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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 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역할 함축되어 있는 이름이나 속성 참고 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 여호와 로이,(Jehovah Roi) 시 23 : 1
시니(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창 22 : 14
리로다(1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그가 나를 쉴 만한 여호와 살롬,(Jehovah Shalom) 삿 6 : 24
물가으로 인도하 (여호와는 <우리의> 평화)
시는도다(2절)
내 영혼을 소생 여호와 로페,(Jehovah Rophe) 출 15 : 26
시키시고(3절) (여호와는 <우리의> 치료자)
의의 길로 인도 여호와 치드케누,(Jehovah Tsidkenu) 렘 23 : 6
하시는도다(3절) (여호와는 우리의 의)
내가......해를 두려워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 출 17 : 15
하지 않을 것은(4절) (여호와는 나의 깃발)
주께서 나와 함께 여호와 삼마, (Jehovah Shammah) 겔 48 : 35
하심이라(4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여호와 메카디쉬켐, 출 31 : 13
바르셨으니(5절) (Jehovah Mekaddishkhem)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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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각 속성이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부응하는 것에 주목하라. 시편 23편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시는 속성이 우리의 필요와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위 도표에 제시된 인간의 필요와 그것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이것이 시편 23편의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지 검토해 보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
보호 : 여호와 로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목자로 처음 묘사된 시기는, 야곱이 창세기 48 : 15에서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을 때였다. 마치 양이 양치기 혹은 목자를 떠나 헤매는 것처럼 야곱도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지만, 그럴 때조차도 하나님은 항상 그의 목자가 되어 주셨다. 노인이 되었을 때, 야곱은 자신이 여호와 로이(Jehovah Roi)를 경험하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양은 무엇과 같은가? 이사야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53 : 6)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먼저 이 동물이 집을 찾아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둘째로, 양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없고, 일반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데 무지하다. 양은 여우굴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거나, 가시 덤불에 걸리거나, 혹은 급류에 휘말려서, 처음에는 북슬북슬한 털 때문에 잠시 물위로 떠올랐다가 곧 가라앉아 익사하기 쉽다. 이런 양처럼, 우리도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호와 로이, 신성한 목자가 필요하다.
양의 이러한 세 가지 특성 때문에 목자도 세 가지 의무를 진다. 여호와 로이, 선한 목자의 통솔 아래 지상의 목자 혹은 양치기들도 이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먼저 그들은 본보기를 통해 양들 을 인도해야 한다. 경건의 본을 보이는 데서 나오는 능력은 강력한 것이다. 선한 양치기들은 양떼를 "쉴 만한 물가"(시 23 : 2)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게'하며, 그분과 친교를 나누고, 그들의 영성(靈性)을 진작하도록 도와준다. 목자들은 또한 양들을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3절) 인도한다. 이것은 죄에서 멀리 떠나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하는 인도이다.
둘째로,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거나 손수 클로버 잎을 뜯어 먹임으로써 그들을 먹여야 한다. 지상의 목자들도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먹인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책임감을 세 번이나 연거푸 각성시켜 주셨다(요 21 : 15-17). 베드로는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무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했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은 여호와는(우리의) 평화, 즉 여호와 살롬을 배울 필요가 있다.
셋째,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지켜야 한다. 이땅의 목자들도 양들이 죄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책망과 경고와 대화로 그들을 보호한다.
양식 : 여호와 이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 : 1). 인생의 기본적인 필요들은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즉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에 의해서 충족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 : 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일상의 모든 필요를 이 기도에 다 포함시키신 것이다. '양식'은 빵, 물, 의복, 머리를 가려 주는 지붕, 여행에 필요한 건강,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이 밖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바쳐야 할 제물까지 준비해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이레라는 구절이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신 이름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지은 몇 안 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그를 여호와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22장).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믿음의 행위로서, 자기 아들을 죽음의 장소에 데리고 가서, 이 가장 귀한 제물을 드리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께서 그를 제지하시고, 대신 "뿔이 수풀에 걸린 한 수양"을 준비해 주셨다(13절).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잡아서, 그것을 대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절).
