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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썩히다와 삭히다
우리말에는 모음의 교체에 의해 의미가 분화되는 예들이 많다. 이를 모음교체에 의한 어사분화라고 한다. 모음이 바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원래 의미에서 완전히 동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공통점은 유지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많은 경우에 어사분화는 의미의 강하고 약한 정도를 보여준다. 의성어와 의태어가 대표적인 예이다. 큰 소리와 작은 소리, 큰 모양과 작은 모양을 모음으로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다. 주로 밝은 모음은 가볍고 작은 느낌을 주고, 어두운 모음은 무겁고 큰 느낌을 준다. ‘찰랑, 철렁, 출렁’의 느낌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모음의 교체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앉다와 얹다’, ‘머리와 마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어휘에 대한 느낌이 긍정적인지 아닌지도 모음의 교체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쓰레기와 시래기’를 모음교체로 보는 입장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도 모음교체는 뉘앙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쓸모없는 것과 새로운 용도로 쓰인다는 의미가 갈라진다. 우리말에서 이런 뉘앙스의 느낌을 정확히 보여주는 예가 바로 ‘썩히다’와 ‘삭히다’이다. 썩은 것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삭히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이다. 한자어로 설명하자면 썩는 것은 ‘부패(腐敗)’가 되고 삭는 것은 ‘발효(醱酵)’가 된다.
단순히 모음의 교체가 일어난 어휘처럼 보이지만 의미가 피어나는 상황은 정반대다. 오래되어 썩는 것에는 사람의 관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한 곳에 모이고 오래 두면 그저 썩어서 사용할 방법이 없다. 물론 뒷날 거름이 되어 새 생명에 뿌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삭히는 것에는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다.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관심에서 새로운 탄생이 일어난다.
우리나라 음식 중에는 이렇게 삭히는 것들이 많다. 오래 두어 발효시키는 음식이 많은 것이다. 김치가 그러하고 젓갈이 그러하다. 홍어회의 경우에는 삭히는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아마 세계에서 이렇게 삭힌 음식이 발달한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썩는 것과 삭는 것의 차이를 잘 알고 활용한 민족이다. 삭히는 것의 미학을 한국에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아내의 권유로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와타나베 이타루 저)’라는 책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은 ‘발효와 부패’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자는 ‘다루마리’라는 시골빵집에서 좋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 천연균으로 빵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유기 작물에 균을 배양했을 때는 썩어버리던 것이 자연 작물에서는 발효가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스스로 강한 자는 균이 들어왔을 때 발효가 되어 세상에 쓸모 있게 되고, 외부의 도움으로 강해진 자는 균이 들어왔을 때 부패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말 ‘썩다’와 ‘삭다’의 분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그러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삭힌 음식이 되고 오히려 사람들의 건강을 좋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주변의 도움으로 그저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경우에는 외부의 고난이 닥쳤을 때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여 썩고 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스스로 강해지지는 못하는 듯하다. 지나친 보호 속에서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다.
자신의 재능을 약한 마음속에서 썩히지 말라. 스스로 강해진다면 세상의 어떤 험한 자극이 와도 자신의 능력을 더욱 삭혀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썩는 것과 삭히는 것이 보여주는 세상을 기억하기 바란다.
눈여겨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고 하면 세상의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는 뜻이 됩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본다는 말에서 자상함이 더 느껴집니다. 본다는 것은 듣는 것보다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픈 마음으로 세상의 소리를 본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눈은 보는 것이고, 귀는 듣는 것이고, 입은 말하고 먹는 것이고, 피부는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감각기관의 기능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말의 표현을 살펴보면 이러한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게 됩니다.
우리말에는 한 가지 감각을 여러 감각으로 표현하는 이른바 공감각적 표현이 발달하였습니다. 시에서 사용되는 ‘푸른 종소리’와 같은 표현은 우리말 속 여기저기에 나타납니다. ‘거친 숨소리, 따뜻한 목소리, 구수한 노래’와 같은 표현이 어느 말에나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눈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입으로 보기도 합니다.
