 1347년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행정에 참여하였다.
그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하였고, 또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경기체가인〈관동별곡 (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하여진 뒤 생을 마쳤다. 그후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저서로는 《근재집 (謹齋集)》이 있다.
근재는 2남1녀를 두었는데 그중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1324~1394)은 자(字)가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그는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삼사도사를 지냈다. 공민왕초에 전법정랑으로 있을 때 송사를 잘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다.
1361년(공민왕 10) 양광도안렴사로 있을 때 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음죽(陰竹)에 이르렀으나 왕을 접대하지 못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다. 뒤에 전법총랑이 되었으나 당시 권세가인 신돈의 미움을 사서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다.
신돈이 처형된 후 사헌시사·우사의대부·성균관 대사성·우상시·대사헌을 거쳐 판숭경부사가 되고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우왕초에 우사의대부로 있을때 좌사의대부 유순(柳珣) 등과 함께 환관(宦官)의 폐단을 논하며 그 횡포를 시정하고자 노력했다.
1382년(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되어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이 되었다. 최영이 탐관과 권신을 숙청할 때, 청렴근직하다고 하여 문하찬성사로 기용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1391년 흥녕부원군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판문하부사를 지냈다. 1394년 사은사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간공 안종원은 미균 황유정의 외삼촌이 된다. 또한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안경온(安景溫),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道巡問使) 안경량(安景良), 영삼사사(領三司事)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公)은 외사촌이 된다.
3) 처가(妻家)
선생의 처가(妻家)는 봉화정씨(奉化鄭氏)로 장인은 공민왕(恭愍王)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염의(廉義) 정운경(鄭云敬) 선생이다. 봉화정씨는 고려시대 호부령(戶部令)을 지낸 정공미(鄭公美) 선생을 시조(始祖)로 한다. 2세인 정영찬(鄭英粲)이 비서랑동정(秘書郞同正)을 지냈는데 이는 실직(實職)이 아니고 종7~8품의 하급 산직(散職)에 불과하였다. 3세인 정균(鄭均)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종3품의 산직이었다. 4세인 정운경(鄭云敬,1305~1366)은 공(公)의 장인(丈人)이 된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집에서 자랐다. 그는 영주향교(榮州鄕校)에서 수학하다가 이후에 복주(福州,지금의 안동)향교로 옮겨 배웠는데 당시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 복주에서 사록(司錄)의 벼슬을 지내던 7세 연상인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교류하며 관동지방을 유람하기도 한다. 뒷날 아들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이곡의 아들인 이색(李穡)과 막역한 사이가 된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한림(翰林)을 지낸 외삼촌 안분(安奮)을 따라개경에 왔다고 한다. 개경에 도착한 그는 12도(徒)와 교유하였는데 안축(安軸) 선생이 그의 재주를 칭찬하였다. 1326년(충숙왕 13)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1330년에는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고 이듬해 상주목 사록(司錄)에 제수된 뒤 전교교감(典校校勘), 주부(注簿), 도평의 녹사, 삼사도사(三司都事) ,통례문지후, 전의주부, 홍복도감의 판관을 거쳐 1343년(충혜왕 복위 4)에 밀성군 지사가 되었다. 밀성군지사 시절에 재상 조영휘(趙永暉)가 밀성사람들에게 대여하였던 포(布)의 징수를 종용하였으나 이를 묵살하였으며 ,이듬해 복주목의 판관에 전임되어서도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뒤 재정을 맡은 삼사의 판관을 거쳐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어 1346년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으로 중국의 연경에 다녀왔으며,그뒤 성균사예(成均司藝),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製敎)를 지내고 1348년(충목왕 4) 양광도(楊廣道) 안렴사,이듬해 교주도(交州道) 안렴사 등을 거쳐 1352년(충정왕 3)에는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올랐다. 1353년 전주목사(全州牧使)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356년(공민왕 5)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올라 무반의 인사를 관장하였다. 1357년 비서감,보문각직제학을 거쳐 강릉도와 삭방도 존무사(存撫使)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359년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에 올랐다. 1363년 검교밀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영주에 돌아와 1366년 62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수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청렴하고 강직하게 선정을 배푼것이 후에 평가를 받아 <고려사> 양리전(良吏傳)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죽은뒤 국가로부터 시호(諡號)를 받지 못했으나 그를 아끼는 친우들이 그의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염의 선생(廉義 先生)>이라고 불렀다.
아들 정도전은 그의 행장에서 평상시 집안의 재산을 돌보지 않고,세속의 이욕에 담박한 성품이었으며,집에는 모아놓은 재산이 없고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하였으나 깨끗하게 처신하였다 고 한다. 그는 3남1녀를 두었는데 맏이가 삼봉 정도전이고, 둘째가 정도존, 세째가 정도복이며, 사위는 공조전서 황유정이다.
특히 맏아들 정도전(정도전,1342∼1398)은 자가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그는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그는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 영주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 (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 (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 (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 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은 바로 공의 처남이 된다. 이밖에도 참판공(參判公) 정도존(鄭道存), 판윤공(判尹公) 정도복(鄭道復)도 선생의 처남이다.
4) 진외가
미균 선생의 진외가는 단양우씨(丹陽禹氏)로 진외조부는 대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종제(從第)인 우평(禹평) 선생이다. 단양우씨는 고려 향공(鄕貢) 진사(進士)로 정조(正朝) 호장(戶長)을 지낸 우현(禹玄)을 시조로 한다. 2세 우신(禹臣)은 문과로 전법령(典法令)을 지냈으며 3세 우인가(禹仁可)로 양주목사(楊州牧使), 4세 우잉순(禹仍順)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5세 우경절(禹慶節)은 도사(都事)를 지냈고 6세 우중대(禹仲大)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7세 우천석(禹天錫)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8세는 우평(禹평)이다. 우평은 5형제를 두었는데 우수생(禹壽生)은 전객령(典客令), 우덕생(禹德生)은 호군(護軍), 우복생(禹福生)은 상호군(上護軍, 文純公), 우소생(禹小生), 우녹생(禹祿生)을 두었다. 우평은 <영주지(榮州志)>에 영주의 첫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연대는 상고할 수 없다. 우평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며 대광문하시중(大匡文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우평의 따님은 바로 미균 선생의 조모(祖母)가 된다.
