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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
출 24: 1-8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많은 계약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부도 서약을 함으로 공포가 되고
노사도 고용계약으로 이루어지고,
국가간의 관계도 각종 협정이라는 계약으로 지탱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떨까요?
이 역시 계약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은 성도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준행입니다.
1) 언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성경입니다.
많은 언약이 있는데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① 일방적인 언약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선포하신 언약입니다.
인생이 그 언약에 순종하면 그 언약이 보장한 은혜를 받습니다만, 설령 불순종했더라도 언약이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은 언약대로 이루어집니다.
② 상호적인 언약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백성들은 확약하는 겁니다.
"출 24:7-8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만약 이 언약을 준행치 아니할 때는 상응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종종 동물을 죽여 그 피를 갖고 맹세한 것은 언약을 파기시 파기 자는 동물처럼 죽어야 한다! 는 상징성이다.
오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든지 자원하는 종으로 섬기겠습니다 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에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하며 일제히 반응하고 맹세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토록 「준행하겠나이다」한 것을 참으로 준행했느냐하면 결국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하나님!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은혜로 살펴주시고, 긍휼로 이루어 주시길 바랍니다」했었으면 좋았을 것을....
다 준행하겠나이다 했으므로 그 책임은 인생이 지도록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이루어 졌을까요?
교만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례를 쉽게 생각한 반면 자신들을 너무 과신했던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율례가 어떤가요?
완전한 「의」입니다.
표면적인 것만 아니라 내면적인 것까지도 이루어야 합니다.
예컨대 도둑질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탐욕을 갖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또한 100가지 율례 중 단 1가지라도 준행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준행하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례를,
다 준행하겠나이다! 라고 했으니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생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2) 인생의 비극
인생의 비극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다 준행하겠나이다 했지만, 하지 못했으니 죄인이 되었고, 죽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야 할 인생!
태어나면서부터 울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죽으면 「평안히 쉬라!」하는 인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언약에서 불이행을 했으니, 인생은 죄의 채무자가 되어 도망가고 하나님은 생명의 채권자가 되어 좇는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쫓기는 인생! 좇는 하나님! 원수된 관계요, 불화목한 관계입니다.
쫓기는 인생에게 감사가 있나요?
쫓기는 인생에게 평안이 있나요?
쫓기는 인생에게 만족이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생은 불행의 탓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이 율례를 만들어 놓아서....
율례를 타박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워서....
인류의 불행!
하나님을 떠나 있기에 오는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가야할 존재이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인생의 행복은 다른데 있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 위반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피하니,
고독해 집니다.
궁핍해 집니다.
괴로움의 연속이 오는 겁니다.
찬송가 440장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누가복음을 보면 아버지를 떠나 마음대로 사는 아들이 나옵니다.
잠시는 아버지의 간섭이 없어서 좋은 것 같았지만, 곧 비참해지고 마침내 돼지 치는 자로 전락한 것을 봅니다.
이 모습이 과연 누구의 모습입니까?
이 탕자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왜요?
바로 나!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행하신 일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의 율례를 준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와 죄를 갖고 이루지 못한 그 모든 율례를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 준행하게 하셨습니다.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여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심은 이 율례를 준행하고자 하심입니다.
이 땅위에서 고난의 삶과 죽음의 삶을 마치실 때의 언어가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율례를 완전한 종이 되어 준행하셨기에,
하나님과 언약은 영원히 존속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의 인생에게는 비로소 평화가 주어진 겁니다.
성탄절 때가 되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하는데 그냥 멋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 구원의 주심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무엇이 이토록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주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율례를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노라면 이러 저래 하다가 하나님이 나오면 하던 말을 멈추고 「하나님께 찬송할지어다」하며, 혹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하는 환호의 감탄어를 보게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그 성경을 기록한 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의 율례, 계명, 여하한 영원히 존속됩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킬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아들로 지키게 하셔서 예수님도 의롭고 그 예수를 믿는 백성들도 의롭다고 하시는 겁니다.