눈은 보는 기관입니다. 귀의 역할이 듣는 것인 것처럼 눈의 역할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자세히 보라는 의미를 표현할 때 ‘눈여겨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여기다’는 말은 ‘생각하다’라는 의미이므로 눈으로 생각하고 본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눈이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여겨본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냥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입은 먹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맛은 ‘느낀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본다’라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마치 맛을 시각처럼 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맛을 보라!’고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물론 ‘보다’라는 단어가 ‘먹어 보다’처럼 ‘시도하다’의 의미가 있으니 ‘시음, 시식’의 해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먹는 행위를 ‘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맛깔 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람도 맛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싱겁기는!’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구두쇠를 가리킬 때 ‘사람이 짜다’고 합니다. 기름기 많은 목소리와 행동을 보면서 ‘느끼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문득 이런 표현을 외국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집니다. 달콤하고, 시큼하고, 새콤하고, 짭짤하고, 쌉쌀하고, 새콤달콤한 우리 민족의 감각 표현이 입 안 가득 궁금함을 더해 놓습니다.
나이에 대한 생각
외국인에게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나이’에 대해 질문하는 게 싫다는 이야기가 많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나이를 묻는 것이 곤혹스럽다는 반응이다. 나라에 따라서는 나이를 묻는 게 금기가 되는 경우도 있고, 나이로 차별하는 것도 심각한 차별인 곳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상황과 맥락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어쩌면 나이를 묻는 것은 당연한 질문일 수 있다. 그래야 존댓말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니까.
나이에 관한 언급 중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아마도 공자의 말씀일 것이다. 30세는 입(立)의 나이, 40세는 불혹(不惑)의 나이, 50세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60세는 이순(耳順)의 나이, 70세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나이라고 했다. 70세를 고희(古稀)라고도 하는데, 이는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하는 표현이다. 물론 지금은 매우 많으니 70세가 고희라는 표현은 이제 더 이상 맞지 않는다.
30세 입(立)이 되면 홀로 설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오히려 20대들에게는 희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20대는 참으로 불안하다. 뭔가 책임을 져야할 나이 같은데 아직 모든 게 두렵다. 하지만 그 나이를 일단 30으로 미루어 두어도 될 듯하다. 세상에 홀로 서는 나이는 스무 살 청춘 때가 아니다. 아직은 더 뜨겁게 세상을 만나고 부딪쳐 보아도 된다.
나이를 두고 제일 많이 인용되는 표현은 ‘불혹(不惑)’인 듯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자신의 생각이 뚜렷해지는 시기라는 말이다. 하지만 40을 지나온 입장에서 말하자면 참 어려운 나이이다. 유혹에는 번번이 넘어간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금방 귀가 솔깃해 지기도 한다. 내 주관이라고 하는 게 그저 욕심이나 고집인 경우도 많다. 나이 40에 스스로 반성하며 새겨야 할 어휘가 ‘불혹’이라고 생각한다. 돈 욕심도, 권력 욕심도, 명예 욕심도 늘 우리 주변에 있다. 욕심 부릴 일이 왜 이리도 많은지. 헛된 욕심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50세 지천명에 대해서도 많은 해석이 있다. 나는 지천명의 핵심은 ‘천명(天命)’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의 이치를 알게 되었다는 말은 무엇일까? 사실 내가 볼 때는 지천명이면 이순과 종심도 모두 끝난 이야기이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는데 귀가 순해지지 않을 리 없고,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문제가 될 리가 없다. 공자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지 모르겠으나 나는 천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늘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천명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단계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단계이고, 남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여길 수 있는 단계인 것이다.
