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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8) 원산 해성학교
1921년 원산 해성학교 개교… 바다의 별, 희망의 등불이 되다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차렷 자세의 원산 해성학교 어린 학생들과 구경꾼들, 유리건판,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지역 유일의 본당 부설 학교 10년 전에 폐쇄
1920년 7월 26일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함경도를 포함한 한국 북동부 지역을 관할하는 원산대목구를 설정하고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에 이관했다. 그러면서 초대 원산대목구장으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임명했다.
원산대목구 설정과 함께 1921년 5월 갑작스럽게 원산본당 주임을 맡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원산에서 두만강에 이르기까지 함경도 전체에 가톨릭 학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며 ‘해성학교’(海星學校)를 설립했다. 우리말로 ‘바다의 별’ 곧 ‘마리 스텔라’이다. 한없이 크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바다의 별처럼 우리 삶에 희망을 주는 등불 같은 존재인 성모님께 의탁해 가톨릭 교육 이념을 펼치겠다는 의지로 지은 이름일 것이다.<사진 1>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우리의 소망과 일치한다. 지역 유일의 본당 부설 학교는 10년 전에 폐쇄되어 지금은 허물어져 가는 작은 집일 뿐이다. 신자와 외교인들이 매일 사제를 찾아와 학교를 다시 열어 달라고 청하고 있다. 소년 30명이 한꺼번에 등록 신청을 하고, 새로 산 교리문답 책을 보여 주며 그들의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마침내 낡은 건물을 수리했다. 공사가 끝나자마자 생기발랄한 소년들이 신이 나서 입학했다. 첫 학년이 끝나고 방학 후 새 학년이 시작될 때는 1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학교가 11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없어서였다. 소녀들도 물러서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이 열등하다는 케케묵은 고정관념에 저항했다. 113명의 소녀가 갖은 고생을 감수하고 매일 학교에 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519~520쪽)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원산 해성학교 남학생 수업, 유리건판,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남학생 35명·여학생 12명으로 첫걸음
에카르트 신부는 수도원 목공 책임자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의 도움을 받아 긴 책걸상 6개만으로 해성학교를 시작했다. 개교 당시 교사 2명, 남학생 35명, 여학생 12명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에카르트 신부는 성인 25명에게 독일어를 가르쳤다. 개교식 날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학생들은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날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남녀를 구별해서 한 교실에서 함께 가르치고 공부할 수 없었다. 특히 겨울에 여학생들이 고생했다. 남학생이 먼저 수업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느라 몸이 꽁꽁 얼었기 때문이다.<사진 2>
“추운 날은 학교에 오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에게는 매일매일 수업이 소중하고, 다른 학생들이 배우면 자기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 어느새 원산에서 ‘제일 좋은 학교는 해성학교’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 1922년 2월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예기치 못한 방문을 받았다. 원산에서 도보로 3시간 30분 거리에 문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가톨릭 신자가 한 명도 없고, 반경 두 시간 거리 이내에는 학교도 없었다. 아이들은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독일 아이들이라면 기뻐했겠지만 겨울 지나 봄이 찾아오듯 서서히 깨어나면서 배움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슬픈 현실이었다. 개신교 목사들이 학교를 세워 주겠다고 했지만 문평 이장과 원로들은 영적 아버지인 신부를 원한다고 안드레아스 신부에게 호소했다. 돈은 없지만, 논밭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며 신앙을 가지겠다고도 했다. (⋯) 수사들이 학교를 완공하는 데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분도통사」 277~280쪽)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1909년 한국에 진출해 서울 백동(혜화동)에 수도원을 먼저 지은 후 성당과 학교를 지었는데, 원산대목구에서는 거꾸로 했다. 학교를 먼저 짓고 그 다음으로 성당을 보수하고, 수도원을 지었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원산 해성학교 운동회, 유리건판,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4년 남학생 500명·여학생 300명 달해
1921년 개교한 원산 해성학교는 얼마 안 가 비좁아졌다. 일본 정부도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했다. 급기야 1924년 봄학기에는 남학생이 500여 명, 여학생이 3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이에 비해 교실은 4개에 불과했다. 그래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1924년 9월 60명 정원의 교실 4개를 더 짓기로 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아와 그달 18일 원산 해성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5월 22일 열린 해성학교 운동회를 기록영화로 촬영했다.<사진 3>
“5월 20일 대규모 체육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여러 주 동안 교사들이 연습하고 준비했는데, 비가 억수같이 오는 바람에 5월 22일 금요일로 연기되었다. (⋯) 5월 22일 체육대회가 열렸다. 화창한 날씨에 며칠 전 내린 비로 운동장엔 먼지가 없었다. 체육대회는 원만히 진행되었다. 아이들과 관중이 하나같이 즐거워했다. 기록영화를 찍을 좋은 기회를 총아빠스님께서 놓치실 리가 없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카누토 다베르나스 신부의 유능한 지휘하에 우리 악단이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는 점이다.”(「분도통사」 382~383쪽)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원산 해성학교 여학생 수업, 랜턴 슬라이드, 1925년 5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무료 야간 빈민학교 ‘호수천신학교’도 운영
