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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당한 환란(행 21:27-40)
지난 시간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네 사람과 함께 결례를 지키며 그 비용을 부담해서 자신이 율법과 규례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대적자들에게 보여주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결단합니다.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다면 복음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율법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사도바울은 성령이 예언한 대로 대적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신앙생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내가 가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하고 내게 도움이 되는 그런 길이기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앞에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 지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붙잡힐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생각을 부인하고 그길을 가는 것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왕 예수 믿으려면 고지식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너무 융통성이 많아지면 신앙의 거룩함, 신앙의 능력을 잃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편협하게 예수 믿느냐?", "왜 그렇게 촌스럽게 예수 믿느냐?" 이렇게 비판해도 개의하지 마십시요. 이왕이면 독하게 믿으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성수하세요. 아무리 급한 일 있다 하더라도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가 우선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다음에도 주신 명령입니다. 예배생활은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데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아직 신앙이 연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하려면 철저히 하십시요. 자녀 교육, 신앙중심으로 철저히 하십시요. 조금씩 양보하다가 나중에는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 충성된 권사님의 자녀가 교회에 잘 다니지 않으니까 '주일예배만이라도 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중보니까 주일도 안 지킵니다. 아닙니다.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왕 믿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타협이 없습니다.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는 결국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고지식하게, 독하게 예수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바보취급을 받아도, 지금은 무시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이 다음에 하나님앞에 서는 날 후회함이 없습니다. 요즘 저는 코로나시기에 우리자신의 영적인 모습이 자꾸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가운데 놓여져 있는 우리들은 지금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까?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까? 이왕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위해서 달려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시험이 있다고 주저앉거나 타협하고 적당히 신앙생활한다면 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이유(27-29절)
27절,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대적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 비용까지 대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의식을 지키고 있는 데 결례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았습니다.
저들을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았습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겠습니까? 성경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바울이 이전에 선교여행을 집중적으로 했던 에베소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쉽게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에베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했던 곳이었습니다. 기적과 능력도 많이 나타나긴 했지만, 소란과 시련도 많았습니다. 바울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비상한 기적을 행하게 하시고,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자 에베소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두려워하여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에베소에 3년이나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에베소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는 사랑과 열정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온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열심히 전도했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도 가끔 이런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문제삼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8절,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가깝게 지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못할 짓 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으라' 해 놓고서는 '율법으로는 구원얻을 수 없다' '이방인은 할례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으니 율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다르지만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받으라' 권한 것도 바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율법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까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성전을, 이방사람인 드루비모와 함께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힌 것 아니냐?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성전은 가장 가까이 제사장의 뜰, 그리고 유대인의 뜰(남자들만), 여인의 뜰, 그리고 계단 내려가 낮은 곳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는데,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는 큰 벽이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 이상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뜰 사이에는 '이곳을 지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보존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방인을 멸시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실제로 이방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유대법으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사형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29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성전에도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은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바울이 미워했습니다. 어떻게든 바울을 없애버리고 싶었습니다. 무슨 건수만 있으면 바울을 얽어메어 죽이고 싶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붙잡은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없습니다. 왜 죽여야 됩니까? 왜 바울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에도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 선택한 길은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꼭 가야할 길이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전쟁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은 선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습니다, 왜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왜 사람들은 의인과 경건한 자와 선한 자를 그대로 두고 지낼 수 없습니까? 왜 핍박을 해야 합니까? 세상은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온 땅에 가득 덮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사자는 핍박을 받습니다.
믿는 사람, 진실하게 사는 사람,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또한 이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울하게도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죄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일이 순리대로 편안하게, 안일하게, 무사하게, 그렇게 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아프카니스탄, 저 북한, 세계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각오로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과 환란은 사회적 고통입니다. 영적인 시험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이 때 진정으로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정금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시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핍박받는 바울(30-36절)
30-32절,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율법을 훼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말에 모여있던 유대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왜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을까요? 성전 내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성전 밖으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는 바울을 죽이겠다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또 하나 성전의 제단 뿔을 잡는 자는 누구도 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이 제단 뿔을 잡는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제단 뿔을 잡지 못하도록 재빨리 끌고 나간 것입니다.
30절 후반절 봅니다. 바울이 성전 밖으로 끌려나가자 성전의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는 이제 죽었구나' 무슨 생각했을까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돌 던지는 사람 뒤에서 '잘한다'하면서 옷 지키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자신이 아니었습니까?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나왔고 성전 문은 닫혔고, 이제 끝이 보였습니다. 아 이렇게 끝을 맞이한다고 예언하셨나 보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32절 끝을 보니 천부장과 백부장과 군사들이 오기까지 바울은 두드려 맞았습니다. 왜 때렸습니까? 31절 보니까 죽이려 할 때에,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죽음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은 이미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오면 붙잡힌다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 바울의 고통과 절망은 어떻겠습니까?
