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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야당의원이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고 합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냉정한 겸손으로 코로나 대응 점검해야 터널 끝에서 K-방역 자랑할 수 있어. 돌이켜보면, 코로나 대응에 있어 조용한 다수가 가장 불안했던 것은 세계 최고라며 K-방역을 자화자찬하는 정부였다. 백신이 개발돼 널리 퍼져야 상황이 종료될 테니 장기전이 확실한데, 그러니 앞으로도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할 텐데, 왜 저럴까, 저 말을 방어하느라 솔직하지 못하고 무리해야 할 텐데”라며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국가가 진정한 승자인지는 상황이 끝나봐야 알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여성야당의원은 “더구나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의견이 제시되면 K-방역을 험담하지 말라며 여권 인사들과 열성 추종자들이 우격다짐으로 입을 다물게 하는 모습은 ‘과학이어야 할 질병 대응을 정치화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개되는 정보의 양과 질이 협소하고 자문그룹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데다 이들 자문 교수들은 다른 전문가들에게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는 발언을 계속해 걱정의 대상이 돼왔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이 야당의원의 말을 들으면서 지금 현 국회와 정부, 그리고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치를 온통 세력타툼과 패싸움판으로 만들어버린 현실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정치는 정말 이 야당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열성 추종자들간의 세력다툼이고 합리적인 토론이나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자기들이 추종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뭐든지 좋게 생각하는 것이 정말 답답한 지경에 이르게 된 듯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도 세상사람들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인정하는 추종자들일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정말 고리타분하고 정말 고지식하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들이 볼 때는 우리도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시선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며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세상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그렇게 모든 것을 바치며 따를 가치가 있으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정치인들을 비호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선호하는 정치인만 두둔하고 다른 어떤 비판을 받아도 그들을 위해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써가며 막무가내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예수님은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분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가버나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지도자들을 따랐고 예수님께서 등장하실 때 과연 예수님의 어떤 점이 그들의 지도자를 능가했다고 생각하여 따르게 되었는 지를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서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이유가 우리의 삶속에서도 항상 은혜속에서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사람들은 첫째로, 많이 아는 사람들, 지식인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장 22절입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본문을 보며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고 되었습니다. 이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중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며 무역과 교통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국제무역을 위해 꼭 거쳐야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세청이 있었고 세리 마태도 이 가버나움에서 만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가버나움은 엄청난 돈이 유통되는 도시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강남이나 분당, 동탄같은 꽤 돈 좀 버는 사람, 그래서 아이들에게 고액과외를 시키며 자신은 다른 지역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재력가라고 학력도 높고 사회지위도 높은 편에 속하고 자신들의 일을 잘 처리하는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지역의 사람들은 학력, 학벌, 출신지역같은 것을 생각하며 외형적 자격증을 보며 사람들에게 모이고 여러 가지 외형적인 자격에 맞게 사람을 존경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도 지금부터 정확히 6년전 이 맘때 성지순례를 가서 가버나움을 방문했습니다. 가버나움 항구도 보았고 항구에서 불과 100m정도떨어져 가까운 곳에 있는 가버나움 회당도 들어가보았습니다. 지금 그 크기의 교회나 성당을 지어도 꽤 크겠다고 느끼질 면적에 폐허가된 가버나움 회당 외벽이 존재해있었는데 회당안에 들어가 이 곳 저 곳 살펴보면서도 정말 그 당시 웅장했겠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회당만 보아도 정말 2천년전 가버나움이 대단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물과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의 큰 회당이면 유대인 서기관, 랍비들이 서로 회당장이 되고 싶어 관심을 두었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인정받을 능력이 있어야 그 곳의 회당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언변이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각종 자격에 관련된 테스트에서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어야할 것입니다. 이런 곳에 있는 회당에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이 회당에 속한 사람들은 지적인 뜨거움이 있었고 종교적인 삶을 학문적인 것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대 부흥사 무디선생이 삼 천명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그 날따라 말씀이 더욱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마이크가 없던 때에 삼천 명이니까 그것만도 굉장한 숫자인 것이었습니다. 무디 선생은 열변을 토하듯 힘써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어느 저명한 대학교수 한 분이 무디 선생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몰라서 그러셨겠지만 쓰신 말씀이 문법적으로 틀린 단어를 열여섯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무디 선생은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잘못 세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많이 했을 텐데요. 저는 이렇게 무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앎을 지나치게 신뢰합니다. 어느 날 문득 그 한계가 보일 때 당혹스러워합니다. 