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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확증Ⅱ
(고린도후서13:5~13)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딱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았으나 죄로부터 진정한 자유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 그리고 예언과 같은 영적인 은사들을 많이 갖고 있었으나, 네 개의 당파로 나누어져 싸웠고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소송했으며 심지어 자기 계모를 간통하는 영적으로 신앙은 충만한데 그들의 행동은 전혀 기독교인 같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마지막 권고를 고린도후서 13장에서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에 대한 바울의 처방은 모두들 자기를 시험하고 자기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시험해보고 자신이 믿음이 있는지 자신을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할 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확신이고 또 다른 확증입니다. 확신은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확증은 믿는 확살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감리교를 시작한 요한 웨슬레는 특별히 신앙의 확증을 강조했습니다. 자신에게 신앙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이고 완전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서로 정말 사랑하는지 사랑의 확증을 서로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들을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 하는 동안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정면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피하지 못합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 세 때 얻은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것을 피했으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을 확증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해 독자 아들을 아끼지 않고 바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과 믿음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삶과 행동을 통해 정말 보여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사랑하면 안 됩니다. 행동으로 보여야 합니다. 남편 사랑이 확증되어야 합니다. 교회 사랑도 말로만 하면 안 됩니다. 삶과 행동으로 보여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 사랑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이 확증은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하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일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 외아들을 보내사 죽게 해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전도와 구제를 한층 강조합니다. 이 믿음의 확증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을 행동과 삶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믿음의 확증을 알기 위해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피하거나 싸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순종함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지만 마귀의 시험은 무조건 피하거나 목숨 걸고 싸워야만 합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저의 친구 중에 이 철원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전도한 짝입니다. 그 친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기 집 다락에서 기도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기도하던 중에 눈을 뜨니까 공중에서 자기를 쳐다보는 존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마귀였다고 합니다. 마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하는데 그만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초신자여서 믿음의 혼돈이 온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 이렇게 혼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며 시험할 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버리고 도망칩니다. 이처럼 마귀의 시험은 피하거나 싸워야만 합니다.
손자병법에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전법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해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되고 만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무조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합니다.
셋째, 자기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가 믿음이 있는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시험한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인데 사람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판사가 자기 바지가 잘못 됐다고 해서 한국인 세탁소 업주를 법원에 소송을 내면서 54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손해보상비를 청구하여 온 세상에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바지 하나가 잘못됐다고 해서 한국 돈 500억 원 이상의 보상을 요구했다니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판사라는 데에 있다. 남의 잘잘못을 객관적으로 판결해야 할 판사가 이러한 과대망상에 걸려있다니 어처구니가 없고 미국의 판사 임용 방식이 이정도 밖에 안 되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자는 그때 이 사건을 보면서 사람에게 자기 객관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인격의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자기를 객관적으로 잘 바라볼 수 있는 자기 객관화 능력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고든 올포트(Gorden Allport)는 성숙한 인격의 기준이 되는 것이 자기 객관화라고 하였습니다. 성숙한 인격의 사람은 늘 자기를 객관적인 눈으로 평가하지만 미숙한 인격의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를 주관적으로 과대하게 평가합니다. 성숙한 인격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와 남이 생각하는 자기가 많은 부분 일치하지만 미숙한 인격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와 남이 생각하는 자기가 거의 일치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잘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남에 대해 배려하는 성향이 강하고 자기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기적이고 남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바라보려면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제한성과 미래적 운명을 잘 아는 사람에게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진정한 자기 인식만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되면 하나님을 잘 알게 되고, 하나님을 잘 알게 되면, 역으로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깨달음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웬만한 노력이 아니면 자기 자신이 죄인인지 결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만큼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라깡(Jaque Lacan)이라는 포스트 모던 철학자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였습니다.
라깡의 이 말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그 곳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내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딴 곳에 괴물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것은 자기 객관화에 달려 있습니다.
KBS의 프로그램 중 ‘생노병사의 비밀’에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운전하면서 화를 많이 내는 택시 운전기사를 하나 택했습니다. 대부분 운전하면서 “저 사람 때문에 운전에 방해를 받아서 늦게 되었다”라고 말한답니다. 교통안전 연구소가 분석했습니다. 운전기사의 운전습관에 대한 연구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분노가 많은가?’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려고 더 많이 교통법규를 위반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는 운전기사는 자신의 문제가 더 많아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 불편하게 만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화내는 경우가 매우 줄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 세계 선교를 하면서 끈임없이 자기를 객관화하며 자기 연구를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희생적으로 선교하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디모데전서 1장 15절)라고 고백합니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을 씁니다. ‘내가 지금도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살인자, 간음자, 사형수보다 더 죄를 많이 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서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권면합니다. 즉 네 믿음이 있는가 스스로 테스트해서 그 믿음을 행동과 삶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인격과 행동으로 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시험해서 확증하지 않으면 버리운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장 5절).
확증하다는 원어는 ‘도쿠마세티’ 혹은 ‘도큐모이’입니다. 여기에 헬라어 ‘a’를 붙이면 ‘아도큐마세티’인데 그것은 ‘버리운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믿음을 확증하지 않으면 버리운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TV를 살 때 그 성능을 보게 됩니다. 성능을 알기 위해서는 화면이나 밝기 같은 그 제품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어떤 제품의 특징을 ‘specification’이라 하는데 이것을 줄여서 ‘스펙’이라 합니다. 이 스펙이란 말이 나중에는 취직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능력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취직을 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토익 시험을 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되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객관적 능력 말고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정신적 능력, 마음의 능력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면접관들이 취준생들에게 자기 소개서를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 소개서는 스펙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그 인생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능력을 증명해야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이 회사를 지원하게 되었다는 증명입니다. 나의 강한 정신력을 이야기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너희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믿음의 능력과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겠는가? 대체적으로 이러한 믿음의 능력은 상황이 어려울 때 잘 드러납니다.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믿음의 능력이 어느 때 드러납니까? 교회가 어려울 때 사람들의 믿음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가?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가?를 여러분의 삶과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확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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