이때 천부장이 백부장과 군사를 거느리고 소요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천부장은 로마군 일천명의 지휘관이죠. 백부장은 백명의 지휘관입니다. 오순절에는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세계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도시에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든다는 것은 치안 담당관들에게는 정말 신경쓰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위쪽에 안토니오 탑이라고 하는 로마군의 망대에서 천부장이 치안 질서 유지를 위해 진두지휘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란하다는 정보가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군사들을 이끌고 현장에 당도해보니 바울이 죽도록 두드려 맞고 있었습니다. 천부장이 군사들을 이끌고 도착하니 그들이 보고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33절로 35절을 보면 우선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여 군중들과 격리시킨 후에 이 사람이 누구며 무슨 일로 때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천부장이 일단 바울을 군대의 병영 안으로 끌고 가는데 36절을 보십시다.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바울을 죽이려고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거짓정보와 잘못된 신앙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마귀 짓입니다. 저 이스람교 과격파들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을 익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종교라는 이름으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는 사람들을 보면 무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둠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사자로서 어둠과 타협하지 말고 빛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박한 환경속에서 사도바울을 구해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로마의 천부장이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천부장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부장을 통해 바울을 구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세상 살면서 가끔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돈입니까? 돈으로 다 되는 것 같아도 못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지식입니까? 아는 사람이 더 답답하고 불안한 것입니다. 의사입니까? 고치는 병도 많지만 못 고치는 병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 여러분. 위기의 때에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 121:1-3“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이 성경 말씀 생각합니다.
(롬 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지금은 비록 고난의 가시밭길같이 느껴질지라도 분명히, 반드시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해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스스로 변호하는 바울(37-40절)
천부장은 일단 바울을 병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요쳥을 합니다. 37절,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유대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고통하던 그 사람이 헬라어로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 하니까, 유대인이라 히브리어만 하는 줄 알았다가 헬라어를 유창하게 하니 깜짝 놀라서 “당신이 헬라말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교양있는 헬라어로 말을 하자 깜짝 놀라 묻습니다.38절,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주후 54년경 한 애굽인이 예루살렘에 왔었습니다. 이 사람은 선지자 행세를 하면서 유대인들을 로마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동하여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축제기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정치인과 관리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슴에 칼을몰래 품고 다니던 4000명이 있었는데 '애국적 암살단'이라 칭했습니다. 유대인들 마음에 로마사람들에 대한 한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로마군의 즉각적인 진압으로 흩어졌고 주모자는 몰래 도망친 사건이 있었는데 ·천부장은 바울이 바로 그 사천명의 자객을 거느렸던 애굽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애굽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명 때문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작은 촌 동네가 아니라 길리기아의 지방의 수도 다소 태생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에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이 상당히 수준 높은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천부장에게 말합니다. "부탁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한번 말할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천부장이 기회를 주어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사도행전 22장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저는 두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어떤 형편이었습니까? 천부장이 오기 전까지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죽이려는 마음으로 때렸으니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천부장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이 위기를 피해 안전한 곳에서 쉬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울은 그냥 현실에 메여 끌려다니지 않았습니다. 피투성이 모습으로 이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천부장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 놓고 실컷 두들겨 팼으니 그들이 승자입니까? 아니면 피묻은 얼굴로 그들 앞에 다시 선 바울이 승자입니까? 누가 승자입니까? 누가 패자입니까?
또 하나 도대체 바울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백성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도 할 만큼 했다. 이제 너희 구원은 너희 문제다'하고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내 할 도리는 다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서고 있습니다. 왜였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사도 바울에게 남아 있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다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복음이 아니면 저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비록 죽음을 당한다할지라도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노라고 결단했던 바울은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저들이 알지못해서 이렇게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이지 나처럼 안다면 저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사명, 그 어떤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포기할수 없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복음을 진리입니다. 결코 타협할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복음이 아니면 저들을 구원할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 진리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마침내 성령이 예고하신대로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모함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아직 바울이 죽을 때는 아니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의 천부장을 통해 바울이 상아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자기를 죽이려고 폭력을 쓰고 눈에 독기가 서린 저들을 향해 바울은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한 때 자신도 그런 사람들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의 삶을 변화되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비록 지금 저들이 나를 핍박하고 죽이려하지만 저들도 깨달으면 내가 만난 예수를 만난다면 저들도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백성들 앞에서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어떤 시험과 환란이 다가와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입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 예수님을 힘있게 외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