그 경한계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을 모두 동원해도 해결할 수 없는 암담한 한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데 우리는 인간적인 지식이 풍성한 사람이 신앙심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착각속에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보다 하나님 자체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잠언 3장 5절을 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지적 교만은 자주 복음의 대적으로 지적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믿음이 이성을 초월할 수 없다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논리적인 생각과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되어져야 하나님을 믿을 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 지식이 없어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면서 지적인 지식으로 신앙을 받아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 절반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의 절반만 사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1편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향남지역 목회자 독서모임의 취지가 좋은 것은 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적인 내용의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한국교회의 대안을 찾아가는 모임이라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몇 몇 목사님께서 인문학과 심리학에 관련된 책들과 심지어 다른 종교의 서적을 비평적으로 보기 위해 그런 서적들을 함께 보는 것도 지식의 깊이를 넓히는 측면에서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독일인문학에 유명한 소설인데 철학적 내용이 많이 포함된 정말 심오한 소설책 한권을 추천하면서 제가 독어독문학을 전공했으니 언제 기회되면 독서모임시간에 제가 그 책을 강의해달라고 요청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독어독문학을 전공했지만 독일의 철학, 신학, 문화등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물론 종교개혁시대의 순수했던 독일신학은 좋아하지만 그 독일신학이 지적인 것을 너무 추구하다보니 신학이 자유화되었고 결국 독일교회의 타락은 지적인 갈망이었다는 견해를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지적인 욕구, 지적인 갈망이 독일교회의 타락과 독일교회의 영성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가버나움의 사람들이 바로 이런 지적인 것에 대한 갈망으로 지금까지는 대단한 서기관과 대단한 회당장을 청빙하여 우리 수준에서 뭔가 내세울 사람들을 찾았던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머리만 커진 지식적인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합리를 강조하고 이성을 강조하지만 실제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체험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지식이 분명 필요하지만 지식이 우리의 교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내세울 학위와 학벌로 목회자를 판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의 참된 지식은 영성에서 비롯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식이지 인간의 머리로 잘 연구해서 만들어진 학벌, 학위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정말 주님의 은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성과 참된 목회의 선포가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안목이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사람들은 둘째로, 카리스마있고 언어의 재능과 설득력있는 사람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장 22절입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만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예사롭지 않은 권위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22절, 27절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똑같이 ‘권위있다’라고 평가하지만 앞에서의 ‘권위있는’과 뒤에 있는 ‘권위있는’이라는 단어사이에는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에서의 권위있는 말씀을 재능있고 설득력있고 말 잘하는 경험적인 말씀, 실제적인 적용의 기술이 있는 말씀으로 평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보다 예수님이 “권위있는 사람”이라는 측면에 더 집중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따랐던 서기관들은 학력, 학벌, 출신지역같은 것이나 사람들에게 내세울 외형적 조건이 탁월했습니다. 그들이 펴낸 책들이나 가르치는 기술도 꽤 괜찮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을 양피지에 베껴 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전체를 한 문장 한 문자에 제대로 옮겨 적어서 후세에 전체 성경이 오류없이 옮겨지도록 말씀암송과 연구와 말씀보전에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경구절을 매일매일 읽는 것뿐 아니라 그 내용을 외우다시피 해야 그 일을 계속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만큼 서기관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에 그 서기관들보다 예수님이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것 속에서 실제적으로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내용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의 성경해석은 현실과는 괴리된 딴 세상 이야기같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실제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말씀도 귀에 속속들어오니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카르스마있고 재치있게 말씀을 가르쳐주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8~29절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권위라는 단어의 뜻은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능력 혹은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이나 기술을 말합니다. 한글성경에 권위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엑수시아’(exousia)입니다. 이것은 ‘행동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앞에서도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권위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종교권력자들에게 가서 손을 비비고, 아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종교권력자들앞에서 너무나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강하게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위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실제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당시 나이가 몇 살입니까? 이제 공생애를 시작했으니 막 서른이 된 젊은 청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가버나움의 모든 회중들은 지금까지 수 십년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매일 적으면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서기관이 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식으로 정말 박학다식한 사람들, 학벌이 뛰어나서 성경에 대한 학식이 높은 것처럼 보여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따로 학문을 배워온 것도 없고 작은 시골동네 나사렛에서 30년동안 목수의 아들로 살아왔다고 말하는데 그런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구절 하나하나 제대로 꽤 뚫어보고 영적인 해석을 하며 성경 전체의 내용을 마치 그 시대 그 인물들과 동일하게 살았던 것처럼 묘사를 하니 ‘권위있는 사람’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에 그냥 사람들의 눈치보며 성경 지식을 아는대로 그냥 줄줄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당시 서기관들도 지금의 많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이 교회를 떠날까봐 입맛에 맞춰 듣기 편하고 좋은 말을 하고 귀에 거스릴 것같은 부담되는 내용, 회개와 구원, 죄사함, 헌신, 섬김같은 경우는 잘 이야기 하지 않는 것처럼 서기관들도 성경속에서의 축복의 말씀만 민족의 부흥만 가족의 행복만 가르쳤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 나오고 예수님이 나와 진정한 하나님의 회개를 외치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외치며 거짓된 신앙에 대한 책망과 바른 신앙적인 삶을 가르치니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권위가 무엇일까요? 세상에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권위일까요? 세상의 권세를 다 가지고 있다면 그 곳에 권위가 생기는 것일까요?