3.미균(米囷) 황유정(黃有定) 선생의 생애(生涯)
1) 시대상황
미균(米囷) 황유정(黃有定)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12세기이래 누적되어 오던 고려(高麗)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던 때였다. 특히 원(元)나라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많은 문제점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것은 국왕의 측근세력과 친원세력(親元勢力)에 의해 자행된 토지점거나 홍건적이나 왜구의 침입과 같은 문제로 국가의 재정은 궁핍해졌으며 백성들의 생활도 크게 어려워졌다. 이시기는 12,13세기 처럼 농민들이 항쟁을 일으키거나 활발한 초적(草賊)활동을 전개하며 적극적으로는 저항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거주지를 이탈하여 유망(流亡)하는등 소극적인 형태로 국가에 대응 하였다. 이는 당시 고려사회의 지배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사회의 모순의 극복은 공민왕대에 와서 처음으로 시작된다. 고려말 정치체제의 재편은 공민왕대로부터 비롯된 국내외적인 변화에 대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시기 고려사회는 반원개혁을 단행한 공민왕의 즉위(1352) 이후 공양왕 4년까지 40여년간에 걸쳐 원나라의 간섭의 결과로 나타난 국내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떠안고 있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원,명(元,明)교체기에 따른 대외정세의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고려 후기 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몽고와의 전쟁과 원(元) 간섭기를 통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사전(私田)이 가산화(家産化)되는 대토지소유의 확대현상으로 농장(農莊)이 발달하고, 정치적으로는 외세의존적인 권문귀족의 독점적 정권과 신흥사대부 세력의 갈등이 깊어져 갔다. 그 과정 속에서 1388년(우왕14)의 위화도회군은 신흥사대부의 정치적 승리와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공양왕으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1개월도 못된 8월13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하교하여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으며, 15일에는 삼군우복사(三司右僕射) 이괄(李括)을 한양으로 보내어 궁궐을 수리하게 하는 실제적인 천도준비를 하였다. 미균은 이러한 여말선초의 복잡다양한 시대상황에서 태어나 조선개국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다양한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 활동의 영역이나 내용은 전하는 바가없다.
2) 미균 황유정의 생애
미균(米囷) 황유정(黃有定) 선생의 초명(初名)은 지정(知定)이고 호가 미균(米囷)으로 본관은 평해이다. 평해황씨(平海黃氏)는 황온인(黃溫仁)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는데, 2세 황우정(黃佑精)이 군기소윤(軍器少尹), 3세 황유중(黃裕中)이 문하시중(門下侍中), 4세 황진(黃璡)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각각 지냈다. 5세는 황지정(黃之挺)이고, 6세 황원로(黃原老)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냈는데 그가 바로 미균(米囷) 황유정의 조부(祖父)가 된다. 선생의 부친인 황근(黃瑾)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다. 선생은 1343년(충혜왕 복위 4년)에 직제학 황근과 봉화정씨 사이의 3남 1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따님이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비범하여 12세 되던해인 1355년(공민왕 4)에 안동도회(安東都會)에 가서 시(詩)를 지었는데 시관(試官)이 그 시를 보고 과거에 응시하기를 권하였다. 다음은 그때 지은 <병서(病署)>라는 제(題)의 시에 아래와 같은구(句)를붙이니고관(考官)이보고놀랬다.
가을을 먼저, 여름을 뒤에 둘까 하늘이 묻는다면 先秋後夏天若問
조삼모사라, 나는 원숭이를 따르련다. 朝三暮四吾從狙
선생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오직 글읽기만을 좋아하여 잠들기전에는 손에서 책을 놓아 본적이 없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논어(論語)>읽기를 즐겨하여 당시 세인들이 칭하기를 <미균 선생(米囷 先生)>이라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작성된 영천(榮川,지금의 영주) 장적(帳籍,호적대장)에 의하면 당시 황유정은 48세이고 초계군수(草溪郡守,지금의 경남 합천)를 지내고 있었으며, 맏아들 황전(黃銓)은 예빈주부(禮賓主簿)였고, 둘째아들 황현(黃鉉)은 22세로 생원(生員)이었으며, 세째아들 황연(黃鋋)은 11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초계군수 시절 단정,청렴하여 초계군민과 아전들이 오래토록 그 덕을 기렸다고 한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나 당인(唐人)의 풍조가 있었는데 80세이던 1422년(세종 14) 어느날 외손자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집을 찾아가 시를 지었다.
우연히 명아주 지팡이를 집고 사립문을 나서니 偶携藜丈出柴扉
4월의 화창한 날씨에 제비들이 쌍쌍이 날고 四月淸和燕燕飛
이에 시흥이 솟구쳐 김씨집에 찾아가보니 乘興往尋金氏子
장미꽃 한 떨기가 울타리에 빼어나게 피어있네 薔薇一朶秀疎籬
선생은 1390년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역임했는데 초계군은 현재 경남 합천군의 초계면·적중면·청덕면·쌍책면·덕곡면·율곡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로 삼한시대에 초팔국(草八國)이었는데, 신라의 세력 확장에 따라 108년(파사왕 29) 이곳에 초팔혜현(草八兮縣)이 설치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팔계현(八谿縣)으로 개칭, 강양군(江陽郡:陜川)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초계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합주(陜州:陜川)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으며 14세기초 충숙왕대에 현(縣) 사람 정수기(鄭守琪)ㆍ변우성(卞遇成)이 왕실(王室)에 공이 있었으므로 군으로 승격하여, 조선시대말까지 초계군을 유지했다. 하지만 초계군수시절 미균의 활동은 찿아볼 수 없다.