어린 이삭이 제물로 드려야 할 어린 양에 관하여 묻자, 그의 아비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대답했다. 어떤 번역가들은 이 말의 순서를 약간 바꿔서 이렇게 해석하였다.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으로 자신을 준비하시리라."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번제할 어린 양을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삼으셨으므로, 그를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슥 12 : 10 ; 요 1 : 29, 3 : 16).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육체적·영적 필요를 모두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 즉 여호와 이레가 준비하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감정의 변화 : 여호와 살롬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 : 2). 바로 이 '여호와는(우리의) 평화', 즉 여호와 살롬(Jehovah shalom)의 역할이다. 여호와는 큰 낙심에 빠졌을 때, 그리고 살아가면서 감정의 파고(波高)를 느낄 때 우리를 돌보신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은 여호와는(우리의) 평화, 즉 여호와 살롬을 배울 필요가 있다. 고통과 괴로움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우리에게 쉼을 주시므로, "그는 (우리를) 누이신다"(2절).
여호와 이레라는 구(句)는 기드온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임무를 떠맡았을 때 계시되었다. 여호와는 기드온에게 백성을 솔선하여 미디안을 쳐부수라고 명하셨다. 기드온은 그 임무를 감당하기엔 자신이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아비의 집에서 가장 어린 아들이며, 또한 자기 집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지극히 세력이 약한 므낫세 지파, 그 중에서도 지극히 힘없는 집에 속해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언제나 인간으로 하여금 맡은 임무를 틀림없이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이 계시로 인하여, 기드온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삿 6 : 22)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23절)". 그때 기드온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기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는(우리의) 평화라는 뜻으로, "여호와 살롬"(24절)이라 붙였다.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인간이 여호와의 새 이름을 지은 것이다. 기드온은 두렵고 놀라운 임무를 맡았을 때, 여호와 살롬이 그의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기드온이 군대를 모으고 전략을 짜기 전에 제단을 쌓았던 것은 온전히 믿음의 행위였다. 사람이 믿음으로만 여호와 살롬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 : 1).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노력할 때,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 : 9, '여호와 살롬'과 비교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목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양이 누워 있는 것을 한번쯤 세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양들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누워 있게 두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혼자서 한 바퀴를 빙 돌 때, 양들은 자기의 털에 질식해 죽을 염려가 있고, 또한 독충이나 독뱀에 물리거나 감염될 소지도 많기 때문이다. 여호와 살롬은 양들이 안전하게 누워 있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신다. 그리고 급류를 두려워하는 양들을 위하여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눕게 하신다.
치료 : 여호와 로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 : 3). 여호와는 자신의 병든 양들을 치료하시고,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목자다. 이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여호와는(우리의) 치료자'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 로페(Jehovah Rophe)이다. 상당수의 동물들이 자기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양은 이것을 거의, 혹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양들은 대부분 자기가 상처를 입었는지 혹은 병들었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양들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돌보는 것은 목자의 일이다.
여호와 로페라는 구(句) '여호와는 (우리의) 치료자'("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는 출애굽기 15 : 26에 있다. 이스라엘을 돌보는 하나님의 목자 모세는 무리를 이끌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왔다. 삼일 동안 백성들은 물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두렵고 생명을 위협당하는 경험이었다. 백성들이 마라라 불리는 물웅덩이에 이르렀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그들은 불평을 터트렸다.
쓴 물은 해롭지는 않으나 맛 때문에 먹을 수 없거나, 혹은 오염되어 마시기 위험한 물을 의미한다. 이곳 물은 틀림없이 이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한 나무를 발견하고, 그것을 꺾어서 물 속에 던졌다. 하나님은 종종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내적 사역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신다. 그 나무가 실제로 물을 달게 하는 작용을 했을 수도 있고, 혹은 마시기에 적합하도록 물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상징물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여호와가 치료하실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러한 일을 행하셨다.