해성학교는 1925년 11월 21일 툿찡포교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4명이 원산에 도착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수녀들이 여성 교육과 유아 교육을 도맡았기 때문이다.<사진 4> 또 수녀들은 무료 야간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도 운영했다. 이런 헌신적인 수녀들의 활동에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9월 말 원산을 떠나면서 수도자들에게 수녀원을 짓는 데 인색하게 굴지 말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우리 해성학교는 시 당국과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훌륭한 사립학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월사금을 마련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한국 전체의 실상이다. 차이가 있다면 공립학교는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퇴학시키는데 우리는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학생들을 퇴학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 우리가 운영하는 학교를 살려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은인들이 변함없이 우리를 도와주느냐 않느냐, 새로운 은인들의 도움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달려 있다.”(「분도통사」 552~553쪽)
원산대목구 성 베네딕도회 남녀 선교사들은 독일 은인들에게 선교 자금을 요청하면서도 한국인들에게는 복종과 순응을 요구하는 자선가의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환대’했고, 배우기 위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을 단 한 명도 내치지 않았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9) 숭공학교(崇工學校)
“기도하고 일하라”…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능공 양성에 큰 공헌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목공부’,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목공부가 제작한 제대’,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네딕도회,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실업학교 설립
“가파른 언덕배기, 수도원 방향으로 꼬불꼬불한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실업학교가 있다. 얼마 전에 일부가 증축되었고, 그 옆에 꽤 넓은 부속 건물도 새로 들어섰다. 입학을 원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나날이 증가 추세에 있어서 이 신축 건물도 머지 않아 또 좁아질 것이다. 극동에서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실업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문화 민족에게 있어서 실업학교의 성공은 당연히 미심쩍을 수 있다. 그러나 실업학교 설립을 시도하지 않기에는 베네딕도회 모토의 ‘일’(Labora)과 ‘기도 생활’(Ora)이 너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실업학교의 설립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해 보였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76쪽)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선교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설립한 실업학교가 한국민들에게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결실은 개교와 함께 곧바로 드러났다. “백성들은 가난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빈자 중의 빈자였다.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을 뻔했던 시절도 너무 짧았다. 박해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1894년에도 조조 신부가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동학군에게 살해되었다.
이 모든 저간의 사정은 실업학교가 설립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는 탄탄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명민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배움이 빨라서 좋은 결실을 맺고 세간에 학교의 명성을 드높였다. 목공부와 철공부는 소박하게 출발했지만 신통한 마술을 부리듯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비중을 증대시키고, 그리스도교 자체의 명예도 빛내 주었다. 이제는 작업장과 교직원이 부족한 데다 증축 자금도 달려 급기야 지원자 가운데 수백 명을 되돌려 보내야 할 지경이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제차부 실습’,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철공부 실습’,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기도와 일’ 숭공학교 운영
그리스도인들은 실업학교에서 생계 문제의 해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수공업의 활성화를 통해 삶의 기반을 다졌다. 박해 시대부터 이어져 온 그리스도인에 대한 외교인들의 존경심도 더욱 강화되었다. 한때 박해받고, 멸시받고, 빼앗기고, 내쫓겼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회적 움직임을 주도하고, 산업 활동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외교인들은 박해의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준 영웅적 용기와 희생 정신에 감탄을 금치 못했듯이, 이제는 엄청난 경제적 성과도 창출할 줄 아는 놀라운 동력으로서 그리스도교를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런 사회적 변모는 어머니 교회가 자녀들의 일용할 양식을 돌보기 위해서도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지 외교인들에게 보여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77쪽)
베버 총아빠스가 이토록 자랑한 실업학교는 바로 1910년 서울 백동 수도원 안에 설립한 숭공학교(崇工學校)다. 숭공(崇工)은 ‘기도와 일’을 의미한다. 백동 수도원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숭공학교의 목적과 가치, 목표를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가톨릭교회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을 형성해 중산층을 양성한다. 셋째, 젊은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다. 넷째, 유능한 현지인 평수사를 양성한다.