* 위의 품계로보아 전서(정3품) 벼슬 이후에 판한성부사(정2품)를 지냈을 것 같다.
이후 미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예조전서(禮曹典書)와 공조전서(工曹典書),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다.
그는 조선에 들어와 공조판서(工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한다. 그는 이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거치고 늙어 병(病)을 이유로 낙향(落鄕)하여 영주의 구성(龜城) 아래 동리의 자택에서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것이 곧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봉화 정씨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따님이다. 그의 아들로는 지평(持平) 황전(黃銓)과 제주(祭酒) 황현(黃鉉), 훈도(訓導) 황연(黃鋋)이 있으며 현손(玄孫)에는 목사(牧使)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있다. 또한 외손(外孫)에는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김증(金潧), 이조판서(吏曹判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과 홍문관 교리 김조(金漕)등이 있다. 묘역은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을좌지원(乙坐之原)으로 황분토(黃墳土, 덕동)이다.
3) 미균 황유정의 관직
미균 황유정 선생의 관직에 대한 고증은 앞에서 보았듯이 그 자료의 미비로 인하여 정확히 알아볼 수 가 없다. 또한 기존의 여러문헌에 나타나있는 관직들도 하나같이 다르게 표기되어있어 어떤 관직이 옳은지 판단할 수가 없다. 먼저 기존의 각종 문헌에 나타나있는 미균의 관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한성판윤, 한성부윤, 공조전서, 공조판서, 형조전서, 형조판서, 예조전서, 예조판서, 초계군수 등의 관직들을 혼용하여 쓰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먼저, 한성판윤(漢城判尹, 정2품)과 한성부윤(漢城府尹, 정2품)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나라를 세우고 1394년 10월 28일에 도읍지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그 다음해인 1395년(태조 7년) 6월 6일에 1308년(고려 충렬왕 34)이후 지방관청으로 불리어 오던 한양부(漢陽府)의 명칭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또한 1395년 이후 71년간 한성부의 수장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불렀으며, 1466년(세조12)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정2품), 1469년(예종 원년)에 가서야 한성판윤(漢城判尹,정2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볼때 선생이 1395년(53세) 이후 한성부의 수장을 맡았기에 미균의 관역을 판한성부사로 보는것이 마땅할것이다. 또한 미균이 판한성부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기록이 누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로 전서(典書)와 판서(判書)에 대한 문제이다.
미균은 예조,형조,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한다. 하지만 미균이 1390년에 초계군수를 지낸것을 유추해보았을 때 예조와 형조,공조전서를 지낸것은 1392년 이후인 조선초기로 보아야 할것이다. 주지하다시피 6조의 설립은 고려시대 초기의 선관(選官)·민관(民官)·병관(兵官)·형관(刑官)·예관(禮官)·공관(工官) 등의 6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이·호·병·형·예·공의 6부(部)로 관제를 개편하였으나, 1275년(고려 충렬왕 2)에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4사(司)를 두게 되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이전의 6부를 전조(詮曹)·민조(民曹)·병조(兵曹)·형조(型曹)·의조(儀曹)·공조로 개칭하였고, 그 후 6부와 6사 등으로 개편되었으며, 1389년(공양왕 1)에 이·호·병·형·예·공의 6조로 다시 개칭되었다.
조선도 처음에는 고려의 6조 제도를 계승하여 1392년(조선 태조 1)에 6조를 두었으나, 의정부(議政府)가 각 사(司)를 관장하고 있었으며, 6조의 장관인 전서(典書)는 고려시대와 같이 정3품으로 조정(朝廷)에 참여할 수 있는 직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단순한 정무집행기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405년(태종 5)에 6조의 전서를 판서(判書)로 개칭하고 정2품으로 승격시켜 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미균이 1392년에서 1404년 사이에 예조와 공조 전서(정3품)를 역임했는지 아니면, 1405년(63세)이후에 예조와 공조 판서(정2품)를 역임했는지에 따라 차이가 난다. 또한 미균이 고려의 전서(典書)벼슬에 부임할 수 있었던 시기는 1390년(50세) 초계군수이후 조선개국(1392)까지 불과 2년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1392년부터 1404년까지 8년이라는 기간이 있었다.
결국 미균이 전서(典書)의 벼슬에 보임할 수 있었던시기는 고려와 조선을 통해 1390년부터 1404년까지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이때 미균은 공조,형조,예조전서에 보임되었다고 보면될것이다. 또한 1405년(63세)이후 미균은 공조,형조,예조판서(判書)에 보임되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4. 미균 황유정의 아들 3형제
1) 황전(黃銓):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通訓大夫 司憲府 持平)
황전은 황유정의 장남으로 원(元)나라 지정(至正) 계묘(癸卯)(공양왕 12년 1363)에 출생하여 조선 태종(太宗) 11년 신묘(辛卯 1411)에 서거하였는데 근거가 될 수 있는 문헌이 거의없고, 다만 옛 족보 작은주(小註)에 적혀있기를 16세에 삼시(三試)에 장원을 했고, 21세에 또 삼시(三試)에 장원을 했는데 나이는 불과 40여세에 지나지 않았으며, 벼슬은 천거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제수되고 또 청도군수(淸道郡守)가 되었는데 그 관저(官邸)에서 서거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넓고 컸으나 당시 시대에 쓰여져서 세상에 은택을 남길 수가 없었으며, 또 그 남긴 글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고 있다.