물을 고치신 이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로페는 질병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보여 주셨다. 먼저 하나님은 예방 조치를 통하여 '치료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잘 따른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26절)라고 약속하셨다. 조건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26절)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생활을 절도 있는 마음으로 잘 통제하여, 여호와 로페의 예방 치료의 효과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건강에 해를 끼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들은 마약이나 알콜, 혹은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는 기타의 다른 물질들을 섭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많은 영역에서도 뚜렷하게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호와 로페의 치료에서 두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치료 조치이다. 마라의 쓴 물을 고치신 것처럼, 하나님은 병든 자들을 치료하신다. 모세에게 이 약속을 하신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그의 누이 미리암의 문둥병을 치료해 주셨다(민 12 : 11-16). 오늘날에도 여호와 로페는 변함없이-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질병들을 치료하신다.
마라의 물 속에 던져진 나무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치료 능력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육체적 치유가 즉시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어떤 경우에는 부활 때까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전 15 : 42 참고), 십자가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모든 치유 관계를 상징한다.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결함으로 말미암은 저주를 친히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현대 과학의 기적은 흔한 감기의 치료책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어머니라도 아이들이 눈이 수북이 쌓인 들판으로 놀러 나가려 하면, 감기의 예방 조치로서 두터운 옷을 둘러 입힐 줄 안다. 만일 아이들이 감기나 유행성 독감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그들에게 코프 시럽이나 아스피린 같은 적절한 약을 먹일 것이다. 이와 똑같이, 여호와 로페도 우리에게 크신 사랑으로 두터운 옷을 입히시며, 의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셔서,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예방 조치를 취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질병이나 죄악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에 가장 적합한 치료를 베푸신다. 때로 이것은 죄의 용서라는 형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기적적인 육체의 치유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어떤 때에 이것은 관계의 회복이나 혹은 정신적인 문제의 해결일 수도 있다. 여호와(우리의) 치료자, 곧 여호와 로페가 바로 이런 일을 하신다.
의 : 여호와 치드케누
하나님은 죄책을 씻어야 할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시는,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치드케누(Jehovah Tsidkenu)이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 23 : 3) 분이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이다.
죄는 많은 경우에 있어, 자기의 길로 가는 것 혹은 제길을 벗어난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각기 제길로 갔거늘"(사 53 : 6). 우리가 죄의 길을 걸어 간다면,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는 심판 혹은 벌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목자, 여호와 로이는 또한 그분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새로운 신분을 은혜로 부여해 주시는,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치드케누이기도 하시다.
여호와 치드케누라는 구(句)는 예레미야 23 : 6에 처음 나온다. 때가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바로 깨닫고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의 의'로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여호와의 의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경험한 칭의(稱義)를 알게 될 것이다.
칭의는 타고난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운 신분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 23 : 3) 분은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3절) 자신 백성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용기 : 여호와 닛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시 23 : 4). 두려움을 이기는 이러한 용기는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로부터 나온다.
두려움은 우리가 헤아려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거나, 반대 세력이 압도해 옴을 느낄 때 종종 일어난다. 어린 아이는 어둠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자러 갈 때, 어머니가 이층까지 바래다 주기를 바란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군가와 동행하기를 원한다. 다른 많은 두려움들도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나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를 알 때, 우리는 용기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다.
여호와 닛시라는 구(句)는 전쟁 용어이다. 전투 중에 자기 부대에서 멀어지게 된 군인은 전쟁터 위로 나부끼는 자기 군대의 깃대나 깃발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가 그 깃발 아래로 빨리 달려가서, 혼자 싸우는 위험한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가 되신다.
