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시인의 말 · 5
1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지그린다는 것·12
찬찬한디·14
제사·16
행복 총량의 법칙·18
나를 탓하다·21
오십 대의 마지막 생일 전날 밤·24
바람의 말·26
제자리암·28
가늘고 길게·30
체면·32
혼술·34
2부
비웃어도 되는 세상을 비웃지도 않으며
거울·38
내 젊은 날의 유적지·40
성장통·43
익환이·44
그는 호모사피엔스의 선생이다·46
그날 칠갑산에 오르다·48
설마·50
성자의 이름을 희롱하다·52
두서없는 시·54
당신 덕분에·56
일요일·58
한여름 밤의 꿈·60
3부
그대 향한 오랜 그리움 지워낼 수 있다면
나 죽기 전에·64
나도 꽤 괜찮은 친구다·65
배포 확대술·68
석모도에 스며들다·70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관용이·73
진짜 사랑이란·76
부소산길 2·78
부소산길 3·80
부소산길 4·82
부소산길 5·83
부소산길 6·84
4부
이렇게 푼돈 갚듯 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빚·88
새해 다짐·90
너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92
참회록·94
낙과·97
막걸리·98
어떤 나쁜 습관과 어떤 좋은 습관·99
인셉션·102
시·104
죽기 좋은 날·108
테니스화에 대한 소회·110
발문
제자리를 지키는 일상의 거룩함에 대하여(최은숙)·112
책 속으로
동네 친구들과 늦도록 쏘다니다
슬며시 대문 열고 들어서면
안방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
얘야, 동생 안 들어왔다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어머니의 그 목소리를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듣는다
반 아이들에게
어제 느낀 서운함을 오늘도 느낄 때
친구가 술기운에 못 이겨
되지도 않는 말로 몰아세웠을 때
불현듯 아내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고
세상이 지겹도록 미워졌을 때
그럴 때마다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얘야,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내가 그럭저럭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어머니의 목소리를
우리 집 아이들한테 똑같이 전해주고 싶다
얘들아,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그나저나 그때의 젊은 어머니는
내가 들어오는 줄을 어떻게 아셨을까
---「지그린다는 것」중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면
앞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위로도 오르지 못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신호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도로가 평등하고
등대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바다가 순하며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별자리가 아름답다
또
아내의 몸에 찾아온 병이 제자리를 잘 지키셔서
집안이 평화롭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무엇보다도 그대들이 빛난다고
그대들이 있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어제 공을 칠 때
제자리를 잘 지켜 귀중한 포인트를 얻었다
내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제자리암」중에서
스무 해도 넘었던가
한글 해득도 못 하고 고등학교에 온
애들 서넛을 불러 한글을 가르쳤다
글자를 익히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진전이라고는 없어
전날 배운 가나다라를
다음날 또 읽지 못했다 그중
멀쑥하니 키 크고 사람 좋게 웃던 익환이
평소 차비 계산은 틀리지 않았고
집으로 가는 옥산행 시내버스를 잘만 타고 다녔다
옥산을 어찌 읽고 타느냐 물었더니
그냥 모양으로 알아요 한다
세월이 한참 지나
지금은 마흔쯤 됐을 익환이
여전히 멀쑥하니 키 크고
사람 좋게 웃을 것인데
이제 모양으로 읽는 실력은 도가 터
그의 눈에 모양으로 읽히지 않는 것들은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돈 계산도 잘할 것이고 살림도 잘할 것이고
특히 글만 잘 쓰는 사람 보란 듯이
잘살고 있을 것이다
비웃어도 되는 세상을 비웃지도 않으며
잘만 살고 있을 것이다
---「익환이」중에서
부소산길은 다 예쁘다
그중 우리 학교로 내려오는 길은
부소산이 종아리를 뻗은 듯 희고 보드랍다
쌀쌀한 가을날
단풍이 수북이 쌓여 그 길을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단풍을 밟으면 사각사각
풀 먹인 이불 홑청 소리가 났다
날씨는 더 추워졌고
누군가 단풍을 말끔히 쓸어냈다
길은 종아리가 이불 밖으로 나온 듯
추워 보였다
가문 여름내 꽃물 주느라
도대체 앉아 있지를 못했던
우리 학교 비정규직 성 주사님
길이야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밟히는 단풍이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부소산길 6」중에서
출판사 리뷰
수수하게 뒷자리에 앉으려는 시
이은택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읽는 방법은 시에 대한 어떠한 기성 관념과 편견을 먼저 내려놓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시에 대한 ‘지식’도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시가 원래 지식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시인에게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식마저 시의 용광로 안으로 들어오며 그 형태가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현대시 특유의, 자아가 너무 괴로워서 못 살겠다는 투의 엄살도 이은택 시인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자신의 살아온 시간과 현재 대면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담담한 읊조림이 있는데, 시인은 여기에서도 대단한 통찰을 보여주겠다고 덤비지 않는다.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전할 뿐이다. 이 과정에 자의식의 겸허가 있으니 언어는 어쩔 수 없이 투명해진다. 하지만 그 투명함은 한 잔 마셔도 좋을 것 같은 건강한 빛이 어리고 있다.