2) 황현(黃鉉): 가선대부 행 성균관 대사성(嘉善大夫 行 成均館 大司成)
황현은 홍무(洪武) 기유(己酉,1369)년에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 문과 수업을 닦아서 약관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태종 을해년(태종조에는 을해년이 없으므로 태조인 것으로 사료됨 즉 태조 4년 1395)에 임금이 친히 보인 과거에서 을과 제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성균직강(權知成均直講)이 되었고, 을미년(1415)에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에 배수(拜授)되었고 세종(世宗) 을사년(1425)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배수되었고 무신년(1428)에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다.
기유년 (1429)에 또 대사성에 배수되어 재차 대사성직에 있게 되었다. 공의 긴 소장(疏狀)과 짤막한 차자(箚子 : 신하가 임금께 올리는 문서의 한 체)의 우직하고 강직한 말과 바른 논리에 가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愛君憂國) 정성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남긴 글이 처음으로 오늘날에 나와서 장차 인쇄에 맡겨 오래 전해지도록 했다. 공역(工役)을 맡은 사랑하는 후손들의 정성이 부지런하다.
공의 숨겨지고 잠복된 사행(事行)들이 거의 이로부터 공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은 향년 66세로 갑인년(1434)에 서거하니 영천(지금 영주) 두전리(豆田里) 동쪽 반지산(盤芝山)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례지냈다.
아깝게도 그 유사(遺事)와 유적(遺蹟)들이 세상에 다 전하지 못하게 되어서 그 온전한 것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질박한 것을 숭상하여 남의 선(善)한 것을 기록할 적에 한자도 함부로쓰지 않았으니 보첩(譜牒)에 [經明行修爲世師儒: 경서에 밝고 행실이 잘 닦아져서 세상에 스승이 되는 유학자]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으니 그 분이 높은 문장과 큰 덕이 아니었다면 능히 이와 같이 기재되었겠는가? 이 여덟 자의 글야말로 실로 공(公)의 진실을 묘사한 한 장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가히 후세에 증명을 댈 수 있을 것이다.
3) 황연(黃鋋): 승의랑 순흥훈도(承議郞 順興訓導)
황연은 홍무(洪武) 경신(庚申)년(1380)에 출생하셨다. 생원(生員)으로 승의랑 순흥훈도(承議郞 順興訓導)를 지냈다. 영천(榮川)에서 다시 풍기(豊基)로 이사하여 그 자손들이 이로부터 드디어 풍기사람이 되었다. 신사(辛巳, 1461)년에 서거하니 향년 72세(82세가 잘못된 것 같음)로 묘소는 영천군 남쪽 반곡리(蟠谷里) 해좌원(亥坐原)이다. 배(配)는 공인(恭人)으로 청주정씨 지평(持平) 시(時)의 딸이요, 문간공(文簡公) 복(福)의 손녀인데 묘는 지천(芝川)의 손좌원(巽坐原)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 말손(末孫)은 선교랑(宣敎郞)으로 사온서주부(司醞暑主簿)요, 또한 아들의 이름은 계손(季孫)이요, 딸은 영천이씨 오(塢)에게 출가하였으니 그는 직제학이다. 말손의 아들은 효동(孝仝)이니 순릉참봉(順陵參奉)이요, 계손의 맏아들은 원명(遠明)이니 학관(學官)이며, 또 아들 수운(守雲)과 수동(守仝)이 있다. 이오(李塢)의 아들은 희량(熙良)인데 사정참봉(司正參奉)이다. 손자 치(觶)는 의릉(義陵)의 참봉(參奉)이요, 또 손자 굉(觥)과 상(觴)이 있다. 치(觶)의 아들은 준량(俊良)인데 호가 금계(錦溪)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이르렀고,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일찍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늦게는 성리학(性理學)을 궁구(窮究)하였다.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아 퇴계선생의 추허(追許)하는 바가 되었다.
금계선생이 서거하게되자 퇴계선생이 직접 금계선생의 관(棺)위에 쓰기를 [오호 망우 금계 황선생(嗚呼 亡友 錦溪 黃先生)<슬프다 돌아간 벗 금계 황선생이여>]라고 하고 또한 퇴계 선생이 금계공의 행장(行狀)을 짓기도 했다. 금계공의 문집이 간행되었고, 금계선생은 욱양서원(郁陽書院)에 배향되었고, 금계의 동생 수량(秀良) 역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호가 금간(錦澗)이요 벼슬이 부령(富寧)의 교수(敎授)였다. 공이 성스러운 임금의 태평성대에 태어나서 훌륭한 부친(有定)아래 가정교육을 받으셨으니 기필코 시(詩)를 듣고 예(禮)를 들어서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와 자녀에 대한 자애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적들이 있었을 터인데 오랫동안 난리로 인하여 재난을 당하고 증빙될 만한 자료가 없어 당시의 사적들을 추적할 수 없으니 어찌 사랑스런 후손들의 끝없는 유감이 아닐 수 있으리요. 자손이 번창하고 가업(家業)이 대대로 이어져서 고손자(玄孫) 금계(錦溪) 같은 이에 이르러서 적실(的實)하게 한서(寒栖)의 뜻을 받아서 부조묘향(不祧廟享 : 영원히 제사지내는 사당)을 설치했다. 그러니 성(盛)하게도 유림(儒林)의 명문가문이 되었으니 이는 어찌 공의 쌓은 두터운 음덕(陰德)의 결과인것 같다.
5.후손들의 추모
려말선초의 변혁기에 활동한 미균 선생의 묘역을 근 수 백년동안 찿지못하다가 1784년(정조 8) 3월에 찾고, 1799년(정조 23) 두암 김약련이 찬(讚)한 제단비(祭壇碑)를 세웠다. 또한 후손들은 1975년 추원재 옆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등 추모사업을 펼쳐왔다. 덕동추원재(德洞追遠齋)는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덕골) 동편 산 을좌지원(乙坐之原)에 위치한 미균 황유정 선생의 묘역 아래에 위치해 있다. 약 300여년전에 개갈입석(개碣立石)한 이래 1929년 후손들의 정성으로 다시 개갈입석을 하고 추원재(追遠齋)를 건립하여 선생을 모셔오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랜 풍상에 낡고 협소하여 1992년 추원재중건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95년 4월에 준공식을 가졌다.