4)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준행하겠나이다! 보다는 믿습니다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 등..
율례의 요구 따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거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된다는 보장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뜻이요, 찬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영원하십니다.
지켜야할 모든 말씀(율례)도 영원합니다.
내가 준행하겠나이다 하는 고백은 예수님 밖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할 때,
비로소 그 힘을 갖고 주의 말씀을 준행하게 됩니다.
언약의 체결
24: 1-8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찌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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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프랑스에 가시면 베르사이유 궁전이 있습니다. 그 궁전은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에 의해서 건설이 됩니다. 당대 최고의 기술진과 재료가 동원이 되어 유럽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궁전을 건설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거울의 방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길이 75m, 넓은 방을 17개의 벽면으로 나누어 578개의 거울로 장식합니다. 이곳은 주로 궁정 축제와 주로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어떤 방문객이든 다섯 걸음 마다 한 번씩 허리를 굽혀서 왕에게 절하면서 왕에게 알현을 합니다. 75m되는 거리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왕을 향해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굉장한 권세입니다. 그런데 외국의 사절들마저 할 수 없이 왕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내국인과 동일하게 알현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병자호란 때 인조 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절을 하며 군신 관계를 맺은 치욕의 역사와 비슷합니다.
이처럼 나라와 나라사이의 조약은 힘과 강압으로 맺어지기 때문에 불평등일 때 가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하나님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이 추인하는 형태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Covenant라고 하는데 이것은 짐승을 잡아서 맹세하는 영속적이고 변개함 없는 언약을 상징합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 백성이 되는 언약이 됩니다. 이러한 언약을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과 맺으시는 언약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시내 산 언약의 중요성
먼저 언약은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장소적 배경이 되는 시내산은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내산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모세를 만나주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 실 때 “내가 너희 조상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너희 이스라엘의 고역을 들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말씀이 “그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 모세를 부르신 이유와 목표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도 성경을 읽다가 한동안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우리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가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땅으로 가라인데, 모세는 광야에 제사 드리러 간다고 합니다. 모세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자! 여기서 사흘 길의 광야는 어디를 말합니까? 이 거리는 이스라엘의 거주지인 고센에서 시내 산에 이르는 거리를 말합니다. 분명히 가나안 땅인데 모세는 왜 그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는가? 모세의 생각은 이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필요하지 않지만 만약에 광야를 거치지 않고 가나안으로 직접 갔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의 커다란 비극이였을 것 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종의 습관을 못 벗고 그대로 가나안에 가서 애굽의 신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주어진 자유가 방종이 되어서 가나안은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우상의 소굴로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자유보다도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언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내산의 언약은 우리 교회를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 교회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내적인 외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구원을 받으면 되지 구태여 교회에 얽매여 살 필요가 있는가? 그냥 교회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서 신앙생활하면 좋겠다 말씀 좋은 곳만 찾아 다닙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광야를 거치지 않고 가나안땅에 직접가야겠다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에게 교회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과 훈련을 받고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신앙을 점검 받게 하시고, 관계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시내산이 필요하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꿈이 있는 교회가 나의 시내산 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교회를 사랑하시고 훈련을 기쁘게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준행 하리이다.
이제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제사장이 되는 나답과 아비후과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70인을 하나님의 산 시내산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올라오라고 하시고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주셨는데 그 중요한 내용은 10계명의 말씀입니다.