이 칭호는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하러 나갈 때 계시되었다. 이 전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도망쳐 나온 후 처음 치르는 것이었다. 구약 시대 내내,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계속 전쟁을 하였다.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르비딤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이겼고, "모세가......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출 17 : 11). 모세가 지쳐서 팔을 더 이상 올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론과 훌이 대신 그의 손을 붙들어 올렸고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계속 이 전쟁을 탄원하게 하였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그날 승리를 거두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15절). 이것은 사람이 지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여호와 나의 깃발은 '승리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전쟁은 사람들이 할지라도,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다.
아말렉은 구약 시대에 육체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옛 본성을 이기기 위해 육체와 싸운다. 이 전쟁에서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씨름하고, 달리고,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가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전투의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주를 섬길 수 있다.
고독 : 여호와 삼마
시편 기자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여호와 삼마(Jehovah Shammah)의 임재를 확신한 것이다.
구원과 더불어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 가운데 한가지는, 우리 삶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임재를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 : 1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대위임(大委任)을 주셨을 때, 예수님도 이렇게 약속하셨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 20).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은 에스겔 48 : 35에 나온다. 예언을 마치며 에스겔은 영원한 도성을 묘사하고, 하늘에서도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여호와 삼마)라고 말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실 때에(시 23 : 4), 그분은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다. 목자는 지팡이를 야생 동물들을 치는 곤봉으로 사용한다. 그의 막대기는 곤란한 지경에서 양을 이동시키는 도구이다. 그것을 사용하여 목자는 물이나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올릴 수 있다. 엄밀히 해석하면, '안위하다'는 말은 '인도하다'는 의미이다. 여호와 삼마는 지팡이로 적들을 물리치고, 막대기로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냄으로써, 양들을 인도한다.
거룩함 : 여호와 메카디쉬켐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시 23 : 5). 성경 전체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용도를 위하여, 물건과 사람과 장소를 거룩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거룩하게 하다'는 말의 기본적인 뜻은 '구별하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짓고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관한 몇 가지 지침을 주셨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만나실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충분히 거룩하고 성결한가? 여호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 : 13).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가 여호와 메카디쉬켐(Jehova-Mekaddishkhem)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성화하여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친히 우리를 구별해 주신다. 여호와 메카디쉬켐만이 우리를 거룩케 하실 수 있다.
성경 시대에 기름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목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 깨끗하게 하는 것도 그 중 한 이유였다. 양에게 더러운 상처가 생겼을 때, 목자는 기름으로 그 다친 곳에서 오물과 더러운 것들을 씻어 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가 죄를 짓고 영혼에 상처를 입을 때도, 여호와 메카디쉬켐은 성령의 기름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치유의 피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과 똑같이, 치료의 기름도 병을 낫게 한다. 그리고 기름은 고통을 덜어 준다. 햇볕에 피부가 그을렀을 때, 우리는 변색된 부위를 가라앉히기 위해 기름이나 로션을 바른다. 기름은 태양에 의해 타버린, 몸의 본래 유지를 회복시켜 준다. 목자가 양에게 기름을 발라줄 때, 그는 그것들의 본래 몸의 상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삼상 16 : 13 ; 사 61 : 1, ; 행 10 : 38 참고). 여호와 메카디쉬켐은 인생의 강한 불 속으로, 삼위일체 중 제3위를 보내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고통을 덜어 주시고, 치료해 주신다.
여호와 로이이신 예수님
목자처럼 양을 돌보시는 예수님
목자가 양들을 전적으로 돌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똑같이, 예수님도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요 10 : 11)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자신을 다 내어 주셨으므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11절)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은 '자기 양'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3절) 인도하신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4절). 목자와 양의 친밀한 관계는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를 반영한다. 일단 한 신자가 목자와 양의 관계에 들어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생명을......더 풍성히" 얻게 되리라는 약속도 받는다(10절).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양을 치는 목사들
신약성경에서 목사라는 말은 또한 목자를 의미한다. 목사는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지킨다. 목자로서, 목사는 문제의 해결과 결정 등을 통하여 양들을 인도한다. 그는 교훈과 상담과 교육 등으로 양들을 먹인다. 그는 제자 훈련과 경책(警責)과 살피는 일 등을 통하여 양들을 돌본다.