1) 덕동제단비(德洞祭壇碑)
아! 이는 작고한 공조판서(工曹判書) 황공 휘 유정(有定)의 제단비(祭壇碑)이다. 단의 위에는 하나의 큰 무덤이 있고 그 봉분 위쪽으로 몇 발짝쯤에 조그마한 무덤 하나가 있는데 대대로 전하기를 공의 묘는 영주군(榮州郡) 동쪽 20리 애동(艾洞) 을좌원(乙坐原)에 있고 공의 맏아들인 지평공(持平公) 전(銓)의 묘는 그 위에 있다고 하였다. 애동은 한편으로 이름하기를 황분현(黃墳峴)이라고도 하니 이는 대개 공의 묘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워진 것이다. 이제 그 동네의 호칭과 묘소의 모습이 완연히 서로 부합이 되고 있으니 생각컨데 큰 무덤은 공의 묘이고 작은 무덤은 지평공의 무덤일 것이다. 그러나 증거가 될 만한 비갈이 없다. 작은 무덤 위에 또 쌍분이 있는데 이는 외후손 무덤인데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원래 비갈이 있었을 텐데 누가 뽑아간 것 같다고 한다. 아! 슬프도다. 너무나 오래된 옛날 일이어서 지금 어떻게 상고 할 수 있으리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은 평해인이요 고려 태자검교(太子檢校)로 있던 휘 온인(溫仁)이 시조이다. 조부의 휘는 원로(原老)이니 과거에 올라 영해부사가 되었고, 부친의 휘는 근(瑾) 이니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공은 원(元)나라 지정(至正) 3년 계미년(1343)생이다. 문과에 합격하여 내직과 외직의 벼슬을 두루 역임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과 예조․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를 때까지 논어 일부를 애독하여 세상에서 그를 미균(米囷)이라 칭했고 시문을 지음에 당나라 풍조가 있다고 했다.
공의 족손(族孫) 해월공(海月公) 여일(汝一)이 옛날에 들었던 것을 수습 정리하여 간략히 기술한 것이 있다. 그러나 공이 이전 고려 말기에 과거에 올라 전서(典書)에 이르렀고, 일의 업적과 지은 문장이 틀림없이 후세에 남길 만한 것이 있을 터이나,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서 집안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나 분명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는 남은 글은 다만 7언시 일절 뿐이다(시가 고증편에 나와 있다).
아! 애석하구나. 공이 처음 영천(지금 영주)에서 살았는데 자손들이 집을 풍기로 옮겨 살았다. 공이 이미 조선왕조에서 뚜렷한 벼슬을 했고 맏아들 전(銓)이 학행이 뛰어나 천거되어 지평이 되었다. 둘째 아들 현(鉉)은 문과에 올라 제주(祭酒)였고, 막내 아들 연(鋋)은 생원에 합격 관이 훈도(訓導)였다. 손자와 증손 이하로 과거에 오르고 벼슬한 이가 십여명이나 된다. 금계 선생(錦溪 先生) 황공 준량(俊良)은 공의 자손이다. 이조 판서 김공 담(淡)은 공의 외손이다. 내외(內外) 후손들이 풍기와 영주 두 고을에 퍼져 살고 있는데 세대가 이미 오래 되어서 무덤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니 어찌 깊이 통탄하지 않겠는가.
공의 9세손 한천(寒泉)공 중연(中衍)이 공을 위해서 선영도(先塋圖 : 선조들의 무덤 위치도)를 만들기를 앞에서 말한 대로 만들었는데 옛날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이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묘인지를 확실히 지적 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한천공까지의 세대가 또 이백년이 가까이 되었으니, 누가 뒤를 이어서 의아한 바를 확실히 단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세종 육 년째 되는 갑진년(1424) 윤삼월(潤三月)에 후손 여러 사람이 여러 대 선인들이 남긴 뜻을 받들어 외후손 몇몇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을 시켜 공의 무덤이라고 여겨지는 큰 봉분을 파서 징험을 해보기 위해 무덤을 빙 둘러서 그 사방을 둘러 웅덩이를 파고 그 봉분을 흩어 보니 그 평평한 광중(壙中)안에 이르러서도 한 조각의 지석(誌石)도 얻지 못했다. 여러 자손들이 서로 울면서 말하기를 아! 슬프도다. 무덤을 높고 크게 분(墳)해서 세웠는걸 보아 품계가 사서인(士庶人)의 무덤은 아님이 틀림없는데 밭가는 농부와 나무하는 아이들, 또 입 있는 이 들이 모두 「황분」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정히 이른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데 어찌 당초에 지석(誌石)을 묻지 않았던가. 우리들의 정성이 얕아서 지석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찾지 못했음인가. 그러나 오래된 무덤을 발굴해서 완전히 깨트릴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지나치면 차마 슬픔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지석 찾는 역사(役事)를 중지하고 다시 묘의 봉분을 봉(封)하고 단을 쌓아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서 백세의 사모하는 마음을 두게 할 따름이다. 진실로 조상이 옆에 계신 것 같이 여기는 정성을 다한다면 이 땅 속에 있는 영혼(精靈)이 성하게 위에 계실 것이다. 하물며 이 무덤이 우리 선조의 묘소라는 것을 비록 단적으로 증거를 조사하여 증거 할 만한 단서는 댈 수 없겠으나 옛날 문적을 상고하건대 다만 무덤이 이 산 가운데 있을 것이니 단을 설치하여 받들기를 경건히 하는 것이 어찌 의(義)를 일으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계단 아래 단을 쌓고 제물을 갖추어 올리고 정경부인(貞敬夫人) 봉화정씨(奉化鄭氏)를 부(祔) 하고 지평공을 그 아래 함께 모시어 제사를 지내고 또 여러 자손이 차례로 서서 행사를 예(禮)로서 하게 했다. 이미 이렇게 일을 마치자 또 서로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 해마다 제사를 한 차례씩 올리는 것은 예의에 마땅한 것이다 라고 하고 불가불 돌을 세워 그 유래를 기록해야 한다고 했다. 15년이 지난 기미년(1799) 여름에 돌을 깎아서 곧 글을 새기게 됨에 나 김약련(若鍊)에게 음기(陰記)를 지을 것을 위촉 해왔다. 나는 이조판서 김공의 후손으로서 또한 일찍이 묘소를 파서 징험을 하고 단소(壇所)를 구축하는 의논에 참여해 들은 적이 있었으니 이제 이번 제단비 설립 역사(役事)에 어찌 내 문장이 짧다고 하여 감히 사양할 수 있으리오. 드디어 간략하게 일의 시종(始終)을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외 후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선성(宣城) 김약련(金若鍊) 삼가 짓다.
