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표선 제주 민속촌3. 농가와 사냥꾼의 집
제주에 사냥꾼의 집이 따로 있었던가?
민속촌 이집 저집을 다니다 보니 사냥꾼의 집이라고 따로 지어져 있었다. 제주의 시골집과 다름없어 보이는 집안 뜰로 들어서니 겨울날 눈이 많이오는 강원도의 산골을 갈때 신는 설피같은 미끄럼 방지용 덧신이 움막같은 집 앞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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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제주에서는 '태왈'이라한다. 태왈은 제주의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리는 산간에서 눈에 빠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는 덧신의 일종으로 재료는 잘 휘어지는 윤노리 나무와 칡줄로 만들어있다. 이것은 제주가 먼저인지 강원도와 같이 눈이 많이오는 지방에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이'태왈'만으로 보더라도 아무리 그 옛날 타 지방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교류가 원만치 않은 시절에도 같은 도구를 만들어 썼다는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사냥꾼은 야생동물을 잡기 위하여 산에서 돌아와 다음 사냥을 위해 안방에서 올가미를 만들어 놓는것 같다. 내가 어렸을 적 제주는 들과 산에 꿩과 노루, 오소리가 많았었다. 그때에 제주시에 살던 나 역시 동네 조무래기들을 몰아 30여분 걸어 총싸움을 하기 위하여 산길을 향해 가노라면 이곳 저곳에서 놀란 꿩들이 푸다닥 날라가는 모습에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 다음번 올라갈때는 이 꿩을 잡기 위해 꿩코(꿩을 잡기위한 올가미)를 드문드문 놓고 다녀 며칠 후 뒷산에 오르며 그놈들이 잡히기를 기대했었지만 능구렁이 같은 이 꿩들은 조무래기들의 행동에 비웃기나 하듯 하나도 잡힌 적이 없었다.
?제주의 집은 이렇게 뒷뜰이 있었다. 뒷뜰에는 이처럼 장독을 놓거나 텃밭을 만들어 찬거리로 쓰기 위하여 고추나 마늘,호박줄기를 심어놓아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그냥 놀리지는 않했다.
사냥꾼의 집 돌담을 벗어나니 외딴집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홀로 지어진 집이 있었다. 제주의 시골집은 저렇게 단독으로 지어져 있지 않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외기둥 집이라 적혀있다. 외기둥집? 처음 들어보는 주거 형태였다.
집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보니 재해에 의해서 어쩔 수없이 지어졌거나 시기가 맞지않아 임시로 외기둥을 세워 만든집을'외기둥 집'이라 했다는데 다른말로는'말코지 집'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추측컨데 제주에는 겨울동안 가두었던 말들을 봄날에 한라산 자락에 방목하여 키우며 말들을 돌보던 말 테우리(목동)들의 임시 거주했던 집이 아닌가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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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들어 가보니 흙바닥에 침상이 놓여있고 간단히 취사를 할 수있는 화덕위에 무쇠솥이 얹혀 있었다.
가운데는 집의 제목처럼 외기둥이 세워져 있음에 지칭하기를 외기둥이라 지었는지 모르지만 여느 한옥집을 짓기 위하여 대들보를 세우려 한것 같지는 않고 한라산 자락에 드문드문 있는 나무를 이용하기 위하여 집 한 가운데 나무를 중심으로 지은 집이 아닌가 생각 되어진다.?
제주의 시골집 어귀는 다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커다란 나무가 마을 어귀에 있고 집과 집을 사이에 두고 울타리라 하는 돌담이 이집 저집을 구획하는 구분선으로 서 있지만 제주의 아낙들은 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는 사람들에게 돌담너머로 어젯밤 제사 음식을 나눠 먹곤 하였다. 이름하여 요즘 제주의 해안가 길에 조성된 외부인들이 많이 찾는 올랫길의 원조이다.
?모로앉은 세거리집!
입구 좌측에 안거리(안채)가 있고 밖거리(바깥 채)?는 모로나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제주도 산북보다 산남 지역에서 더 많이 확인된다.옛부터 제주의 가옥에서 안채는 집 주인인 가장의 주거지 이지만 가장이 죽고 그 집 아들인 장남이 장가를 가게되면 노모는 이 안채를 비워주고 바깥채로 물러 앉아 혼자 만의 삶을 살아간다. 새로 맞이한 며느리가 버젓이 있지만 늙은 노모는 혼자 밥을 해먹고 혼자만의 생활을 한다.아마도 제주여인의 물질과 밭일을 하며 힘겨운 삶을 시작하는 며느리를 위하여 시어머니의 배려가 아닌가 싶다.마당 안을 들어서니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다. 집 기둥에는 喪家에서 볼 수있는 하얀 창호지로 만든 등이 걸려있는게 초상이 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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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천년수'라 상방 문(대청마루 문)에 써놓은 글을 보니 아마도 부모의 喪을 표현하기 위한것 같다.
이 집 부모 중 어느 누가 돌아 가셨을까 하고 다가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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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상주가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고, 머리에는 수질을 둘러맨 건(巾)을 쓰고,허리에는 삼과 짚을 꼬아 만든 요질을 하고 상장을 앞에 두고 곡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유교적 전례는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시대 한양에서 귀양 온 양반님네들에게서 배웠을것이고 그들에게서 주자학과 성리학을 배웠으리라 여긴다. 그때에 씨를 뿌려 논 후손들이 제주섬에 이어져 살아오고 있기에 아마도 오늘날 제주사람들이 반골 의식이 싹트지 안했나 싶다.
제사상 역시 홍동백서 조율이시의 규범대로 제주의 전통 제사음식이 차려져 있다.
?우리의 아버지가 그랬고 그 아버지가 그랬었고 그의 할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그 아들들이 대를 이어 가신 부모를 이렇게 보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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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여'가 보관 되 있는 상여집이다.상여란 초상 때 시신을 장지로 운반하는 제구를 말하는데 제주도는 마을마다 상여계를 짜서 공동으로 마련하고 보관하였다. 보통 제주의 상여는 한번 쓰고 태워버리는 꽃상여가 아니고 조립이 가능했던 목상여로 평상시에는 모두 해체해서 마을 상여집에 보관해 두었는데 내가 이 상여를 마지막으로 봤던게 시골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동네 사람들이 둘러맸던 시절이니 벌써 35년이 다 되가고 있다. 그때에 이 상여를 뒷따르며 할머니와의 살아생전 추억을 생각하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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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집을 나와 민속촌 깊숙히 들어서는데 내리던 가랑비가 후두둑 주위를 때림에 나는 어느 목각 예술인이 운영하는 작업실 옆에 있는 초가의 처마에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려야했다.뚝뚝뚝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며 어릴 적 비오던 날 시골집 상방(대청마루)에 앉아 할머니가 쪄주신 햇감자를 고운 소금에 찍어먹던 추억을 그리는데 한 떼의 관광객들이 우산을 받혀들고 재잘 거리며 비오는 6월의 어느 일요일 민속촌 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녀들 역시 제주의 시골길을 걸으며 어린날의 그 시절을 그려 보았으리라 (계속)