목사가 목자라면, 주일학교 선생들과 소집단의 지도자들도, 주일학교와 소집단 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목자적 사역을 확장시키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학교 선생과 소집단 지도자들도 또한 목자들이다. 모든 목사는 보다 더 큰 무리에게 목자이고, 선생들과 지도자들은 주일학교와 소집단 무리에게 목자이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시지만, 그분은 자신의 이름으로 일하는 인간 목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친밀한 배려를 전하신다(요 21 : 15-17 ; 행 20 : 32 ; 벧전 5 : 1-5).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시편 23: 4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제가 임종이나 장례 예식 때 주로 들려주는 말씀은 오늘 읽은 시편 23편입니다. 특히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이 감동이 됩니다. 아마 지금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고 있는 사람, 이미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 낯선 길을 홀로 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그것처럼 큰 위로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이 말씀을 새겨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만약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기억이 지워지면서 우리 무의식에 소리들이 올라올 터인데 그때 나는 어떤 소리를 하고 있을까?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노년에 치매에 걸리셨는데 이분이 자꾸 욕을 하더랍니다. 만약 그 무의식의 순간에 시편 23편이 내 입에서 낭송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또 가족들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을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시편 23편을 들려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들이 정신을 잃는 그 순간에도, 마치 몸은 죽었지만 동물의 근육신경은 살아서 꿈틀대듯이, 우리 입술이 시편23편을 낭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이라는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이 말씀이 우리 영혼에서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어에서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을 암송해서 읊조린다는 뜻입니다. 시편 1편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에서 ‘묵상한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가’인데 이 단어는 비둘기가 구구하는 소리,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사람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주야로 묵상하려면 암송해야 하고 그런 후 마치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이 말씀을 읊조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암송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십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인데 이 분이 독일에서 유학하실 때의 일입니다. 자기를 가르치던 어느 노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10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갖춘 분이셨다고 합니다. 특히 이 교수님은 자주 시편 23편을 히브리어 운율에 맞추어 암송하시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히브리어를 잘하시냐고 물으니 그분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을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노 교수님은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유태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항상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다녔는데 시편 23편을 암송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님도 그 친구를 따라서 시편 23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한 유태인 탄압이 거세졌고 이 유태인 친구 또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현장에 갔는데 트럭에 올라타면서도 이 친구는 시편 23편을 암송하더랍니다. 그중 특히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는 구절은 함께 히브리어로 낭송했다고 합니다.
이 교수님 또한 전쟁이 치열해지자 독일군으로 징집되었습니다. 그러다 한 전투에서 잡혀서 연합군에 끌려갔고 즉결 재판을 받고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 유태인 친구가 생각나서 자기도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낭송하고 죽으려고 잠깐의 시간을 요청했습니다. 그 교수님은 자기를 겨눈 총구를 바라보며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시편 23편을 낭송하였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구절을 낭송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연합군 러시아 장교가 그 나머지 부분을 따라서 히브리어로 낭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장교 또한 유태인이었던 것입니다. 함께 23편을 낭송하고는 그 장교가 교수님을 즉석에서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목자들은 양 떼를 몰고 주기적으로 대이동을 하곤 합니다.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싱싱한 꼴을 양들에게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높은 산등성이에는 영양가 있고 여린 풀들이 많습니다. 이 싱싱한 꼴을 찾아서 대이동을 합니다. 겨울이 다가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는 좀 더 따뜻한 곳을 찾아서 내려오게 되는데 때론 험한 산을 넘기도 합니다. 그때 반드시 지나치게 되는 곳이 오늘 말씀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한 깊은 골짜기입니다. 등산을 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골짜기를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골짜기를 거쳐 오르는 길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입니다. 