60세 이순(耳順)은 귀가 순해진다는 뜻으로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순’이 이치에 통달하여 듣는 대로 척척 알아내는 사람의 의미보다는 ‘용서하는 사람’의 함의가 강하다고 이야기한 도올 선생의 의견이 맞는다고 본다. 70세에 마음대로 행동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말은 이순의 반대편 모습이다. 남의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내 모습도 세상을 구분 짓는 일에 얽매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좀 복잡해 보이지만 용서할 수 있게 되고, 세상을 구분 짓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어찌 보면 불혹부터 종심까지는 모두 같은 말일 수도 있다. 즉, 불혹이면 지천명이고, 지천명이면 이순이며, 이순이면 종심이다. 불혹인데 유혹에 수도 없이 넘어가고, 지천명이라며 나의 욕심을 먼저 챙기고, 이순인데 오히려 고집이 세지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면 큰 일이 난다. 나도 이제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다. 지천명의 의미를 깊이 새겨본다.
받침의 비밀
어떤 소리인가에 따라 어휘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소리를 더 좋은 소리라고 생각할까? 음운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소리의 특성에 따라 우리의 느낌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 흥미롭다. 우리가 잘 아는 것 중에 ‘거센소리, 된소리, 예삿소리’의 경우에는 어떤 소리인가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다르다. ‘감감하다’와 ‘깜깜하다’, ‘캄캄하다’의 경우는 세기의 강도가 다르게 다가온다.
모음의 경우는 더 규칙적이다. 밝은 소리와 어두운 소리가 있다. 이른바 모음조화가 있다. ‘찰랑’과 ‘출렁’의 느낌, ‘발발’과 ‘벌벌’의 느낌이 명확히 구별된다. 그래서 우리말에 ‘어 다르고 아 다르다’라는 속담도 있는 것이다. 모음의 차이로만도 느낌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언어학적인 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어감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한 속담이 있다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언어학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받침의 경우에도 느낌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받침이 ‘ㄱ, ㄷ, ㅂ’의 소리로 나는 경우의 어휘는 왠지 지속적이지 않은 느낌이다. 막힌 느낌, 끝의 느낌, 답답한 느낌이 난다. 지금 막 언급한 ‘막히다, 끝, 답답하다’의 받침을 생각해 보라. 단어를 발음만 해 봐도 느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단어 중에서 ‘ㄱ, ㄷ, ㅂ’으로 발음 나는 받침의 예를 생각해 보라. 물론 모든 어휘가 예외 없이 이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교적 일리가 있는 접근이다.
받침이 울림소리인 경우에는 무언가가 계속 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울림소리는 발음을 했을 때 계속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ㄴ, ㄹ, ㅁ, ㅇ’소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시에서 이러한 음을 받침에 쓰면 여운을 길게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시를 찾아보면 주로 행이나 연의 끝에 울림소리 받침이 놓여있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받침이 아니라면 모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음 역시 울림소리니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서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진달래꽃)
우리말의 조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울림소리로 끝이 난다. ‘은, 는, 이, 가, 을, 를, 만, 도, 까지, 조차, 아, 야’ 등의 경우를 보라. 조사는 보통 말의 한 마디가 끝남을 나타낸다. 하지만 무언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울림소리를 써야 다음의 말을 잇기가 자연스럽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조사 부분에서 길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다음 이야기가 금방 생각나지 않을 때 조사를 길게 끌게 된다. ‘내가~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밥을~ 먹고 있는데~’와 같이 말이다. 받침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ㄱ’과 ‘ㄹ’ 발음의 받침이다. ‘막다, 꺾다, 꽉, 뚝, 탁’ 등의 느낌을 보라. ‘ㄱ’은 막혀 있고, 끝나버린 느낌이다.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꺾인 느낌을 준다. 우리말에서 ‘죽다’가 기역 받침인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이승의 삶이 끝나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ㄹ’ 받침의 경우는 흘러가는 느낌을 준다. 지속적인 느낌이 있다. 흘러가고, 올라가고, 굴러가고, 돌아가고 가는 세상의 느낌이 난다. 벌써 눈치 챘겠지만 ‘살다’는 리을 받침이다. 삶은 움직이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받침은 단순히 받침이 아니다. 발음을 그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언어를 이야기하면서 언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다. 받침이 보여주는 세상에 눈 돌려 볼 필요가 있다.