분명 그 전에 서기관들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다른 지역에 있는 서기관보다 이 시대의 어느 서기관보다 똑똑하고 박학다식하고 대단히 권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가버나움의 회당 서기관하면 이스라엘에서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회당의 서기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앞에서는 권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도 사람들은 돈에서 권위를 찾으려하고 권력에서 권위를 찾으려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 모두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그 권위로 백성들에게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권위로 군림했지만 권위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권위인 것처럼 보여지게 사람들은 그들앞에 엎드렸지만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존경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권위주의자, 혹은 권위적인 사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권위주의자나 권위적인 사람은 절대 권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일명 ‘꼰대’라고 표현하는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에도 가진 지위로 명예로 재물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며 강하게 행동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성경에 대한 설교말씀을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말씀을 대하십니까? 그냥 듣기 편하고 말 잘하고 설명 잘하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이해되어지도록 설명 잘 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닿고 나에게 아픔이 되고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아멘으로 받으십니까? 권위를 어떤 사람의 외모나 학벌, 학력에서 찾고 어떤 언변이나 기술적인 능력에서 찾으십니까? 아님 진정 그 속에 담긴 실제의 경험과 체험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에서 찾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진정한 권위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말씀이 직접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 권위를 인정하며 참된 권위를 찾아서 말씀과 함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셋째로, 온 천지만물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7절입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제가 앞부분에서 말씀드리면서 22절, 27절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똑같이 ‘권위있는 말씀’이라고 평가하지만 앞에서의 ‘권위있는’이라는 표현과 뒤에 있는 ‘권위’라는 단어에는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에서의 “권위있는 말씀”을 재능있고 설득력있고 말 잘하는 경험적인 말씀, 실제적인 적용의 기술이 있는 말씀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권위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방금 실제로 눈앞에서 보며 권위있는 말씀에 첨가된 권위있는 능력을 보면서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저는 가버나움 사람들이 들어가는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이 이 때 처음 온 것이 아니라 종종 귀신이 들리고 수시로 찾아와서 회당에서 집회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기관들은 이 이 사람이 그냥 성격이 더러운 사람이나 뭔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뭔가 우둔한 사람으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시작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귀신이 발작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귀신들린 것을 파악하고 바로 귀신을 꾸짖어 그 사람에게서 내보내시는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기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시니 이건 정말 이런 일이 다 있냐는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24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본문에서 귀신은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악한 힘과 권세를 통칭하는 표현이거나 교묘히 위장해 있는 또 다른 더러운 영들이 있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탄마귀는 여러 귀신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고 더러워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고 시간을 모면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인정하는 듯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들리면 위장술을 써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쫒으십니다.
마가복음 1장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보통 유대인들은 귀신 들린 사람이 있으면 유대인들은 그 사람을 추방하고 격리합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해결책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과 똑같은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람과 악한 영을 따로 분리시킵니다. 악한 영은 추방되고 사람은 보전됩니다. 귀신을 내어쫒으며 참된 생명을 가진 인생으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단순히 귀신 들린 개인만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들을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모두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다 낙인찍고 배척하는 사람들도 치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이는 사건입니다. 질병뿐 아니라 사회의 구조도 고친다는 점에서 온전한 회복입니다. 거룩함이 부정한 것에 의해 해를 입는다는 두려움을 뒤집고, 거룩함이 부정함을 회복시킨다는 진실을 드러내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추방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삶뿐 아니라 우리의 영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활을 고치실 뿐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도 고치시고 우리의 생계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속 가치관, 인생의 목적까지 고치시는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의 모든 삶속에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것을 깨달으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사실 가버나움의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추구에 먼저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성경의 지식을 잘 가르쳐주는 서기관들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을 때는 처음에는 어떤 보여지는 학벌, 출신에 대한 편견으로 뭐가 특별할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체계적이고 실제적이고 틀림없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지식에 대해 감탄하며 마음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우리가 믿어야할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며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깨달았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이런 본문을 보면서 권위있는 목회자가 되자는 쪽으로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회당장, 서기관들이 권능있는 목회를 하기를 원했으면 이렇게 행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당장의 자질회복, 회당장의 참된 목회의식 회복의 주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가 주제입니다.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가 주제입니다.
우리는 신앙속 권위를 어디서 찾습니까? 목회자의 권위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설교의 권위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목회자의 학벌, 목회자의 지식수준, 언변능력, 신유의 은사 등등을 운운하며 능력있는 목회자, 권위의 목회자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예수님께서 권위이시기에 예수님의 위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어떤 목사님이 대단하다, 어느 교회가 대단하다로 신앙을 찾아가지 마시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담대함으로 하나님만 높이는 신앙을 만들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권위를 따르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