또 골짜기에는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동 중에 지친 양떼들이 언제든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양들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힘든 곳입니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음침한 곳에서 늑대나 사나운 짐승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길이 험하고 자칫 잘못하면 절벽과 같은 곳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푸른 초장에만 있으면 행복하고 좋을 것 같은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직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울 때,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건강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죄나 실수로 감옥에 갇혔을 때,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 사별을 했을 때, 원하는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계속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을 때 이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보입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는 힘이 듭니다. 위험도 위험이지만 끝도 없이 골짜기는 계속되고, 또 울창한 숲으로 인하여 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등산을 하다가 다리를 다친 적이 있습니다. 설악산 정상에 올랐다가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과정에서 그랬습니다. 젊은 치기에 하루만에 정상 정복이 가능하다며 오만했던 것입니다. 오색약수 쪽으로 대청봉을 오를 때까지는 가능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산 길에 무릎이 이상이 오기 시작했고, 그 아픈 무릎을 끌고 오는데 천불동 계곡은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도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고 어두워져 가는데 두려움이 털컥 일었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어둠 속을 혼자서 해매며 나가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공포스러웠습니다. 혼자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본모습입니다. 인생의 골짜기도 혼자 헤쳐가야 한다는 사실이 더 힘이 듭니다. 그때 어둠 속을 같이 헤쳐 갈 동료라도 있었으면 덜 힘들 것입니다. 또한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절망스럽게 만듭니다. 얼마쯤 더 가야 이 어둠의 끝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 힘들고 될 수 있으면 피해가고 싶은 길이지만 한 가지 우리가 공통적으로 깨닫는 바는 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농도 깊은 삶의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푸른 초장에 누워 그때를 두고두고 회상하며 오히려 즐거워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철이 들고, 인생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깨달았고, 또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면 다른 길이 아닌 바로 이 아픔과 고난의 골짜기를 통해서입니다. 유명한 목회자나 부흥사들의 설교에서, 또 일류 강사들의 연설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자기가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의 간증들입니다. 이게 없으면 강의나 설교가 힘이 없습니다. 수백 번을 해도 질리지 않으며 듣는 사람들도 공감하며 듣습니다. 대표적으로 활빈교회 목회를 하셨던 김진홍 목사님 같습니다. 청계촌 쪽방 촌에서 힘들게 목회하던 시절의 경험과 긴급조치로 감옥에 갔던 3, 40년 전의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방송을 들으니 제가 몇 번째 들었던 내용을 또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의 경험을 평생 우려먹고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았더라면 어쩔 번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랍인들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이 있습니다. “사시사철 햇볕만 내리 쬐면 사막이 된다.” 우리 인생에 푸른 초장만 있지 않고 이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좀 더 성숙해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생이라는 것의 깊이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깊이를 알기 위해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곳을 지나는 분이 있다면 그 때문에 절망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놀라운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목적지는 골짜기가 아닙니다. 골짜기는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골짜기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입니다. 언젠가 정상에 있는 푸른 초장에 누워 골짜기를 지나던 때를 아름답게 추억할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인생 골짜기의 경험이 우리 인생에서 깊은 맛을 우려낼 것입니다.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
사망의 골짜기를 혼자 지나가는 것은 힘이 듭니다. 옆에 동료나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래도 덜 힘이 들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 실험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차가운 얼음에 발을 담그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한 번은 텅 빈 강의실에 홀로 두고 측정을 하였고, 다른 한 번은 곁에 친한 동료들을 두고 측정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곁에 동료들이 함께 있을 때 두 배 정도 고통을 더 견딜 수 있더랍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퀴즈 문제인데 먼 길을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야 한다, 고속 철도를 타야 한다, 자동차로 가야 한다며 이런 저런 답들을 내었습니다. 그 대답들 중 정답으로 선택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였습니다. 여러분 연애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여행은 멀어도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좋습니다. 부부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곁에 끝까지 남아 있을 사람은 여러분의 배우자뿐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면 아마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 것입니다. 하루 종일 내 옆을 지키며 시중을 들어줍니다. 오랜 병에 아무도 찾지 않지만 부부만은 그 순간에도 함께 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우리는 어떤 아픔도 이길 수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과 소중함은 사실 이런 아픔을 통해서 더 깊어지고 절실해집니다.