다문화(多文化)라는 말은?
문화라는 말의 어원은 서양에서는 경작하다, 재배하다였다. 이 말은 ‘교양있다’라는 말로 확대되어서 사용되었고, 지금은 문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는 자연상태가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자연상태가 아니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자연상태가 아닌 것은 좋은 것인가? 경작의 예를 들어 보자. 자연상태에서 주어진 곡식과 열매만으로 충분히 먹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지형이나 기후에 따라서는 이러한 생활이 불가능하다. 추위에 시달려야 하고, 혹시 닥칠지 모르는 홍수나 가뭄에도 대비해야 한다.
문화는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를 풍족하게 한다. 넉넉함이 있는 것이다. 즉, 문화를 안다는 것은 자연상태를 벗어나 미리 준비하고, 즐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경작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자신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재배하고 있는 작물이 자신의 문화가 된다.
그렇다면 다문화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문화는 경작지를 넓히는 효과가 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더 생긴다는 것은 힘이 되는 일이다. 또한 다문화는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작물을 기르면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시각도 깊어질 것이다. 다문화는 더 풍요롭고 더 아름다운 생활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더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힘을 갖게 한다.
문화(文化)를 한자로 풀어보면 글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언어로 하는 것이다. 언어로 한다는 의미는 싸우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한국어에서 ‘말로 하자, 말로 해라’라는 말은 폭력으로 일을 해결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문화는 평화의 의미가 된다. 문화적 인간이라는 말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다문화는 평화의 수단을 여러 개 가졌다는 의미도 된다.
한편 문화가 평화의 도구인 것은 맞지만 잘 모르는 낯선 문화와 만날 때는 오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분쟁을 낳기도 한다. 화해의 도구여야 할 문화가 오히려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문화 구성원은 이러한 분쟁을 막고, 문화를 평화의 도구로 쓰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인재들이 된다. 다문화는 물어보나마나 좋은 것이다. 다문화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의 시작은 문화에 대한 열린 시각이다. 문화에 대한 받아들임이 있어야 한다.
문화에 핵심적인 요소에는 언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어를 모르면 문화를 올바로 이해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언어를 잘 하면 할 수 있는 역할도 늘어난다. 다문화 구성원으로서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열린 문화인의 역할도 해야 한다. 문화를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문화를 충분히 소개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문화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알아야 느낄 수 있다. 알아야 그 느낌을 소개할 수 있다.
이제 다문화 구성원이란 다문화 가족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다문화 사회로 들어선 지 오래다. 우리 모두 다문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필요한 때이다. 다문화인으로서 열린 시각을 갖고,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평화를 위해 살아가기 바란다.
반말의 비밀
반말과 존댓말이 정확하게 나뉘는 언어는 많지 않다. 일부 어휘에 존경의 표현이 있기는 하나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반말과 존댓말을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주요한 언어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상대에 따라 존댓말이 발달한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 인도네시아의 자바어 정도이다. 따라서 존댓말을 하는 언어가 오히려 특이한 언어가 된다.
동물행동학에 관한 책(고바야시 도모미치, 인간은 왜 박수를 치는가)을 보다가 우리말의 반말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동물행동학이나 인간비교행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강한 개체는 에너지를 조금 쓰려 하고, 약한 개체는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존댓말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윗사람은 반말을 씀으로서 에너지를 덜 소비하게 되고, 아랫사람은 존댓말을 써서 에너지를 더 많이 쓰게 된다. 아랫사람이 더 많은 행동을 하게 되는 원리와 같다.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은 바삐 움직이고, 윗사람은 동작이 느리다. 말도 느리고 짧다.