외 후손 진성 이헌순 삼가 쓰다.(1800년 10월)
* 김약련(金若鍊)
1730(영조 6)∼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선성(宣城) 또는 예안(禮安). 자는 유성(幼城), 호는 두암(斗庵) 또는 인수(忍叟). 아버지는 생원 지(墀)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생원 태래(泰來)의 딸이다.
1774년 증광별시 문과전시(增廣別試 文科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1776년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함을 입어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정월에 풀려났다. 그뒤 16년 동안 은거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793년(정조 17)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고, 이어 전적·병조좌랑·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효부전 5편, 열녀전 7편, 동물전 3편 등 국문학사에 연구 가치가 있는 글을 남겼다. 특히 동물전은 순수한 문예창작물이다.
저서로는 《두암선생문집》 10권 5책이 있다.
2) 사모정기(思慕亭記)
사모정(思慕亭)이란 나의 외선조이신 공조판서(工曹判書) 평해 황공의 제단의 제계숙제(霽戒宿霽)하는 곳이다(제단에 제사지내기 전에 목욕제개하는 곳임). 처음에 공이 문과로 진출하여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고 총재(冢宰)가 되었으니 명예와 지위가 이미 높고 뚜렷하게 되었다. 아들로서 지평(持平) 전(銓)과 제주(祭酒) 현(鉉)과 훈도(訓導)연(鋋)이 있었으며 현손에는 목사인 금계선생(錦溪先生) 준량(俊良)이 있었고 외손에는 홍문관 교리(校理) 김조(金漕)와 이조판서인 문절공 김담(金淡)이 있었으니 그 복스러운 후손이 이와 같았다. 다만 옛날에 묘소를 보수하지 아니하여 옷과 신발을 저장한 무덤이 점차로 황량하고 애매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의 묘소는 영천군(현재 영주) 동쪽 이십리 지점인 애동(艾洞)에 있으니 일명 황분현(黃墳峴)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제 큰 봉분 하나가 덩실하게 있으니 이는 위계가 높은 분의 무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구덩이를 파고 지석(誌石)을 찾아보았으나 증거 될 만한 것이 없었음으로 이에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단소(壇所)를 그 아래에 설치하여 비를 세우고 제실을 건축한지 이미 몇 해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여러 자손들이 서로 더불어 의논하기를 몇 칸의 집을 제실 밖에다가 건축하여 자손이 제개하고 목욕하는 집을 넓히는 일을 어찌 아니 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정미년에 재물을 모아 기와를 굽고 일년을 넘기니 갑자기 여섯 칸의 집이 이루어 졌다. 가운데에 대청을 만들고 좌우에 방을 들였다. 이에 그 현판에 쓰기를 「사모정(思慕亭)」이라 하고 복진(福鎭)과 필진(必鎭) 등 제군들이 그 기문(사모정기)을 나 승학(承學)에게 짓기를 요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데 자손이 조상에 대해 그 누구인들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리오. 오직 그 정성에 혹시라도 게을리 하는 바가 있으면 잊어버려 소홀히 여기기 쉽게 되어 도리어 시달(수달피-수달피가 물고기를 잡으면 여기저기 늘어놓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선조에 제사 지내는 것으로 보았다. 즉 수달도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하물며 사람이 되어 조상에게 제사를 받들지 않음이 있겠는가 라는 말)이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조상을 사모한다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이제 판서공의 후손들은 묘역(墓域)이 확실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단소(壇所)를 만들고 단소만으로는 부족하여 돌을 깎아 표석을 세웠으며 제실이 좁다는 이유로 이 정자를 더 지었으니 그 정성과 힘의 단란함이 참으로 효자와 아름다운 후손의 선조에 대한 사모(思慕)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선조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다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또 다시 현판 이름을 지어 달게 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아 의리를 사모하게 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대대로 독실하게 추모하여 내내 쇠퇴함이 없게 하려고 한 것이니 아 어찌 이다지도 진지한고! 진실로 이와 같이 하면 판서공의 영혼이 어찌 후손이 있음을 기뻐하지 않겠으며 남아있는 두터운 음덕이 또 오래 갈수록 어찌 더욱 다함이 없겠는가.
나 승학(承學)은 어리석고 비루하며 들은 것이 없어서 진실로 붓을 적실 수가 없으나 김 문절공의 후손인지라 일이 한 집안일과 같음으로 감히 참담됨을 잊고 정자(亭子)의 이름 붙인 취지를 위와 같이 짓는다.
기유년(1939년) 초복절(初伏節)
외손 선성(宣城) 김승학(金承學)은 삼가 기술(記述)한다.