이러한 교육 이념으로 숭공학교는 목공·철공·제차·원예 분야의 숙련된 장인을 양성하기 위해 매일 이론 2시간·실습 8시간 등 강도 높은 수업을 진행했다. 3년 과정의 견습 기간을 통과한 학생들은 수도원 안에서 2년 더 기능공으로서 기술을 익혔다.
일데폰소 플뢰칭거 수사가 지도한 목공부는 각종 가구는 물론, 제대·감실·촛대·독서대·무릎틀·강론대·주교좌 등 성당 전례용 집기를 제작해 명성을 날렸다.<사진 1>·<사진 2> 힐라리오 수사가 지도한 제차부는 마차를 비롯한 각종 운반용 차량 상부 제작과 자동차 수리로 이름을 높였다.<사진 3>·<사진 4> 원예부는 전문적인 종묘재배와 양봉·양계 기술을 익혔다.<사진 5>
- <사진 5>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원예부 실습’, 유리건판,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목공·철공·제차·원예 분야 장인 양성
숭공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목공부를 지도하던 일데폰소 플뢰칭거 수사를 비롯한 총 5명이 강제 징집되면서 숭공학교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독일은 유럽에서뿐 아니라 조차지인 중국 청도에서도 일본과 영국의 연합군에 패했다. 이후 데라우치 총독은 백동 수도원의 독일 선교사들을 감시하고 단속했다. 독일인 선교사들은 수도원 안에서 조용히 지내야 했고, 행동의 자유는 제한됐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고, 고해성사 말고는 모든 선교 활동이 금지됐다. 자연히 숭공학교 학생 수도 줄어들었다. 결국 선교 베네딕도회가 1920년 원산대목구를 맡아 서울을 떠나게 됨에 따라 1923년 숭공학교는 폐교하고 만다.
베버 총아빠스는 숭공학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숭공학교 작업장에서는 훌륭한 걸작품뿐 아니라 탁월한 장인들도 배출되었다. 그들은 수습 시절부터 수도자들의 엄격한 지도 아래 낯선 연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법을 배웠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511쪽)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0) 덕원신학교
일제 시기 유일한 국내 신학교, 공산정권에 의해 강제 폐쇄
- <사진 1> ‘덕원신학교’,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원산대목구 설정 직후 덕원신학교 설립
“좋은 신학교를 이룩하려면 조급한 마음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이 말은 신학교에서 성장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에게도 해당된다. 선교지에서 신학교를 성공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더 힘들다. 어린 학생들은 지금까지 길들여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생활과 사고방식 가운데서 성장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고 나면 자신이 배운 것을 동포들에게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교사가 불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정력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개인적 선교가 성취됨을 발견해야 한다.”(「분도통사」 504~505쪽)
1920년 8월 5일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함경남북도와 간도 지방을 관할하는 원산대목구를 설정해 한국에 진출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에 위임하자 선교사들은 곧바로 신학교를 설립했다. 수도원 소속 사제뿐 아니라 원산대목구를 비롯한 한국 교회 교구 사제, 그리고 실업학교인 숭공학교 출신의 평수사 양성을 위해 원산대목구가 운영하는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세웠다.
원산대목구장 겸 덕원수도원장인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1920년 서울 백동수도원에 있던 숭공학교 일부를 고쳐 소신학교로 운영했다. 이후 1927년 서울 백동수도원이 덕원으로 완전히 옮겨짐에 따라 신학생들 역시 덕원수도원 옆에 새로 지어진 성 빌리브로로드 신학교, 곧 덕원신학교로 모두 옮겼다.<사진 1>
“덕원역에서 내려 30분 정도 거리를 걸어서 베네딕도 수도원 전경을 마주했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멀리서 봐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푸른 숲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우뚝 솟은 종탑이 보이는 수도원과 그 옆에 신학교가 있었다. 신학교 뒤편으로는 수목이 울창한 얕은 야산이 있었고 그 너머로 동해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수도원 앞으로는 넓은 논밭이 시원하게 트여있었는데 그 들판 한가운데로 서울에서 함흥과 청진으로 가는 기차가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72쪽)
덕원신학교는 1921년 11월 3일 소신학교 신입생 14명으로 개교했다. 교장은 안셀모 로머 신부였다. 교육 과정은 예비과 2년, 소신학교 6년, 대신학교 6년 등 14년이었다.<사진 2> 예비과는 보통학교 교과를 주로 보충했다. 소신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교리·기하·대수·한국어·독일어·일본어·역사·지리·화학·미술·음악·체조 등을 가르쳤다. 대신학교에서는 철학 2년, 신학 4년의 교육이 이어졌다.<사진 3>
교수진도 탁월했다.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자신들이 양성한 한국인 사제들의 신앙과 학문 수준을 높이기 위해 역량이 뛰어난 교수진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철학과 신학 교수는 반드시 박사 학위 소지자로 배정하려 했다. 그 결과 덕원신학교는 1921년 개교 이후 일제 말기까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박사 학위 소지자 교원을 확보한 신학교였다.