반말은 반만 말하는 것이다. 말이 짧아지는 게 반말을 의미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존대를 나타내는 어휘를 살펴보면 ‘말과 말씀, 병과 병환, 묻다와 여쭙다, 밥과 진지’ 등 높임말이 길다. 또한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면 반만 말한다는 것이 금방 이해가 된다. 명령을 표현하는 ‘웃어/웃어요/웃으십시오’의 느낌을 보면, 길어질수록 존대가 되고 짧을수록 반말이 된다.
존댓말은 길게 돌려 말하는 것이다. 존대를 나타내는 ‘-(으)시-’를 어미 앞에 붙이는 것도 길게 말하는 것이 존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윗사람에게 나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프다’를 ‘편하지 않다(편찮다)’로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죽다’를 ‘돌아가시다’, ‘먹다’를 ‘드시다(들다)’로 표현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돌려서 말하다 보면 말이 많아지고, 길어질 수밖에 없다.
반말에도 존댓말에도 숨어있는 태도가 있다. 숨어있지만 느낌으로 전달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종종 아랫사람에게 존댓말을 하면서도 거만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일반적으로 낮은 목소리는 위압적이다. 위엄을 나타내려고 하는 태도일 때 목소리를 깔게 된다. 윗사람 앞에서는 존댓말을 할 때 목소리를 깔지 않는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하는 존댓말은 여전히 고압적일 수 있다. 반면 밝은 목소리의 존댓말은 기분이 좋아진다. 반말도 밝은 목소리일 때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같은 반말이라고 해도 ‘해라’ 보다는 ‘해’가 가볍다. 같은 존댓말이라도 ‘하십시오’보다는 ‘해요’가 가볍다. 격식체에 ‘해라’나 ‘하십시오’가 쓰이고, 비격식체에 ‘해’나 ‘해요’가 쓰이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말을 잘 들여다보면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서로에게 편안함과 기쁨이 되는 언어생활이었으면 한다.
우리는 반말을 하면서 내가 왜 반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난 왜 반말을 하는가? 누구에게 반말을 할 것인가? 반말을 할 때 나의 마음가짐은 어떤가? 위압적인가? 얕보는 마음인가? 친밀함의 표시인가? 상대방은 내 반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존댓말을 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 아랫사람에게 존댓말을 하는 내 심리상태는 무엇일까? 아예 서로 반말을 하는 것은 어떤가? 서로 존대를 하는 것은 어떤가?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품 안의 자식
‘품’이라는 말은 ‘가슴’과 유의어처럼 쓰이지만 느낌은 전혀 다른 말이다. ‘품’이라는 말에는 온도가 있다. 따뜻함이 있고, 정이 담겨 있다. ‘품’이라는 말만 들어도 포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이 단어의 마력이다. ‘엄마 품’이라는 표현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도 따뜻함이 겹쳐지기 때문이리라. ‘아빠 품’이나 ‘그대의 품’이라는 말에도 다정함이 있다.
‘품’과 관련된 표현 중에 ‘품 안의 자식’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낳아서 기를 때는 부모만을 생각하던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부모에는 관심이 없음을 한탄하며 사용하는 말이다. 어린 시절 아이들은 엄마가 조금만 안 보여도 울고 난리가 난다.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불안해한다. 엄마 품을 찾는 것이다. 간절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좀 지나면 아이들도 안다. 엄마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방을 혼자 쓰고 싶어 한다. 아이 나름대로의 독립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굳은 결심의 선언도 밤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밤이 깊어 가면 아이들은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부모의 방으로 찾아든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아이처럼. 부모의 품을 벗어나기가 쉬운 게 아니다. 밤에 부모 잠자리 옆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는 부모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지만 영 엄마나 아빠의 품을 떠나지 못할 것 같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밤에 혼자서도 잠을 잘 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 봐도 이제는 더 이상 안 온다. 엄마가 안 보이면 울던 아이가 이제는 집에도 늦게 온다. 방문을 닫고 지내기도 한다. 품을 찾기는커녕 소리 없는 단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서히 품 안을 떠나는 시기가 온다.