* 김승학(金承學)
1894년(고종 31)∼ ? . 본관은 선성(宣城) 또는 예안(禮安).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수촌(水村)으로 호진(灝鎭)의 아들이다. 그는 성암(誠庵) 김세영(金世榮)과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의 문인으로 문예와 행실을 갖추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 <수촌집(水村集)> 3책이 있다.
3) 추원재중건기(追遠齋重建記)
훌륭하도다 재사(齋舍)의 편액을 추원(追遠)이라고 게재(揭載)함이여. 추원(追遠)이라 함은 공경함으로 선조(先祖)를 사모하여 멀리까지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백성들이 태어난 지가 또한 오래 되었다. 누구인들 아무 할아버지와 아무 현인의 손자가 아니며 누구인들 모(某)대(代), 모(某)성(姓)의 자손이 아니겠는가. 저 어떤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없고 사모하는 것이 없는 것은 진실로 또한 무슨 까닭인가. 반천년(半千年)하고 일기세(一紀世)전의 고려(高麗)의 충렬왕과 공민왕 때에 문과(文科)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휘(諱)가 유정(有定)이며 호(號)가 미균(米囷)인 분이 있었으니 조상 황락(黃洛)공의 후손이다. 많은 자손들이 깊이 묻힌 덕(德)과 행적을 찬양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한문(漢紋)과 영수(永洙)를 고산(孤山)아래에 있는 이 삼호서실(三乎書室)에 보내서 그 가문에 전하는 문(文) 한권을 소매 안에 넣어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이 제사(齋舍)의 중건기(重建記) 짓기를 요구하였다. 스스로 나의 얕고 좁은 역량을 돌아보아 여러 차례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단소(壇所)의 비문(碑文)을 읊어보고 음미해 보니 바로 승지(承旨) 김약련(金若鍊)의 봉황(鳳凰)을 토(吐)하는 재주가 서린 훌륭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고 선생(有定公)은 문장도 깊고 덕(德)도 높았으며 일생동안 논어(論語) 읽기를 좋아했고 문장은 그 나머지 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시(詩)는 당(唐)나라․송(宋)나라 풍(風)의 시를 지었고 두루 깨끗하고 뚜렷한 벼슬을 드날렸다. 그래서 감히 꼬집어 헐뜯을 만한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 리가 두텁고 근원이 멀면 가지가 번성하고 잎이 무성한 법이다. 그러한 고로 후손이 있어서 추원재를 북두성이 비추고 달이 밝은 마을의 상서로운 구름이 때때로 감도는 거리에 설치하였도다.
세월이 오래되자 집이 무너지고 헐어졌기에 서로 상의하며 의논이 일치된바 임신년(壬申年)에 경영을 시작하여서 중건하였는데 옛날보다 더욱 넓히었다. 드디어 운(韻)자를 따서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게 하니 “자손들이 뜻을 보이고 정성을 멀고 가까이에 보이니, 기(旗)를 들고 북을 치는 선비들이 물처럼 솟는 문(文)과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는 듯한 사(詞)를 무더기로 이루고 상자에 넘치게 지어 올렸다. 글들이 선대의 덕이 깊이 묻혔던 것을 찬양하는 일에 언급되니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함이 있게 한 것으로 7월(槐黃)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었으니 모두 구슬과 인끈 같고, 비단 무늬 같이 훌륭하여, 화씨(和氏)의 구슬과 같이 진기하여 유산(酉山)에 수장할 만한 가치 있는 보배였다. 창살의 아래에는 왕골 자리와 위로는 대자리를 깔고 친족을 도타이 친근히 해서 화기애애하게 읍(揖)하고, 늙기를 즐겁게 해서 자못 화주(禾主)와 습지(習池)의 풍도(風度)를 지었으니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모두가 이만한 조상이 있어서 이만한 자손이 있게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죽령(竹嶺) 아래이고 낙동강 위인 풍기와 영주사이에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전해지는 잘난 인재가 모인 것이 구성(龜城)의 삼판서(三判書)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구슬 같은 고택에 금계(錦溪)와 해월(海月, 황여일) 초곡(草谷, 황계옥)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발자취를 이어 배출해서 아주 넉넉하게 되었다. 문물(文物)의 고장에 비추고 비춰서 강좌(江左, 안동)지역에서 제일로 드날렸으니 이 어찌 못의 물이 깊어서 길게 흐르게 된 것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감히 한마디의 말을 현판인 목판에 새겨서 싣는 것은 계책을 남겨주는 선대의 아름다운 덕과 선대의 뜻을 이어서 일을 전해 가는 자손들의 효성을 적은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선생(有定公)의 넓고 많은 문장과 우러러 볼 훌륭한 덕이 별과 달에 비칠 만 한데 병화(兵火)를 입고 글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지석(誌石)을 상고 할 수 없어서 끝내는 모든 사실(史實)을 증빙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추모하는 정성만을 써서, 섯가래로 재실을 짓는 썩지 않는 자료(資料)로 표현했으니 이에 이르기를 옛사람들이 이른바
“돌은 때가 되면 문드러지지만 덕(德)이 있는 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진실로 미균(米囷)때문에 준비된 말일 것이다. 글을 출중한 후손 사람들에게 보내노니 어찌 다만 시경의 소아(小雅)편에 실린 “조상의 심어놓은 나무만을 공경하는 데에 그쳐서야 되겠는가” 시경 대아(大雅)편에 이르기를 “언제나 효도다 하시니 효도를 법으로 삼는다” (永言孝思 孝思有則) 라고 했으니 진실로 공경(恭敬)할만 하고 사모(思慕)할만 할 것이다.
단기 4332년(1999) 기묘년 초화절
한양후인(漢陽後人) 조광영(趙光永)은 삼가 기를 짓는다.