- <사진 2> ‘덕원신학교 수업’,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3> ‘기도 중인 선교사와 신학생들’,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윤공희 대주교와 김남수·지학순 주교 등 배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맨 먼저 부딪히게 되는 난관은 라틴어 시간이었다. 소신학생은 일반과목 공부도 해야 하지만 라틴어 공부는 필수였다. 당시 미사를 전부 라틴어로 드리고 있었고 또 대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 과목을 모두 라틴어로 강의를 들어야 했으므로 라틴어를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롭고 가족적이었다. 교수 신부님들이 독일 베네딕도회 소속이었으니 독일인의 합리적인 성향이 그대로 묻어났을 것이다. 학교의 규모는 작았지만, 운영은 짜임새가 있었다. 학교 교칙에는 성문화된 규율이 없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였다. 교수 신부님들은 학생들에게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깨쳐서 배워나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지도하였다.”(「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82~87쪽)
덕원신학교는 신입생을 격년제로 모집했다. 그러다 평양대목구가 신학생 양성을 맡기고, 원산대목구와 연길대목구 신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1941년부터는 해마다 신입생을 받았다. 또 조선총독부가 정식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1942년 서울대목구 예수성심신학교를, 이듬해인 1943년 대구대목구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폐교함에 따라 덕원신학교 신학생 수가 100명이 넘을 만큼 늘어났다. 덕원신학교는 한국 교회에서 유일하게 일제의 정식 설립 인가를 받은 신학교였기 때문이다.<사진 4>
1936년 6월 7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에 연길대목구 출신 김충무(클레멘스)·한윤승(필립보)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개교 후 14년 6개월 만에 덕원신학교 출신 첫 번째 사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덕원신학교는 1949년까지 40명의 사제를 배출했다. 덕원신학교 출신 사제로는 윤공희 대주교와 고 김남수·지학순 주교, 하느님의 종 김치호 신부 등이 있다.
- <사진 4> ‘덕원신학교 음악 수업’, 랜턴 슬라이드,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5> ‘덕원신학교 신학생들’, 유리건판, 1927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49년 ‘순교자 찬가’ 부르며 떠난 신학생들
덕원신학교는 1949년 5월 9일 북한 공산당에 의해 수도원과 함께 강제 폐쇄됐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독일인 수도자들이 체포됐고, 수도원과 신학교는 강제 몰수됐다. 이후 덕원신학교 신학생들은 귀가했고, 일부 신학생들은 남하해 서울 대신학교로 편입, 훗날 사제품을 받았다.<사진 5>
“한밤중에 일어나 복도에 나와 있는 신학생들 앞에 정치보위부원이 소리쳤다. 그는 신학교 건물 현관 옆 조그만 응접실에서 늘 학교를 감시하고 있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신부들의 압제에서 풀려났습니다. 이제 해방입니다!’ (⋯) 그 밤으로부터 일주일간 우리는 신학교 건물 안에서만 갇혀 지내야 했다. (⋯) 일주일이 다 되어갈 무렵 그 주 금요일에 당 간부가 우리를 불러 신학교를 폐쇄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당장 모두 귀가 조치할 것이라며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짐 보따리 속에 종교와 관련된 어떠한 물건이나 옷·책을 숨겨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5월 13일 금요일 73명의 신학생과 26명의 수사가 수도원을 나섰다. 모든 개인 물품은 조사당하여 성물과 수도복·단 한 권의 서적도 갖고 나올 수 없었다. 묵주까지도 다 빼앗아 갔다. 신학생과 수사들은 수도원 밖으로 나와 열을 지어 걸어가면서 다 같이 ‘순교자 찬가’를 부르며 발길을 옮겼다.”(「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179~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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