아이가 크면서 부모와의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수많은 일들이 생기고, 부모보다 가슴 저리게 그리운 사람도 생겨난다. 그러고는 한 발짝씩 부모의 곁을 떠나간다. 부모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어차피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홀로서야 하는 자식이기에 응원하며 손을 놓아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손을 놓아야 함이 아파서 부모는 눈물짓지만, 홀로 힘든 일을 이겨나가는 자식을 보며 대견함을 느끼기도 한다.
부모의 품을 떠나가는 시기가 저마다 차이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모의 곁을 떠나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학에 갈 때와 군대에 갈 때, 결혼할 때가 품 안을 떠나는 시기가 된다. 아이가 대학을 먼 곳으로 진학하게 되면 품 안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 애절한 이별을 처음 하는 순간이다. 자식이 군대에 가는 것이나 결혼을 하는 것도 부모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품에서 내놓는다는 것은 기쁘면서도 아린 일이다.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은 주로 자식이 부모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서운해서일 것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도 부질없다.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의 곁을 떠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마침내는 부모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품 안에 자식이 있을 때 더 잘 해 주고,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야 한다.
나에게도 두 아들이 있다. 이제 그 아이들도 서서히 품 안에서 떠나가고 있다. 여전히 미덥지 않고 불안하지만, 스스로 잘 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니 간절히 바란다. 아직 내 품에 있는 동안 더 잘 보살펴야겠다. 내 품 안에 있는 참 귀한 아이들이 아닌가? 품 안의 자식이 그리울 때가 온다.
있는 게 뭐니?
‘하늘’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쉽게 머릿속에 답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어휘가 반대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언어나 똑같이 반대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말을 찾다보면 언어의 신비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특이하게도 한국어의 반대말에는 재미있는 어휘들이 많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알다’이다. ‘알다’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금방 ‘모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모르다’라는 어휘가 있는 언어는 거의 없다. ‘알다’의 반대가 되는 표현은 ‘알지 않다’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는 언어 중에 ‘알다’의 반대말이 있는 언어가 있는가? 우리가 잘 안다고 이야기하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에는 ‘모르다’라는 어휘가 없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한국어는 모르는 것을 아는 언어’이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있다’의 반대말이 없는 언어도 많다. ‘없다’가 없는 언어는 우리에게는 희한할 따름이다. ‘없다’라는 말이 없이 어떻게 언어 표현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어에도 ‘없다’에 해당하는 어휘가 특별히 없다. 부정표현이 존재할 뿐이다. 일본어의 ‘nai'라는 말도 ‘없다’의 의미처럼 보이지만 ‘-지 않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아서 ‘없다’인지 ‘-지 않다’인지 불분명하다. 많은 언어에 ‘없다’라는 표현이 없다.
없는 것이 있다면 있는 것도 있어야 한다. 말이 좀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없다’가 포함된 말에는 반대말도 있어야 한다. ‘재미없다와 재미있다’, ‘맛없다와 맛있다’에서처럼 쌍을 이루게 된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있다’와 ‘없다’ 계통의 반의어가 잘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지만 다른 언어에는 발견하기 힘든 현상이다. 단순한 게 단순한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말을 살펴보면 ‘없는 것은 있는데 있는 것은 없는’ 말이 많아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어휘들을 생각해 보라. ‘어처구니없다, 덧없다, 실없다, 터무니없다, 느닷없다, 어이없다, 하릴없다, 하염없다, 부질없다’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처구니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고, ‘덧있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터무니, 느닷, 어이, 하릴, 하염, 부질’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쉽게 찾아낼 수도 없다. 단지 뭔가가 없는 것이라는 느낌만 갖고 있을 뿐이다.