4) 추원재중건기 서(追遠齋重建記 序)
현재 영주시(榮州市) 이산면(伊山面) 두월리(斗月里)의 덕동(德洞)은 옛날의 영천(榮川) 임지면(林只面)의 창팔리(昌八里)였다. 새로이 재사(齋舍)를 짓고 추원재(追遠齋)라고 편액(扁額)을 단 것은 곧 평해(平海) 황씨(黃氏) 여러분들이 선조 판서공(判書公)의 제단(祭壇)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옛 터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산은 푸르름을 더한 것 같고 물은 맑음을 더한 것 같으며 제비들은 하례(賀禮)를 올리는 것 같이하거든 하물며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追遠報本)하는 정성이야말로 그칠 때가 없음 있겠는가? 역사(役事)가 늦게 끝나자 후손인 무섭(武燮)선비가 나에게 문(門) 위의 판에 기록할 글을 요구하였으니 해는 민국(民國)이 건국된 지 두 번째 되는 을해년(1995) 2월이었다.
삼가 상고하건데 공(公)의 이름(諱)은 유정(有定)이다. 이씨조선 개국 때 관직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고 처음으로 평해로 부터 지금의 영주에 옮겨서 자리를 잡았다. 세상에서 일컬으기를 공(公)은 평생에 논어(論語) 전부를 읽기를 좋아하였고, 시문(詩文)이 당(唐)나라 사람의 품격(品格)이 있었다고 한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우연히 명아주 지팡이를 끌고 사립문을 나서니 사월의 청화한 날씨에 제비가 나는 도다. 흥(興)을 타고 김씨 젊은이를 찾아가니 장미꽃 한 송이가 엉성한 울타리에 빼어났구나” 라고 했다. 이른바 김(金)씨 젊은이라는 사람은 곧 공의 외손자인 문절공(文節公) 담(淡)이었다. 이때로 부터 십여세(十餘世)가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많은 본손(本孫)과 지손(支孫)들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독실하게 계승하여 큰 유가(儒家)의 규범을 잘 지켜왔으니 이는 역시 공(公)이 덕(德)을 심어서 꾀(謀)를 물려주기를 후(厚)하게 한 징험(徵驗)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재사(齋舍)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낮았던 것을 넓혀서 위로는 당실(堂室)로부터 아래로는 행랑채(廊廡 )에 이르기까지 주선하고 제사하는 모든 일을 행할 장소가 넓직하여 여유가 있었으니, 이는 또한 여러 훌륭한 자손들이 그 마을을 합쳐서 힘을 쓰고 정성을 다한 효과가 아니겠는가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해서 이에 그 덕을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지장과 피(곡식)에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이 향기롭다“라고 했으니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을 뿐이고, 그 사람은 보지 못하였는데 처음으로 여기 덕동(德洞)의 재사(齋舍)에서 그것을 보게 되었다. 감히 황씨(黃氏) 여러분을 위해서 칭송을 하노니 만약에 대대로 이와 같이 해 갈 수 있다면 그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에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단기 4328(1995)년 언해 3월 3일
순천후인(順天後人) 김철희(金喆熙)는 삼가 서(序) 하노라
6. 글을 맺으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려말선초의 정치사회적 변혁기를 살다간 미균 황유정 선생의 삶의 모습은 각종 문헌속에서 찿아볼수 없었으며 <평해황씨대동보(平海黃氏大同譜)>와 일부 문헌에 실린 “1343년 출생, 문과급제, 공조판서, 초계군수, 시(詩) 2편”등 서너줄 기록이 고작이었다. 이러다보니 처음부터 선생의 행적을 찾아본다는 것은 막막한 일의 시작이었다. 다만 선생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선생의 성장과정과 관로진출의 단적인 면들을 추정해 볼 수 밖에없었다. 미균 선생은 영주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판서로 당대에는 명성이 높았으나 그의 흔적은 대부분 소실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평해황씨대동보(平海黃氏大同譜)>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합천군지(陜川郡誌)>, <초계군지(草溪郡誌)>, <서울시사(市史)>, <영천지(榮川誌)>, <영주지(榮州誌)> 등 옛 문헌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았으나 선생의 관직이나 그 삶의 흔적은 찿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대동보 등 몇 문헌을 통해 선생의 삶을 단적으로나마 살펴보면 선생은 어려서부터 외조부인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신진사대부로 성장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당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인 외삼촌인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과 장인인 염의공(廉義公) 정운경(鄭云敬) 등의 도움을 받았을것으로 보인다. 또한 처남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참판공(參判公) 정도존(鄭道存), 판윤공(判尹公) 정도복(鄭道復), 그리고 외사촌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안경온(安景溫),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道巡問使) 안경량(安景良), 영삼사사(領三司事)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公)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벼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초계군수(草溪郡守)시절 단정,청렴하여 초계의 군민과 아전들이 오래토록 그 덕을 기렸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관직생활은 청렴하고 밝은 다스림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목민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생은 시문(詩文)에 뛰어나 당인(唐人)의 풍조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시와 문장에 능통했던 것 같다. 또한 당시 외조부인 근재 안축, 장인인 염의 정운경, 처남인 정도전 등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적 학문을 갖춘 신진 사대부의 한사람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론을 해본다. 그는 아들 삼형제를 당대의 인물로 성장시켜 놓는 등 선생의 기록은 소실되었지만 선생의 삶의 편린들은 아직도 곳곳에서 남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을 맺으며 조광영(趙光永)이 지은 추원재중수기로 선생의 간략한 삶을 논해 본다. “선생은 문장도 깊고 덕(德)도 높았으며 일생동안 논어(論語) 읽기를 좋아했고 문장은 그 나머지 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시(詩)는 당(唐)나라․송(宋)나라 풍(風)의 시를 지었고 두루 깨끗하고 뚜렷한 벼슬을 드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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