①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②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③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지 말라
④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⑤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살인하지 말라
⑦간음하지 말라
⑧도적질하지 말라
⑨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⑩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약속의 내용은 정확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바로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분은 자기의 의지대로 일을 하며 그것은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기도도 하고,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이 합니다. 여러분 사역 가운데 내 생각으로는 좋은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ex) 모세를 보시면 그는 애국심이 넘치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애국이라는 좋은 마음도 하나님 뜻이 아니라 혈기로 움직였을 때 그는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와는 그녀가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탐스러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봅니다. 좋을 것 같아 먹었지만 선을 추구하였지만 그 속에 악이 있음을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와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의 문화들이 선한 것처럼 보입니다. 기분을 좋게 하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술과 오락 유흥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문화는 저는 “영화 007”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007은 모든 남성들의 로망입니다. 숀 코넬리, 로져무어, 피어슨 브룬손 영국의 미남 배우들 멋있죠! 싸움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고 마지막 장면은 멋진 여인과 함께 행복해 보이죠! 그런데 그 사람 이후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007제임스 본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분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50대에 에이즈와 폐암으로 걸려서 죽었다.
세상 문화는 결과를 말해주시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약속을 정확하게 말씀해주시고 그것을 지켰을 때와 지키지 않았을 때를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신명기 28장 축복과 저주의 기록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말씀해주시고 그것을 지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대적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미치리라” 들어와 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신앙은 늘 결단을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노라”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하시는 모든 언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준행 하리이다” 말씀에 대한 응답을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들은 우리도 이러한 결단과 응답이 필요합니다. 바른 결단이 있을 때 유혹의 세상가운데 말씀으로 승리할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런 은혜가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언약식의 거행
여러분 제가 문제 하나드리겠습니까?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수갑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결혼식 반지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 반지를 낍니다. 그런데 반지는 언제끼게 되나요? 순서는 성혼이 선포되고 서로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반지를 낍니다. 이제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그 말씀을 준행 하리다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언약식을 거행합니다. 이른 아침에 제단을 쌓습니다.
제단위에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하는 12돌을 세웁니다. 그리고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제사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피 뿌림 입니다. 모세는 제단에 피를 뿌리고 백성에게 낭독한 후에 백성에게 피를 뿌립니다. 그 피는 여호와와 그의 백성을 연합을 이이야기 하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었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은 먼저 조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우리 죄 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약의 제물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가 긍휼하심을 얻고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것이라”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이 이루어지고 이제 언약한 당사자 간의 약속이 지켜져야 합니다. 이제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가운데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시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말씀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사함을 받은 후 이제까지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변화의 역사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토색한 것의 4배나 갑겠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구원이 이 사람의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다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의 잃은 자, 언약의 회복과 공동체의 회복을 이야기 합니다. 언약의 회복은 공동체의 회복이고, 이때 회복은 자신의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헌신이 있을 때 그 믿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나오는 말
최근에 출간된 “내가 틀렸었다” I was wrong 짐 베커 목사 아픈 참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 기독교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레이건, 아버지 부시에 이르기까지 미국 대통령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짐 베커가 던진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를 믿으면 성공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고도 다이내믹한 그의 설교는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가가 최고조에 달했던 87년 자신의 비서와의 성추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그는 한꺼번에 존경과 명성, 가족을 다 잃어버리게 잃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89년에는 헤리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금 유용 혐의로 4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나이 50에 쇠고랑을 차는 신세가 됐다. 세상과 단절된 어두운 공간에서 그는 성경의 말씀을 다시 읽게 됩니다. 그가 감옥에서 읽는 말씀은 이전의 메시지와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사업이나 큰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고도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경을 읽던 그는 마침내 그는 "내가 틀렸었다"고 외치면서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결국 자신이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를 몰랐다고 고백을 합니다.
’내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을 신념으로 생각했다. 짐 베커 목사는 나중에 공금 유용 혐의를 벗고 무죄를 선고 받았다. 4년6개월간 복역하고 출소한 짐 베커는 소외 계층을 위해 봉사활동을 벌이며 5명의 아이를 입양하며 새로운 복음 사역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모세와 이스라엘의 언약 체결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 생각으로, 내 판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의 목표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외적으로 드러난 사역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를 보시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도 그런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과는 주님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사로 잡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사역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의 의미 그 언약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언약은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친밀함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다니엘 11:32절 말씀처럼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약속의 땅에 곧 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산과 같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언약을 지키며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언약을 아는 친밀한 관계, 이런 복된 발걸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