‘어처구니’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보통 ‘맷돌의 나무 손잡이’를 어원으로 이야기한다. 맷돌은 있는데, 손잡이가 없다면 정말 황당한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있는 것은 당연하므로 표현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실없다’의 경우는 실(實)을 한자로 볼 수 있다. 가득 차 있고, 열매가 달려 있는 것이 실 있는 것일 텐데, 뭔가 알맹이 없는 모습을 ‘실’이 없다고 하였을 듯하다. ‘터무니’의 경우는 ‘터의 무늬’ 즉, 흔적이라는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덧없다’에서 ‘덧’은 ‘시간, 세월’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고 없다는 한탄의 느낌을 보여주는 어휘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설명하는 어휘들도 일단 추론을 한 것이니 더 찾아서 밝혀 봐야 하겠다.
그런 말은 없지만, ‘터무니있게, 느닷있이, 어이있게, 하염있이, 부질있이’라는 말이 있다면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진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이런 말들도 새로운 어휘가 되어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있을 수도 있겠다. 우리말이 들려주는 수수께끼가 한 가득이다.
칭찬의 어려움
‘칭찬’은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잘 한 것을 보고 좋다고 해 주는 말이다. 주로 선생님이 학생을, 부모가 자식을,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칭찬한다. 칭찬은 누구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칭찬에는 평가가 담겨 있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칭찬한다는 말은 왠지 어색하다. 평가는 주로 위에서 아래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쓰는 말이 ‘찬양, 찬미, 찬탄, 칭송’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모두 칭찬보다는 아부처럼 들린다. 아니면 아예 아주 높고 고귀한 존재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스토니부룩 대학 박성배 교수님의 ‘미국에서 강의한 화엄경 보현행원품’이라는 책을 보다가 ‘칭찬여래원(稱讚如來願)’ 부분에서 눈이 멈췄다. 뜻이 ‘여래’를 칭찬하고 싶다는 것인데, 여래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한다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경전의 내용보다 어휘 표현에 마음이 가는 것을 보니 직업병은 직업병인가 보다. 아무튼 ‘칭찬’이라는 단어가 원래 아랫사람에게만 쓰는 표현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칭찬’을 여래께 썼다는 것을 알고 나서 여래를 어떻게 칭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떤 종교에서든지 절대자나 신앙의 대상을 칭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말이 ‘칭찬’을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야 찬송이 되고, 찬양이 되고, 찬미가 되고, 찬탄이 될까?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고, 그냥 ‘찬양합니다. 찬미합니다.’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찬양과 찬미는 늘 부족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찬양을 하는 것일까?" 어차피 부족한 말솜씨인데 찬미를 하는 게 뭔 소용일까? 그런데 그 대목에서 박성배 선생님은 탁월한 답을 하고 계셨다. 그것은 찬양의 순간이 부끄러움과 반성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 찬미할 수 없는 이를 닮으려 노력하는 것이 칭찬과 찬미의 까닭이 된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갚을 길도 닮을 길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 순간에 찬양이 절로 나오게 된다. 찬양은 시켜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듣는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듣는 사람이 그리 훌륭하지 않은데 칭찬을 하면 아부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칭찬을 포기하기도 한다. 불쾌감과 아부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칭찬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상대방이 듣기 좋게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대방의 좋은 점을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서 나를 반성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칭찬할 게 없다는 말도 한다. 저 사람은 아무리 살펴봐도 나쁜 점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교만이 아닐까?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러한 존재의 이유에는 좋은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칭찬은 상대의 좋은 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좋은 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고, 칭찬할 말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칭찬은 아름답다.
칭찬은 참 어렵다. 단순히 칭찬 받을 만한 사람만 칭찬한다면 좀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는 칭찬 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참다운 칭찬은 참다운 반성과 맞닿아 있다. 위대한 이에 대한 칭찬이건 하찮아 보이는 이에 대한 칭찬이건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