전우애란 것도 있습니다. 목숨이 언제 날아갈지도 모르는 곳에서 생기는 것이 바로 이 전우애입니다.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 한다는 기쁨을 모릅니다. 어느 전쟁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적의 치열한 공격으로 전선을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정신없이 후퇴하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보니 자기와 가장 절친한 전우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퇴각하다 심한 부상을 당했든지 죽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병사는 상관에게 호소했습니다. “제 친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서 그 친구를 데려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할 수 없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 때문에 또 한 병사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며 장교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진으로 달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중상을 자신도 입은 채 친구의 시신을 메고 돌아왔습니다.
그 광경을 본 장교가 몹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죽었을 거라고 했잖아. 난 이제 너희들 둘 다를 잃게 되었다. 그래, 시체 하나를 메고 오기 위해 거기까지 가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그러자 중상을 입고 죽어가는 사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이 친구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네.’”
역설적으로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을 함께 겪지 않으면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게미와 쌀겨를 먹던 가난한 시절의 아내를 말합니다. 조강지처를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부장적 배경에서 나온 이 고사성어는 이젠 옛말이 되었지만 중요한 진실을 여전히 담고 있습니다. 함께 고생할 때 정이 들고 그렇게 정이 든 사람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부러 그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푸른 초장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던 양들도 사망의 골짜기에서만은 목자 곁에 바짝 붙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해 보았던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쩌면 우리와 깊게 사귀기 위하여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의 답이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어리석고 두려워서 곁에 목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목자는 결코 자기 양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함께 한다고 하여도 일부분일 뿐입니다.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는 올 수 없고, 또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에는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 깊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동료가 있어 덜 외로울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고난은 홀로 견뎌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고독의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만났던 곳은 바로 그 깊은 곳에서였습니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2:5-7) 골짜기를 빠져나오는데 급급하여 하나님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는 골짜기를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놓친다면 우리가 골짜기를 지나온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의지적으로 찾으려고 한다고 하여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사망의 골짜기에서 가장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는 것은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곧 나를 편안하게 하고 안심시킨다고 고백합니다. 목자가 가진 막대기는 그냥 막대기가 아닙니다. 막대기 끝에는 쇠심이 박혀 있거나 뭉툭하게 만든 무기의 일종입니다. 그것으로 사나운 짐승들을 때려잡기도 하고 던져서 물리칩니다. 다윗은 여기에 더하여 물맷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넘어뜨렸던 물맷돌 한 방이면 사나운 곰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목자에게는 또한 지팡이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이 지팡이는 무기라기보다는 양들을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지팡이 끝은 구부러져 있어 양들을 걸어 올리기 좋습니다. 양들은 꼴을 찾아 절벽 가에도 갔다가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 덤불숲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양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이 지팡이입니다. 곁길로 갈 때는 지팡이로 옆구리를 쳐서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합니다. 지팡이는 양들을 구원하고 이끄는 사랑의 도구입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시2:9)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쥐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무기를 사용하여 나아가면 우리 앞에 당한 원수들과 문제들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했던 곳은 다름 아닌 광야에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는 반석에서 샘물이 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원수들을 질그릇같이 부수어뜨리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능력하여 하나님만 바랄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아낌없이 드러내십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대하14:11)
여기 사망의 골짜기라 하지 않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원뜻은 사망의 그림자의 골짜기입니다. 죽을 곳이 아닙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위협하는 곳입니다. 그림자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개의 그림자는 물 수 없습니다. 칼의 그림자는 우리를 벨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는 실제 위험이 닥쳐서가 아니라 그림자를 보고 놀라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 안의 사자처럼 우리를 소리로만 위협하지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에 놀라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3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감당할 만한 시험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우리가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것이라면 그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러니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겨낼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을 의지함으로 그곳에서 깊은 은혜를 경험하며, 또 그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