동네 친구들과 늦도록 쏘다니다
슬며시 대문 열고 들어서면
안방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
얘야, 동생 안 들어왔다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_「지그린다는 것」 부분
그런데 행복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진짜 있다면 사회에도 적용될 터
우리 가족의 행복 총량을 끌어올리려면 결국은
다른 가족의 행복 총량을 뺏어 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_「행복 총량의 법칙」 부분
인용한 「지그린다는 것」는 너무도 당연한 사람 살이의 상식 또는 기본적인 도덕을 말하지만 그것이 강요되거나 규범화되어 있지 않다. 동생이 아직 안 들어왔으니 문을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뒤에 들어오는 동생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는 동시에 누군가 우리 집으로 들어올 존재가 있는 한 문을 잠그지 말라는 전언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혜 아닌 지혜일 터, 시인은 이 작품의 말미에서 이것을 아이들에게 전달해 주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말씀도 그 말씀이지만 “내가 들어오는 줄을 어떻게 아셨을까”라고 말이다.
눈치 못 채게 “슬며시” 들어왔는데 말이다. 얼핏 보면 시적 눙침 같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면 어머니가 가졌던 생(生)의 기미에 대한 감각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 총량의 법칙」에서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마음의 밑자락에 꼭 간직해야 할 것을 일상적인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엊그제는 드디어 내가 우리 클럽 월례회에서 우승했다/ 크게 기뻤으나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이 심심한 마무리의 속뜻은 무엇일까. 이은택 시인은 학생들을 오래 가르친 교사지만 최소한 시에서는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적 자아를 독자의 앞에 두려고도 하지 않고 어느새 뒷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앞에서 말했던 ‘시적 눙침’은 사실 뒷자리에 앉으려는 시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말없이 뒷자리에 앉으려는 시인의 태도는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대할 때도 변함없이 드러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5·18 민주묘역”에서 시인은 아주 사소한 경험, 즉 화장실에 들어온 “날것”에게 드는 연민의 감정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의 유사성(analogy)으로 퉁치지 않는다. 도리어 낮고 준열하게 자신을 역사의 뒷자리에 앉힌다.
그런데 그 날것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닫힌 유리창만 쫓아다니며
한사코 머리를 부딪고 있다
평생 갚아도 못 갚을 큰 빚을
이렇게 푼돈 갚듯 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_「빚」 부분
이런 시인의 태도가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에 어떤 투명함을 준다. 이 투명함은 ‘발문’에서 최은숙 시인이 말했듯이 “시인이 자기 성찰을 놓지 않기 때문”인데 여기서 “성찰이란 배움과 짝을 이루는 말”이다. 언제나 대상보다 낮아지려는 이 배움의 자세가 시 전체에 투명함을 주고 무겁지 않은 깊이를 부여한다. 은근한 유머는 바로 이 무겁지 않은 깊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은택 시인의 이번 시집은 확실히 지난 시집인 『벚꽃은 왜 빨리 지는가』에 비해 진일보했다. 미학적으로? 아니 반미학적으로! 시의 아름다움이 대상을 지배하거나 또는 진실과 도덕을 은폐하는 쪽으로 진화하는 시대에 이은택 시인은 명백하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시들이 언어의 화려함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자연 선택이 아닌) 사회 선택 때문에 그럴 것이다. 너도나도 돋보이려는 외형적, 언어적 독특함에 이은택 시인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생활에 맞는 옷을 걸쳐 입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 옷이 너무 익숙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자신의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대신 수수하고 담백한 차림새는 그 욕망이 생명의 본능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임을 말없이 비춰준다.
추천평
“얘야, 동생 안 들어왔다/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늦은 밤에 들어오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대문을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이은택 시인은 이 말을 시를 쓰는 태도로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한글 모양을 보고 버스를 타는 익환이. 생일날 미역국을 끓이는 아내, 종아리가 이불 밖으로 나온 듯 추워 보이는 부소산길. 이 모두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지그려 놓은 대문을 닮아 있다. 그래서 시를 읽을수록 비어 있는 마음은 채워지고, 외로움은 사라지고, 굳어있던 얼굴은 슬그머니 펴진다. 더구나 그는 두서없는 시를 여기서 줄이겠다며 고백하는, 성찰하는 시인이다.
- 최교진 (세종특별자치시 교육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